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05화 (105/605)

105화. 첫걸음

105화. 첫걸음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로드릭 성으로 돌아왔다. 음울하고 음침한 복귀였다.

로벨은 단 하루 만에 영지의 3분지 1을 잃었다. 무적무패의 명성 또한 금이 갔다. 귀족과 행상인의 발길도 끊겼다. 전쟁 때문에 몸을 사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로벨에게 실망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로벨 로드릭의 깃발이 신용을 잃었다.

로벨은 어린 집사 방에 꼭꼭 숨겨진 금고를 찾았다.

“역시 집사밖에 없어.”

로벨은 차곡차곡 쌓인 금화주머니를 보고 웃었다. 주머니 하나당 250페닝. 총 20개 주머니로 5,000페닝이었다.

‘조금 모자란데...’

로벨은 어린 집사 침대에 걸터앉아 고심했다.

1시간 전, 브릭 가문의 늙은 당주가 찾아와 머리를 조아렸다. 주드 맥켈런 경이 머를 브릭 경의 몸값으로 7,500을 요구했는데, 가문의 재산을 통틀어도 2,000페닝 뿐이니, 모자란 몸값을 빌려달라는 간청이었다.

로벨은 흥쾌히 내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자신의 용돈 주머니와 어린 집사의 비밀금고를 털었는데, 150페닝이 모자랐다.

영지 운영자금 대부분이 버팅거 시티 공장에 투입된 상태라, 가을걷이가 끝날 때까지 수입이 없었다.

‘펄프 대장한테 빌릴까?’

로벨은 갈등하다가 그만뒀다. 아무리 친해도 고용주와 고용인 관계였다. 관계를 역전시킬 수 없었다.

‘서 바이란은 성을 잃었고, 서 켈트는 아직까지 충성하지 않는데...’

150페닝, 고작 150페닝이 나올 곳이 없었다. 결국 송아지를 두어 마리 팔기로 결정했다. 어린 집사가 알면 노발대발하겠지만, 소보다 기사가 중하니 어쩔 수 없었다.

“기사님? 여기 계신가요?”

마녀 키르케가 문틈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로벨은 돈주머니를 챙겨서 일어났다. 10페닝짜리 금화가 500개나 되다 보니 블랙잭(blackjack: 가죽주머니에 모래나 납을 채워 넣은 둔기)으로 써도 될 정도였다.

“여기 계셨군요. 에구구. 다행이네요.”

“응?”

“전쟁에서 진 기사는 우울증, 무기력증, 대인기피증, 두통, 복통, 소화불량 등등에 시달린다고 하더라고요. 심지어 책임감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도...”

“...어느 책에서 그래?”

“장미의 기사와 호수의 아가씨요.”

제목을 보아 전문서적일 리 없고, 기사도 소설이거나 로맨스 소설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 괜찮아요?”

마녀 키르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화불량 어쩌고는 웃음을 주려고 한 농담이지만, 그래도 진심이 담겨 있었다. 로벨은 팔짱을 끼고 턱을 긁적였다.

“사실 안 괜찮아.”

첫 패배의 충격이 작지는 않았다. 악마추종자의 농간으로 시작된 전쟁이라 억울하기까지 했다.

“페이스에 끌려가고 있어.”

“페이스요?”

“주드 맥켈런 남작의 의도대로 움직이잖아. 이래서는 안 돼.”

로벨은 지난 승리를 되새겼다.

“조지 도트넘 자작과 싸울 때는 연기를 피워서 승리했어. 팔콘 요새에서 싸울 때는 배후를 공격해서 승리했고, 모건 아만다 남작과 싸울 때는 아만다 성을 역습해서 승리했어.”

“뱀파이어 군주와 싸울 때는 덩굴성을 점령해서 이겼죠!”

“요약하면 적이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해야 이길 수 있어.”

로벨은 북해의 사자를 깜짝 놀라게 할 방법을 고심했다. 그리고 한참 뒤에 멀뚱멀뚱 서 있는 마녀 키르케를 보고 물었다.

“왜? 할 말이 있어?”

