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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13화 (113/605)

113화. 붉은 머리

113화. 붉은 머리

로벨은 여관에서 쫓겨나와 아야의 뒤통수를 가볍게 때렸다. 신기하게도 통통! 소리가 났다.

“끼잉... 낑...”

아야는 덩치에 안 어울리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귀를 젖히고 흰자위를 들어내며 눈치 보니 차마 화낼 수 없었다.

“다음부터 그러지 마.”

“컹! 컹!”

“대답은 잘 해.”

로벨은 용서했지만, 마녀 키르케가 용서하지 않았다. 떡갈나무 지팡이로 아야와 이야카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거짓말하지 마! 또 물 거잖아!” 아야와 이야카는 과장되게 “깨갱! 깽!” 울며 도망쳤다. 로벨은 한숨을 쉬고 추경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한 해 중 가장 풍요로운 시절이었다. 큰 손, 작은 손, 거친 손, 고운 손, 굽은 손이 가리지 않고 가을걷이에 열중했다. 작년보다 소출이 많아 땀을 흘리면서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앗! 저기 말이 있어요!”

수확이 끝난 공터에 털북숭이 덩치가 4마리나 돌아다녔다. 어린 집사가 큰마음 먹고 사들인 포클랜드 산 농마였다.

“말은 훌륭한 짐승이지. 힘세고, 영리하고, 순종적이니까.”

“컹! 컹컹!”

이야카가 거세게 항의했다. 로벨은 질투심 많은 수컷 늑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너도 좋은 짐승이야. 말은 잘 안 듣지만.”

“카르릉...”

이야카는 기분이 좋은 듯 눈을 지그시 감고 골골거렸다. 한편, 늑대 소리를 들은 영지민이 큰 소리로 주위 사람을 불러 모았다. 로드릭 마을의 늙은 촌장이 지팡이를 바삐 놀리며 찾아왔다.

“어이구, 영주님! 시찰 나오셨습니까?”

“응. 잘 지냈어?”

로벨은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익숙한 얼굴들을 보니까 안심되었다.

“응?”

그러나 전부 낯익은 것은 아니었다. 귀리밭 한쪽 귀퉁이에 낯을 가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들은?”

촌장이 구부러진 허리를 좀 더 구부리며 고했다.

“이틀 전 이곳에 온 피난민입니다.”

“피난민?”

“북쪽의 후작님이 다스리는 땅에서 찾아왔다 합니다. 고향 땅이 고블린 손에 불타서 갈 곳이 없다고...”

“그런데 왜 보고를 안 했지?”

로벨의 눈초리가 가늘어지자 촌장은 그만 횡설수설했다.

“그, 그것이, 어제 아침 찾아뵈려고 했으나, 미처 뵙지를 못해서, 오늘도, 그러니까 공사다망하시기에, 어린 집사도 만나지 못하고...”

로벨은 표정을 풀었다. 기사와 상인을 상대하느라 촌장의 알현을 받지 못했다.

“그런 일이 있으면 여기 키르케나 펄프 대장에게 전해. 외부인보다 영지민이 중요하니까.”

“아, 예. 그리하겠습니다.”

로벨은 피난민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나 피난민들은 ‘영주님’이란 말에 겁을 집어먹고 머뭇머뭇했다. 로벨은 뭐라고 떠들었기에 저리 무서워하냐고 촌장을 째려봤다. 촌장은 온몸으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잘생기고, 온화하고, 세금이 낮고, 노역도 거의 없다고 좋은 말만 잔뜩 했는데, 뼛속까지 농민이라 본능적으로 기사를 어려워했다.

“마, 마로드...!”

로벨이 직접 다가가자 피난민들은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넙죽 엎드렸다. 로벨은 피난민의 몰골을 보고 질책할 수 없었다. 고생이 많았는지 가죽과 뼈 사이가 무척 썰렁했다. 로벨은 어미 품에서 칭얼거리는 갓난아기를 힐끔 보고 질문했다.

“어디서 왔어?”

“부, 북쪽 까마귀 마을에서 내려왔습니다.”

“까마귀 마을?”

“모몬트 남작님이 다스리는 마을입니다.”

“모몬트 남작...”

로벨은 익숙한 이름이라 생각하다가 번뜩 깨달았다. 주드 맥켈런 남작과 관련된 두 사람 중 하나였다.

“고블린의 습격을 받았다지?”

“예. 예예. 간밤에 마을로 쳐들어와 사람들을 죽이고, 잡아가고, 불 지르고...”

