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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07화 (107/605)

107화. 속임수

107화. 속임수

로벨은 가시성을 점거했다.

포로를 지하감옥에 가두고, 부상자를 치료하고, 여물통에 처박힌 로드릭 가문 깃발과 바이란 가문 깃발을 찾아 성벽 위에 걸었다. 가시성의 영지민이 깃발을 보고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로벨은 로벨 로드릭 남작군의 승리를 알리고, 징집 및 징발을 일체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영지민은 후자에 만족해서 큰 목소리로 ‘로드릭 만세!’와 ‘바이란 만세!’를 외쳤다. 가시성을 사랑하는 바이란 경이 보았다면 심히 감동했을 것이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징집을 안 하면 수비를 어찌합니까요? 혹시 울프 용병단을 불렀습니까요?”

“아니.”

“그럼 다른 기사 나리들이 지원 옵니까요?”

“아니.”

“...설마 여기 있는 10명으로 성을 수비하라는 것은 아니지요?”

로벨은 허풍쟁이를 돌아보았다.

“내가 시킨 일은?”

“기사 나리가 시킨 일이라면...”

“주드 맥켈런 남작에게 접근한 귀족이 있어?”

“아하! 악마추종자 말이군요? 몇 명 있었습니다요!”

“누구야?”

허풍쟁이는 기억을 더듬는지 이름도 더듬더듬 말했다.

“길리안 모몬트 남작이란 나리하고, 마르틴 퍼그 남작이란 나리입니다.”

“모몬트 남작과 퍼그 남작이라?”

로벨은 두 사람의 이름을 곱씹었다. 프란시스 가문 쪽 기사가 아니라 낯설었다. 노스폴드 시티 행상인을 통해 조사하면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허풍쟁이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말했다.

“제가 한번 알아볼깝쇼?”

“아니. 그 전에 할 일이 있어.”

“제가 말입니까요?”

“너 밖에 못하는 일이야.”

로벨은 별거 아니라는 듯 웃었다. 그러나 허풍쟁이는 안심할 수 없었다. 로벨이 직접 내린 명령 중에 쉬운 일은 없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을 찾아가. 하버트 페르젠 백작이 500명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고 보고해. 널 가시성의 수비병으로 알고 있을 테니 분명 믿을 거야.”

허풍쟁이는 감탄과 의심을 동시에 했다.

“페르젠 백작 말입니까요? 늙은 사자가 믿을까요?”

“가시성은 페르젠 백작의 봉신인 헤일러 남작의 땅이야. 그걸 루카스 자작이 빼앗았고, 내가 다시 빼앗은 거야. 그러니 페르젠 백작이 되찾을 만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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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의 기본은 물자고, 전술의 기본은 속임수다.

전략적으로 더 많은 병사와 더 많은 무기를 가진 쪽이 이기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전술적으로 상식을 뒤집을 수 있었다. 병사와 무기를 속이면 되었다.

‘속을 수밖에 없을 거야.’

속임수에는 두 가지가 존재했다. 진실을 숨기는 것과 거짓을 보이는 것이다. 얼핏 비슷하게 들리지만 큰 차이가 있었다. 로벨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존재하지 않는 500명의 병사를 만들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전방에서 이를 가는 로벨 로드릭 남작과 후방에서 올라오는 페르젠 백작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둘 다 거짓이니까.’

로벨은 나부끼는 로드릭 가문 깃발 아래에서 근엄하게 북동쪽을 노려보았다. 허름한 옷차림에 수행원이 없어도 장엄할 수 있었다. 비록 모두가 동의하지 않아도 말이다.

“기사님? 혼자 뭐하세요?”

마녀 키르케가 성벽 위에서 궁상떠는 로벨을 찾아왔다. 아무것도 없는 휴경지를 향해 중얼중얼하는 모습이 퍽 안쓰러웠다. 오랜 전쟁의 후유증이 아닐까 의심되었다.

로벨은 마녀의 괘씸한 생각을 알지 못하고 미소 지었다.

“부상자는?”

“약 바르고 붕대 감았으니까 잘 먹이고 잘 재우기만 하면 될 거예요.”

“수고했어.”

로벨은 마녀를 칭찬했다. 하지만 마녀의 목적은 칭찬이 아니었다. 톱풀을 잘 말린 지혈제와 소독한 붕대를 꺼냈다.

“기사님도 치료해야죠.”

“나?”

“아닌 척하지 마세요. 옷이 피투성이잖아요.”

로벨은 꼬뜨의 앞자락을 내려다보고 고개 저었다.

“조금 긁힌 거야.”

