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탈환
106화. 탈환
로벨은 눈알이 뒤집힌 용병 정수리에서 흐룬팅을 회수했다. 가장 단단한 머리뼈에 꽂혔는데도 부드럽게 회수되었다. 피가 3인치 정도 불룩 솟았다가 뇌수와 함께 땅바닥에 떨어졌다. 허풍쟁이 제이콥과 발가락 슈미츠는 두 팔을 번쩍 들고 항의했다.
“우악! 기사 나리! 다짜고짜 무슨 짓입니까요!”
“무슨 짓?”
“아, 아니, 제 말은 그러니까...”
로벨은 변명을 듣지 않았다.
“시체 숨겨. 그리고 발가락 슈미츠는 여기 남아.”
“저, 저요?”
“퇴로를 확보해야지.”
로벨은 흐룬팅을 옆으로 휘둘렀다. 풀러(Fuller)에 고인 피가 방수포에 고인 빗물처럼 깔끔하게 떨어졌다. 강도도 그렇고, 색깔도 그렇고 보통 철이 아니었다.
‘나중에 한번 알아봐야지.’
지금은 가시성을 탈환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곳 수비상태는?”
허풍쟁이 제이콥과 발가락 슈미츠는 시체의 팔다리를 잡고 보고했다.
“저희 포함해서 용병 15명, 자칭 해적출신 징집병 14명입니다.”
“그럼 25명 남았군.”
“...26명입니다.”
로벨은 손가락을 꼽아보고 헛기침했다.
“어쨌든 한꺼번에 덤비면 골치 아파. 분산시킬 수 있을까?”
그랜드 챔피언이라 해도 갑옷과 말이 없으면 일개 칼잡이였다. 두어 명은 상대할 자신이 있지만, 넷이 덤비면 위험하고 다섯이 덤비면 도망쳐야 했다. 발가락 슈미츠가 시체를 수풀에 던져놓고 말했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저희 둘이서 하기는 좀 어려웠는데, 기사 나리가 있으니까 해볼 만합니다.”
“뭐가?”
발가락 슈미츠는 코밑을 쓱- 문지르고 말했다.
“포로들을 풀어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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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불확실한 기억보다 허풍쟁이 제이콥를 믿었다. 허풍쟁이는 로벨과 마녀 키르케를 끌고 가시성의 감옥으로 안내했다.
가시성 수비병력은 대부분 아성에 머물고 있어서 안마당을 돌아다니는 병사는 많지 않았다. 물론, 아주 없지도 않았다.
‘쉿! 이쪽으로!’
허풍쟁이는 로벨과 마녀를 끌어당겨 건초창고에 숨겼다. 건초더미에 방뇨하는 개념 부족한 전직 해적이 있었다. 로벨이 버릇을 영영 고쳐주기 위해 흐룬팅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그러나 허풍쟁이가 제지했다.
‘제가 쫓아내겠습니다요.’
그리고 창고 밖으로 뛰쳐나가 버럭! 소리쳤다.
“이 더러운 해적놈아! 내가 아무데나 오줌 싸면 거시기를 잘라버린다고 했냐, 안 했냐!”
“우워억! 깜작아! 왜 거기서 튀어나와!”
“그건 알 거 없고! 너 이 자식 잘 걸렸다! 이리와! 그 쥐좆만한 거 잘라다 목에 걸어줄 테니까. 어어? 어디가! 이리오라고!”
“이, 이 미친 용병놈이! 그거 내려놔! 안 내려놔? 이런 망할! 어디서 저런 또라이가...!”
허풍쟁이 도끼를 주워들고 달려들 시늉하자 전직 해적은 바지를 추스르지도 못하고 죽어라 도망쳤다. 허풍쟁이는 껄껄 웃고 도끼를 버렸다.
“이제 됐습니다요.”
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허풍쟁이의 연기력을 극찬한 후 걸음을 서둘렀다. 감옥은 건초창고 바로 뒤에 있었다.
가시성의 감옥은 독특한 구조였다. 오랜 전통(?)을 따라 지하에 자리한 것은 같지만, 보통 감옥과 달리 쇠창살이 없었다.
허풍쟁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바닥문을 끌어당겼다. 쇠사슬과 철봉이 연결된 문이 90도로 들려서 고정되었다. 썩은 내와 곰팡이 냄새가 물씬 올라왔다. 로벨은 인상을 찌푸렸고, 마녀 키르케는 기침했다.
“여기가 감옥인가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소리와 암영으로 가늠하건데 10피트 정도의 지하구덩이였다.
“어떤 의미로는 완벽한 감옥이야.”
사방이 벽이고, 출구는 머리 위 천장뿐이라 외부에서 사다리를 내려주기 전에는 탈옥이 불가능한 구조였다. 그 때문인지 간수도 없었다.
로벨은 벽에 걸린 횃불을 빼내 마녀에게 내밀었다. 마녀는 주문을 외워 불을 붙였다. 마녀와 함께 다니면 부싯돌이나 돋보기가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은 여기 있어.”
