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98화 (98/605)

98화. 탐문

98화. 탐문

볼프 사트로 후작은 한때 포비아 왕국에서 가장 위대한 기사였다.

강철성의 기사 웨일 도트넘 백작 아래에서 전공을 세워 18살 젊은 나이에 기사 서임을 받고, 수많은 토너먼트에서 수많은 기사를 쓰러트리며 무명을 높이고, 청옥성의 기사 주드 맥케런 경을 낙마시키며 20살에 포비아 왕국 그랜드 챔피언이 되었다. 그 시절 볼프 사트로 후작은 자신에게 대적할 기사가 없다고 자신했다. 이듬해 혜성처럼 등장한 로벨 로드릭 경의 랜스에 의식을 잃기 전까지 말이다.

“이제야 설욕전을 치를 수 있겠군.”

볼프 후작은 건틀렛의 가죽끈을 꽉 쪼이고 엄지와 나머지 네 개 손가락을 움직였다. 벙어리장갑이라 기민성은 떨어지지만, 창칼을 다루기에는 충분했다.

올해 성인이 된 기사 종자 톰슨이 뚱하게 말했다.

“프란시스 가문과의 화해보다 그쪽이 목적 아니십니까?”

“무슨 말을? 이건 어디까지 화해의 제스처야.”

볼프 후작은 천막 밖을 보았다. 언덕 아래 시합장은 수백 명의 군중이 뿜어내는 열기로 가득했다. 프란시스 공작이 주최하는 승전 기념 토너먼트다웠다.

“기회가 왔으니 잡을 뿐이지.”

“후작님. 시간이 됐습니다.”

수행원이 전투마를 끌고 다가왔다. 볼프 후작은 헬름을 챙겨서 일어났다.

“그래. 결판을 내러 가자.”

로벨 로드릭.

전설 속에서 뛰쳐나온 듯한 기사. 그 창과 다시 부딪칠 생각하니 즐겁고 두려웠다.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 따지면, 아마도 설렘일 것이다.

“누구냐!”

긴장과 흥분에 찬물을 끼얹는 소란이 일어났다. 볼프 후작을 수행하는 기사와 기사 종자가 호통을 쳤다. 볼프 후작은 전투마를 세우고 소란의 정체를 확인했다.

수도승이 입고 다니는 큼직한 꼬뜨를 두르고, 코까지 내려오는 깊은 후드를 썼으며, 밀이나 보리를 수확할 때 쓰는 대형 낫을 손에 들었다. 성직자 같기도 하고, 순례자 같기도 하고, 농부 같기도 했다. 다시 말해 무엇과도 닮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내가 좀 바빠서 그런데, 볼 일이 있으면 나중에 찾아오게.”

볼프 후작은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 적당히 쫓아냈다. 그러나 정체 모를 이방인이 말을 하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네가 새로운 후작인가?”

한여름에 겨울바람을 맞이한 느낌이었다. 피가 차가운 뱀이 귓불을 핥은 느낌이었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내게 볼 일이 있나.”

“네 아비가 한 약속을 지켜라, 후작.”

“이놈! 감히 후작님 앞에서...!”

새 후작에게 잘 보일 기회만 찾던 젊은 기사가 메이스를 빼들었다. 그러나 두 번 다시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이방인의 낫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젊은 기사 목이 잘리고, 핏물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농부가 낫질하듯, 대장장이가 망치질하듯 자연스럽게 사람을 죽였다. 볼프 후작은 핏물이 주위 사람을 덮친 뒤에야 ‘살인’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주, 죽었어!”

“이놈이! 가, 감히...!”

이방인은 대형낫을 세우고 속삭이듯 말했다.

“피로 맺은 계약은 그 피가 다할 때까지 지속된다.”

“너는...”

이제 토너먼트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볼프 후작은 롱소드를 뽑아 경계했다. 조금 전 솜씨를 봐서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다. 이방인은 한결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계약을 이행하라.”

볼프 후작은 마른침을 삼키고 상대를 떠보았다.

“...싫다면?”

“후회할 것이다.”

피잉-!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 이어서 살을 지지는 듯한 통증이 따라왔다. 마상시합을 위해 분리해놓은 허벅지에 쿼럴이 꽂혔다.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상했지만, 고통보다 놀라움이 더욱 컸다.

“어째서...?”

볼프 후작의 종자가 시위 풀린 크로스보우를 겨냥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잘 못 쏜 건 아닌 것 같군.’

