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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15화 (115/605)

115화. 유령

115화. 유령

설익은 마음을 들뜨게 하는 책장 속 모험담과 달리 현실의 모험은 90%의 지루함과 9%의 고단함과 1% 될까말까한 재미, 경이, 낭만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로벨은 영리한 전투마에게 몸을 위탁한 후 소리 없이 졸았고, 마녀 키르케는 따분함을 쫓아내기 위해 수레 위에서 소리 없이 바동거렸다.

외팔이 더치는 주먹이 두 개쯤 들어갈 큰 하품을 하고 졸음을 쫓아내기 위해 침묵을 괴롭혔다.

“날씨가 허벌나게 좋수다.”

로벨은 실눈으로 외팔이 더치를 흘겨보았다. 어린 집사의 거친 말투는 외팔이 더치에게서 옮은 것이 분명했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외팔이를 따라 하품하고 구시렁거렸다

“고블린은 고사하고 산토끼 한 마리 보이지 않잖아.”

“뭐라도 안 나타나나?”

“그런 말 하지 마라. 재수 없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풀잎을 몇 장 모아 요령 좋게 풀피리를 불었다. 높은 낮은 소리를 차례로 내더니, 어느 순간 본격적으로 연주했다. 마녀 키르케가 손뼉을 치고 소리쳤다.

“이 노래 알아요!”

“응. 농민들이 부르는 노래야.”

솜씨가 좋아 고작 서너 가지 음으로 볼탄 반도 민요를 흉내 냈다. 로벨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였고, 마녀 키르케는 콧소리로 흥얼거리다 잘 아는 파트가 나오면 따라 불렀다.

본래는 힘차고 경쾌한 노래인데, 풀피리 탓인지, 아니면 허풍쟁이 제이콥의 심경이 어두운 탓인지 조금 서글펐다.

“은근히 재주가 많다니까요?”

“응. 글은 모르지만.”

기사와 마녀와 용병과 가을단풍이 풀피리 위로 느릿느릿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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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 네일 공국 출신으로 고향땅이 가깝다고 좋아한 외팔이 더치와 볼탄 반도 토박이로 볼탄 반도에서만 10년째 용병 노릇 한 허풍쟁이 제이콥이 기가 죽어서 심기 불편한 젊은 상전의 눈치를 보았다.

로벨은 전투마 안장 뿔에 손을 올리고 ‘가장 믿음직한 부하들’을 굽어보았다.

“1시간이 지났어.”

“그, 그런가요?”

“해가 졌잖아.”

“그, 그렇군요?”

로벨은 덩치에 안 맞게 쪼그라든 외팔이 더치를 가만히 보다가 한숨 쉬었다.

“길 잃은 거 맞지?”

“아, 아닙니다요! 외길이라 길을 따라왔으니 잘못되었을 리 없습니다요!”

마녀 키르케가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몰아붙였다.

“여기 길이 어디 있어요? 외팔이 아저씨 눈에만 보이는 길이에요? 히야! 마법사가 요기 있었네요! 저랑 직업 바꾸실래요?”

그동안 당한 핍박을 앙갚음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 증거로 입꼬리가 통 내려오지 않았다. 로벨은 쩔쩔매는 외팔이와 신이 난 마녀를 내버려두고 고민에 잠겼다.

목적지에 다 와서 길을 잃었다. 은유가 아니라 진짜 ‘길’을 잃었다. 이정표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놓였다.

“날이 밝으면 주위를 살펴서 방향을 잡는 것이 좋겠어.”

“그럼 야영인가요?”

“어쩔 수 없어.”

로벨은 해 그림자가 드리운 언덕을 가리켰다. 시야에 닿은 곳에서 가장 적당한 야영지였다. 외팔이 더치는 속도가 한결같은 농마를 언덕으로 몰았다. 그리고 야영을 재고했다.

“앗! 불빛이에요!”

마녀가 깜박거리는 조명을 가리켰다. 언덕 너머에 농가가 있었다.

“이런 곳에? 운이 좋군.”

맹수와 몬스터가 들끓는 야지에서 농가를 발견할 확률은 아무렇게나 쏜 화살이 완전무장한 기사를 낙마시킬 확률하고 비슷했다. 로벨은 외팔이 더치에게 농가로 가자고 신호했다. 외팔이는 실수를 만회하게 되어 기쁘게 농마를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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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빚마저 사그라지는 아슬아슬한 시간, 로벨 일행은 깜박이는 불빛을 쫓아 간신히 농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환영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외면이나 배척도 받지 않았다. 마중 나올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로벨은 전투마에서 내려 한쪽만 남은 울타리 문을 밀었다. 끼이이익- 덜컥-! 관리를 안 한 듯 돌부리에 걸렸다. 주위를 둘러봐도 잡풀만 가득했다. 사람과 가축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버려진 농장인가?”

