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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08화 (108/605)

108화. 보트

108화. 보트

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재편해서 로드릭 마을 외곽으로 이동시켰다.

지금쯤이면 주드 맥켈런 남작도 가시성을 점령한 것이 페르젠 백작이 아니라 로벨이란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번과 다를 거야.’

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잔잔히 둘러보았다. 외팔이 더치가 돌아온 풋맨 소대와 애꾸눈 볼포스가 합류한 크로스보우맨 소대가 시끌시끌했다.

어린 집사가 로벨의 생각을 읽고 한 마디 던졌다.

“한 명은 분위기 메이커고, 한 명은 정신적인 멘토니까요.”

“응. 울프 용병단의 중심이야.”

그리고 급료를 따박따박 챙겨주는 어린 집사와 무패의 역사를 증명하는 마녀 키르케까지 주요인물이 모두 모였다. 울프 용병단이 완성되었고, 사기가 하늘을 아프게 했다.

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가로질러 선두로 나왔다. 웃고 떠들던 용병들이 로벨을 보고 숨을 죽였다.

로벨은 모두와 눈을 마주쳤다. 입단한지 얼마 안 된 신입도 있고, 3년 넘게 지낸 고참도 있었다. 그러나 존경 어린 눈빛은 똑같았다.

로벨은 시선을 돌려서 북쪽 숲으로 이어지는 오솔길과 물레방앗간으로 흘러가는 개울과 조금 퍼석퍼석한 흙바닥을 살폈다. 농부들은 비가 안 와서 걱정하지만 용병들은 싸우기 좋은 날이라 좋아했다. 칼이 녹슬거나 갑옷이 해지지 않으니까.

“적은 우리를 무서워해.”

남들보다 키가 큰 외팔이 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정정당당하게 싸우지 않고 거짓말로 수작을 부린 거야. 우리와 싸우면 이길 자신이 없으니까.”

적을 속인 것은 로벨도 마찬가지였지만, 분위기상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속지 않아. 우린 빼앗긴 성을 되찾고,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할 거야.”

로벨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점심 메뉴를 읊듯이 평이했다. 그래서 고무하는 것이 아니라 기정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 이기러 가자.”

120명의 울프 용병단이 일제히 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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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기운차게 행군해서 아만다 성과 마을이 보이는 허허벌판에 도착했다.

불탄 집과 무너진 울타리 너머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보이고, 저 멀리 수평선 위에 두 척의 갤리선이 보였다.

마녀 키르케는 약탈당한 마을을 보고 화를 냈다.

“불을 지르다니! 너무해!”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손잡이를 만지며 위로했다.

“아만다 마을주민의 재산은 어선이야. 집은 금방 다시 지을 수 있어.”

아만다 마을의 가장 큰 재산은 푸른고래 호와 함께 안전한 곳에 있었다. 성을 빼앗기고 마을이 불탔지만, 사람과 배가 무사하니 버틸 수 있었다.

“우리가 집을 짓게 도와주자.”

로벨은 맥켈런 가문의 깃발이 걸린 아만다 성을 바라보았다.

성문 앞에 뾰족한 통나무를 꽃아 바리게이트로 삼고, 성벽 위에 총안이 뚫린 호딩을 설치하고, 성벽이 낮은 곳이나 부실한 곳에 병력을 집중배치 했다. 고작 사흘 만에 허름한 시골성을 요새화했다.

‘정말 대단한 기사야.’

로벨은 철옹성을 어떻게 공략할지 고민했다. 그때 어린 집사가 손가락으로 성문을 가리켰다.

“영주님! 백기에요! 백기가 나와요!”

성문이 열리고, 새하얀 깃발이 총총히 걸어 나왔다.

로벨은 혹시 항복하려는 건가 기대했다. 그러나 백기를 올린 자가 강철을 두른 기사임을 알고 기대를 버렸다.

“주드 맥켈런 남작 같아요.”

“전군 대기!”

로벨은 펄프 대장에게 명령하고 홀로 나갔다. 펄프 대장은 애꾸눈 볼포스를 불렀고, 애꾸눈은 아바레스트를 장전한 채 안대를 만지작거렸다.

로벨 로드릭 남작과 주드 맥켈런 남작. 포비아 왕국의 위대한 두 기사가 수행원 하나 없이 마주 섰다. 성과 들판을 등지고, 수백 명의 병사들 앞에서 마주선 광경이 근사했다. 하지만 가까이서 대화를 엿들으면 그리 멋지지는 않았다.