“조금 긁힌 상처로 죽는 사람 많이 봤어요. 자자, 옷 벗으세요.”

로벨은 마녀 키르케의 손을 피해 화급히 물러났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왜요?

“지, 지저분해.”

“제가요?”

“아니! 내가!”

마녀 키르케의 두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그래도 치료해야 해요. 옷 벗으세요. 어허! 안 잡아먹어요!”

로벨은 뒷걸음치다가 성벽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마녀 키르케는 사냥감을 코너에 몰아넣고 음험하게 웃었다. 성(性)의 고정관념이 바뀐 것 같은데, 진실의 바닥이 깊어 마냥 웃을 수 없었다. 로벨은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기절시킬까? 아니면 뛰어내릴까?’

어느 쪽이든 후환이 무서웠다. 그러나 옛 신은 로벨을 버리지 않았다.

“기사 나리, 여기 계셨군요. 이것 좀 보셔야... 근데 무슨 일 있습니까?”

발가락 슈미츠가 성벽을 올라왔다. 그리고 겁먹은 로벨과 낄낄거리는 마녀를 번갈아 보고 심히 당황했다. 로벨은 위대한 기사답게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 그걸 봐야지? 깜박했어!”

“예?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뭐해? 빨리 가자!”

그리고 치밀하게 마녀의 손에 들린 약초와 붕대를 빼앗았다.

“내가 알아서 할게! 가져다줘서 고마워!”

“앗! 안 돼요! 이럼 안 되는데!”

로벨은 발가락 슈미츠를 닦달해서 도망치듯 성벽을 내려갔다. 마녀 키르케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발을 동동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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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위기에서 벗어나 한숨 돌렸다. 성을 점령하는 것보다 마녀 키르케의 의심을 피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발가락 슈미츠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기사 나리?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아.”

로벨은 허리를 쭉 펴고 옷매를 다듬었다. 본의 아니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

“아까 뭐라고 했어?”

“성 안을 정리하다가 이런 것을 찾았습니다.”

발가락 슈미츠가 종이뭉치를 내밀었다. 글자를 몰라도 그림은 알았다. 프란시스 가문의 장미 인장이 찍혀있었다. 로벨은 옹색한 용병을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어디를 어떻게 정리했기에?”

“커험! 사실 돈 될 만한 것을 찾다가... 죄송합니다.”

“주인이 있는 물건이야. 손대지 마.”

로벨은 발가락 슈미츠에게 경고하고 첫 번째 편지를 확인했다. 켈트 경과 바이란 경이 에릭 공작의 가신이란 것은 새삼스러운 비밀이 아니었다. 시절이 어수선하니 편지를 주고받을 만했다.

“응?”

로벨은 아무 생각 없이 편지를 뒤적이다가 위화감을 받았다. 똑같은 장미인데, 크기와 모양이 미묘하게 달랐다. 발신자가 다른 편지였다. 볼탄 반도에서 장미 인장을 쓰는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다.

“류트 공자인가?”

에릭 공작의 기사이자 로벨의 봉신인 바이란 경이 류트 공자와 편지를 주고받은 이유를 추리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중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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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바쁜 시간을 쪼개 바이란 경의 비밀편지를 살폈다. 그리고 섣부른 의심을 반성했다.

바이란 경이 류트 공자와 편지를 주고받은 것은 맞지만, 배신이나 반역 같은 위험한 단어를 붙일 내용은 없었다. 오래된 친구 사이에서 오갈 만한 평범한 편지였다. 물론, 로벨이 모르는 암호나 암시가 있을지도 모르니 의심을 완전히 접지는 않았다.

바이란 경은 프란시스 공작가에 오랫동안 봉사하여 두 형제 모두와 친분이 있었다. 대의를 위해, 가문을 위해 에릭 공작편에 섰지만 15년의 우정을 버리지 못했다. 옛 친구를 걱정하고 위로했다.

‘내게 충성한 것도 그 때문인가?’

로벨이 봉토를 하사해서 충성한다는 것은 핑계였다. 로벨에게 충성하면서 우정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을 덜 수 있었으리라.

‘이 기사도 복잡한 사정이 있네.’

로벨은 편지지를 원래대로 돌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프란시스 가문의 기사 대부분이 류트 공자와 친분이 있지.’

