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대결
110화. 대결
갤리선 두 척이 충돌했다. 화약이 폭발한 듯 불꽃이 터지고, 이어서 검은 연기가 구름처럼 치솟았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아만다 성의 성벽에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실로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로벨 로드릭은 스무 명 남짓한 병사로 전함을 나포하고, 그 전함으로 전함을 요격했다.
“저게 현(現) 그랜드 챔피언이란 말인가?”
주드 맥켈런 남작의 기사들이 다급히 소리쳤다.
“마로드! 함대를 잃으면 퇴로가 막힙니다!”
“지금이라도 출격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주드 맥켈런 남작은 한 덩이로 뒤얽힌 갤리선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기사들은 가슴에 주먹을 붙여 군례를 표시하고 자신의 기사 종자와 소대장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해안가로 궁수를 보내라!”
“뱃놈들이 아니니 멀리 가지 못할 것이다!”
“해안이 아니오.”
그러나 주드 맥켈런 남작이 명령을 막았다. 기사와 기사 종자들이 당황해서 남작을 쳐다보았다. 남작은 손을 들어 육지 쪽을 가리켰다.
“지금 공격해야 할 곳은 적군의 본진이오. 로벨 로드릭 남작이 자리를 비운 지금 적의 주력을 꺾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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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갑판 위로 조심스럽게 머리를 들었다. 로벨이 명령하긴 했지만, 정말 대포에다 꼬라박을 줄은 몰랐다. 화약통이 폭발하면서 선수상이 사라지고 포어마스트가 기울어졌다.
“...아군 피해는?”
“기사 나리 빼고 없습니다!”
울프 용병단은 충돌 전에 멀찍이 피해서 전원 무사했다. 로벨과 로벨에게 덤비던 적 선원들만 대거 당했다.
로벨은 끄응- 소리 내며 일어났다. 컴포지트 아머 덕분에 무사했다. 갑옷이 아니었으면 유혈낭자가 무엇인지 직접 보여주었을 것이다. 로벨은 쇳조각과 불덩이에 엉망이 된 적을 발로 차 기절시킨 후 명령했다.
“아만다 항으로 돌아가야 해. 선원들을 죽이지 마.”
울프 용병단은 날붙이를 집어넣고 메이스와 워 해머를 꺼냈다. 눈치가 빠른 선원은 생존 가능성을 깨닫고 즉시 항복했지만, 용감하거나 멍청한 선원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기어이 뼈마디가 박살 났다.
로벨은 전세가 완전히 기울자 아멧을 벗고 아론다이트에 흐르는 핏물을 닦았다. 요정의 검답게 사람 몇 명 벤 거로는 이빨 하나 나가지 않았다. 강도만 보면 흐룬팅 이상이었다. 그러나 흐룬팅과 달리 핏자국이 쉽게 닦이지 않았다.
‘이건 뭐로 만든 거지?’
로벨이 아론다이트를 이리저리 비출 때, 외팔이 더치와 겁쟁이 데비가 50대 초반 선원을 잡아왔다. 뱃일에 안 어울리는 나이와 계절에 안 맞는 옷차림으로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청새치 호 선장입니다.”
“청새치?”
“이 갤리선 이름이 청새치랍니다요.”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결 깨끗해진 호수의 검으로 선장을 겨냥했다.
“이 시간부로 나 로벨 로드릭이 청새치 호를 지휘할 거야. 내 명령에 따르면 목숨을 살려줄게.”
선장의 낯빛이 하얘졌다. 그러나 반세기 동안 바다와 싸워온 진짜 바다 사나이였다. 제법 강당이 있었다.
“거부하면?”
“배를 몰 줄 아는 것이 너 하나는 아니겠지?”
로벨은 피 흘리며 끌러오는 선원들을 힐끔 보았다.
“하지만 쓸데없이 피 흘리고 싶지 않아. 검과 명예로 약속할게. 내게 협조하면 너희 모두를 살려주겠어.”
선장은 선원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피칠갑한 기사가 칼을 들이밀고 선장 or 죽음을 제시하면 일말의 주저 없이 선장직을 선택할 것이다.
“전부 살려준다고?”
“응.”
선장은 한숨을 쉬고 결정했다.
“시키실 일이 뭡니까?”
로벨은 빙그레 웃었다. 그때 발냄새 베커가 소리쳤다.
“기사 나리! 기사 나리! 적이 나옵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집어넣고 뱃전으로 이동했다. 아만다 성의 성문이 활짝 열리고, 세 자릿수의 병사가 나왔다. 중무장한 기사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설마 본진을 노리는 건가?”
“우리가 할 말은 아니지만, 치사한데?”
로벨은 아론다이트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짧게 숨을 내쉬었다.
“흠.”
