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09화 (109/605)

109화. 해상전

109화. 해상전

로벨은 컴포지트 아머의 방호력을 믿고 선수로 나갔다. 갤리선에서 화살이 날아왔지만 맞는 것은 거의 없었다. 요행히 명중해도 갑옷을 뚫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갤리선의 뱃머리를 간신히 먼 바다로 돌았을 때, 로벨의 보트가 고물에 충돌했다. 쿠웅-! 충격이 작지 않아 모두 휘청거렸다. 로벨도 하마터면 바다에 빠질 뻔했다.

“휴우...”

컴포지트 아머의 무게를 생각하면 죽다가 살아났다. 로벨은 발냄새 베커를 한번 째려보고 갤리선의 높은 선체를 올려다보았다. 7~8피트 높이로 사다리 없이는 올라가기가 조금 버거웠다. 외팔이 더치가 부하들을 닦달했다.

“사다리 없냐? 갈고리는?”

“그런 게 있겠냐!”

“...그럼 만들어야지. 엎드려.”

로벨은 외팔이 더치를 끌어 당겨 선체를 짚고 서도록 했다. 외팔이가 ‘설마? 에이, 설마?’ 중얼거리는 사이, 로벨은 보트 난간과 외팔이 등짝을 차례로 밟고 뛰어올랐다. 44파운드 갑옷과 흔들리는 보트를 생각하면 놀라운 운동능력이었다.

“으허허엉! 척추! 척추가 부러진 거 같아!”

외팔이 더치가 땅바닥에 쓰러져서 고통을 호소하자 용병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벌써 부러지면 안 돼! 우리도 올라가야지!”

“야야, 다시 엎드려 봐. 나도 할 수 있을 거 같아.”

로벨은 눈물겨운 전우애를 감상할 틈이 없었다. 하프 파이크를 꼬나든 선원들과 대치해야 했다.

“기어이 올라왔어!”

“기, 기사 같은데?”

“지금 쳐! 한 놈이잖아!”

활 다루는 솜씨로 짐작했지만 훈련된 병사가 아니었다. 포위하지도 않고 다짜고짜 창을 찔렀다. 로벨은 왼발을 뒤로 빼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온몸으로 창을 받았다. 깡! 까깡-!

하프 파이크는 해전용으로 사용되는 가벼운 단창이었다. 갑판 위로 뛰어드는 날렵한 해적을 상대하기는 좋지만, 눈구멍 이외에는 빈틈이 없는 중무장 기사를 상대하기는 힘들었다. 창날이 튕겨나가고, 일부는 낚시 바늘처럼 휘어졌다.

“창이 안 박히잖아!”

“제길! 단단해!”

로벨은 가드를 풀고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기사랑 싸우는 거 처음이야?”

아마도 없을 것이다. 설령 있어도 로벨처럼 전신갑옷을 입고 갤리선을 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에 빠지면 꼼짝없이 수장될 복장이니까.

“그럼 좋은 경험이 될 거야.”

로벨은 부러진 창을 휘젓는 선원에게 다가가 머리를 내려쳤다. 그리 빠르지도 않지만 큰 칼과 큰 갑옷에 압도된 선원은 피하지 못하고 머리가 쪼개졌다.

“우아악!”

피가 뿌려지자 비로소 실감이 나는지 우왕좌왕 흩어졌다. 거친 바다 사나이 어쩌고 해도 완전무장한 기사 앞에서는 평범한 민간인이었다.

로벨이 하나하나 숨통을 끊는 동안 울프 용병단이 속속 갑판으로 올라왔다. 숫자는 30대 20이지만 20명 전원이 살인의 프로페셔널이었다. 로벨을 따라 일말의 주저 없이 병장기를 휘둘렀다. 선상이 피로 물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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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중에 자주 나오지만 별 소용없는 말이 몇 가지 있었다.

“자, 잠깐!”

로벨은 세 번의 ‘그만!’과 네 번의 ‘잠깐!’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만두거나 멈추지 않았다. 로벨의 대답은 쭉 한결 같았다.

“싫어.”

로벨은 일곱 번째 선원을 사살한 후 몸을 돌렸다. 남은 선원은 10명이 채 되지 않았다. 과반수가 쓰러지자 비로소 적절한 단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항복! 항복합니다! 살려주세요!”

“나, 나, 나는 맥켈런 가문 사람이 아니야!”

로벨은 아론다이트에 흐르는 핏물을 갑판 위에 뿌리고 투항을 받아들였다. 딱히 자비로워서가 아니었다. 갤리선을 조종하기 위해서는 선원이 어느 정도 필요했다.

“더치, 데비, 아래로 내려가. 노잡이를 제외하고 전부 잡아와. 저항하면 죽여도 돼.”

