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95화 (95/605)

95화. 주군

95화. 주군

로벨은 머를 브릭 경, 펄프 대장, 마녀 키르케를 집무실로 불렀다. 어린 집사와 애꾸눈 볼포스가 자리에 없는 것이 아쉬웠다. 외팔이 더치는... 뭐, 외팔이 더치는 상관없다.

“켈트 경이 누구랑 싸울까?”

“주군은 아닐 겁니다. 감히 그럴 리가 없지요.”

머를 브릭 경이 아부하듯이 싹싹하게 말했다. 그러자 펄프 대장이 대놓고 비웃었다.

“그런 당연한 소리는 빼고 말합시다.”

켈트 경과 바이란 경은 로드릭 가문의 봉신이었다. 에릭 공작의 이름으로 성을 하사할 수 없어 비롯된 충성이지만, 아무튼 대외적으로 로벨에게 충성하는 기사라 로벨을 공격할 수 없었다. 명분도 없이 충성맹세를 저버리면 포비아 왕국, 아니, 유라피아 대륙 어디에서도 기사로 살 수 없었다.

머를 브릭 경이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럼 잘난 용병대장 생각 좀 들려주시오.”

“당연히 페르젠 백작이 아니겠소?”

펄프 대장의 주장에 머를 브릭 경이 코웃음 쳤다. 사실 보리와 홉으로 맥주를 만든다고 말해도 코웃음을 칠 준비가 되어있었다.

“바위성의 군사력은 최대로 긁어모아도 100명에서 150명이오. 그 정도 병력으로 파도성을 공격한단 말이오? 켈트 경이 그쪽처럼 무지한 용병인 줄 아시오?”

“뭐요?”

“그리고 입조심 하시오. 나는 기사요. 주군께서 총애하는 울프 용병단 대장만 아니었으면...”

“아니면? 아니면 어쩔 거요? 용병 나부랭이한테 결투라도 신청하시겠소?”

젊은 기사와 늙은 용병이 으르릉거렸다. 여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싸우는 연적 같기도 하고, 주인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강아지 같기도 했다. 로벨은 두 사람을 건성으로 말리고 명령했다.

“머를 브릭 경은 영지로 돌아가시오.”

“허나!”

“펄프 대장은 바위성을 감시해. 켈트 경이 무슨 생각인지 알아내야겠어.”

“가시성도 확인해야지 않겠습니까?”

에릭 공작의 명령을 받은 거면 가시성의 바이란 경도 같이 움직일 것이다.

로벨이 고개를 끄덕이자 펄프 대장은 울프 용병단을 소집하기 위해 벌떡 일어났다. 머를 브릭 경은 괜히 서운한 마음에 미적거리며 엉덩이를 떼었다. 그러나 한 사람, 마녀 키르케는 그대로 앉아있었다.

“그 기사님이 무슨 생각인지 쉽게 알아낼 방법이 있어요.”

“어떻게?”

“여기로 불러서 물어보면 되지요.”

머를 브릭 경이 가장 먼저 감탄하고, 로벨과 펄프 대장은 조금 뒤에 따라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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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키르케의 말은 ‘궁금하니까 물어보자’란 의미였지만, 로벨 등은 ‘부르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로벨에게 충성한다면 로벨의 소환에 응할 것이고, 충성할 마음이 없다면 무시할 것이다.

“가만. 페르젠 백작이 사용한 수법이잖아?”

“이 단순한 것을...”

“봉신을 거느린 적이 없다 보니까.”

로벨은 켈트 경과 바이란 경에게 소환장을 보냈다. 그리고 사흘 뒤 심각한 고민에 잠겼다. 두 기사에게서 아무 답장도 오지 않았다.

“역시인가?”

“역시는 역시군요.”

로벨은 화가 났다. 반쪽짜리 충성이라도 충성인데, 이처럼 자신을 무시할 줄 몰랐다.

로벨은 상대를 바꿔서 장미성으로 편지를 보냈다. 켈트 경과 바이란 경의 행동이 심상치 않다는 뜻을 직설적으로 담았다. 걸음이 빠르다는 이유로 전령 역할을 맡은 마당발은 투덜거리며 사흘 치 식량을 챙겨 출발했다. 그 사이 켈트 경이 120명의 병사를 움직였다.

로벨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울프 용병단을 대기시켰다. 그러나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켈트 경은 바이란 경의 가시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로벨은 허풍쟁이 제이콥의 보고를 받고 중얼거렸다.

“가시성이라고?”

“제가 두 번 세 번 확인했습니다요. 가시성으로 진군 중입니다. 가만있자, 지금쯤 도착했을 것 같습니다요.”

펄프 대장 이하 울프 용병단 소대장들이 일제히 소란을 피웠다.

“그럼 내분이잖아?”

“미친 거 아니야?”

“그러게 평소 사이좋게 좀 지내지.”

마지막 말은 마녀 키르케였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마녀는 목을 움츠리고 말했다.

“어쩌면 가시성과 바위성의 싸움이 아니라, 장미성과 기사님의 싸움일지도 몰라요.”

“어째서?”

“두 기사님이 싸우는 이유를 모르잖아요?”