주드 맥켈런 남작이 비웃듯이 말했다.

“이번에는 ‘진짜’ 로드릭이오?”

로벨은 부끄러움을 애써 누르고 말했다.

“그렇소.”

“얼굴을 보니 그런 것 같군. 허허! 설마 목동 따위에게 갑옷을 입힐 주는 몰랐소. 게다가 페르젠 백작이라니? 본인을 두 번이나 속이다니, 과연 로벨 로드릭이오.”

로벨은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짧게 대꾸했다.

“경은 그리 똑똑하지 않으니까.”

로벨답지 않은 도발이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한두 번 속인 걸로 너무 기고만장하군.”

“세 번이오. 어쩌면 네 번일지도 모르오.”

“뭐요?”

“본인은 호그 맥켈런을 죽이지 않았소.”

로벨은 또박또박 말했다. 눈빛이 흔들리지 않고, 목소리가 평이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였소?”

“응?”

“이런! 또 속을 뻔했군. 소문보다 훨씬 영악하오?”

“그런 것이 아니오.”

“무엇이 아니란 말이오? 이미 조사를 끝냈소. 검은 성의 수많은 병사가 증언했소. 로벨 로드릭이 내 아들을, 사파이어 섬의 차기 주인인 호그 맥켈런을 살해하였노라.”

“경의 아들은 함정에 빠진 것이오. 그리고 함정에 빠트린 자들이 당신은 이용하기 위해...”

“구차한 변명 집어치우시오!”

히이이잉-!

주드 맥켈런 남작이 버럭 소리쳤다. 양쪽 진영에 모두 들릴 크기였다. 로벨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적의 사기가 올라가고, 아군이 웅성거렸다.

“결국 싸워야겠군.”

“몰랐소?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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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주드 맥켈런 남작은 각자 진영으로 돌아가 하루를 그냥 보냈다. 당장 붙을 것처럼 굴었지만, 현실의 벽이 만만치 않았다.

주드 맥켈런 남작군은 가시성에서 포로가 된 병력을 제외하고 135명, 로벨 로드릭 남작군은 봉신들의 병력을 제외해서 122명이었다. 숫자는 엇비슷하지만, 전원이 전문용병으로 구성된 로벨이 우세했다. 하지만 용병도 머리통 깨지면 죽기는 마찬가지라 성벽을 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저 갤리선이 마음에 걸려.”

로벨은 수평선 위에 떠있는 갤리선을 가리켰다. 성을 공격하면 갤리선이 뒤를 노릴 가능성이 높았다.

“절벽성 때와 정반대군요.”

“...응.”

로벨은 입장이 바뀌자 도반 도트넘 백작에게 괜히 미안했다.

마녀 키르케가 어린 집사를 괴롭히며 말했다.

“하지만 큰 차이가 있어요.”

로벨, 펄프 대장, 외팔이 더치와 애꾸눈 볼포스 등이 마녀 키르케를 쳐다보았다. 모두들 마녀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좋아했다.

“무슨 차이?”

“도반 도트넘 백작은 먼 곳에서 온 침략군이었지만, 우린 우리 땅을 지키는 수비군이에요. 저 바다사자는 성을 점령했어도 침략자죠.”

“바다사자가 아니라 북해의 사자...”

“그건 됐고. 구체적으로?”

“저 사람들은 보급 받을 곳이 없어요.”

주드 맥켈런 남작은 볼탄 반도의 귀족이 아니다. 즉, 이 땅에 연줄이 없다. 로벨은 생각이 많아 눈살을 찌푸렸고, 펄프 대장은 생각을 포기하고 실없이 웃었고, 외팔이 더치는 애당초 생각을 하지 않아 멍- 했다.

어린 집사가 자꾸 엉덩이를 찌르는 지팡이를 빼앗으며 소리쳤다.

“이대로 포위하고 기다리자고요? 언제까지요? 겨울이 올 때까지요?”

“그건 안 돼. 남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로벨은 집사와 마녀 사이를 중재하고 회의를 계속 진행했다.

“마을을 약탈한 것도 무기와 식량이 부족해서일 거예요.”

“아만다 마을은 가난한 마을입니다. 더욱이 농사를 짓지 않아 저장한 식량도 많지 않습니다. 고기잡이로 먹고 사니까요. 탈탈 털어봐야 보름치 식량도 안 나올 겁니다.”

“자기네 땅에서 가져온 것도 있잖아?”

“저 작은 배에 두 자릿수 병력이 타고 왔는데 얼마나 되겠냐. 더욱이 그때는 여름이야. 식자재가 쉽게 상하지. 영주님, 길어야 한 달입니다.”