후계자 전쟁 때 직접적으로 대립한 페르젠 백작이나 루카스 자작을 제외하면, 류트 공자에게 적대적인 귀족보다 우호적인 귀족이 더 많았다. 에릭 공작의 정통성이 무너지고, 지금껏 마땅한 대안이 안 나온 상황에서 더욱 그러했다. 친(親) 에릭 공작 파벌인 로벨과 야심만만한 페르젠 백작이 눈 시퍼렇게 뜨고 있어서 잠잠할 뿐, 로벨의 힘이 약해지면 류트 공자를 옹립하자는 의견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바꿔 말해, 류트 공자와 악마추종자가 로벨을 얼마나 눈엣가시로 여기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믿을 수 있는 기사가 없어.’

로벨은 볼탄 반도의 기사를 모두 의심했다. 적이 분명한 바이란 경에게 편지를 보낼 정도면, 어지간한 기사에게는 전부 손을 뻗쳤다고 봐야 했다. 한시라도 빨리 에릭 공작의 정통성을 회복해야 했다.

로벨이 편지 몇 장으로 볼탄 반도의 정세를 그리는 사이, 눈앞에 전쟁도 바쁘게 돌아갔다. 짝귀가 로벨의 임시 집무실을 찾아와 큰소리로 보고했다.

“적 대장이 바닷가 성으로 도망쳤습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이 아만다 성으로 후퇴했다고?”

“옙! 그렇습니다!”

“그래...? 여기로 안 오고 아만다 성으로 철수했단 말이지...?”

로벨이 중얼거리자 하나둘 표정이 밝아졌다. 마녀 키르케는 깔깔 웃었고, 발가락 슈미츠는 주먹을 휘둘렀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수비병력이 고작 10명뿐인 성을 포기했다.

“이렇게 쉽게 속다니! 으하핫! 전쟁 영웅이니 북해의 사자니 해도 별거 아닌데요?”

“날 얕잡아 본 거야.”

로벨은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면 너무 높이 평가했거나.”

로벨이 전쟁 전에 첩자를 심고 거짓 정보를 흘릴 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은 통하지 않을 거야. 맥켈런 경은 바보가 아니니까.”

로벨은 오두방정 떠는 부하들을 진정시켰다.

“이제 아만다 성을 되찾을 차례야.”

발가락 슈미츠는 옛 신의 신앙에 버금가는 믿음을 보냈다.

“물론 그 방법도 생각해두셨겠지요? 전 준비되었습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로벨은 곤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혀 아닌데?”

“...예?”

“좋은 아이디어 없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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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가시성을 바이란 경에게 돌려주고 소집령을 해제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이 어디로 뛸지 모르니 각자의 성을 방어하는 것이 좋았다. 성을 잃은 머를 브릭 경만 로벨 곁에 남았다.

“홀로 사자를 사냥하실 겁니까?”

로벨은 목동이 반납한 컴포지트 아머를 재조립하며 말했다.

“혼자가 아니오.”

머를 브릭 경은 로벨 이외에 기사가 누가 있는지 생각했다. 그리고 로벨의 신뢰에 감격했다.

“저, 저를 그리 높이 평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를...”

로벨은 무슨 멍멍이 소리냐는 듯 눈을 흘겼다. 때맞춰 아야가 컹컹 짖었다. 머를 브릭 경은 헛기침하고 다시 질문했다.

“제가 아니면 누구입니까?”

로벨은 조립된 뱀브레이스를 팔뚝에 대보고 말했다.

“기사만 싸울 줄 아는 것이 아니오.”

머를 브릭 경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주군께서 용병들을 아끼는 것은 아오나, 그것들은 명예도, 충성심도 없습니다.”

“기사 중에도 명예가 없는 자가 있듯이 용병 중에도 명예로운 자가 있소.”

“그게 누굽니까?”

로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버팅거 시티로 떠난 어린 집사 일행이 돌아왔다.

“영주님! 와! 와! 정말 보고 싶었어요!”

“컹! 컹!”

“우리 식충이들도 보고 싶었어! 으헤헷! 잘 지냈어? 야! 핥지마!”

어린 집사가 돌아오자 로드릭 성이 떠들썩해졌다. 로벨은 모처럼 소리 내어 웃었고, 아야와 이야카는 꼬리를 풍차처럼 돌리며 방방 뛰었다. 마녀 키르케는 뒷짐 지고 어린 집사 주위를 기웃거렸다.

“저는요? 저도 보고 싶었어요?”

“...누구세요?”

“이이잇! 너무해요!”

애꾸눈 볼포스 이하 울프 용병단의 핵심 멤버들은 발가락 슈미츠를 통해 그동안의 일을 전해 들었다. 악마추총자를 욕하고 주드 맥켈런 남작을 비난하기에 앞서, 로벨이 말한 ‘명예로운 용병’이 자신이라며 싸움질해서 로벨로 하여금 기어이 한숨짓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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