“예! 기사님들이 홀에서 기다려요!”

로벨은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다음에는 그것부터 말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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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 경과 바이란 경이 격렬하게 논쟁했다.

“공격은 칼 한 자루로 충분하지만, 방어는 전신갑옷이 있어야 하는 법이오! 적의 숫자는 200명이 채 안 되오! 용병단과 징집병을 총동원해서 빼앗긴 성을 공격해야 하오!”

“그럼 주군의 성까지 잃겠지.”

“적장을 과대평가하지 마시오! 그자가 무슨 수로 두 성을 지키면서 주군의 성까지 노린다 말이오?”

“해안방어가 뚫릴지도 몰랐고 가시성을 빼앗길 줄도 몰랐소. 본인이 과대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경이 과소평가하는 것 아니오?”

켈트 경과 바이란 경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의외인 것은 성질 급한 켈트 경이 신중론을, 소심한 바이란 경이 진격론을 펼친다는 점이다. 성을 잃은 기사의 조급함이 엿보였다.

“우리도 본거지를 노리면 어떻소?”

“메그람 섬을? 불가능하오. 북해까지 보낼 병력이 어디 있소. 그리고 배도 없소이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그럼 경의 생각을 말해보시오!”

그냥 내버려 두면 멱살잡이를 할지도 모르겠다. 로벨은 적당한 타이밍에 허리를 끊었다.

“그만하시오. 경들의 의견은 충분히 알았소.”

로벨은 작전을 정리했다.

“우리가 공격할 곳은 세 곳이오.”

“세 곳? 두 곳이 아닙니까?”

“주군도 사파이어 섬을 생각하시는 겁니까?”

로벨은 말로 설명하기 조금 버거워서 로드릭 령 지도를 펼치고 금화 3개를 차례로 놓았다.

“적에 빼앗긴 아만다 성과 가시성, 그리고 적이 타고 온 2척의 갤리선이오.”

켈트 경과 바이란 경은 서로를 보았다. 고만고만한 둘이서 아웅다웅해봐야 로벨 한 사람에 미치지 못했다. 로벨은 지도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세 곳 모두 맥켈런 남작의 수비범위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오. 어느 곳 하나 쉽지 않을 거요.”

“그럼 이대로 가시성을 내줄 겁니까?”

“그런 뜻이 아니오. 적이 모르는 것을 생각해보란 의미요.”

켈트 경과 바이란 경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하고 주군에게 떠넘겼다. 로벨 역시 두 기사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푸른 고래 호? 아니야. 그 정도는 조사했을 거야. 그럼 2척의 갤리선도 방어준비가 되어 있겠지. 허풍쟁이와 발가락은... 아만다 성에서 보이지 않았으니, 십중팔구 가시성에 배치되었겠지.’

“아?”

로벨은 맥켈런 남작이 모르는 것을 하나 찾았다. 정확히는 주드 맥켈런 남작군 전부가 모르는 것이었다.

“잘 하면... 잘 하면 가능할 거야.”

“마로드?”

“조금 치사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어.”

로벨은 소리 없이 웃었다. 평소에도 저리 웃지만, 오늘따라 왠지 음흉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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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펄프 대장을 보내 로드릭 마을의 목동을 조용히 불렀다. 목동은 무서운 용병두목과 지엄한 영주님을 앞에 두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 땀을 흘렸다.

“영주님, 시키실 일이 있으면 그냥...”

“똑바로 서.”

목동은 재빨리 정자세를 취했다. 로벨은 목동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머리, 어깨, 팔다리 등을 흘겨보았다. 마시장에서 우마를 살피는 느낌이었다.

“어때?”

“예?”

목동이 얼결에 대답했다. 하지만 목동이 아니라 펄프 대장에게 물은 말이다.

“키가 좀 작지 않습니까?”

로벨은 목동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목동은 영주님의 고귀한 체취에 잠깐 의식을 잃었다. 한창때 나이에 외로운 목초지에서 홀로 지내다 보니 본능이 먼저 반응했다.

