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농마
114화. 농마
로벨은 조이 모몬트 경을 로드릭 성으로 초대했다. 조이 모몬트 경은 경박하고 경솔해도 본바탕이 기사라 울프 용병단과 방어시설을 눈여겨보았다. 성문을 지키는 용병과 성벽을 어슬렁거리는 용병이 모두 체격이 좋고 무장이 우수했다. 성 자체도 훌륭해서 진입이 가능한 곳마다 보루가 세워져 있고, 사다리를 붙일만한 곳마다 호밍이 설치되어 있었다.
‘세 자릿수 군사로는 넘보지도 못하겠군.’
조이 모몬트 경은 내심 감탄했다. 로벨 로드릭 남작의 ‘힘’이 전해졌다.
한편, 로벨을 발견한 용병들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기사 나리, 어디 다녀 오십니까요?”
“응. 산책.”
“아참, 애꾸눈이 사냥허가를 내려달라고 합니다. 추수제에 쓸 고기와 멍멍이들 줄 간식을 구해오겠답니다.”
“좋아. 5명 뽑아가라고 해.”
귀가 밝은 용병들은 5명에 포함되기 위해 우르르 뛰어갔다.
로벨은 마녀 키르케에게 아야와 이야카를 떠넘기고 아성으로 향했다. 조이 모몬트 경은 최신식 석재성(Castle) 안에 구닥다리 목재성(Keep)을 신기하게 구경했다.
“본인이 짐작한 것보다 총애가 대단한 모양이오? 사냥허가라니?”
“누구보다 총애하오.”
로벨은 빙긋 웃었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수족이니까. 조이 모몬트 경은 껄껄 웃었다.
“그거 좋구려! 로벨 로드릭 남작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오?”
“여기 있소.”
“여기? 어디 말이오?”
“경 앞에.”
로벨은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에 손을 올리고 근엄하게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위엄이 없어서 실패했다.
“에게?”
“...에게?”
“아, 말이 헛나왔소. 그러니까 경이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 남작이란 말이오?”
“그렇소.”
“페르젠 백작, 헤르만 백작, 도트넘 백작을 차례로 혼쭐내고, 주드 맥켈런 남작을 포로로 잡은 그 로벨 로드릭 남작이란 말이오?”
“...그렇소.”
“이야! 반갑소! 이리 뵙게 되어 영광이오!”
조이 모몬트 경은 두 손을 번쩍 들어 뒤늦게 놀람을 표시하고 악수를 요청했다. 로벨은 요청을 무시하고 물었다.
“아직도 이상형이 궁금하오?”
“그건 됐소. 잊어주시오.”
조이 모몬트 경은 무안해진 손을 뒤통수 긁는데 사용했다. 생각보다 순박했다. 그래서 미심쩍었다.
‘이 자는 악마추종자가 아닌가?’
마녀 키르케가 아무 말 하지 않은 것을 보아 조이 모몬트 경은 평범한 기사일 가능성이 높았다. 로벨은 1층 응접실로 안내하며 슬그머니 떠보았다.
“그러고 보니 모몬트 가문은 맥켈런 가문과 가깝지 않소?”
“우리 가문이? 그럴 리가?”
조이 모몬트 경은 손사래 쳤다. 깜짝 놀란 표정과 당황한 동작이 거짓말 같지 않았다. 허풍쟁이 제이콥을 잡아와 제대로 조사한 것 맞느냐고 윽박지르고 싶어졌다.
“본인이 오해한 모양이오.”
로벨은 응접실에서 손님자리를 권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조이 모몬트 경은 어색한 듯 천장과 책장을 두리번거렸다. 로벨은 적당히 숨을 고른 후 말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하인즈 자작가와 혼담은...”
조이 모몬트 경의 표정이 급 진지해졌다.
“...결례를 무릅쓰고 거절할 생각이오.”
“정말이오? 으하핫! 아주! 엄청! 대단히 현명하시오! 세상에 정략결혼이라니! 100살 먹은 고리타분한 할배들이나 할 발상 아니오?”
“...경의 주군이잖소.”
“본인의 주군은 진짜 할배니까 괜찮소!”
로벨은 평가를 수정했다. 아무래도 ‘평범한’ 기사는 아니었다. 이런 기사를 거느린 하인즈 자작이 조금 안쓰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확신했다. 조이 모몬트 경은 악마추종자가 아니다.
“본가에 안 좋은 일이 있다고 들었소.”
“까마귀 마을 말이오?”
조이 모몬트 경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이래저래 알기 쉬운 기사였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오. 허나, 형님이 잘 해결하리라 믿고 있소.”
“형님이 계시오?”
