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광대
112화. 광대
로벨은 근엄한 표정을 짓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선이 가늘어 위엄하고 거리가 먼 얼굴인데, 최근 피로가 쌓여서 퀭하기까지 했다. 의자 좌우에 앉은 아야와 이야카가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으르릉거리는 것이 그나마 ‘무적무패의 기사’의 위엄을 돋우고 있었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반들반들하게 닦아놓은 로드릭 성 메인 홀로 말쑥하게 차려입은 기사들이 들어왔다. 금실로 수놓은 더블릿과 베일 듯이 주름 잡은 브레가 대단히 신경 쓴 복장이었다. 서임 받은 지 얼마 안 된 20대 기사부터 슬슬 은퇴를 생각할 때가 된 50대 기사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실제로 볼탄 반도 출신이란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는 기사들이었다.
“구릉성의 마튼 경, 늪지성의 메튜 경, 그리고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입니다.”
애꾸눈 볼포스가 귓가에 속삭였다. 가솔만 몇 명 거느린 가난한 기사도 있지만, 인구 800명의 힘깨나 쓰는 영주도 있었다.
“내 성에 온 것을 환영하오. 내가 로벨 로드릭이오.”
로벨이 의자에서 일어나자 구릉성의 마튼 경이 무릎을 꿇었다. 잔뜩 긴장한 기사들이 화급히 따라 했다. 그로써 한 가지 공통점이 생겨났다.
“샘 포클 폐하의 오랜 전통을 따라 검과 말을 바치고자 합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막상 충성맹세를 들으니 간지럽고 어색했다. 이어서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이 롱소드를 뽑아 머리 위로 올렸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으로 로드릭 가문의 정당한 주인을 섬길 것을 맹세합니다.”
로벨은 롱소드를 받아 로드릭 가문의 기사로 임명한 후 정중히 돌려주었다.
“로드릭 가문의 주인으로 충성에는 신뢰를, 정의에는 명예를 선물하겠소.”
오래된 성에서 칼을 내리는 군주와 무릎 꿇은 기사의 모습이 장엄하지만, 펄프 대장은 하품을 참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리고 딱히 관심도 없었다. 어제와 그제에 이어서 3일째 치르는 충성맹세였다.
주드 맥켈런 남작에게 승리한 후 로벨에게 충성하는 영주와 기사가 10명이 넘었다. 에릭 공작의 봉신과 루카스 자작의 기사 등이었다. 그 결과 로드릭 성, 아만다 성, 가시성, 바위성에 더해서 볼탄 반도 남부 요충지인 구릉성과 버팅거 호수 서쪽에 위치한 늪지성이 새로운 영토로 추가되었다. 땅 크기만 보면 페르젠 백작과 비교해도 작지 않았다.
“시골 영지들이라 인구는 3,000명밖에 안 돼요.”
“옛날 생각하면 충분히 많잖아?”
“그럼 뭐해요. 페르젠 시티 수준도 안 되는데요.”
땅이 커지고, 인구가 늘어도, 로벨과 어린 집사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로벨은 창가에 앉아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손질했고, 어린 집사는 로벨 대신 주판알을 굴리며 장부를 정리했다.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추경지 세금과 소금광산 수입은 울프 용병단 운영자금으로 빠져나가고, 깃발 보험의 수익은 버팅거 시티 공장에 묶이고, 봉신들이 보낸 세금은 청새치 호 수리에 사용되었다.
‘왜 돈이 안 모이지?’
어린 집사의 고민도 지난날과 다르지 않았다.
어린 집사는 돌멩이를 제자리에 놓고 툴툴 거렸다.
“영주님이 여지껏 남작님이라 그래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충성맹세하지 못하는 영주들이 많아요. 쳇! 영주님이 백작님, 아니, 자작님만 됐어도 냉큼 달려와 칼을 바칠 텐데요.”
어린 집사는 자신의 말에 빠져들었다.
“에릭 공작님이 정통성을 되찾으면 일등 공신은 당연히 영주님이겠죠? 배신자인 페르젠 백작과 헤르만 백작은 모가지 부지하기도 힘들 테고요. 그럼 영주님이 백작님이 되는 것도...”
“꿈이 너무 크잖아.”
로벨이 소리 없이 웃었다. 어린 집사가 깜짝 놀랐다. 햇살 아래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처녀였다.