지휘관이 없는 부대는 허술하다. 이것은 전쟁 소설 몇 권만 읽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로벨은 입꼬리를 올렸고, 외팔이 더치 이하 울프 용병단은 서로를 향해 껄껄 웃었다. 결국 선장이 호기심을 못 참고 질문했다.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지금 큰일 난 거 아닙니까?”
로벨은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울프 용병단의 지휘관은 내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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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 용병단의 지휘관이 숨 가쁘게 명령했다.
“1열 사격!”
“2열 사격 준비!”
“꼼지락대지 마! 3열 발사!”
펄프 대장은 별명 그대로 '대장'이다. 울프 용병단은 로벨의 지휘보다 펄프 대장의 지휘가 익숙했다. 게다가 전술적인 감각이 뛰어난 과묵한 몬트와 백발백중의 애꾸눈 볼포스가 보조했다.
과묵한 몬트가 긴 침묵을 깨고 벼락처럼 소리쳤다.
“지금이다!”
“스피어맨! 앞으로!”
크로스보우맨은 3교대로 쿼럴을 쏟아붓고 신속하게 뒤로 빠졌다. 그리고 스피어맨 소대가 파비스 사이로 길고 짧은 창날을 세웠다. 기사의 랜스 차칭이 파비스와 파이크에 가로막혔다.
“이, 이놈들이...!”
주드 맥켈런 남작의 기사들은 전투마를 세우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러나 잇몸과 전투마를 위해서는 빨리 벗어나야 했다. 애꾸눈 볼포스가 가늠자 위에 표적을 올렸다.
“이미 늦었소.”
팡-! 아바레스트에서 발사된 철제 쿼럴이 파이크 숲을 헤집고 전투마의 이마를 꿰뚫었다. 이름 모를 전투마는 신화 속의 유니콘 비슷한 모습이 되어 풀썩 쓰러졌다. 기사는 재빨리 몸을 굴려 전투마에 깔리는 참사는 피했으나, 맨몸으로 100명의 용병 앞에 팽개쳐진 낭패감에 젖었다. 애꾸눈 볼포스는 윈드라스를 꺼내 시위를 감으며 외쳤다.
“크로스보우맨 제1소대! 지금부터 자율사격에 들어간다! 기사의 말을 노려라!”
“으하핫! 뒤통수 조심해라!”
울프 용병단 제1소대는 애꾸눈 볼포스가 직접 지도한 정예 중의 정예 소대였다. 창벽 너머의 적을 하나씩 저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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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과 떨어진 두 곳에서 희비가 엇갈렸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상상 이상으로 완강한 저항에 당황했고, 로벨은 기대 이상으로 잘 싸우는 광경에 기뻐했다. 외팔이 더치가 흐뭇하게 한 마디 붙였다.
“저희가 안 가도 되겠는뎁쇼?”
하지만 로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투 준비해.”
겁쟁이 데비와 발냄새 베커가 의아해하며 반문했다.
“어어? 펄프 대장을 돕습니까?”
“저희가 도착할 때쯤이면 전투가 끝날 텐데요?”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펄프 대장이 아니야.”
“그럼요?”
로벨은 100여 명의 병사가 빠져나가 어딘지 썰렁해 보이는 아만다 성을 가리켰다.
“주드 맥켈런 남작.”
로벨 이외의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저희끼리 성을 칩니까요?”
“응. 30명 정도 남았을 거야.”
“그래도 성벽이 있지 않습니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어.”
“그 길에는 성문이 없나 보죠!”
로벨은 잡소리가 길어지자 모두를 노려보았다. 외팔이 더치 이하 울프 용병단은 짜증이 가득 담긴 눈을 마주하고 헛기침했다. 겁쟁이 데비가 가장 빨리 태세전환 했다.
“기사 나리가 하자면 하는 거지! 무슨 잔말이 많아!”
“암! 그렇지! 저깟 성쯤이야?”
로벨은 기분이 안 좋은 선장과 눈치 보는 선원들을 불러 갤리선을 전진시켰다. 뱃머리가 날아가고 포어마스트가 두 동각 났으며 멀쩡한 선원보다 피 흘리는 선원이 많지만, 그래도 용케 움직였다. 노잡이 노예들은 살았다는 안도감에 힘차게 노를 저었다.
로벨은 불이 덜 꺼져 타닥- 타닥- 소리 나는 이물로 나아가 시시각각 커지는 아만다 성을 관찰했다.
‘주드 맥켈런 남작. 슬슬 승부를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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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드 맥켈런 남작은 백병전을 치르는 아군의 주력부대와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청새치 호 함대를 번갈아 보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어디서 잘못된 거지.’
가시성을 빼앗겼을 때 철수해야 했다. 식량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해야 했다. 울프 용병단의 전력을 제대로 분석해야 했다.