“위로 형님이 한 분 계시고, 아래도 남동생과 여동생이 하나씩 있소.”
“부친께서 참 든든하시겠소.”
“애석하게도 그렇지가 못하오. 아버님이 건강이 좋지 않아 형님이 대소사를 처리하고 있소.”
로벨은 자세를 고쳐서 관심을 애써 숨겼다.
“형님의 힘이 되어드려야지 않소?”
“아우가 돕고 있소이다. 본인은 기사로서 꼭 수행해야 할 중대한 일이 있는지라...”
그 일이 하인즈 자작의 딸을 꼬시는 일이라는데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모두 걸 수 있었다. 로벨은 사냥감을 선별한 늑대처럼 머리를 낮추고 숨소리를 죽였다.
“그럼 형님에 대해 말해주시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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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응접실을 나와 2층 객실에 주드 맥켈런 남작을 찾아갔다. 똑똑. 로벨이 방문을 노크하자 맥켈런 가문의 기사들이 주섬주섬 일어나 목례했다. 손님과 포로 중간쯤에 위치해서 처신이 어중간했다.
“로벨 로드릭 남작.”
주드 맥켈런 남작은 침대에 기대앉아 부드럽게 맞이했다. 마녀 키르케의 꾸준한 치료 덕분에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 로벨은 주위에 기사들을 힐끔 보았다. 지나온 세월만큼 눈치가 빨라 금방 알아들었다.
“자리를 피해주게.”
“주군.”
“걱정할 것 없네. 이참에 햇살 좋은 곳에서 눈 좀 붙이게. 경들 모두 몰골이 말이 아닐세.”
기사들은 주섬주섬 밖으로 나갔다. 로벨은 빈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앉았다. 칼침을 주고받은 사이라 단둘이 있으면 조금 어색했다. 그래서 형식과 격식을 빼고 본론만 말했다.
“지프 모몬트란 자를 아시오?”
“...기억이 나는군. 청어 거래를 담보로 8,000페닝을 빌려준 젊은 영주요.”
“내 조사에 따르면 그자가 악마추종자일 가능성이 높소.”
그 조사의 출처가 허풍쟁이 제이콥과 철부지 기사라 조금 머쓱했다.
“증거가 있소?”
로벨은 그 작은 영지에서 거액의 지원금이 나온 것과 까마귀 마을을 습격한 고블린을 의심했다. 그러나 늙은 기사는 냉철했다.
“분명 의심이 되나, 정황증거일 뿐이오. 그걸로는 귀족원 회의를 소집해도 처벌하지 못할 거요.”
“본인이 직접 가서 확인할 생각이오.”
주드 맥켈런 남작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로벨을 진심으로 걱정했다.
“경의 짐작이 사실이면 대단히 위험하오.”
로벨은 늙은 기사의 따뜻한 마음을 받고 미소 지었다.
“물론 혼자 가진 않을 거요. 믿음직한 부하들을 대동할 테니 안심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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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믿음직한 부하가 불만을 토로했다.
“아, 왜 또 접니까요! 대체 왜! 저 말고도 100명이나 있는데!”
로벨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제일 한가하잖아.”
“저 말고도 한가한 놈들이 열 수레입니다! 코골이 녀석은 마구간에 숨어서 자고 있고, 겁쟁이 녀석은 베티인지 베리인지 하는 죄 없는 처녀를 쫓아다닙니다요! 정의구현을 위해 그놈들을 잡아가시죠?”
“아니야. 난 네가 좋아.”
허풍쟁이 제이콥은 근래 위기가 찾아온 머리숱을 심하게 괴롭혔지만, 로벨과 마녀와 외팔이 더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펄프 대장은 성을 수비하고, 애꾸눈 볼포스는 추수제를 준비하고, 과묵한 몬트는 뉴 로드릭 마을에서 구울 사냥을 할 거야. 다들 할 일이 있어.”
“으으! 차라리 구울 사냥에 보내주십쇼!”
“나랑 있는 게 싫어?”
“예!”
허풍쟁이 제이콥이 당당히 말했다. 로벨은 상처받은 얼굴로 허풍쟁이를 돌아보았다. 그랜드 챔피언답지 않은 처량한 눈빛에 은근히 소심한 허풍쟁이 제이콥이 당황했다.
“아,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고요! 기사 나리랑 다니면 꼭 사고가 생기잖습니까? 더구나 악마추종자라니! 그거 예전에 본 마귀 아닙니까? 괴물을 부리고, 저주하고, 막 그러잖습니까!”
“우리도 마법사가 있잖아?”
“에헴. 에헴.”
마녀 키르케가 팔짱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마녀를 한번 보고 더욱 열정적으로 항의했다. 로벨은 허풍쟁이의 불평불만을 묵살하고 전투마를 가져오라 지시했다.
