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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99화 (99/605)

99화. 고문

99화. 고문

로벨은 전투마 고삐를 끌며 사트로 시티 외진 골목을 누볐다. 그리 쾌적한 곳은 아니었다. 깨진 접시, 망가진 의자, 부서진 나무통 등의 쓰레기는 준수한 편이고, 겹겹이 쌓인 오물과 고양이만한 시궁쥐와 구더기가 들끓는 개 사체 등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악취가 대단했다.

“기사님?”

그래도 악취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정말 괴로운 것은 갈비뼈가 훤히 드러난 앙상한 몰골로 눈알을 굴리는 빈민들이었다. 늙고 병든 빈민들이 로벨의 바짓가랑이와 마녀 키르케의 꼬뜨 자락을 잡으며 구걸했다. 로벨이 아론다이트 손잡이를 쥐자 불에 덴 것처럼 떨어졌다. 모두가 구걸하는 것은 아니었다. 무기라고 부르기가 민망한 쇠토막을 쥐고 살기를 띄우는 사내도 있었다. 그러나 용기가 부족한지, 아니면 배가 덜 고픈지 로벨과 눈이 마주치자 화급히 도망쳤다.

“기사님,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로벨은 위험하고 지저분한 골목을 계속 나아갔다. 하지만 길을 잘 아는 것은 아닌 듯 갈림길이 나오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녀 키르케는 호기심과 불안감에 짓눌려서 목청을 조금 높였다.

“기사님! 어디 가는 거냐고요!”

로벨은 걸음 속도를 조금 늦추고 말했다.

“검은 성.”

“성이요? 왜요? 아니, 성을 가는데 왜 이리로 가나요?”

“몰래 들어가야 하니까.”

로벨과 마녀 키르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마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검은 성의 웅장한 성벽이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아...”

성벽 아래는 군사적인 이유로 주거할 수 없는 장소였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살 곳이 없는 빈민들의 주거지가 되었다. 성에서 버리는 쓰레기가 유용한 탓도 있었다.

“여기 볼 일이 있는 게 아니군요?”

마녀 키르케는 안도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까 검은 성이 빈민가보다 위험했다.

“가만! 성에 왜 들어가려는 거예요? 그것도 몰래?”

“악마추종자를 찾아야 하니까.”

성벽을 따라 조금 걷자 사람 한 명 겨우 지나다닐 측문이 나타났다. 평소에는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곳이지만, 전시에는 병사를 몰래 내보내는 비밀통로가 되었다.

로벨은 전투마를 세우고 측문을 밀었다. 본디 항상 잠겨있어야 하는 곳인데, 로벨이 밀자 슬며시 열렸다. 마녀 키르케가 손뼉을 치고 감탄했다.

“와아! 마법이에요?”

“그럴 리가.”

측문 뒤에 나이가 젊은 기사 종자가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정황상 어렵지 않게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서(Sir) 호그?”

“서임 받지 못한 몸입니다. 호칭을 생략해주십시오.”

“그럼 스콰이어(Squire) 호그.”

볼프 후작이 보낸 안내인이었다. 다시 말해 집주인에게 허락받은 잠입이었다. 마녀 키르케가 로벨의 새끼손가락을 잡았다.

“저기, 기사님?”

“괜찮아. 기사 종자 호그는 전쟁 이후에 들어왔어. 악마추종자일 리 없어.”

“그게 아니고요. 여기 왜 온 거예요?”

로벨은 잠깐 당황했다. 검은 성의 측문을 찾는데 집중해서 가장 중요한 설명을 빠트렸다.

“악마추종자가 시내에 있다면 허풍쟁이와 발가락이 찾겠지만, 성 안에 있으면 방법이 없잖아.”

“그럼 후작님한테 부탁해서 찾으면 되잖아요. 왜 몰래 숨어 들어와요?”

“우리가 성에 있는 것을 알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테니까.”

악마추종자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단 성을 나간 다음 몰래 들어왔다. 볼프 후작과 기사 종자 호그 이외에는 로벨이 다시 온 것을 알지 못했다. 로벨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자신의 치밀함을 자랑했다. 마녀 키르케는 뾰루퉁해서 투덜거렸다.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해주지...”

기사 종자 호그가 나이답지 않게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로 모시면 됩니까?”

로벨은 하몬 남작의 성과 깁스 남작의 성을 떠올리며 말했다.

“볼프 후작의 눈이 닿지 않는 곳. 지하 깊은 곳이나 사람이 자주 찾지 않는 외진 곳으로 안내해.”