“영주님?”
“응?”
“아, 아니, 그냥 불러봤어요.”
로벨의 나이가 어느덧 20살이 넘었다. 여인의 자태가 완전히 숨겨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가장 큰 걱정거리가 여기 있잖아?’
로벨이 승승장구하는 것이 마냥 좋지 않았다.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 받을수록 정체가 탄로 날 위험도 높아졌다.
‘최대한 대외활동을 줄이고 쥐죽은 듯 지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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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수일 뒤, 어린 집사의 걱정과 불만이 한 덩어리로 나타났다.
로벨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으나, 차마 충성맹세할 수 없는 영주들이 전통적인 제안을 가져왔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인류의 문화이자 옛 신의 이름으로 치러지는 성사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정략결혼?”
붉은 산의 광산주인, 하인즈 자작이 제안이었다.
에릭 공작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철광은 전략적인 가치가 높다- 대귀족이 먼저 제안한 것은 로벨의 입지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로벨과 어린 집사는 기뻐할 수 없었다.
로벨은 선대의 인연이 어쩌고 우호적인 믿음이 저쩌고 적힌 편지를 뒤집어놓고 말했다.
“거절해야겠지?”
“당연하죠!”
“기분 나빠할까?”
“당연하죠?”
로벨도 심각성을 깨달았다.
“내 짐작인데, 이런 편지가 계속 날아올 것 같아.”
“저도 그게 걱정이에요.”
“그냥 결혼할까?”
어린 집사가 펄쩍 뛰었다. 로벨은 흥분한 어린 집사를 말리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진짜로 하는 게 아니고. 결혼했다고 알리면 더 이상 귀찮게 안 할 테니까.”
어린 집사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리 간단하지 않아요. 거짓말로 거절하면 더 큰 모욕이라 여길 거예요. 진짜로 결혼할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영주님의 정체를 알고도 용서하고 비밀을 지킬 레이디가 있을지...”
“호수의 기사 흉내 낼까?”
로벨은 아론다이트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호수의 요정을 사랑해 평생 동안 결혼하지 않은 전설 속 기사였다.
“전설과 현실은 다르죠. 비웃음당하기 십상이에요. 하지만 지금으로선 나쁘지 않아요.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 여자가 있다고 답장하죠. 그걸로 포기할 것 같지는 않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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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어린 집사에게 일거리와 고민거리를 함께 던져주고 슬그머니 성을 빠져나왔다. 수일 째 성에 갇혀 있었다. 한번쯤 바람을 쐴 필요가 있었다.
“어디 가세요?”
“컹! 컹!”
말을 타지 않고 소리 없이 나왔는데, 귀신같이 알아챈 짐승들이 있었다. 마녀 키르케와 아야와 이야카 무리였다. 로벨은 흠칫했지만 애써 티내지 않았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쿨쿨 자고 있어요. 지금은 잠이 약이니까요.”
“응. 수고했어.”
“그래서 어디 가세요?”
로벨은 주저하다가 솔직히 대답했다.
“로드릭 마을.”
영주가 영지를 시찰하는데 말릴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귀찮게 할 사람은 있었다. 마녀 키르케도 그중 하나였다.
“저도 같이 가요!”
“컹!”
로벨은 그렇게 반응할 줄 알았기에 군말 없이 허락했다.
“그 대신 조용히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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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릭 마을주민 숫자는 작년과 비슷하지만, 체감상 두 배로 북적였다. 로벨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귀족 일행과 행상인 무리, 그리고 울프 용병단에 가입하기 위해 기웃거리는 떠돌이 용병과 철부지 청년들 때문이다.
촌장의 손녀딸 루시와 방앗간 장남 지미가 차린 작은 여관은 어느덧 3배로 커져서 호황을 누렸고, 마을광장은 한 푼이라도 벌어보려는 행상인들이 좌판을 깔아 작은 시장이 되었다.
총총걸음으로 뛰어가는 양 떼 사이로 조랑말을 탄 기사가 지나가고, 자리싸움을 벌이는 행상인 옆에서 칼을 찬 떠돌이가 군침을 삼키며 눈치를 보았다. 로드릭 마을 토박이 로벨에게 퍽 낯선 광경이었다.
“언제부터 이랬어?”
