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치료
111화. 치료
로벨은 신중하게 거리를 가늠했다. 20살의 로벨과 52살의 주드 맥켈런 남작의 싸움이지만, 체력적으로 차이가 없었다. 해변에서 성벽까지 뛰어와 숨이 가쁘고 다리가 무거웠다.
‘오래 끌지 않을 거야.’
롱소드와 메서는 기본기에서 차이가 있었다. 롱소드는 찌르기와 받아치기에 비중이 크지만, 메서는 철저하게 베기에 특화되어 있었다.
체력과 무기를 고려할 때, 주드 맥켈런 남작이 선공하는 것은 당연했다.
“흡!”
전쟁 영웅, 북해의 사자, 전(前) 그랜드 챔피언 주드 맥켈런 남작이 혼신의 힘을 다해 수직베기를 시도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비스듬히 올려 흘려보내고 45도 돌려 폼멜로 그레이트 헬름을 노렸다. 그러나 노기사도 만만하지 않았다. 무거운 헬름을 재빨리 움직여서 직격을 피했다. 쇠와 쇠가 부딪치자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깡-!
“과연! 제법이오!”
세 줄로 난 눈구멍 속에서 주드 맥켈런 남작의 안광이 번쩍였다. 로벨은 화급히 뒤로 물러났다. 주드 맥켈런 남작의 메서가 흉갑과 스커트 사이의 빈틈을 노리고 올라왔다. 1피트도 안 되는 거리에서 사각을 점한 완벽한 공격이었다. 평범한 기사라면 중한 부상을 입을 것이다. 로벨은 스커트에 새겨진 흠집을 보고 중얼거렸다.
“과연 바다사ㅈ... 북해의 사자로군.”
“본인이 할 말이오.”
로벨 만큼이나 주드 맥켈런 남작도 놀랐다. 설마하니 그 공격을 피할 줄 몰랐다. 두 기사는 한층 신중해졌다.
“그만한 실력을 가지고 걸음마도 못 뗀 내 아들을 죽여야만 했소?”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하지 마시오.”
“부모에게 자식은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라오.”
로벨의 호흡이 안정되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큼직한 메서를 상하좌우로 휘둘렀다. 로벨은 두어 번 쳐내다가 그냥 마주 공격했다. 챙! 챙챙! 깡! 까강-!
“이합!”
“타핫!”
기합과 기합이 엇갈리고, 칼날과 칼날이 엇갈리고, 쇳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칼에서 불똥이 튈 때마다 갑옷이 조금씩 찌그러졌다.
로벨은 신음을 참았다. 컴포지트 아머가 아무리 튼튼해도 충격이 없지 않았다. 내일 아침이면 온몸이 푸르팅팅하게 변할 것이다. 로벨은 20살이나 30살의 주드 맥켈런 남작을 상상하며 감탄했다.
‘저 나이에 이 정도면, 전성기 때는 얼마나 대단했을까?’
“벌써 지친 것이오?”
아멧의 눈구멍으로 날카로운 찌르기가 날아왔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마구잡이로 때리다가도 기회가 생기면 어김없이 급소를 노렸다. 잠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럴 리가!”
로벨은 아론다이트 손잡이로 메서를 쳐내고 반걸음 물러나며 주드 맥켈런 남작의 손목을 노렸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찌르는 속도 그대로 칼을 당겨서 칼등으로 막았다. 로벨은 개의치 않고 세 번 더 두드렸다. 칼이 울고 손이 저렸다.
‘이것이 닷새간 매복하고 한나절을 싸운 자의 힘이란 말인가?’
주드 맥켈런 남작은 최상의 컨디션인 로벨을 상상하며 감탄했다. 정정당당하게 싸우면 진작 결판이 났을 것이다. 그야말로 박빙의 싸움.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는 법이다.
로벨의 아론다이트가 주드 맥켈런 남작의 흉갑 고리를 때리면서 브레스트 플레이트와 백 플레이트가 분리되었다. 아밍 더블링에 고정되어 있어서 완전히 벗겨지지는 않았지만, 옆구리에 빈틈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아차하며 메서로 옆구리를 가드 했다. 그러나 로벨은 옆구리를 노리지 않았다.
“이쪽이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아래로 쓸어서 발목을 공격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예상 밖의 공격에 휘청거렸다. 로벨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깨로 부딪쳤다. 무게 중심이 왼쪽으로 쏠린 상태에서 몸무게 + 갑옷무게로 밀치자 속절없이 넘어졌다.
“크윽!”