이번 여행에는 전투마 외에도 운송수단이 하나 더 있었다.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가 새로 산 농마를 수레에 묶었다. 추수가 끝나면 내년 봄까지 할 일이 없으니 짐말로 부릴 생각이었다. 마녀 키르케는 걸어 다닐 필요가 없다고 좋아했고,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도 짐꾼 노릇에서 벗어나 만족했다. 어린 집사만 기분이 언짢았다.
“직접 가실 필요 없잖아요. 외팔이랑 마녀만 보내면 안 돼요?”
“안 되오!”
“싫어요!”
외팔이 더치와 마녀 키르케가 극구 거부했다. 로벨은 어깨를 으쓱이고 아론다이트를 풀어 어린 집사에게 주었다. 어린 집사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이걸 내다 팔고 살림에 보태라고요?”
“아니야!”
“그럼 영주님이 그리울 때 꺼내 보라고요?”
“음... 그건 괜찮아.”
로벨은 무기고에서 꺼내온 워 해머를 차고 시험 삼아 뽑아 보았다.
“저들은 아론다이트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나봐. 저번처럼 고블린에게 쫓기지 않으려면 놓고 가야 해.”
로벨은 워 해머를 빙글빙글 돌린 후 가죽고리에 꽂았다. 칼과 달리 쇠뭉치가 위로 올라와 넣고 빼기가 불편했다. 로벨은 고민하다가 가죽고리를 오른쪽에 달았다. 이걸로 워 해머와 흐룬팅을 동시에 뽑을 수 있었다.
로벨이 워 해머를 고쳐 매는 사이, 허풍쟁이 제이콥이 전투마를 끌고 왔다. 길쭉하고 늠름한 전투마와 넓적하고 펑퍼짐한 농마가 나란히 섰다. 마녀 키르케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기사님과 외팔이 더치를 보는 것 같아요.”
“뭣이라?”
와팔이 더치는 누가 전투마고 누가 농마인지 직감해 화를 냈다. 로벨은 전투마에 오르며 성난 외팔이 용병을 달랬다.
“농마도 장점이 많아. 힘이 세고 인내심이 강하잖아.”
외팔이 더치는 그거 보라는 듯 콧대를 올리고 어깨를 흔들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네놈이 농마란 것은 부정하지 않잖아.”
어린 집사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악한 악마추종자를 잡으러 가는 일당답지 않게 죄다 바보스러웠다.
“그럼 다녀올게.”
“우리 아가들 밥 주는 거 잊지 마요!
“컹! 컹!”
“잘 다녀오십쇼!”
바보들을 걱정하는 바보들이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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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탄 반도에서는 이맘때가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였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에 배부른 과일과 살찌운 짐승이 가득해서 조금만 부지런떨면 굶주릴 일이 없었다.
로벨은 사과를 꺼내 옆구리에 쓱쓱 문지르고 한 입 깨물었다. ‘아삭!’ 소리에 일행이 돌아보았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군침을 삼키고 말했다.
“저기, 기사 나리, 지프 모몬트란 기사 나라가 악마추종자면 어찌 됩니까요?”
로벨은 사과를 우물거리며 흐룬팅을 두드렸다. 백 마디 말보다 확실한 태도였다.
“늑대왕이나, 소머리 백작처럼 위험하지 않을까요?”
로벨은 흐룬팅을 한 번 더 두드렸다. 강철을 쪼개는 명검이 있으니 지난번처럼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외팔이 더치가 소처럼 느릿느릿 걷는 농마에게 괜히 채찍질을 한 번 하고 말했다.
“기사 나리, 북동쪽이란 것만 알고 길을 모릅니다요. 역참이나 마을에 들려서 길을 물어봐야 합니다. 괜찮겠습니까요?”
“응. 괜찮아.”
“그 말 많은 기사 나리 잡아다가 길 안내시키면 좋았을 텐데요.”
“시끄러워서 안 돼.”
“아니면 피난민 중에 한 명 골라 와도 되고요.”
“그건 좀 가혹하잖아.”
로벨은 사과 씨를 길가에 던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뒤통수를 비춰서 그림자가 앞으로 쏟아졌다.
“북동쪽이면, 네일 공국 방향이지?”
“제 고향과 가깝습니다요.”
외팔이 더치가 기분 좋은 듯 껄껄 웃었다.
“국경에 가까운 영지야. 사고 치지 않게 조심하자.”
“에이, 기사 나리만 조심하면 아무 탈 없습니다요.”
“히히힛! 그건 그래요!”
로벨은 사과를 새로 꺼내 시시덕거리는 일행에게 집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