애꾸눈 볼포스가 확신했다.

“보름에서 한 달이라.”

로벨은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뜬금없이 결정했다.

“그럼 갤리선을 공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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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아만다 마을 동쪽으로 철수시켰다.

포위를 완전히 풀지는 않았지만, 기습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리라 긴장감이 상당히 완화되었다. 최고 지휘관이 부재한 갤리선 쪽은 더욱 그러했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은 변화가 없었으나, 셋째 날에 그물을 풀어 고기잡이를 시작했다. 애꾸눈 볼포스의 짐작대로 식량사정이 좋지 않은 듯했다.

넷째 날이 지나고, 다섯째 날이 되자 성으로 물고기를 보내기 시작했다. 여유가 있을 때 조금이라도 식량을 비축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닷새는 성급했다. 하루만 더 끈기를 가졌으면 로벨과 울프 용병단이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좋아. 상륙했어.”

로벨은 무너진 담장 틈새로 나무통을 굴리는 사내들을 보았다. 북해에서 온 선원들이었다.

“지금 칩니까? 지금? 제발 지금이라고 해주십시오!”

닷새 동안 숨소리 한번 크게 못 내고 비스킷과 싸구려 와인으로 버텼다. 로벨도 로벨이지만, 외팔이 더치는 미치기 직전이었다.

“지금.”

“우와아아아!”

외팔이 더치는 닷새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일시에 발산했다. 그을린 판자벽을 부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 멍청이가!”

덕분에 따로 신호를 보낼 필요가 없었다. 폐허가 된 아만다 마을 곳곳에서 로벨과 외팔이 더치를 비롯한 20명의 울프 용병단이 뛰쳐나왔다.

“적이다!”

“저, 저놈들 마을에 숨어 있었어!”

선원들을 애써 잡은 물고기를 팽개치고 성으로, 바다로 도망쳤다. 매정한 성 문지기는 재빨리 성문을 닫았다. 아군에게 버림받은 선원들은 성문을 두드리며 열어 달라 소리쳤다. 쓸모없는 조심성이고, 소용없는 애원이었다. 로벨이 노리는 것은 아만다 성이 아니었다.

“적함은?”

“너무 멀리 있습니다!”

그러나 갤리선 쪽도 쉽지 않았다. 갤리선은 상륙하지 않고 해안 저편에서 쪽배로 선원과 물자를 내렸다. 그나마도 소동을 눈치 채고 뱃머리를 돌리는 중이었다. 로벨은 선원들이 타고 온 보트를 가리켰다.

“저걸로 쫓을 수 있을까?”

“저런 뗏목으로요? 에이, 불가능하죠.”

“좋아. 쫓자.”

“아, 그럴 거면 왜 물어봅니까요!”

로벨은 모래사장에 올라온 보트 중 하나를 골라 탔다. 이를 갈며 쫓아 온 외팔이 더치 등은 보트를 바다로 밀고 재빨리 올라탔다. 한 배에 5명씩 타자 딱 맞았다.

“자! 노를 저어라!”

“나, 나 해본 적 없는데?”

“그런데 왜 거기 앉아! 저리 비켜!”

발냄새 베커가 노를 잡았다. 해양강국 에르나 왕국 출신답게 보트 정도는 조종할 줄 알았다. 외팔이 더치가 바클러를 머리 위로 올리고 소리쳤다.

“이놈들아! 놀지 말고 파비스를 높이 들어!”

외팔이 더치의 감이 맞았다. 꼬리에 불이 붙은 갤리선이 활과 쇠뇌를 장전했다. 그리고 일제사격. 겁쟁이 데비가 자지러지게 비명 지르고, 발냄새 베커가 나 좀 지키라고 소리쳤다. 그래서 잠시 뒤 퍽 무안해졌다. 사람은 고사하고 보트에 닿은 화살도 없었다.

로벨은 바이저를 올리고 부하들을 안심시켰다.

“숙련된 병사들은 성에 있을 거야.”

“그, 그렇군요. 어쩐지 죄다 형편없네...”

“가까이 붙어. 일단 붙기만 하면 이길 수 있어.”

“기사 나리 말씀 들었지? 팍팍 저어!”

“시끄러! 네놈이 무거워서 속도가 안 나니까!”

“나보다 쇳덩이 입은 기사 나리가 더 무거울 텐데...”

거대한 갤리선 2척을 향해 작은 보트 4척이 용감하게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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