주드 맥켈런 남작은 메서를 팽개치고 대거를 뽑았다. 그러나 로벨이 좀 더 빨랐다. 로벨은 진즉에 아론다이트를 버리고 대거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벌어진 옆구리에 쑥- 찔러 넣었다.
“컥!”
주드 맥켈런 남작은 살이 찢어지는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로벨의 관자놀이를 향해 대거를 휘둘렀다. 그러나 아멧의 장갑을 뚫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치잉- 로벨은 머리가 울려서 한 걸음 물러났다.
“승부가 난 것 같소.”
로벨은 머리를 휙휙 젓고 흐룬팅을 뽑았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옆구리를 감싸 쥐고 일어나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도로 주저앉았다.
“후우... 그런 것 같군.”
주드 맥켈런 남작은 허허, 허, 웃고 그레이트 헬름을 벗었다. 명예로운 기사답게 패배를 받아들였다.
“몸값 따위 요구하지 말고 죽이시오.”
“기대하지도 않았소.”
로벨은 흐룬팅을 두 손으로 잡아 백발머리를 겨냥했다.
“죽이기 전에 진실을 알려주겠소.”
“진실?”
“스콰이어 호그 맥켈런, 경의 아들을 죽인 것은 내가 아니오.”
“...끝까지 그리 주장하시오?”
“곧 죽을 사람에게 거짓말할 이유가 있겠소?”
로벨은 바이저를 올리고 주드 맥켈런 남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거짓말이나 조롱이 보이지 않은 진지한 눈이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의 눈이 흔들렸다.
“그럼 대체 누구요?”
“잉그비아 왕국의 악마추종자요.”
주드 맥켈런 남작의 눈동자가 커졌다.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악마추종자...? 그래... 들어본 적이 있소...”
“경을 이용하기 위해 꾸민 짓이오. 경은 그자들 손에 놀아났소.”
로벨은 흐룬팅을 고쳐 쥐고 높이 들었다. 그러나 주드 맥켈런 경의 눈은 칼을 쫓지 않았다.
“내가... 내가 그 사악한 자들에게 이용당했단 말이오? 내 아들의 원수에게...?”
“잘 가시오.”
로벨의 흐룬팅이 아래로 떨어졌다. 주드 맥켈런 남작이 죽어가는 사람답지 않게 버럭! 소리쳤다.
“아직! 아직 죽을 수 없소!”
흐룬팅의 칼날이 머리를 쪼개기 직전에 멈췄다.
로벨은 빙긋 웃고 흐룬팅을 회수했다. 아무리 로벨이라도 이렇게 갑자기 칼을 멈추지는 못한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 말을 기다렸소.”
“하아... 하아... 지금 나를...”
“허나, 거짓말이 아니오. 악마추종자의 함정에 빠진 것이 사실이오. 그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게 도와주시오.”
로벨은 진지하게 요구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소리 내지 못하고 기절했다.
“죽어라! 로드릭의 개!”
“뭐야? 오크처럼 생긴 잡놈이!”
로벨은 성 안과 성 밖을 번갈아 보고 저 싸움들을 어찌 말려야 할지 고민했다.
“내가 이긴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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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아만다 성의 깃발을 바꾸고 승리를 선언했다. 고용주를 잃은 용병들은 즉시 항복했고, 죄진 것이 많은 해적들은 도망쳤다.
로벨이 부상자를 치료하고, 전사자를 수습하는 사이 어린 집사는 주변 마을과 행상인을 찾아다니며 승전소식을 알렸다. 8년 전 영웅을 꺾었으니, 볼탄 반도를 넘어 포비아 왕국 최강의 기사가 되었다.
“이걸로 진상품이 왕창 들어오겠죠? 참! 깃발 가격을 올릴까요? 두 배를 요구해도 앞다퉈서 지불할 거예요!”
로벨은 어린 집사를 제지하고 마녀 키르케를 가리켰다. 어린 집사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이 식은땀을 쭉쭉 흘리며 누워있고, 그 옆에서 마녀 키르케가 지팡이를 흔들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오오! 옛 신이시여!”
“로벨 로드릭 남작! 정말 안전한 것이 맞소이까?”
주드 맥켈런 남작의 기사들이 잡아먹을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로벨이 아론다이트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짤막하게 ‘흠!’ 소리 내자 잽싸게 시선을 돌렸다.
어린 집사가 모처럼 진지한 마녀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편히 못 가게 저주하는 중인가요?”
“...그런 말 하지 마.”
로벨은 얼굴 근육이 날뛰는 기사들을 진정시키고 어린 집사에게 설명했다.
“약으로 안 나아서 치료 마법이란 것을 시도하고 있어.”
