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04화 (104/605)

104화. 함락

104화. 함락

로벨과 달리 주드 맥켈런 경은 전투를 서둘렀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뿔나팔 소리와 함께 일제히 공격했다. 달빛을 담은 새하얀 쇠촉이 은하수를 건너 아만다 성 위로 떨어졌다. 퍼퍽-! 퍽-!

울프 용병단은 여장 아래 몸을 숙이고 입으로 응수했다.

“개놈의 자식들아! 치사하게 기습이냐!”

“저놈들은 잠도 없나?”

“배 타고 와서 푹 잤겠지!”

“불화살을 가져와! 그거 말고! 기름 먹인 거 있잖아!”

로벨은 성(Keep) 밖의 소란에 눈을 떴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아멧과 소드 벨트를 챙겼다.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칼고리에 걸 때, 형식적인 노크와 함께 머를 브릭 경이 침실로 뛰어 들어왔다.

“마로드! 적의 기습입니다!”

“본인도 귀가 있소.”

머를 브릭 경은 컴포지트 아머를 풀세트로 갖춘 로벨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기사 종자가 없으니 갈아입은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벗지 않았다.

“본인보다 경이 서둘러야겠소.”

머를 브릭 경은 자신의 헐렁한 베옷을 내려다보고 얼굴을 붉혔다.

“서 켈트와 서 바이란은?”

“아, 아마도 갑옷을 입고 있을 겁니다.”

“누구보다 낫군.”

누구는 더욱 부끄러워했다.

로벨은 머를 브릭 경을 돌려보내고 홀로 성을 나갔다. 화톳불 사이로 바삐 뛰어가는 병사들이 보였다.

핑-!

성벽 위로 화살이 넘어와 성문 앞에 설치한 파비스에 꽂혔다. 로벨은 파르르 떨리는 화살대를 보고 조용히 바이저를 내렸다.

한편, 겁 없는 펄프 대장은 뚜껑도 없이 화살비 속을 달려왔다.

“영주님! 북쪽에서 공격입니다!”

“적의 숫자는?”

“3개 소대 규모입니다!”

아만다 성이 부실한 목재성이라지만, 고작 5, 60명으로 함락할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로벨은 낮의 일을 잊지 않았다. 양동작전을 확신했다. 북쪽에서 화살을 쏘고, 남쪽에서 돌격할 것이다.

“1소대와 6소대를 남쪽으로 보내. 그리고 7소대를 이곳에 대기시켜.”

로벨이 태어나기 전부터 전쟁터를 떠돌아다닌 펄프 대장은 로벨의 생각을 바로 이해했다. 울프 용병단 풋맨 소대와 아만다 마을 농민병에게 횃불을 하나씩 쥐여 주고 남쪽 성벽에 올렸다. 성벽 위에 50개의 횃불이 늘어서 있으면 섣불리 다가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적이 공격한 곳은 남쪽이 아니었다. 서쪽의 바다였다.

콰과과-광-!

바다에서 천둥이 쳤다.

어둠 속에서 불꽃이 번쩍이고, 성벽 아래 해안 바위에서 굉음이 울렸다.

“대, 대포?”

“갤리선에서 쏜다!”

로벨과 펄프 대장은 허겁지겁 성벽 위로 올라갔다. 성을 지키는 바다가 적의 포병진지가 되었다. 또다시 천둥번개가 내리쳤다. 콰과광-!

로벨은 허리를 쭉 펴고 병사들을 고무시켰다.

“여기까지 닿지 않아! 당황하지 마!”

아만다 성과 갤리선은 거리가 500야드 정도 떨어져 있어서 위협적이진 않았다. 간혹 작은 포탄이 성벽을 때렸지만 조금 흔들릴 뿐 부러지거나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주군! 주군!”

켈트 경과 바이란 경이 무장을 갖추고 로벨을 불렀다. 어감상 잘 잤냐는 인사는 아니었다.

로벨은 남쪽 성벽을 보았다. 울프 용병단은 침착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포격을 겪은 적 없는 아만다 성의 병사들은 겁을 먹고 흩어지고 있었다.

‘이때 남문이 공격받으면...!’

적군의 삼면포위가 완성된다. 로벨은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서 바이런! 남쪽을 지키시오! 서 켈트는 이곳 북쪽을 막아주시오! 서 브릭! 서 브릭!”

“여, 여기 있습니다!”

머를 브릭 경이 아성에서 달려 나왔다. 허둥거리는 꼴이 헬름을 거꾸로 쓰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말을 준비하시오!”

“영격하실 겁니까?”

“적이 둘로 나눠진 지금이 머리를 칠 기회요. 남쪽에서 싸움이 시작되면 우리는 주드 맥켈런 남작의 본진을 쳐야 하오.”

