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03화 (103/605)

103화. 차칭

103화. 차칭

초가을보다 늦여름이 어울리는 날씨였다. 햇빛이 강렬해서 투구를 만지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땀방울이 턱선을 따라 주르륵 떨어졌다.

“스피어 앞으로.”

“스피어맨 앞으로!”

“2소대 전진!”

“7소대 전진하라!”

로벨의 명령이 펄프 대장에게 전달되고, 다시 스피어맨 소대장들에게 전달되었다. 76명의 스피어맨이 스무 걸음 전진했다. 울프 용병단 22명과 가시성에서 소집한 농민병 54명이었다. 바이란 경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저놈들이 활을 쏘면...”

“우리 쪽이 더 높아.”

로벨은 진형의 좌우익을 한 번씩 보았다. 울프 용병단 크로스보우맨 60명과 바위성의 사냥꾼 37명이었다. 그 외에도 예비대로 빼놓은 풋맨이 50명이 있었다. 로벨 로드릭 남작군 총병력 223명이었다.

그에 비해 적군은 많지 않았다. 화살이 닿지 않는 먼 바다에 닻을 내린 소형 갤리선 두 척이 전부였다. 한 척당 100명씩 잡아도 최대 200명이었다. 선원과 노잡이를 빼면 병사는 더 적을 것이다.

“마로드, 상륙을 못 하게 해안에서 막는 것이 어떻습니까?”

로벨의 첫 번째 봉신이자 이곳 아만다 영지의 주인인 머를 브릭 경이 조언했다. 로벨은 영주의 체면을 생각해서 고민하는 시늉 좀 하고 기각했다.

“저 배에는 대포가 실려 있소. 해안으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오.”

“맥켈런 남작이 어찌 대포를...”

청옥성의 재정은 옛날의 로드릭 영지보다-그래봐야 4년이 채 안 되지만-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대포 같은 최첨단 무기를 취급할 여력이 없었다.

“에르나 왕국과 전쟁 중에 회수한 것이 3문, 해적선에서 노획한 것이 1문이오.”

“그럼 4문이나! 헌데 어찌 그리 소상히 아십니까?”

로벨은 허풍쟁이 제이콥이 보낸 밀서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밀서라 부르기가 민망하기 때문이다.

허풍쟁이와 발가락은 에르나 왕국 문장 아래 대포 3개, 졸리 로저 아래 대포를 1개 그려서 보냈다. 그 내용을 해독하는데 마녀 키르케의 상상력이 총동원되었다.

‘설마 둘 다 글을 모를 줄이야.’

글을 몰라서 다행인 것도 있었다. 의심스러운 짓을 하다 걸려도 첩자로 오해받지 않았다. 주드 맥켈런 경이 아무리 의심이 많아도, 설마 까막눈이 첩자일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누가 악마추종자인지 모른다는 거야.’

주드 맥켈런 경의 배후를 알아내도 이름을 쓸 수 없으니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다. 글을 모르면서 왜 순순히 첩자 일을 받아들였냐고 묻고 싶었다. 허풍쟁이와 발가락은 대단히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저놈이 글을 알 거라 생각했다고 답할 것이다. 로벨은 새삼 애꾸눈 볼포스가 그리웠다.

“적선이 움직입니다!”

“노를 젓고 있습니다!”

아만다 항 앞 바다에 떠있는 갤리엇 2척이 움직였다. 로벨 로드릭 남작군 정면에 위치한 해안으로 접근했다.

“이제야 상륙할 용기가 생긴 건가?”

로벨은 즉시 펄프 대장에게 명령했다.

“배에서 내리는 순간을 노려야 해. 사격 준비.”

“크로스보우 장전하라!”

“아처! 노킹(nocking)!”

울프 용병단이 자랑하는 크로스보우맨이 단단히 고정된 파비스 좌우로 쇠촉을 내밀었다.

표적은 북해 메그람 섬에서 유라피아 반도를 빙 돌아 내해 볼탄 반도까지 남하한 갤리엇이었다.

“먼 길을 온 손님이다! 화끈하게 대접해라!”

2척의 갤리엇이 해변에 닿았다. 수십 명 병사가 일제히 갑판 난간을 뛰어넘었다.

“쏴라!”

“쏴!”

짧고 굵은 쿼럴은 낮게, 길고 날렵한 화살은 높게 발사되었다. 속도와 높이가 다르지만 도착지점은 비슷했다. 갤리엇에서 뛰어내린 주드 맥켈런 남작군이었다.

주드 맥켈런 남작군도 바보가 아니라 방패로 벽과 지붕을 만들었다. 그러나 빗발치는 100개의 화살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재수 없는 병사가 꼬꾸라졌다. 모래사장이 붉게 물들고, 파도에 쓸려갔다.

“재장전!”

“재장전하라!”

“쏴라!”