로벨은 용을 써서 울타리 문을 열고 외팔이 더치에게 손짓했다. 하지만 외팔이 더치는 채찍을 휘두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기사 나리, 그냥 지나가는 게 어떻습니까?”

“왜?”

“폐가, 폐가도 아니고 흉가잖습니까?”

“유령이라도 나올까봐?”

로벨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전쟁터를 떠돌아다니는 용병이 죽은 자를 무서워하는 것이 황당했다. 그러나 외팔이 더치는 웃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사람이 살지 않는 게 분명한데... 그 불빛은 누가 보낸 겁니까요?”

로벨도 흠칫했다.

“윌 오 위스프?”

“그럴,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요.”

어린이 동화에서는 호박등을 든 장난꾸러기 유령으로 나오지만, 현실에 나타나는 윌 오 위스프는 끔찍한 재앙을 가져오는 괴물이었다. 뱃사람의 경우 폭풍과 전염병에 시달리고, 육지 사람의 경우 가뭄과 역병을 겪었다. 로벨은 혹시나 해서 마녀 키르케를 돌아보았다. 마녀는 고깔모자를 빙글빙글 돌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농장에 숨어든 도적이나 피난민이 아닐까요?”

“...제일 의심해야 할 직업종사자가 왜 이리 현실적이야?”

로벨은 조금 더 고민한 후 결정했다.

“야외에서 자는 것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야. 들어가자.”

“어어? 제 의견은 안 묻습니까요?”

허풍쟁이 제이콥이 따졌지만 로벨은 전투마를 끌고 농장으로 들어갔고, 외팔이 더치는 끙! 소리를 내며 채찍을 휘둘렀다.

“또 무시했어! 또!”

허풍쟁이 제이콥은 ‘울프 용병단 원년멤버’ 타령했으나 귀담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 자리에 원년멤버 아닌 사람이 없었다.

로벨 일행은 황폐한 앞마당을 지나 음산한 건물 앞에 이르렀다. 로벨은 내뺄 준비하는 외팔이와 허풍쟁이를 한번씩 보고 별수 없이 직접 노크했다. 텅텅-! 쇠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정문이 빠끔히 열렸다.

“안 잠겼는데?”

“그야 흉가니까 안 잠겼지요!”

“여기서 밤을 보낼 생각은 아니지요? 제발 아니라고 해주십시오!”

로벨도 찝찝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랜드 챔피언 자존심에 무섭다고 말할 수 없어 꾹 참았다.

“불빛의 정체를 알아야겠어. 키르케 말대로 도적일지도 몰라.”

“그건 그것대로 달갑지 않은데요?”

로벨은 머뭇거리는 용병들을 잡아끌어 안으로 들어갔다.

전형적인 볼탄 반도의 농가였다. 흙으로 벽을 쌓고 나무로 기둥을 세웠다. 남쪽으로 창문을 내고 북쪽에 벽난로를 설치했다. 주방이 따로 없어 벽난로 근처에 식기와 식자재가 모여 있었다. 햄으로 추정되는 숯덩이와 치즈로 추정되는 곰팡이 덩어리가 인상적이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벽난로를 뒤적이다 잿가루를 뒤집어쓰고 재채기했다.

“에취!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에취! 않은데요?”

외팔이 더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럼 그 불빛은 역시...”

“그럴 리가?”

로벨은 일행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기둥 뒤에서 희멀건 것이 불쑥 튀어나왔다. 요정이나 유니콘처럼 실제로 본 적이 없어도 한눈에 알 수 있는 존재였다. 고스트(Ghost)였다.

“우와아악!”

외팔이 더치가 덩칫값 못하고 뒤로 나자빠졌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전우애를 팽개치고 도망칠 채비를 했다. 그리고 로벨은 기사답게 반응했다. 워 해머를 뽑아 고스트의 머리를 후려쳤다.

“흠!”

역시 머리보다 주먹이 앞서고 수틀리면 칼부터 찾는 기사 중의 기사였다. 과격한 반응에 사람도 놀라고 고스트도 놀랐다. 하얗고 투명한 고스트가 소스라치게 놀라 다시 기둥 뒤에 숨었다.

“소용이 없나?”

로벨은 허공을 때린 워 해머를 아쉽게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혹시나 하여 흐룬팅을 잡았다. ‘요정의 검’이라 불릴 만큼 신비한 무기니까, 어쩌면 고스트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사님! 잠깐! 잠깐만요!”

로벨이 흐룬을 세우고 돌격자세를 취하자 마녀 키르케가 화급히 뜯어말렸다. 그리고 기둥 뒤에 숨은 고스트에게 말을 걸었다. 사실 말인지 시늉인지 알 수 없었다. 입술을 달싹거리는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로벨은 고스트를 향해 흐룬팅을 겨냥하고 물었다.

“마법이야?”