“잠깐! 그거 믿을 만한 거예요? 차라리 의사를 데려오는 편이 좋지 않아요?”
“가장 가까운 병원이 노스폴드 시잖아. 내일 아침이면 송장 치울 거야.”
그때, 길고 긴 마녀의 주문이 끝났다.
“숨 쉬는 바위, 흐르는 나무, 뜨거운 얼음, 깜깜한 불빛, 이곳에서 생명이 되어라.”
마녀는 떡갈나무 지팡이로 주드 맥켈런 남작의 상처를 툭- 두드렸다. 로벨 이하 마법 무외한은 큰 기대를 안고 주드 맥켈런 남작의 상처 부위를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집중해도 바뀐 것이 없었다. 기사들 얼굴에서 실망과 원망이 차올랐다.
“이게 뭐요! 실패한 것이오?”
“제길! 마녀 따위한테 기대한 것이 잘못이지!”
어린 집사가 발끈해서 반박했다.
“지금 무슨 말씀이에요! 저 어벙한 마녀가 실패해서 다행인 줄 아세요! 성공했으면 개구리로 변하거나 빗자루가 되어서...”
콩-
마녀가 지팡이로 정수리를 때렸다. 어린 집사는 머리통을 붙잡고 주저앉아 뒹굴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와 흐룬팅만큼이나 지팡이의 정체가 궁금했다.
마녀는 허리에 손을 얹고 설명했다.
“원래는 식물의 성장을 돕는 마법인데, 사람한테 쓰면 회복력이 좋아져요. 이제 좋은 약과 깨끗한 붕대가 일할 차례에요.”
로벨은 주드 맥켈런 남작의 낯빛을 확인하고 끄덕였다.
“얼굴이 편해진 것 같아.”
로벨의 말에 기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주드 맥켈런 남작의 몸 상태를 살폈다. 호흡이 깊어지고 식은땀이 잦아들었다.
“오오! 과연 주군이다!”
“역시 이런 곳에서 쓰러질 분이 아니시지!”
마녀 키르케의 공이 주군의 업적으로 바뀌었다. 로벨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고, 어린 집사는 마녀의 눈치를 살폈다. 마녀 키르케는 기사들과 함께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하여간, 나 빼고 다 바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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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주드 맥켈런 남작과 휘하 기사들만 체포하고 병사들을 해산시켰다.
용병과 선원은 어디든 갈 수 있지만, 노잡이 노예가 골치였다. 어린 집사가 욕망을 가득 담아 제안했다.
“갤리선을 운용하려면 노잡이가 필요하잖아요?”
“...저 꼬라지인데?”
“에이, 저 정도쯤이야. 구멍 10개 정도만 메꾸면 되겠는데요?”
로벨은 물에 떠 있는 것이 용한 갤리선을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어린 집사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날, 푸른고래 호와 아만다 마을주민이 돌아왔다. 어린 집사는 전문가 의견을 들어보자며 이안 선장을 호출했다. 이안 선장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청새치 호 함대를 살펴야 했다.
“수리하라면 수리할 수 있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선체를 싹 다 뜯어서 교체하고, 돛대를 다시 조립해야 하는데, 새로 한 척 만드는 비용이 나갈 겁니다.”
“그건 곤란한데...”
로벨은 어린 집사를 힐끔 보았다. 어린 집사가 어린 나이답지 않은 주름을 만들었다.
“버팅거 시티의 공장운영도 생각해야 해요.”
이안 선장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새로 제안했다.
“두 척을 합치는 것이 어떻습니까?”
“어떻게?”
“이쪽 배는 포서마스트가 멀쩡하고, 저쪽 배는 메인마스트가 멀쩡합니다. 선수와 선측도 각각 상한 곳이 다르군요. 한쪽을 희생하면 자재비를 상당히 아낄 수 있을 겁니다. 아주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로벨과 어린 집사는 즉시 허락했다.
“그럼 그렇게 해.”
“당장 시작하세요!”
그 외에도 자잘한 일이 남았지만, 로벨이 직접 처리할 필요는 없었다.
로벨은 머를 브릭 경에게 아만다 성을 돌려주고 마을재건 및 피해복구를 떠넘겼다. 머를 브릭 경은 몸값을 내주고 성을 찾아준 로벨에게 찍소리하지 못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주드 맥켈런 남작 일당을 짐마차에 차곡차곡 담아 로드릭 성으로 회군했다. 농부가 농장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듯 조용하고 평온했다. 어떻게 봐도 포비아 왕국 전역이 떠들썩한 위대한 개선답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