“Yes, Sir!”

외팔이 더치가 신이 나서 해치 아래로 내려갔다. 로벨은 포로들을 메인마스트 아래에 모으라고 지시하고 이물 너머를 내다보았다.

주드 맥켈런 남작의 갤리선이 한 척 남아 있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

로벨은 항복한 선원들을 잘 구슬려서 쫓아갈지, 아니면 한 척 나포한 걸로 만족할지 고민했다. 그러자 적함이 고민을 덜어주었다.

“기사 나리, 저놈들이 뱃머리를 돌립니다.”

좀 더 정확히 보고하면, 로벨쪽으로 뱃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발냄새 베커 이하 피 맛을 본 울프 용병단이 사납게 웃었다.

“우리랑 싸우겠다고?”

“용기가 아주 가상하군!”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싸우긴 싸우는데, 울프 용병단이 기대한 싸움이 아니었다. 적함의 선수상 좌우로 크고, 무겁고, 뜨거운 것이 등장했다. 이 거리에서 보일 정도면 보통 커다란 게 아니었다.

“대, 대포닷!”

“엎드려!”

로벨이 몸을 던지는 것과 불꽃이 터지는 것이 동시였다. 콰광-!

로벨의 주먹만한 돌덩이가 로벨이 탄 갤리선을 두드렸다. 갑판 일부가 나무파편이 되어 치솟고, 선체가 풍랑을 만난 것처럼 요동쳤다. 용병과 선원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저 미친놈들이!”

“자기편을 쏘다니!”

로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피해를 살폈다. 용병 한 명이 파편에 맞아 피를 흘리고, 선원 한 명이 돛대에 머리를 부딪쳐 까무러쳤다.

“베커! 저 배로 접근시켜!”

“하, 하지만, 이런 큰 배를 몰아 본 적이 없습니다!”

로벨은 아군에게 공격받고 정신 못 차리는 선원들을 우악스럽게 때렸다.

“저 녀석들은 너희를 버렸어! 우리랑 같이 수장시킬 생각이야! 살고 싶으면 우리를 도와!”

선원들은 포격과 폭력에 비명을 질렀다. 로벨이 ‘내가 좀 심했나?’ 반성할 때, 고참 선원이 더듬더듬 말했다.

“우, 우선 타륜을 잡아야...”

“타륜(Steering Wheel)이 뭐야?”

“배에 바퀴(Wheel)가 어디 있어?”

선원들 얼굴에 공포와 절망이 어렸다. ‘이 새끼들, 100% 순종 땅개들이다.’ 로벨은 항해술을 속성으로 배우기보다 항해술을 가진 포로를 굴리기로 마음먹었다. 표정이 마음에 안 드는 고참 선원을 지목해서 바퀴를 조종하라고 시키고 나머지를 노잡이가 있는 곳으로 쫓아냈다.

“저, 저희만으로 싸울 수 없습니다! 돛을 조종할 항해사도 필요하고, 거리와 풍향을 계산할 관제관도...”

“누가 너희보고 싸우래? 어차피 싸우지도 않을 거잖아?”

로벨은 아론다이트로 임시 조타수를 겨냥했다. 조타수는 찔끔해서 눈을 피했다.

“너희가 할 일은 딱 하나야.”

“그게 머, 뭡니까?”

로벨은 칼끝을 적함으로 돌렸다.

“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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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광-!

세 번째 포격이 날아왔다. 앞서 두 번으로 적응이 끝난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갑판에 납작 엎드려서 옛 신에게 기도했다. 총 6발의 포탄으로 메인마스트가 손상되고, 우현의 노가 몇 개 부러졌으며, 선교 한 귀퉁이가 주저앉았다. 그러나 잉그비아 왕국의 장인이 건조한 북해 갤리선은 침몰하지 않고 꿋꿋하게 전진했다.

“으으으으! 안 돼! 미친 짓이야! 난 수영도 못 한다고!”

겁쟁이 데비가 겁을 먹고 바둥거렸다. 외팔이 더치는 화내고 윽박지르다가 결국 자상하게 타일렀다.

“나무는 물에 뜨잖아? 구멍이 나도 나무인데, 그리 쉽게 가라앉겠어?”

“오호?”

“그럴 듯한데?”

주위의 용병들이 일제히 감탄했다. 외팔이 더치답지 않은 현명함이었다. 선원들은 한심하게 쳐다봤지만, 대포가 가깝고 창칼은 더 가까워서 지적하지 않았다.

로벨도 외팔이 더치 말에 안심하고 몸을 일으켰다. 선원도, 노잡이도 죽기 싫어서 죽기 살기로 배를 몰았다. 그 결과 적함과 거리가 50야드로 좁혀졌다. 갑판 위의 적병이 생생하게 보였다.