마녀 키르케는 한숨을 쉬고 설명했다.

“가장 기본적인 마법이에요. 유령은 인지의 존재라 인지의 세계, 그러니까 마도의 길에서 대화할 수 있어요.”

“위험한 거 아니야?”

“아이참! 그 칼 좀 치우세요. 꼬마가 무서워하잖아요.”

“유령이 칼을 무서워 해?”

“그 칼이 보통 칼이 아니잖아요. 인지의 세계에서 벼려낸 마법의 칼이라 인지의 존재를 해칠 수 있어요.”

“마법의... 칼?”

로벨은 흐룬팅을 새삼스레 관찰했다. 하긴, 수백 년 동안 녹슬지 않고, 강철을 밀짚처럼 베어내는데 평범한 칼일 리 없었다. 로벨은 흐룬팅을 아래로 내리고 다시 질문했다.

“우리를 불러들인 게 저 고스트 짓이야?”

“그런 것 같아요.”

“무슨 목적으로?”

마녀 키르케는 다시 고스트와 대화했다. 로벨은 반쯤 기절한 외팔이 더치와 ‘윌 오 위스프가 아니면 밴시일까?’ 등으로 외팔이를 괴롭히는 허풍쟁이 제이콥을 힐끔 보고 동참을 포기했다.

“딱히 기사님을 찾은 것은 아니래요. 이 앞을 지나가는 사람 모두를 부르는 모양이에요. 왜냐면... 괴물? 괴물이 있어서 가면 안 된대요.”

로벨은 기둥 뒤에 숨어있는 고스트를 유심히 보았다. 대화가 통하니까 무섭지 않았다.

“그 괴물이 아빠랑 엄마랑 오빠들을 죽였데요. 엄마가 자기를 지하실에 숨겨줘서 자기만 살았데요. 음, 아무래도 자기가 죽은 것을 모르는 모양이에요.”

아니, 역시 무섭다. 로벨은 등골이 오싹해서 한 걸음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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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의 정체는 농가의 막내딸 베렛이었다. 생전에는 7살이었고, 지금 나이는 알지 못했다. 기억이 뒤죽박죽이라 자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왜 혼자 남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헷갈려했다.

“이 앞이 위험하다고 해요. 괴물이 나오니까 가지 말라는 말만 반복해요.”

“그래봐야 고블린이겠지.”

“기사 나리, 이제 어쩝니까요?”

로벨은 흐룬팅을 집어넣고 말했다.

“우선... 저 아이의 시체를 찾아.”

“시체요?”

“지하실에 숨었다고 하잖아. 저장고 어딘가에 어린아이 시체가 있을 거야.”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은 지하란 말에 질색했지만, 로벨이 흐룬팅 손잡이에 손을 얹자 마지못해 엉덩이를 떼었다.

로벨은 마녀 키르케와 가엾은 고스트를 번갈아보고 말했다.

“저 녀석도 보내주자.”

“어디로요?”

“죽은 자가 가야할 곳이 있잖아.”

“그런 곳이 있어요?”

마녀 키르케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로벨은 바보가 된 기분으로 되물었다.

“...유령이 있으면 사후세계도 있는 거 아니야?”

“그건 저도 몰라요. 그리고 유령이라 부르지만 진짜 유령이 아니에요. 죽은 사람이 남긴 사념체죠. 이 아이는 내일이 되면 오늘 일을 까맣게 잊을 거예요. 그리고 또다시 지나가는 사람을 부를 거예요.”

로벨은 꼬마 고스트를 불쌍하게 쳐다보았다.

“시체를 묻어주면?”

“소용없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사라져?”

“정화의식이 가장 빠르지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응.”

“살아생전의 염(念)이 떠도는 거라, 염이 새겨진 대상을 제거하면 사라질 거예요. 흔히 원한을 풀어준다고 하잖아요?”

“...괴물 말이야?”

마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벨은 농장 밖을 보고 다시 중얼거렸다.

“괴물을 해치우면 사라질 거란 말이지?”

그때, 허풍쟁이가 지하 저장고에서 허겁지겁 올라왔다.

“기사 나리! 시체를 찾았습니다! 마녀의 말대로 쪼그마한 꼬마입니다요!”

로벨은 지하 저장고 구석에 웅크린 채 죽어있는 7, 8살가량의 시체를 찾아갔다. 차갑고 건조한 장소라 썩지 않고 미라화 되어있었다. 괭한 눈과 앙상한 손과 자그마한 옷가지가 안쓰러웠다.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이 혀를 찼다.

“아이고,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불쌍한 꼬마구만.”

로벨은 소녀의 손을 살며시 잡아준 후 말했다.

“내일 아침 햇빛 잘 드는 곳에 묻어줘.”

“저희가 말입니까요?”

“난 이 꼬마의 가족을 찾아볼게.”

그러려면 괴물을 찾아 배를 갈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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