‘아니, 가장 큰 잘못은 20살짜리 청년 기사를 얕잡아 본 것이다.’
갤리선 2척이 해변에 정박하고, 피크닉 나온 듯 떠들썩한 용병들이 뛰어내렸다. 큰 칼을 가진 젊은 기사가 진두지휘했다.
‘그래도 포비아 왕국의 미래가 밝군.’
“마로드! 로벨 로드릭 남작군이 북문으로 접근 중입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성 안에 남은 병사를 돌아보았다. 기사 종자 1명에 용병 22명이었다.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저들은 대부분 풋맨이다. 투사병기가 없으니 성벽을 넘을 것이다. 장창을 준비해서 막아라.”
아무리 현역 그랜드 챔피언이라 해도 성문을 부수고, 성벽을 허물 재주는 없을 것이다.
“난 아직 지지 않았소. 끝까지 가 봅시다.”
그러나 로벨의 비장의 수를 읽지 못했다. 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이끌고 성문으로 직진했다. 사다리를 준비하지도, 파비스를 설치하지도 않았다. 외팔이 더치가 바클러 크기에 한탄하며 소리쳤다.
“기사 나리! 어쩔 작정입니까요!”
로벨은 통나무를 여러 개 엮어 만든 성문을 가리켰다.
“성문을 열거야”!
“성문이요? 아무리 기사 나리라도 저 큰 문을 어찌...”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뽑아 모두가 볼 수 있게 높이 든 다음 성문을 향해 휘둘렀다.
“성문으로 가라! 성문으로 뛰어라!”
로벨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하게 잘 울렸다. 울프 용병단은 의심하지 않고 명령을 따랐다. 성문을 향해 전력으로 뛰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굳게 닫힌 성문이 스르륵- 열리기 시작했다. 외팔이 더치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기, 기사 나리? 마법입니까요?”
“비슷해!”
로벨은 소리 내어 웃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외팔이 더치 이하 울프 용병단은 떨떠름하게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마법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왜 이리 늦었습니까!”
“우악! 이리로 내려온다!”
익숙한 얼굴, 익숙한 목소리, 그리고 익숙한 경박함이 기다리고 있었다. 겁쟁이 데비와 발냄새 베커가 동시에 소리쳤다.
“허풍쟁이 제이콥?”
“발가락 슈미츠!”
로벨은 오랜 시간 수고한 두 용병을 위로하고 성벽에서 내려오는 주드 맥켈런 남작군에게 달려갔다. 첫 격돌부터 피가 솟구쳤다. 로벨은 성문을 막기 위해 뛰어 내려온 주드 맥켈런 남작군의 목을 수직으로 꿰어서 옆으로 뿌리쳤다. 가엾은 용병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처럼 풀썩 쓰러졌다.
“오늘로 종지부를 찍는다! 가자!”
외팔이 더치는 손도끼로 바클러를 두드리며 돌진했고, 그에 질 새라 모두가 함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상 안 곳곳에서 병장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벨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숨이 턱까지 찼지만 쉬지 않고 성벽 계단을 올라갔다.
“로벨 로드릭!”
롱소드와 체인메일을 갖춘 17, 8살 청년이 앞을 가로막았다. 잘 정리된 머리와 깔끔한 얼굴로 기사 종자임을 알 수 있었다.
“저리 비켜!”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거꾸로 잡아 망치처럼 휘둘렀다. 기사 종자는 교본에 안 나오는 변칙기술에 당황해서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좁은 계단에서 피할 곳이 많지 않았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회초리처럼 붕붕 휘두르다 거리가 좁혀지자 몸을 낮춰 기사 종자의 발목을 잡았다.
“어? 어억? 안 돼!”
“돼.”
로벨은 기사 종자의 오른쪽 다리를 계단 밖으로 옮겨주었다. 정신없이 물러나느라 균형감각을 상실한 기사 종자는 어이없을 만큼 쉽게 추락했다. 쿵-! 성벽이 조금 흔들렸다. 그래도 9피트 높이 밖에 안 되니 머리만 조심하면 죽지 않을 것이다. 예상대로 가냘픈 신음소리가 올라왔다.
로벨은 남은 계단을 훌쩍 올라가 성벽 위의 병력을 확인했다. 울프 용병단을 막기 위해 전부 내려가서 성벽 위에는 딱 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할 말을 잃게 하는군, 로벨 로드릭 남작.”
주드 맥켈런 남작이 그레이트 헬름을 쓰며 중얼거렸다.
“칭찬으로 듣겠소, 주드 맥켈런 남작.”
로벨은 바이저를 내리고 아론다이트를 바로 잡았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헬름 안에서 미소 짓고 랑게스 메서를 뽑았다.
“칭찬이 맞소.”
로드릭-맥켈런 가문의 전쟁이 마침내 두 기사의 대결로 좁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