로벨 로드릭 남작군은 볼탄 반도 남부를 장악한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쉼 없이, 그리고 정확하게 화살을 쏘아붙였다. 방패 사이로 파고들어 꾸준히 사상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주드 맥켈런 남작군도 북해의 해적과 싸우면 단련된 강인한 용병들이었다. 방패벽 뒤에서 반격하며 거리를 좁혀왔다. 그리고 마침내 파이크가 닿을 거리까지 좁혀졌다.

주드 맥켈런 남작군은 너덜너덜해진 방패를 팽개치고 울프 용병단 스피어맨과 맞붙었다. 창이 살을 뚫고, 도끼가 창을 부수고, 갑옷이 맞부딪치며 크고 작은 칼이 피를 짜냈다. 삽시간에 10여 명이 죽었다.

펄프 대장이 로벨을 곁눈질했다. 지금 풋맨 소대를 투입하면 확실히 승기를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로벨은 풋맨을 보내지 않았다.

‘이상해.’

로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전장을 살폈다. 로벨은 후계자 전쟁부터 오늘날까지 숱한 전쟁을 치러왔다. 로벨 만큼 전쟁 경험이 많은 기사도 없었다. 그 경험이 이변을 경고했다.

‘숫자가 너무 적어.’

갤리엇에서 내린 병사는 고작 70~80명이었다. 로벨의 예상보다 한참 부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허풍쟁이와 발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선발대만 보낸 건가?’

그 순간, 로벨은 예지에 가까운 예감을 느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철수해! 철수해라!”

“마로드?”

“적의 함정이야! 펄프 대장! 서둘러!”

로벨에게는 조금 늦고, 적에게는 조금 이른 타이밍이었다. 스피어맨 소대에게 후퇴 명령이 전달될 무렵, 로벨의 배후에서 뿔나팔 소리와 함께 요란한 함성이 들려왔다.

“저, 적군입니다!”

“후방에 적입니다!”

켈트 경과 바이런 경이 이를 갈았다.

“낡아빠진 수법을!”

“그만큼 효과적이지.”

로벨도 적잖이 당황했다. 안 그래도 적은 병력을 둘로 쪼개서, 그것도 수륙양쪽에서 협공할 줄은 몰랐다.

전쟁소설에서는 심심하면 나오는 것이 포위공격이지만, 현실에서는 좀처럼 해내기 어려운 전술이었다. 둘 이상의 군대가 정확한 시간과 정확한 장소에 도착해야 하는데, 지리에 어둡거나 날씨가 안 좋으면 시도할 수 없거니와, 적에게 간파당해 각개격파 당할 위험도 높았다. 현명한 지휘관은 위험부담 때문에 시도하지 않고, 멍청한 지휘관은 시도할 생각조차 못 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포위-섬멸전은 극히 드물었다.

로벨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내가 그리 우습게 보여?’

로벨은 기사 종자를 자처한 과묵한 몬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랜스!”

과묵한 몬트는 해비 랜스와 라이트 랜스 중 어느 것을 줘야 할지 몰라 갈등하다가 둘 다 올렸다. 로벨은 어린 집사의 부재 또한 통감하며 해비 랜스를 잡았다.

“서 브릭! 서 켈트! 서 바이란! 기사의 명예를 드높일 기회가 찾아왔소!”

로벨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세 명의 기사는 자신의 종자에게서 랜스를 받았다.

“펄프 대장! 즉시 아만다 성으로 철수해!”

“영주님!”

“이랴앗!”

로벨은 랜스를 고리에 걸고 전투마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주인만큼이나 전쟁경험이 풍부한 전투마는 어디로 달려가야 할지 분명히 알았다.

“너희들은 아만다 성으로 철수해라!”

“우린 주군을 따른다!”

로벨의 기사들도 로벨을 따라 뛰쳐나갔다.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남하하는 주드 맥켈런 남작군은 화살처럼 달려오는 4명의 기사에 다급히 수비태세를 갖췄다.

“스피어 월! 스피어 월!”

“창을 세워라! 겁먹지 마라!”

주드 맥켈런 남작군은 파이크를 앞세워서 고슴도치처럼 웅크렸다. 그러나 전신갑옷을 입고 전투마에 올라탄 기사의 위용은 엄청났다. 땅이 쿵쿵 울리고, 흙먼지가 산처럼 일어났다. 제일 선두에 선 병사는 저도 모르게 실금했다.

그러나 모두가 긴장한 것은 아니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4명의 기사를 바라보는 노(老)기사가 있었다. 주름진 얼굴과 하얀 수염이 아니면 한참 때 청년으로 착각할 만큼 기운찼다.

“저자가 로벨 로드릭 남작인가?”

“낡은 컴포지트 아머에 구형 아멧... 그런 것 같습니다.”

“기사들만으로 우리를 막겠다? 용감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군.”

“로벨 로드릭 경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경계해야 합니다, 주군.”