“검은 성에서 후작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아니. 있을 거야. 이 큰 성을 구석구석 찾아다니지는 않을 테니까. 조건을 바꿔볼게. 볼프 후작이 자주 가지 않는 곳. 그 중에서 어둡고 습한 곳을 떠올려봐.”

“어둡고 습한 곳...”

“음기(陰氣)가 강한 곳... 사기(邪氣)라고? 차이가 있어? 아, 아니, 설명은 나중에 해. 흠흠. 자세한 것은 여기 마법사한테 물어봐.”

로벨은 자꾸 속닥이는 마녀 키르케를 정면으로 내세웠다. 마녀는 무뚝뚝한 바가지머리 기사 종자가 어려운지 손가락을 꼬며 말했다.

“흑마법을 사용하려면 사념이 강한 곳이 필요해요. 사념은 긍정적인 곳보다 부정적인 곳에 모이기 때문에 폐가나 지하실일 가능성이 높아요.”

“폐가는 없지만 지하실이라면 몇 군데 있습니다. 그중에 후작님이 찾지 않는 곳은... 아! 한군데 있습니다. 북쪽 탑의 지하실입니다.”

“거긴 뭐 하는 곳이야?”

기사 종자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고문실입니다.”

“고문실? 그럼 지하감옥이야?”

기사 종자는 마녀 키르케를 힐끔 보고 말을 삼켰다.

“지금은 쓰지 않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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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 후작이 손을 써두어서 북쪽 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기사 종자 호그는 15피트 남짓한 탑 앞에서 멈췄다.

“이곳입니다.”

로벨은 북쪽 탑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성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지만, 어둡지도, 외지지도 않았다. 마녀 키르케의 생각도 비슷했다.

“에이, 평범한데요?”

기사 종자는 마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대꾸했다.

“후작님이 찾지 않는 곳은 여기뿐이오.”

“그럼 들어가자.”

로벨은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의 손잡이에 두 손을 올리고 탑으로 들어갔다.

기사 종자의 말대로 오랫동안 사용을 안 한 듯 집기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네모난 창문에서 네모난 햇살이 비치고, 오래된 먼지가 장난꾸러기 요정처럼 어른거렸다.

로벨은 1층을 대충 훑어보고,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본 후, 지하 계단으로 향했다. 마녀 키르케가 벽에 걸린 촛대를 꺼내 심지를 잡고 주문을 외웠다.

“태양의 노래, 용암의 춤, 용의 잠꼬대, 살라만다의 한숨.”

손가락 사이에서 연기가 피어나더니 주먹만한 불길이 화르륵- 피어났다. 기사 종자가 놀란 눈으로 마녀 키르케를 보았다.

“진짜 마녀였군.”

“기왕이면 마법사라고 불러주세요.”

마녀 키르케는 손에 붙은 불을 탁탁 털어서 끄며 항의했다. 로벨은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촛대를 주워 불을 나눴다.

“앞장 서.”

기사 종자는 촛대를 잡고 군말 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서로를 한번 보고 기사 종자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잠시 뒤, 기사 종자가 말을 아낀 이유를 알았다.

마녀 키르케가 로벨의 갑옷을 꼭 쥐고 중얼거렸다.

“기사님... 여기는...”

“응. 고문실이야.”

천국과 지옥이 그러하듯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해치기 위해 고안한 고문실이었다.

지하실 구석구석에 고문도구가 놓여 있었다. 벽에 걸린 쇠사슬이나 화로에 꽂힌 인두는 그나마 친숙한 도구였다. 관찰자의 상상력을 시험하는 고문도구가 대다수였다.

로벨은 악명 높은 고문도구를 발견하고 중얼거렸다.

“아이언 메이든.”

안쪽에 쇠못이 촘촘하게 박힌 사람 모양의 관이었다. 저곳에 갇히면 조금만 움직여도 못이 살을 파고들어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

사실은 숨을 쉬게 놔두지도 않았다. 바깥에서 마구 흔들기 때문에 만신창이가 되어 죽었다.

그 외에도 기상천외한 고문도구가 많았다. 삼각뿔 모양의 목마도 그중 하나였다. 얼핏 보면 어린아이의 놀이기구 같지만, 사람이 앉을 수 없게 말 등이 뾰족한 삼각형이었다. 그 위에 사람을 앉히고, 두 다리에 무거운 추를 매달면 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줄 수 있었다.

“기사님... 여기... 여기 너무 무서워요...”