기사 종자의 얼굴에는 사람을 쏘았다는 흥분도, 주군을 공격했다는 긴장도 보이지 않았다. 밀랍으로 빚은 인형처럼 무표정했다.

‘마법인가?’

볼프 후작을 3년간 보필한 종자였다. 마법이 아닌 이상 이런 돌발행동을 할 리 없다.

기사 종자는 러그(Lug: 쇠뇌의 시위를 당기는 장치. 지렛대처럼 사용한다)를 꺼내 시위를 당겼다.

“내가 사과하마!”

볼프 후작은 눈 뜨고 당할 수 없어 기사 종자의 목을 쳤다. 기사 종자의 얼굴은 땅에 떨어지는 순간까지 무표정했다.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

볼프 후작은 이방인을 향해 롱소드를 겨누고 소리쳤다.

“네 이놈! 어디서 사특한 수작을...!”

그리고 이방인을 베기 위해 전투마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허나, 크로스보우를 가진 것은 기사 종자만이 아니었다. 볼프 후작의 수행원이 일제히 쿼럴을 장전했다.

백지처럼 하얀 얼굴이 꼭 시체들 같았다.

“...젠장.”

@

로벨은 볼프 후작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했다. 고지식한 기사라면 농담으로 치부할 허무맹랑한 이야기지만, 로벨에게는 남 일이 아니었다.

“그자의 정체를 아시오?”

“아니오. 나도 모르오.”

“마도의 수호자에요!”

마녀 키르케가 지팡이를 꼭 끌어안고 소리쳤다. 로벨과 볼프 후작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볼탄 반도의 귀족 아가씨들이 가장 선망하는 기사 1위와 2위가 함께 쳐다보니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자를 아시오, 레이디?”

마녀 키르케는 '레이디'란 호칭에 몸을 벨벨 꼬았다. 그래도 대답을 잊지 않았다.

“낫을 가지고 심령을 부리는 자라면 한 명밖에 없어요. 죽음의 관리자, 영혼의 수확자, 사자의 인도자, 그림 리퍼(Grim Reaper)에요.”

“그림 리퍼라면...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사신이잖아?”

기사와 용병이 모두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거 죽을 때 되면 나타나는 유령 같은 거 아니오?”

“그게 실존하는 거였소?”

“으앗! 귀신은 싫은데!”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손잡이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요정의 왕도, 늑대의 기사도 실존하는데, 사신도 나올 만하잖아.”

볼프 후작이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요정의 왕? 늑대의 기사?”

마녀 키르케가 수염을 더듬는 시늉하며 자랑했다.

“어험! 우리 기사님은 마도의 수호자랑 싸워서 이긴 전적이 있답니다.”

“그런 괴물을 이겼다고? 아니, 그 전에 그 괴물이 몇이나 더 있다는 것인가?”

“숫자로 따지면 수백이 넘지만, 현세에 활동하는 마도의 수호자는 그리 많지 않을 거예요. 아마도 다섯은 넘고, 열은 안 될 걸요.”

“다섯도 충분히 많군!”

볼프 후작은 치를 떨며 중얼거렸다. 로벨은 문뜩 궁금해져서 질문했다.

“마도의 수호자와 악마추종자가 같은 거야?”

“아니에요. 마도의 수호자는 인지의 세계에서 넘어온 초자연적인 존재에요. 인간의 믿음에서 비롯된, 에, 그러니까 옛 신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존재죠. 음, 정말 신적인 힘을 가진 것은 아니니까, 반신이라고 해야겠죠.”

“요정의 왕, 늑대의 기사, 뱀파이어 군주, 사신 그림 리퍼라... 그렇군.”

로벨은 마도의 수호자의 공통점을 찾았다. 옛날이야기나 괴담으로 전해지는 존재들이었다.

“그럼 악마추종자는?”

“그들은 마도의 수호자와 소통하는 마법사들이에요.”

“마도의 수호자의 부하인가?”

“전혀 아니에요.”

마녀 키르케는 마법사의 일원으로 반박했다.

“마법이란 인지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을 실체의 세계로 끄집어내는 작업이에요. 마도의 수호자는 인지의 세계에 존재하니까, 마법사와 교류하는 것뿐이에요.”

고귀한 후작과 조금 고귀한 남작과 미천한 용병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이해한 사람이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마녀 키르케는 답답한 듯 발을 한번 굴리고 말했다.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기사님은 칼과 갑옷을 쓰지만, 대장장이의 부하가 아니잖아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의미였어?”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칼잡이들이 별거 아니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벨은 머리를 열심히 굴려서 핵심을 짚었다.