노 기사 주드 맥켈런 경은 소리 내어 웃었다. 로벨의 돌격이 우스워서가 아니었다. 병사들이 겁먹지 않게 하려는 의도된 행동이었다.

로벨은 13피트 길이의 해비 랜스를 길게 내밀어 주드 맥켈런 남작군의 창벽을 찔렀다. 로벨의 랜스가 병사의 파이크보다 좀 더 길었다.

“으아악!”

로벨은 랜스 차칭의 충격을 흘리며 말머리를 돌렸다. 그 사이 켈트 경과 바이란 경이 차례로 주드 맥켈론 남작군을 두드렸다. 프란시스 가문의 기사답게 솜씨가 좋았다.

“왼쪽으로!”

로벨과 기사들은 주드 맥켈런 남작군을 스치듯이 지나쳐 거리를 벌렸다. 성난 병사들이 창을 던지고 활을 쏘았지만 전투마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간혹 제대로 날아온 화살도 판금갑옷을 뚫지 못해 허무하게 튕겨나갔다.

“한 번 더 간다!”

로벨은 흥분한 전투마 위에서 랜스를 고쳐 잡았다. 켈트 경 이하 3인의 기사도 랜스를 곧추세웠다. 로벨이 찢어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차-칭-!”

“제길! 또 온다!”

“자리를 지켜라! 창을 세워라!”

로벨과 로벨의 기사들은 주드 맥켈런 남작군의 창벽을 스치듯이 지나쳤다. 창벽 때문에 시원시원하게 짓밟고 지나갈 수는 없지만, 더 길고 더 튼튼한 창으로 두드려줄 수는 있었다. 큰 피해는 주지 못해도 펄프 대장이 스피어맨을 빼내는 시간은 벌 수 있었다.

“주군! 랜스가 부러졌습니다!”

로벨은 전투마를 진정시키고 켈트 경의 랜스를 보았다. 창대가 뚝 부러졌다. 머를 브릭 경은 중간에 창을 떨어뜨렸고 바이란 경은 모진 병사 가슴을 장식해 주어서 전부 빈손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오. 철수하시오.”

로벨은 창날이 휘어진 랜스를 빙그르 돌려서 땅에 꽂았다. 이곳을 넘지 말라는 엄포였다. 주드 맥켈런 남작의 병사들은 로벨의 기백에 눌려 흔한 욕설 한마디 내뱉지 못했다. 주드 맥켈런 경도 크게 감탄했다.

“실로 대단한 기사군!”

“풍문 그대로입니다. 이곳의 영주들이 기를 못 필 만하군요.”

로벨은 100여 명의 적을 굽어본 후 말머리를 돌려 아만다 성으로 냅다 도망쳤다. 주드 맥켈런 경의 종자가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쫓을까요?”

주드 맥켈런 경은 어느덧 전투가 끝난 해변을 살핀 후 혀를 찼다.

“오늘은 항구를 장악한 것으로 만족하자.”

그리고 도망치는 로벨 로드릭 남작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4마리의 말과 4개의 창으로 기울어진 전쟁의 저울을 바로잡은 기사의 모습이었다.

“결국은 핏값을 지불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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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전투마를 꼼꼼히 살폈다. 간밤에 칼부림에 혹시 다친 곳이 있나 걱정했다. 전투마는 그런 주인이 좋은지 로벨을 향해 혀를 날름거렸다.

“휴우. 다행이야.”

몇 군데 생채기가 생겼지만 깊이 찔린 곳은 없었다. 로벨은 이번 전쟁이 끝나면 마갑을 한 벌 장만할까 고민했다.

‘이 전쟁이 끝나야 말이지...’

로벨은 전투마를 다독여서 마구간에 넣고 성벽으로 향했다. 울프 용병단과 바위성 사냥꾼이 시시덕거리다가 로벨을 보고 부동자세를 취했다.

“경계 중 이상 무!”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성벽 밖을 내다보았다. 주드 맥켈런 경의 군사가 바리게이트를 쌓고 있었다.

‘역시 200명이 안 되네.’

저 중에 허풍쟁이와 발가락이 있을 것이다. 로벨은 앞뒤로 눈치 보느라 정신없을 두 사람을 생각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용맹한 켈트 경은 적이 얼마 안 되니 당장 쳐부수자고 주장했고, 신중한 바이란 경은 급할 것이 없으니 좀 더 두고 보자고 주장했다. 로벨은 바이란 경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아만다 마을의 가장 큰 재산인 어선은 푸른고래 호와 함께 안전한 바다로 보냈다. 농사를 짓지 않으니 추수 걱정도 없었다.

‘병사도, 물자도 우리가 많아.’

로벨은 여장에 손을 올리고 옛 영웅인 주드 맥켈런 경을 찾았다.

“고작 180명 남짓한 병사로 뭘 할 작정이지?”

그것은 지난날 로벨의 적들이 로벨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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