“기사님이 개선한 다음날부터요? 어린 집사가 세금 매기고 다녔는데 몰랐나요?”
로벨을 알아본 영지민은 꾸벅 인사했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았다. 영지민은 가을걷이를 위해 추경지로 나가고, 외지인이 마을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디로 갈까요? 촌장집? 방앗간? 추경지?”
“여관으로 가자.”
로벨은 사람들을 만나니 좋은 곳을 선택했다. 최단기간에 로드릭 마을 최고 부자가 된 촌장네 손녀 부부가 운영하는 여관이었다.
제법 근사하게 꾸며놓은 대문을 지나 급히 지은 마구간을 살피고 아늑하다 못해 아기자기한 여관 건물 앞에 섰다. 그러자 여관 안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니 작금의 볼탄 반도에서 로벨 로드릭 남작을 당해낼 기사가 누가 있죠?”
로벨은 깜짝 놀라 아론다이트 손잡이를 잡았다. 칼날이 한 뼘쯤 뽑혔다. 하지만 위협이 아니었다. 좁은 여관을 더욱 좁게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여관에서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한 사람.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로벨의 허리 높이 밖에 오지 않는 난쟁이였다.
“어머나! 광대에요!”
“응. 추수제 때문에 왔나 봐.”
로벨은 슬그머니 자세를 고치고 광대를 구경했다. 문 앞까지 꽉꽉 들어찬 손님 때문에 쉽지 않았다.
“페르젠 백작은 수차례 패배해서 몸 사리기 급급하고, 헤르만 백작은 빚진 것이 많아 대들지를 못해요. 자신의 검을 바쳤으니 할 말 다했지요.”
광대는 테이블 위로 올라가 앞뒤로 발을 굴렸다. 그럴듯한 달리기 시늉이었다. 광대는 1인치도 나아가지 않으면서 헉헉! 소리 내었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강철성의 도트넘 백작은 꽁무니를 빼고 도망쳤고, 청옥성의 맥켈런 남작은 포로가 되었어요. 덩굴성의 에디즈 자작? 까놓고 급수가 안 맞아요. 급수가.”
광대는 땀을 닦는 시늉 하다가 모자 꼬리를 목에 감았다.
“이제 남은 것은 볼프 사트로 후작인데, 후작씩이나 되어서 남의 집안싸움에 끼어들기가 영 민망하죠. 고로, 볼탄 반도의 차기 주인은 로벨 로드릭 남작일 될 가능성이 제일 높아요.”
로벨은 문가에 기대어서 한마디 던졌다.
“그런 말 함부로 하면 목이 달아날 수 있어.”
로벨의 목소리도 광대만큼이나 잘 울렸다. 여관 안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러나 광대는 기죽지 않았다.
“광대의 싸디싼 주둥이와 깃털처럼 가벼운 머리통 이야기라면 잘 알고 있어요. 제가 광대인데 왜 모르겠어요?”
광대는 자신의 목을 조르며 혀를 길게 내밀었다. 다시 웃음이 돌아왔다. 제법 유능한 광대였다.
“그걸 알고도 단언하는 거예요. 그만큼 로벨 로드릭 남작이 대단하단 뜻이죠. 이곳에 오신 기사님과 용병님 모두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신 거랍니다.”
“그렇지! 그렇고말고!”
“암! 로벨 로드릭 남작밖에 없지!”
로벨을 제외한 모두가 광대의 말에 동조했다. 심지어 마녀 키르케와 늑대 남매도 목청껏 ‘아우우-!’ 소리치며 함성을 보탰다. 그 결과 끓어오른 분위기가 폭발했다.
“으악! 늑대다!”
“누가 늑대를 데려왔어! 당장 나가!”
마녀 키르케가 발끈해서 ‘우리 늑대는 안 물어요!’ 소리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여관 구석으로 도망치는 청년의 엉덩이를 벌써 물었기 때문이다.
로벨은 사냥에 성공해 씨익- 웃는 아야와 분한 듯 씩씩거리는 이야카를 잡아끌며 여관 밖으로 나갔다. 영주가 여관에서 쫓겨나는 웃기는 상황이었다. 로벨을 만나기 위해 붉은 산에서 찾아온 기사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놈의 영지에서는 늑대가 강아지처럼 싸돌아다니네. 영주도 그렇다더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