“고블린이 불을 질러요?”

마녀 키르케가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난 대충 알 것 같아.”

로벨이 얼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마법은 잘 모르지만, 마법사는 어느 정도 알았다. 마을주민을 제물로 쓰고 흔적을 지운 것이 분명했다.

로벨은 난민들이 겁먹자 주름을 펴고 말했다.

“뉴 로드릭 마을에 빈 땅이 있으니까 거기로 가.”

“저, 저기, 영주님. 그곳이 어딘지 모릅니다.”

“사람을 붙여줄 테니까 신경쓰지 마. 아, 맞다. 그람 형제가 올 때가 됐지?”

로벨은 새로운 일거리를 즉석에서 해결했다. 물론, 행정과 실행은 어린 집사와 징수관 형제의 몫이었다.

로벨은 밀과 귀리의 상태를 확인하고, 농마의 건강을 살피고, 진흙투성이로 달라붙는 꼬마들을 피해 개울가로 도망쳤다.

북쪽 숲에서 서쪽 농지를 돌아 남쪽으로 흐르는 개울물은 로드릭 마을의 생명줄이었다. 농업용수로 쓰이는 것은 물론이고, 술을 빚고, 물레방아를 돌리고, 빨래까지 담당했다.

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개울가를 걸으며 빨래하는 아낙들을 구경했다.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는지 웃음이 흘러나왔지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삭힌 오줌과 잿물이 달갑지 않았다.

“비누가 있으면 좋을 텐데...”

“비누요?”

포클랜드 시티의 귀족과 부르주아는 잿가루와 기름을 끓여서 만든 ‘비누’를 사용하는데, 볼탄 반도에서는 아직까지 삭힌 오줌과 잿물이 보편적이었다.

로벨이 비누의 쓸모를 알려주자 마녀 키르케가 의아해했다.

“그렇게 좋은 것이 있는데 왜 안 써요?”

“돈 욕심 때문이야. 국왕 폐하가 비누세를 부과해서 비누값이 왕창 올랐거든. 나도 딱 한 번 써 봤어.”

로벨은 왕실과 중앙귀족의 불만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낮말을 훔쳐 들은 새가 나타났다.

“광대를 혼낼 처지가 아닌 듯하오.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큰일 나지 않소?”

로벨은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에 손을 올리고 뒤돌았다. 붉은 머리와 붉은 옷이 잘 어울리는 청년이 있었다. 로벨은 허리에 찬 롱소드를 확인한 후 기사로 대했다.

“본인을 아시오?”

“아까 여관에서 뵈었소. 늑대 때문에 쫓겨나지 않았소?”

로벨은 눈살을 찌푸리고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모여 있어서 기억나지 않았다.

“내게 볼 일이 있소?”

“그건 아니지만, 처지가 비슷한 거 같아 말을 걸었소이다.”

“처지?”

“골치 아픈 주군을 모시느라 고생이 많잖소.”

붉은 머리 기사가 늑대남매를 가리켰다. 로벨을 로벨의 수행기사로 오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맹한 얼굴의 로벨이 하늘을 날고 대포를 쪼개는 8피트 덩치의 괴물 기사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로벨은 마녀 키르케에게 눈짓했다. 이럴 때 주인을 소개하는 것이 수행원의 역할이다. 그러나 정통파(?) 수행원이 아닌 마녀 키르케는 으르렁거리는 아야와 이야카를 말리느라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로벨이 직접 해명하고자 입술을 뗄 때, 붉은 머리 기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본인은 붉은 산의 하인즈 자작을 모시고 있소.”

로벨은 자기소개를 관두고 경계했다.

“정략결혼?”

“허어? 영지가 콩알만 하니 소문도 빠르군.”

콩알만 한 영지의 주인이 기분 나빠 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오?”

“사실 그 결혼을 막기 위해 왔소.”

적의가 호감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우선 설득하고, 안 되면 힘으로 막을 거요.”

로벨은 난감했지만, 마녀 키르케는 흥미로 눈을 반짝였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소?”

“고귀한 레이디가 불행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요.”

로벨은 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사람을 들었다놨다하는 재주가 있었다.

“본인과... 의 주군과 결혼하면 불행해진단 말이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 누구와 결혼해도 불행하오.”

마녀 키르케가 어린 집사처럼 두 뺨에 손을 대고 소리 없이 비명 질렀다.