‘아, 아앗! 안 돼! 정신 차려! 선(?)을 넘지 마!’

목동은 긴장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급히 심호흡했다. 그 사이 로벨은 목동과 키를 비교했다.

“주먹 하나 반 정도?”

“그 정도면 100피트 밖에서도 알아봅니다.”

“말을 타니까 괜찮지 않을까?”

“갑옷이 맞겠습니까?”

목동은 ‘말을 타니까’ 부분부터 대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저어... 제가 감히 끼어들어도 되는지 모르지만... 저와 관련된 이야기 같아서... 말을 타다니요?”

로벨과 펄프 대장은 동시에 목동을 돌아보았다. 목동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너, 목동이니까 말 탈 줄 알지?”

“아, 아뇨! 말이라니요! 어릴 때 소를 타고 논 적은 있지만...!”

“소나 말이나 비슷해. 일단 합격이야.”

“합격이요?”

로벨은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고민했다. 다행히 어려운 일을 처리해 줄 충복이 있었다. 펄프 대장이 손가락을 세 개 펼치고 말했다.

“몇 가지 조건으로 사람을 찾았다. 영주님과 나이가 비슷할 것, 영주님과 체격이 비슷할 것, 그리고 말을 탈 줄 알 것. 마지막이 가장 중요하다.”

“예... 예?”

“아직도 감이 안 잡히나? 넌 영주님 대행을 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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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주드 맥켈런 경을 본 적이 없었다. 바꿔 말해 주드 맥켈런 경도 로벨을 본 적이 없었다. 적을 속일 수 있는 유일한 허점이었다.

“어퍼 뱀브레이스를 한 단 줄이고, 토셋(Tasset: 허벅지보호대)도 몇 개 뺐어. 대충 맞을 거야.”

로벨은 아밍 더블릿의 허리끈의 꽉 조여서 목동 몸에 맞추고 컴포지트 아머를 하나하나 부착했다. 목동은 기사의 갑옷을 입는 것도, 기사의 시중을 받는 것도 처음이라 돌처럼 굳어 버렸다.

“어려울 것 없어. 필요한 말은 켈트 경과 펄프 대장이 다 할 거니까. 넌 맥켈런 남작을 노려보기만 하면 돼.”

“노, 노려보라니요? 제가요? 기사님을요?”

“자신감을 가져. 울프 용병단이 지켜 줄 거야.”

로벨은 아멧을 씌우고 이마를 탕탕 두드렸다. 목동은 바이저가 내려와 시야를 가리자 깜짝 놀라 허우적거렸다. 켈트 경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얼빠진 놈이 해낼 수 있겠습니까?”

“보기보다 똘똘한 친구야.”

로벨은 목동의 바이저를 올려 고정하고 활짝 웃어주었다.

“아참, 이거 가지고 가. 적들 중에 악마추종자가 있다면 이 칼을 확인할 거야.”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풀어 목동 허리에 메어주었다. 목동은 묵직한 롱소드 무게에 덜컥 겁을 먹었다.

“제가 기사님의 칼을 차도...”

“지금 넌 소몰이꾼이 아니라 당당한 기사야. 정복왕 샘 포클을 보필한 자랑스러운 로드릭 가문의 기사라고.”

“제가 기사...”

로벨은 목동의 어깨를 두드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마녀 키르케가 넝마를 주워와 만든 꼬뜨를 입고 후드를 목에 감았다. 얼굴에 재를 바르고 구부러진 지팡이를 쥐자 영락없는 떠돌이 순례자였다.

“옷이 날개란 말은 역으로도 적용이 가능하군요.”

“뭐야?”

로벨은 못생겨졌다는 말에 툴툴거리고 흐룬팅을 등에 메었다. 칼날 길이가 짧아 감쪽같이 숨길 수 있었다.

켈트 경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명색이 기사인데, 이런 짓까지 해야 하는지, 원...”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

“그런 것 같은데요?”