“재장전하기 전에 붙어야 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데 돛이 찢어지고 노가 망가져서 속도가 나지 않았다. 발냄새 베커가 갑판 위로 올라와 악을 썼다.

“제길! 완전 코앞이잖아? 여기서 포격 받으면 끝장이다!”

겁쟁이 데비가 눈알을 또르륵 굴리며 반박했다.

“배, 배는 나무니까 가라앉지 않...”

“뭔 개소리야! 니 대가리도 돌이지만 돌로 치면 죽잖아!”

말이 안 되는 비유인데 상다수 용병이 희한하게 납득하고 다시 겁을 먹었다.

로벨은 반쯤 풀어헤쳐진 돛을 한번 보고 적함과 거리를 다시 재었다. 이제 30야드로 좁혀졌다. 대포를 장전하는 포수의 얼굴이 보였다. 긴장 탓인지 화염 탓인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뒤로 뻗으며 소리쳤다.

“배를 우측으로 돌려!”

임시 조타수는 순간 갈등했다. 아군이 소리 지르면 닿은 곳에 있었다. 배를 버리고 바다에 뛰어들면 잔인한 용병들에게 복수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로벨이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바이저 안쪽에서 뜨거운 안광이 번쩍였다. 임시 조타수는 혼란에 빠졌다. 이미 적에게 협력했으니 배신자로 낙인 찍혀 수장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 에라이!”

머리가 결정하기 전에 몸이 움직였다. 타륜을 있는 힘껏 오른쪽으로 꺾었다. 타륜에 연결된 동력 로프가 한쪽으로 감기고, 바닷속에 잠긴 키가 빠르게 휘어졌다. 물의 흐름이 빗겨나면서 뱃머리가 오른쪽으로 회전했다. 그와 동시에 네 번째 포격이 시작되었다.

“Fire!”

콰쾅-!

울프 용병단은 재빨리 몸을 낮췄다. 코앞에서 날아온 포탄이라 대단히 위력적이었다. 선교가 완전히 박살나고, 선체가 15도 정도 기울어졌다. 돌조각과 나무파편이 휘몰아쳤다.

이 끔찍한 파괴현장 속에 홀로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외팔이 더치가 얼굴을 감싼 바클러 아래로 겁을 상실한 작자를 불렀다.

“기사 나리?”

로벨은 한 손에 아론다이트, 다른 한 손에 활대를 조종하는 동삭(動索)을 쥐고 서 있었다. 외팔이 더치를 힐끔 보고 웃었다. 바이저 때문에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웃은 것이 분명했다.

“먼저 갈게.”

그리고 아론다이트로 밧줄을 싹둑 잘랐다. 위태위태하게 매달려 있는 삼각돛의 개프가 반대쪽으로 기울어지고, 그 반동으로 로벨의 몸을 하늘로 띄웠다.

“기사 나리가... 하늘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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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프를 이용해 적함으로 넘어가는 것을 해적 이야기에서 흔히 나오는 장면이지만, 현실에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갈고리를 걸어 당기거나 쇠못이 박힌 판자를 놓는 쪽이 안전과 효율에서 훨씬 좋았다. 적어도 하늘을 나는 로벨은 그리 생각했다.

“꺅!”

로벨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설마 이렇게 높이 날아오르지는 몰랐다. 로벨은 착지를 잘못해서 신체 일부가 부러지지 않을까, 바다에 빠져서 꼬로록 가라앉지 않을까 심각하게 걱정했다. 그러나 운이 좋은 건지, 본래 그런 구조인지 개프가 회전하면서 적당한 높이로 내려왔다.

로벨은 기회를 놓지 않고 밧줄을 놓았다. 30야드 거리가 한순간 지워지고, 얼빠진 주드 맥켈렌 남작의 선원 얼굴이 화살처럼 가까워졌다. 로벨은 무릎을 구부려 입을 헤- 벌린 선원 얼굴을 찍고 착지했다. 우당탕! 쿵-!

30야드를 날아온 폴린에 직격당한 선원은 안면이 함몰되어 즉사했다. 그러나 선원을 죽음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시야에 닿는 모든 사람은 하늘을 날아온 기사에게 집중했다.

“어, 어떻게 저렇게...”

“정신 나간 짓을!”

로벨도 정신 나간 짓이라는데 동의했다. 누가 다시 해보라고 권하면 장갑으로 후려칠지도 모른다.

“그래도 보람이 있어.”

로벨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힘을 꽉 주고 몸을 일으켰다. 적함에 혼자 뛰어든 상황이지만, 조금 전 위기에 비하면 내 집에 온 것처럼 아늑하고 평안했다.

“체스로 말하면 나이트가 킹을 잡은 거야.”

“머, 뭐라고?”

“체크메이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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