“그 사랑하는 사람이 그쪽이오?”

“그렇소이다.”

펄프 대장 등이 봤으면 꼴값 떤다고 비웃었겠지만, 순수하고 순진한 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감격했다. 그래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로벨 로드릭은 무적무패라 불리는 최강의, 흠흠! 흠! 최강의 기사요. 결투를 생각 중이면 포기하시오.”

“본인도 무턱대고 싸울 생각은 없소. 본인이 다치면 본인을 사랑하는 수많은 레이디들이 슬퍼할 테니 말이오.”

“...왜 복수형이요?”

“아, 물론 본인이 사랑하는 레이디는 오직 한 명뿐이오. 그러나 본인을 사랑하는 레이디가 여럿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렇지 않소?”

마녀 키르케가 로벨의 옆구리를 꾹꾹 찔렀다.

“기사님, 그냥 결투하세요. 혼내주세요.”

로벨은 ‘그럴까?’ 생각하다가 간신히 참았다.

“본인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도움이 필요하오.”

“경을 도울 이유가 있소?”

붉은 머리 기사는 늑대남매를 힐끔 보고 말했다.

“로벨 로드릭 남작이 애지중지하는 늑대들을 산책시킬 정도면 필히 신뢰받는 기사일 거요. 그렇소?”

“그렇다 치고?”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폼멜을 만지작거렸다. 기사도에 어긋난 제안, 그러니까 암살을 의뢰하거나, 약점을 캐물을 경우 정략결혼과 무관하게 결투를 신청할 작정이었다. 붉은 머리 기사는 주위를 살핀 후 은밀하게 속삭였다.

“로벨 로드릭 남작의 성적 취향, 그러니까, 이상형을 알려주시오. 커험! 험! 그쪽으로 소개해줄까 하오. 그 반대도 좋소이다. 내 소중한 레이디를 보호할 수 있으니. 그 왜 그런 거 있잖소? 이것만큼은 못 참겠다 하는 거. 그런 것 좀 말해주시오. 내 명예로운 거짓말로 삼으리라.”

“......”

로벨은 저것도 기사라고 대접해준 것이 조금 후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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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점잖게 무시했지만, 붉은 머리 기사는 끈질기게 따라오면 졸랐다. ‘왜 말을 못하냐, 취향을 모르냐? 말 못할 비밀이라도 있느냐. 혹시 남색가냐? 남자도 문제없다. 그쪽으로 밝은 친구가 있다’ 등등. 로벨이 참다못해 화를 내기 직전, 주의를 돌릴 사람이 나타났다.

“어이구! 기사 나리! 여기 계셨군요! 성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습니다.”

“그람 형제?”

뉴 로드릭 마을의 징수관 그람 형제가 어찌 알았는지 로벨을 찾아왔다. 로벨은 수다스러운 붉은 머리 기사를 떨굴 수 있어서 환영했다.

“성에서 기다리면 갈 텐데,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여기 촌장에게서 전달받았습니다. 뉴 로드릭 마을로 데려갈 사람들이 있다고요?”

“그리 급한 것도 아닌데 왜 호들갑이야?”

“급한 이유가 있습니다. 엿새 전 사라진 청년이, 아, 보고 못 받으셨습니까? 어린 집사가 알 텐데, 아무튼 그 청년이 어젯밤 구울이 되어서 나타났습니다.”

로벨은 오랜만에 듣는 단어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도 구울이 남았어?”

“전쟁통에 용병들을 싹 빼가... 아니, 총동원하셔서 소탕이 안 되었습니다. 기사 나리도 아시겠지만, 구울이란 것이 역병 같은 것이라 하나라도 남으면 다시 퍼집니다. 난민을 보내기 전에 울프 용병단을 파견해주시면 참 좋을 텐데 옆에 분은 누구십니까?”

붉은 머리 기사는 로벨과 그람 형제를 번갈아 보다가 뒤늦게 본인이 거론 된 것을 알았다.

“난 붉은 산의 하인즈 자작님을 모시는 조이 모몬트라고 한다.”

로벨은 붉은 머리 기사의 성(姓)에 집중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또다시 모몬트 가문이 거론되었다.

“모몬트 남작가 사람이오?”

“우리 가문을 아시오?”

붉은 머리 기사, 조이 모몬트 경이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북방의 한미한 가문이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외지의 기사가 격하게 반응하니 놀라웠다.

로벨은 조이 모몬트 경을 새삼 살펴보며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알아볼까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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