로벨은 전투마에 올라 해비 랜스와 방패를 잡았다. 머를 브릭 경과 기사 종자, 그리고 펄프 대장이 선발한 울프 용병단 20명이 대기했다.

그러나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공격해오는 낌새가 없었다. 성벽을 넘어오는 화살마저 점차 뜸해졌다. 코골이 바디가 용감하게 성벽 밖을 내다보았다.

“적이 물러납니다!”

“뭐야, 덤비는 거 아니었어?”

“그냥 화살만 쏘고 가는데?”

기사와 용병과 농민들이 로벨을 힐끔힐끔 보았다. 아멧 때문에 얼굴이 안 보이지만, 구태여 보고 싶지도 않았다. 낮에 이어서 밤에도 속았다.

@

다음 날 아침. 주드 맥켈런 남작군은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여유롭게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혹시 시간차 공격이 아닐까 의심해서 뜬눈으로 밤을 새운 로벨 로드릭 남작군에게는 조롱이나 다름없었다.

로벨은 성벽 위에서 주드 맥켈런 남작군을 노려보았다. 기분이 몹시 안 좋아 보였다.

로벨 뒤에 기립한 울프 용병단은 서로의 옆구리를 찔렀다.

‘뭐라 위로 좀 해보쇼.’

‘내가 왜?’

‘대장이 가장 친하잖소.’

‘나 배고픈데...’

‘넌 좀 닥쳐!’

머를 브릭 경이 용감하게 한 걸음 나섰다.

“마로드, 아침식사가 준비됐습니다.”

용병들은 입모양과 손동작으로 감탄했다. ‘역시 기사는 다르구만!’

로벨은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시오!’ 따위로 화내지 않았다. 성격상 엄한 곳에 분풀이하지 못했다. 하지만 분은 반드시 풀어야 했다.

“오늘 승부를 봐야겠소.”

“로드?”

“전령을 보내시오. 제7시에 정정당당히 싸우자고.”

“아, 예!”

머를 브릭은 자신의 기사 종자를 시켜 로벨의 뜻을 전달했다.

백기를 든 기사 종자가 적진으로 내려갔다. 대화가 오가는 듯 잠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곧 소란이 일어났다.

“어어? 어? 영주님! 저놈들이 도망갑니다!”

“뭐?”

주드 맥켈런 남작군은 무기와 짐을 챙겨서 후다닥- 소리 나게 철수했다. 로벨은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대체 뭐하는 거지?”

잠시 뒤, 머를 브릭 경의 기사 종자가 돌아왔다. 주군과 주군의 주군이 동시에 부르자 대단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맥켈런 경은 뭐라고 하더냐?”

기사 종자는 로벨과 머를 브릭 경을 번갈아 보고-누구에게 보고해야할지 고민했다- 대답했다.

“싸울 장소와 시간은 내가 정한다!”

“뭐라고?”

“...라고 답하고, 곧장 군사를 소집해서 이동 명령을 내렸습니다.”

로벨은 눈살을 찌푸렸다. ‘신경전인가, 아니면 또 꿍꿍이가 있나?’ 겁쟁이 데비와 코골이 바디가 멀어지는 주드 맥켈런 남작군을 보며 속닥였다.

“저놈들 대체 어디 가는 거지?”

“우리처럼 빈집털이하려고? 혹시 로드릭 성으로 가는 거 아냐?”

말을 꺼낸 것은 겁쟁이 데비인데, 시선이 집중된 것은 로벨이었다. 로벨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로드릭 성에는 마녀 키르케와 농민병이 있어.”

로벨은 로드릭 성을 걱정하지 않았다. 아만다 성에서 하루거리라 언제든지 지원할 수 있었다.

“그러면 가시성? 아니면 바위성일까요?”

“바위성은 너무 멀어. 그리 깊게 들어가진 못할 거야.”

시선이 바이란 경에게 옮겨졌다.

“가시성 수비 상태는?”

“장정들로 30명 남겨두고 왔습니다.”

“지휘관은?”

“푸줏간에서 일하는 짝귀라는 놈인데, 힘이 좋고 칼을 잘 다뤄서...”

“아니, 그거 말고. 글을 아는 자요?”

“예? 아, 아닙니다. 푸줏간 일하는 녀석이 글을 배웠을 리가 없지요.”

로벨은 더 물어볼 거 없이 명령을 내렸다.

“펄프 대장! 울프 용병단 풋맨 소대를 데리고 가시성으로 가! 밤을 새워서라도 맥켈런 남작보다 먼저 도착해!”

“지금 말입니까?”

“당장!”

펄프 대장은 코골이 바디를 끌고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로벨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사실 무리한 요구였다. 하룻밤 꼬박 새었는데, 오늘 밤까지 새워서 이동하는 것은 무리였다.