로벨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켈트 경을 노려보았다. 켈트 경은 찔끔해서 로벨의 작전에 동참했다. 빼앗긴 성을 되찾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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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릭 성과 아만다 성의 중간지점인 까마귀 고개에서 포로석방 겸 정전협상이 진행되었다. 여기서 ‘협상’은 얼굴을 마주하기 위한 구실이고 핑계였다. 성을 잃은 로벨도, 장남을 잃은 주드 맥켈런 경도 협상 따위를 생각하지 않았다. 칼부림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볼프 사트로 후작을 꺾었다기에 내심 기대했소만, 지금 보니 그저 요행이었던 모양이오?”

“콧구멍보다 작은 섬에서 고기잡이나 하니 주군의 업적을 모를 수밖에. 하핫!”

“업적? 비무장한 기사 종자를 죽인 것 말고 말이오?”

“억지 부리지 마시오! 경의 아들이 주제를 모르고 먼저 공격했소! 공명심에 눈이 멀어 천지분간 못하는 멍청이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경은 말을 삼가시오! 멍청이라니!”

켈트 경과 맥켈런 경 사이에서 의미 없는 신경전이 오가는 시각, 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가시성 마을에서 책임논란 중이었다.

“정말 한 푼도 없어요? 1페닝도? 1로닝도?”

“서 브릭의 몸값으로 다 썼어...”

“그럼 점심은 뭐 먹어요?”

“점심이 문제가 아니잖아.”

“아차! 그렇죠! 허풍쟁이 아저씨를 어떻게 불러내요?”

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가시성의 성문을 지키는 주드 맥켈런 남작군을 힐끔힐끔 보았다.

허풍쟁이 제이콥을 불러 달라 요청하자 당당히 뇌물을 요구한 삼류 용병이었다.

“뭘 그리 쳐다봐? 성의를 표시하라는 게 그리 어려워?”

용병은 엄지와 검지를 붙였다. 7살짜리도 이해할 제스처였다.

“저희가 땡전 한 푼 없어서... 허풍쟁이 제이콥 씨를 불러주며 제이콥 씨가 성의를 보여줄 거예요. 진짜예요.”

“그건 안 되겠는데? 임무 중에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 말이야.”

로벨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얄미워서 일단 때려눕힌 다음 고민하고 싶었다. 그러나 용병의 패악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흐흐... 정 돈이 없으면 몸으로 성의를 보여도 괜찮아.”

표정이 얼마나 음흉한지 한겨울에 뱀이 훑고 지나간 기분이었다. 마녀 키르케가 사색이 되어서 소리쳤다.

“저, 저요? 저 그런 일 안 해요!”

“누가 네년이래? 어디 뼈다귀밖에 없는 것이... 네 언니 말이다!”

로벨은 ‘언니’란 말에 움찔했다. 로벨의 성(性)을 알아본 사람은 처음이었다. 눈썰미가 좋은 걸까, 아니면 선입견이 없어서 일까. 마녀 키르케가 깔깔 웃었다.

“언니? 언니요? 히힛! 우리 오라비가 잘생기긴 했지만, 언니라니요? 히히힛!”

“뭐? 그럴 리가?”

로벨은 오른손을 후드 뒤로 옮겼다. 여차하면 흐룬팅을 뽑아 플랜 B를 시작할 것이다. 강행돌파 후 허풍쟁이 제이콥과 발가락 슈미츠를 찾아 성을 점거하는 플랜이다. 펄프 대장이 알면 까무러칠질 것이다. 그러나 천만 다행히 하늘이 도왔다.

마녀 키르케의 웃음소리가 들렸는지 허풍쟁이와 발가락이 성문으로 다가왔다.

“아, 글쎄 이런 지랄 맞은 웃음이 흔치 않다니까?”

“암만 그래도 지랄은 좀... 어라? 기사 나리?”

“기사 나리라고? 앗! 진짜잖아?”

로벨은 흐룬팅 손잡이를 잡은 채 반가운 용병들과 ‘기사 나리?’ 중얼거리는 음흉한 용병을 번갈아 보았다. 하늘이 도우려다가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다.

“차라리 잘 됐어.”

로벨은 흐룬팅을 뽑아 경악하는 용병의 머리를 쪼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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