“마도의 수호자는 칼을 휘두르는 기사고, 악마추종자는 칼을 만들어내는 대장장이란 말이지?”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얼추 맞아요. 악마추종자가 아니면 마도의 수호자가 현세에 나타나지 못할 테니까요.”

로벨은 볼프 후작을 보며 활짝 웃었다. 볼프 후작은 성 정체성을 흔드는 로벨의 미소에 당황했다.

“왜, 왜 그리 웃으시오?”

“그 괴물들을 상대할 방법이 나오지 않았소.”

“방법?”

“악마추종자를 모조리 제거하는 거요. 그리하면 괴물들은 인지의 세계란 곳으로 사라지지 않겠소.”

로벨은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말했지만, 볼프 후작, 허풍쟁이 제이콥, 발가락 슈미츠, 심지어 마녀 키르케까지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

볼프 후작은 검은 성에 머물 수 있게 배려해주었지만, 로벨은 정중히 거절하고 사트로 시내로 나왔다. 마녀 키르케와 두 용병은 깨끗한 성에서 쉬지 왜 사서 고생이냐고 투덜거렸다.

“잊었어?”

“뭘 말입니까요?”

“저기 적진이잖아.”

볼프 후작은 믿을 수 있지만, 볼프 후작의 아랫사람들은 믿을 수 없었다. 악마추종자, 혹은 악마추종자에게 매수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그렇군요.”

“고블린을 조종하는 악마추종자를 잡아야 해. 그자를 심문해서 후작령에 뿌리내린 악마추종자 세력을 솎아내고, 에릭 공작을 모함한 자를 찾아 정통성을 회복시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정통성 전쟁도 끝내고, 사트로 후작가와 전쟁도 막을 수 있어. 모두모두 행복한 결말이야.”

“일자리 잃은 용병 떨거지만 빼고 말입죠.”

발가락 슈미츠가 구시렁거렸다. 전쟁이 끝나면 소금광산과 뉴 로드릭 마을을 합쳐 총 170명이나 되는 울프 용병단을 유지할 이유가 없었다.

“걱정하지 마. 어린 집사는 가시성과 바위성으로 파견 보낼 생각이니까.”

“엥? 무슨 말씀입니까요?”

“켈트 경과 바이란 경을 장미성으로 돌려보내면, 두 성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잖아?”

로벨의 말에 발가락 슈미츠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자 허풍쟁이 제이콥이 초를 쳤다.

“그것도 안 죽고 살아남을 때 이야기지. 기사 나리, 그 몹쓸 악마추종자를 잡을 방안이 있습니까요?”

로벨은 전투마의 목덜미를 두드리며 말했다.

“물론이야.”

로벨이 자신감을 보이자 일행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 역시 기사 나리셔! 어떤 방법입니까?”

로벨은 기대에 부응했다.

“사람들한테 물어보는 거야.”

“......”

@

허풍쟁이 제이콥은 사트로 시티 인구가 2만 명 가까이 되는데 일일이 물어서 어떻게 찾느냐고 항의했다. 그러나 로벨의 계산은 달랐다.

“잉그비아 왕국인이잖아. 이 도시에 잉그비아 왕국인이 많을까?”

“으음... 분명 외국인을 타켓으로 하면...”

“그리고 마법사잖아. 정체를 숨긴다 해도 선원이나 잡부로 일하지는 않을 거야. 의사, 점쟁이, 재주꾼 같은 일을 하겠지. 그냥 한량일 수도 있고.”

“잉그비아 왕국 출신의 전문직 종사자라. 확실히 수가 많지는 않겠군요.”

“마법사라도 밥은 먹을 테니까, 식당이나 식료품 상인을 상대로 탐문하면 될 거야.”

“오오! 그리 말씀하시니 금방 찾을 것 같습니다!”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쾌활하게 말했다.

“그렇지? 그럼 시작해.”

“시작하라니요?”

“탐문.”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았다.

“...지금 바로요?”

“응.”

“밥도 안 먹고요?”

“식당 갈 거잖아? 밥 먹으면서 물어보는 게 좋아. 여기 10페닝 줄게. 열심히 해.”

로벨은 동전을 한 움큼씩 나눠주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7페닝이라고 소리쳤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용병을 쫓아내고 손을 흔들었다. 마녀 키르케가 불안한 눈으로 로벨을 올려다보았다.

“저도... 가요?”

로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우린 따로 갈 데가 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