기상천외한 고문도구지만, 딱 하나 공통점이 있었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용도로 사용된 고문도구였다.

“마녀사냥...?”

“그렇습니다. 전대 후작이 젊은 시절 만든 고문실입니다.”

마녀 키르케는 새하얗게 질려서 오들오들 떨었다.

“너무해요! 정말 너무해요!”

오래전에 사용을 멈춰 핏자국조차 희미하지만, 마녀와 마녀로 지목된 처녀들의 비명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 ‘사념’이란 것이 가득한 곳 같아.”

“너무 끔찍해요. 어떻게 이런 짓을...”

로벨은 기사 종자를 추궁했다.

“마녀 사냥은 150년 전에 금지되었어. 어찌 후작이란 자가 이런 짓을 한 거지?”

로벨이 칼자루를 잡고 협박하자 기사 종자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나 변명했다.

“전대 후작님은 제가 모시지 않아 모릅니다. 다만, 소문에 따르면 여색을 남다르게 밝혀서... 그러니까, 정상적이지 못한 성적취향 탓에...”

“제길!”

로벨이 어금니를 악 물고 칼자루를 꽉 쥐었다. 전 사트로 후작은 버팅거 시티에서 죽은 것이 다행이었다. 지금 로벨 눈에 띄었으면 삼 대조 조상까지 모욕 받으며 결투 신청에 시달렸을 것이다.

기사 종자는 성난 기사와 겁먹은 마녀의 눈치를 보며 길을 안내했다.

“안쪽에 방이 더 있습니다.”

“...안내해.”

검은 성 북쪽 탑은 고문기술자의 작업실이자 고문도구의 전시장이었다. 수레바퀴처럼 생겼으나 손잡이와 사슬이 달린 이상한 기구, 압착기처럼 생겨서 네모반듯한 돌로 채워진 기구 등등. 로벨과 마녀 키르케의 순진한 머리로는 사용법을 알 수 없었다. 색이 바랜 뼛조각과 거무스름하게 남은 핏자국으로 여러 사람을 죽인 도구란 것만 짐작했다.

“이쪽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하 끝방에 도착했다.

로벨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마녀 키르케는 두 눈을 꼭 감고 마지막 방에 들어갔다. 그러나 기대한 풍경이 아니었다.

“여긴 고문실이 아니야.”

고급 마호가니 테이블에 은촛대가 놓여있고, 유리로 된 찻잔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걸려있고, 좌우 벽에는 산과 바다를 그린 풍경화가 걸려있고, 땅바닥에는 인어의 바다를 건너온 융단이 깔려있었다. 지하 고문실이 아니라 귀족 저택의 응접실 분위기였다.

“뭐 하는 곳이지?”

기사 종자도 생뚱맞은 장소에 적잖이 당황했다.

“저도 모릅니다. 검은 성에서 북쪽 탑은 금기시하는 장소라, 이렇게 깊이 들어온 적이 없습니다.”

로벨은 백 플레이트 아랫단을 꼭 잡고 매달린 마녀 키르케를 앞으로 내세웠다.

“키르케, 이곳을 살펴봐.”

“저, 저 무서워요.”

로벨은 마녀 키르케의 어깨를 잡고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도 해야 해. 내 짐작이 맞으면 이곳이 악마추종자의 아지트일 거야.”

“여기가요?”

“그놈들을 혼내주려면 네 힘이 필요해.”

로벨의 속삭임에 힘을 얻어 눈을 살며시 떴다.

“여긴... 사념이 없어요.”

로벨은 바로 실망했다.

“그럼 악마추종자의 아지트가 아니야?”

“아니요. 아니에요. 이상해요. 이 앞에 이렇게 사념이 많은데, 이 방에만 아무 사념이 없어요. 이건 분명...”

마녀 키르케는 떡갈나무 지팡이를 앞으로 세우고 주문을 외웠다.

“태양의 정수리, 달의 뒷머리, 심해의 발자국, 그림자 위에서 춤추는 그림자가 되어라.”

로벨은 아론다이트 손잡이를 오른손으로 쥐고 1인치 정도 뽑았다. 기사 종자도 덩달아 긴장해서 허리 뒤의 대거를 만지작거렸다.

“저 마녀가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나도 몰라.‘

로벨은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마법의 문외한이라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뒤, 마녀 키르케가 지팡이를 내리고 말했다.

“기사님 말이 맞아요. 여기서 커다란 의식을 치렀어요.”

“마법이야?”

마녀 키르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주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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