“서 켈트, 서 바이란, 서 브릭을 도와 성을 지키시오.”

“주군께서는...”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폼멜을 만지며 늑대처럼 으르릉거렸다.

“먼 곳에서 온 손님을 그냥 보낼 수 없잖소.”

@

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이끌고 주드 맥켈런 남작군을 쫒아갔다. 시야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추격전이 벌어졌다.

점심을 대충 때우고, 한 걸음이라도 좁히기 위해 서둘러 행군할 때였다. 과묵한 몬트가 오늘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영주님, 이상합니다.”

“뭐가?”

“펄프 대장을 앞서 갔고, 영주님이 따라가니, 가시성 기습은 소용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잖아.”

“적도 그것을 알 텐데, 왜 계속 갈까요.”

과묵한 몬트의 말이 일리 있었다. 로벨은 주드 맥캘런 경의 의도를 추리했다.

‘간밤의 습격, 재빠른 철군, 가시성, 그리고 눈에 빤히 보이는 행군...’

정답이 금방 나왔다.

로벨은 말머리를 돌렸다. 아무 생각 없이 꽁무니를 따라가던 겁쟁이 데비는 전투마 주둥이에 이마를 찍었다.

“어이구! 기사 나리!”

“아만다 성으로 돌아간다!”

용병 사이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겁쟁이 데비가 이마를 문지르며 질문했다.

“저, 외람되지만, 어째서입니까요?”

“오늘 아침에 적함을 본 사람 있어?”

“적함이면, 저놈들이 타고 온 갤리선이요?”

발냄새 베커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봤습니다! 항구에 정박해 있었습니다!”

로벨은 어금니에서 부드득- 소리 나게 갈았다.

“우리가 쫓는 것은 맥켈런 남작군이 아니야! 그 갤리선의 선원이야!”

대다수 용병들은 로벨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과가 나오자 이해했다.

지나온 길을 절반쯤 돌아갔을 때, 전방에서 두 필의 말이 달려왔다. 그을리고 지저분하지만 훌륭한 말과 갑옷이었다. 아만다 성에 남은 켈트 경과 바이란 경이었다.

“서 켈트!”

로벨은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기사가 저런 몰골로 달려오면 꼭 로벨이 아니어도 불길할 것이다. 켈트 경은 로벨 앞에서 말을 세우고 바이저를 올렸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주군! 아만다 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어떻게 벌써!”

“주군께서 떠난 뒤에 주드 맥켈런 남작이 총공격을 강행했습니다!”

“대포로 성문을 부수고 침입해서, 농민병 대다수가 싸우지도 않고...”

로벨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주드 맥캘런 남작은 선원과 노잡이를 병사로 꾸미고, 가시성을 공격할 것처럼 울프 용병단을 유인했다.

‘간밤에 습격은 포술훈련이었나?’

더불어 공포를 심어놓았다. 농민병 대부분은 성문이 파괴되는 순간 전의를 잃었을 것이다.

“머를 브릭 경은?”

“포, 포로로 잡혔습니다.”

로벨의 눈살이 가늘게 떨렸다. 성과 성주를 한 번에 내주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만다 성을 탈환할지, 로드릭 성으로 철수할지 고민할 때, 가시성으로 보낸 펄프 대장과 풋맨 소대가 돌아왔다.

“영주님! 여기 계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펄프 대장 일행은 급속행군으로 녹초가 되어 있었다. 무장이 가벼운 풋맨이라도 성과 성을 오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신경이 날카로운 로벨은 격려가 아니라 질책을 했다.

“가시성을 지키라니까. 왜 돌아왔어?”

펄프 대장은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설령 눈치챘어도 할 말은 해야 했다.

“가시성이, 가시성이 함락되었습니다!”

@

로벨은 대강의 사정을 알아냈다.

주드 맥켈런 경은 가시성을 지키는 짝귀에게 편지를 보냈다. 로드릭 가문의 문장을 엉성하게 그려 넣은 지원요청이었다. 로벨의 글씨체도 아니고, 로벨의 인장도 찍히지 않았지만, 까막눈인 짝귀는 쉽게 믿어버렸다. 그 결과 주드 맥켈런 경은 하루아침에 성 두 개를 점령했다.

겁쟁이 데비는 적과 아군을 동시에 저주하는 기사들을 피해 속닥였다.

“대장 말이 맞은 거 같소.”

펄프 대장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눈알을 굴렸다.

“내가 뭐?”

“북해의 사자란 기사가 우리 기사 나리보다 대단하잖소.”

펄프 대장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아직 몰라.”

“뭐를 말이오?”

펄프 대장은 로벨을 힐끔보았다.

“너, 허풍쟁이랑 발가락 봤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