로벨은 줄사다리를 잡고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로 내려오자 악취가 더욱 심해졌다. 화장실이 따로 없는지 감옥 구석에 오물이 쌓여 있고, 그 옆에 백골이 된 시체가 굴러다녔다. 죽은 사람 앞에서 엉덩이를 까야하니 볼일 보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사람을 미치게 하려는 곳인가?’
그러나 강인한 가시성의 영지민은 미치지 않았다.
“누구요?”
어둠이 고인 곳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로벨은 흐룬팅을 뒤로 당기고 횃불을 앞으로 내밀었다. 해를 못 봐 궹한 눈들이 나타났다.
“로드릭 가문의 당주 로벨 로드릭이다.”
“로드릭이면...”
“영주님의 영주님?”
눈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소리를 내었다. 그중 상황판단이 빠른 한 쌍이 아래로 푹 꺼졌다.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귀하신 분을 뵙습니다.”
한 사람이 머리를 조아리자 다른 사람들도 따라 했다. 로벨은 흐룬팅을 칼집에 꽂아 넣고-등에 있어서 쉽지 않았다- 가장 먼저 엎드린 남자에게 물었다.
“누가 대표야?”
“저, 접니다. 가시성 푸줏간 주인 노이입니다. 그냥 짝귀라고 불러주십시오.”
“짝귀?”
로벨은 횃불을 아래로 내렸다. 별명대로 한쪽 귀가 뭉개져 있었다.
“가시성의 수비를 맡은 자로군.”
“그, 그렇습니다. 성을 지키지 못한 죄를 물으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그 죄는 바이란 경이 물을 거야. 화가 많이 났더라.”
짝귀의 한쪽 귀가 꿈틀거렸다. 로벨은 감옥 안에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총 11명인데, 3명은 몸 상태가 안 좋은지 끙끙거릴 뿐 일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성을 되찾고, 맥켈런 남작에게 한 방 먹이면 용서받을 수 있을 거야. 어때? 협력하겠어?”
“성을 되찾는다고요?”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왔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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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내보내고 부상자들은 그냥 두었다. 부상자들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저도 싸울 수 있습니다! 제발 보내주십시오!”
로벨은 오해를 풀어주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여기가 가장 안전해. 성을 되찾고 꺼내줄게. 버리는 거 아니야.”
로벨은 부상자를 안심시키고 감옥을 빠져나왔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아성쪽을 경계하고, 마녀 키르케가 무기를 모아왔다. 쇠스랑, 쇠지레, 소형 낫 등등이었다. 조잡해도 빈손보다는 나을 것이다. 가시성의 원조 병사들은 각자 마음에 드는 것을 챙겼다.
“나하고 허풍쟁이가 앞에 설 거야. 너희는 뒤따라오면서 쓰러진 적을 죽이고 무기를 빼앗아. 절대 흩어지지 마. 뭉쳐야 살아.”
로벨은 농민병에게 전술을 가르쳤다. 전쟁을 생업으로 삼은 용병보단 못하지만, 수차례 전투로 단련된 병사들이었다. 용기를 내었다.
로벨은 결의에 찬 표정들을 보고 돌아섰다. 주드 맥켈런 남작이 협상자리에 묶여있는 동안 가시성을 탈환해야 한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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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쾅쾅! 쾅!
“야! 문 열어! 문 열라고! 왜 잠그고 지랄이야!”
허풍쟁이 제이콥이 아성의 성문을 두드렸다. 목청껏 소리 지르며 긴급함을 가장했다. 성 안에서 짜증이 터져 나왔다.
“이 미친놈아! 그냥 들어와!”
“문 열라니까!”
“문 안 잠겼다고!”
“안 열리잖아!”
성 안팎에서 실랑이가 오갔다. 이런 싸움은 목소리 큰 쪽이 이기는 법이다. 결국 성 안의 병사가 오만가지 욕을 하며 다가왔다.
“그 나이 처먹고 문도 못 열면... 응?”
로벨은 문틈으로 흐룬팅을 찔러 넣었다. 기름을 잔뜩 먹인 가죽갑옷을 종이처럼 찢고, 갈비뼈를 두 개 부러트리고, 허파에 앞뒤로 구멍을 낸 후 반대쪽으로 빠져나갔다. 병사는 드르륵- 소리 내며 열리는 성문 사이로 사늘한 표정들을 보았다.
“치, 침입자가...”
“아, 덱스, 너였냐? 미안하다.”
허풍쟁이가 로벨 뒤에서 머리를 내밀고 사과했다. 보름 넘게 한솥밥 먹은 사이라 미안함이 있었다.
로벨은 덱스라는 용병을 발로 밀어 흐룬팅을 뽑았다. 덱스가 가진 군용 클리버는 짝귀 손에 들어갔다.
“저것들은 뭐야?”
“적인가!”
로벨은 쓰러지는 덱스 뒤로 주드 맥켈런 남작군을 보았다. 황당하게도, 메인 홀 한가운데 모닥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고 있었다. 로벨이 혹시나 해서 물었다.
“여긴 주방이 없어?”
“당연히 있습니... 저놈들이?”
짝귀의 눈이 훼까닥 뒤집혔다. 가시성을 내 집처럼 아껴서가 아니라, 가시성 주인이 바닥공사를 시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한편, 주드 맥켈런 남작군도 짝귀만큼이나 눈이 돌아갔다. 성 안에 적이 들어와 전우를 죽였다.
“여기 어떻게 들어왔지?”
“로드릭 가문 놈들인가!”
“몇 놈 안 돼! 쳐라!”
로벨은 흐룬팅을 양손으로 잡고 자세를 낮췄다. 다수와 다수가 싸울 때는 기세가 중요했다. 조금 과격할 필요가 있었다.
“죽어랏!”
“하앗!”
로벨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숏소드를 향해 짧게 끊어 쳤다. 흐룬팅의 날카로움과 단단함을 살린 무기 파괴술이었다. 칼날이 깡! 소리 내며 부러져서 천장으로 날아갔다.
로벨은 칼이 어디 떨어지는지 확인하지 않고 빈손이 된 적병의 어깨를 내리쳤다. 칼날이 쇄골을 자르고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피가 부러진 칼날을 쫓아 솟구쳤다.
로벨은 흐룬팅을 뽑지 않고 몸으로 시체를 밀었다. 어떤 병사는 얼결에 시체에 칼을 꽂았고, 어떤 병사는 시체를 피해 옆으로 물러났다.
“너, 넌 제이콥!”
“오냐! 거시기 대신 다른 것을 잘라가마.”
허풍쟁이는 전직 해적을 앞서 죽은 덱스란 친구와 달리 대했다. 그동안 쌓인 게 많은 모양이다.
쇠와 쇠가 부딪쳤다. 그러나 쇳소리는 비명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로벨은 시체에서 흐룬팅을 뽑으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로벨이 만든 공간으로 짝귀와 짝귀의 부하들이 밀어닥쳤다.
22명 대 10명의 싸움이지만, 10명이 기세를 타고 밀어붙였다. 로벨은 짝귀 패거리 속에서 적절할 때, 적당한 곳으로 흐룬팅을 찔러 넣었다. 우악스럽게 휘둘리는 병장기 사이로 급소를 쏙쏙 찔렀다.
“속이고! 때리고! 가두고! 욕하고! 굶기고!”
짝귀가 클리버를 마구 휘둘렀다. 칼바람이 일어날 정도로 강렬했다. 정통파 기사인 바이란 경이 인정한 실력이었다.
“이 배신자가!”
“아냐! 난 처음부터 이쪽 편이야!”
“이잇! 닥쳐라!”
허풍쟁이가 해적 출신을 때려눕히고 변명했다. 진실을 말하니까 상대가 화를 냈다.
로벨은 두 사람이 잘 버티자 안심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했다. 주드 맥켈론 남작군은 더 많은 숫자와 더 좋은 무장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밀려났다.
“네가 적장이냐!”
적에게도 날카로운 눈과 재빠른 손을 가진 자가 있었다. 로벨을 노리고 롱 스피어를 찔렀다. 갑옷이 있으면 그냥 맞아도 상관없는 공격이지만, 지금은 좀 위험했다. 로벨은 몸을 옆으로 틀어 피했다. 그러나 좁은 공간 탓에 수월하지 못했다. 창날이 가슴을 베었다.
“큭!”
로벨은 왼손으로 창대를 잡아 끌어당겼다. 두 자릿수의 바위를 깨트리며 단련한 기사의 완력이었다. 삐쩍 마른 평민 출신 용병은 ‘어? 어어?’ 하며 두어 걸음 끌려왔다. 흐룬팅의 간격 안이었다. 퍽-!
로벨은 귀한 몸에 상처 낸 용병을 쓰러트리고, 롱 스피어의 창대를 잘라서 거꾸로 잡았다.
주드 맥켈런 남작군은 로벨의 기세에 밀려서 홀 구석까지 쫓겨났다. 전황은 양쪽 다 좋지 않았다. 멀쩡한 사람보다 피를 흘리는 사람이 더 많았다. 죽은 사람도 열이 넘었다. 그러나 승기는 로벨에게 있었다.
로벨은 부러진 창을 어깨 뒤로 당겼다가 힘껏 집어던졌다. 바람과 닻을 이미지한 깃발, 주드 맥켈런 남작의 깃발에 꽂혔다.
“성 밖에는 울프 용병단이 대기 중이다! 항복해라!”
성 안의 병사도 감당하기 힘든 주드 맥켈런 남작군은 머리 위에 꽂힌 창을 올려다보고 하나둘 무기를 버렸다.
로벨은 흡족하게 웃었다. 로벨의 기백에 말린 탓도 있지만, 성 밖에 대기 중인 울프 용병단이 몇 명인지 말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좋아! 가시성을 탈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