펄프 대장이 “이유를 모르는 게 왜 우리 싸움이오?” 등을 질문했지만, 마녀 키르케는 납득할 만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로벨은 켈트 경과 바이란 경을 떠올리고, 이어서 에릭 공작을 생각했다. 지난날 에릭 공작이 말했다.

“힘이 없어서 충성할 뿐이라...”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둘 중 한 명이 변심한 거야.”

“흐음. 그럴 수도 있겠군요.”

펄프 대장은 그럴듯하다고 생각하고 다시 물었다.

“어느 쪽이 배신했을까요?”

“글쎄...”

그 답은 다음날 나왔다. 에릭 공작은 켈트 경을 도와 바이란 경을 처벌할 것을 명령했다. 즉, 변심한 것은 가시성의 바이란 경이었다. 그러나 로벨은 바이란 경을 질타할 수 없었다. 켈트 경이 로벨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고 군사를 일으킨 이유와 동일했다.

바이란 경은 에릭 공작에게서 떨어져 나와 로벨 로드릭에게 ‘진심으로’ 충성하기로 맹세했다. 에릭 공작과 켈트 경의 요구를 거절한 것이다.

로벨은 허풍쟁이 제이콥과 마당발 벤의 보고를 차례로 받고 고민에 빠졌다. 마녀 키르케가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배신은 배신인데, 기사님에게 충성하는 배신이네요.”

“켈트 경이 영주님이 몰래 전쟁을 준비한 이유가 이것이군요.”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가죽 손잡이를 만지다가 메이스 모양으로 조각된 폼멜로 손을 옮겼다.

“울프 용병단의 출진준비가 끝났지?”

“사흘 전에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입니다.”

“가시성으로 가자.”

로벨이 메인 홀 의자에서 일어났다. 펄프 대장이 화급히 따라붙었다.

“켈트 경과 바이란 경은 영주님의 봉신입니다. 어느 쪽 편을 들어주실 생각입니까?”

“안 들어.”

“그, 그럼 왜 출진을...?”

“편들진 않아도 중재는 할 수 있잖아.”

로벨은 메인 홀을 성큼성큼 지나 손수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완전무장한 울프 용병단이 삼삼오오 모여 잡담하다가 로벨을 보고 침묵했다. 로벨은 충직하고 강인한 용병들에게 명령했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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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전부 소집해서 가시성으로 출진했다. 로벨과 마녀 키르케를 포함해 총 114명이었다.

숫자만 보면 켈트 경과 바이란 경의 병사보다 적지만, 전원 전쟁전문 용병으로 구성된 만큼 농민병으로 머릿수를 채운 두 기사의 군대와 비교할 수 없었다. 더욱이 로벨 로드릭과 울프 용병단의 명성은 평범한 용병단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적어도 볼탄 반도에서는 맞설 군대가 없었다. 두 기사가 합심해서 덤벼도 로벨과 울프 용병단의 상대가 되지 못할 터였다.

로벨은 전투마를 몰아 울프 용병단 선두로 나왔다.

가시성의 울퉁불퉁한 성벽 위아래로 이유 없는 살의를 주고받는 수 백 명의 병사가 있었다. 성벽에 위태롭게 걸린 사다리와 균형이 안 맞는 공성탑과 성문과 함께 찌그러진 충차와 기름이 타는 검은 연기가 배경으로 잘 어울렸다.

“꽤 치열하군.”

“순수한 사람이 화내며 무서운 법이니까요.”

로벨과 울프 용병단의 출현을 눈치 못 챈 듯 치열한 공성전이 이어졌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저깟 놈들한테 무시 받는다고 투덜거렸다. 로벨도 무시 받고 싶지 않았다.

“나팔.”

코골이 바디와 몇몇 용병이 청동으로 만든 군용 나팔을 꺼냈다. 로벨이 고개를 끄덕이자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주둥이에 토해냈다. 부우우웅-! 부우웅-! 금속관에서 뿜어져 나온 웅장한 소리가 전장의 소란을 뒤덮었다. 성벽 위에서 돌을 던지던 가시성의 농민병도, 사다리에 매달려 클리버를 휘두르던 바위성의 용병도 동작을 멈추고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저, 저건 또 뭐야?”

“적인가? 아군인가?”

펄프 대장은 기수의 깃발을 빼앗아 요령 좋게 좌우로 흔들었다. 천이 크게 펄럭이며 로드릭 가문의 문장을 펼쳤다. 귀족 가문을 잘 모르는 시골 농민도, 먼 곳에서 온 외지 용병도 깃발 보험으로 유명한 로벨 로드릭의 문장은 알아보았다.

“로벨 로드릭 남작이다!”

“그럼 저놈들은...”

“맞아! 울프 용병단이야!”

전장을 굽어보는 울프 용병단의 모습은 동네 꼬마들의 주먹다짐을 내려다보는 기사의 모습과 닮았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깃발을 흔드는 것으로 전쟁을 끝냈다. 켈트 경의 군사는 눈치를 보며 물러났고, 바이란 경의 병사들은 한숨을 쉬었다. 마녀 키르케가 우울하게 물었다.

“이제 어쩌죠?”

로벨은 두 꼬마를 지칭하며 말했다.

“화해시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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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 경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항의했다.

“경이 참견할 일이 아니오!”

로벨은 켈트 경의 호칭이 신경 쓰였다. 주군(Lord)이 아니라 경(Sir)이라 호칭했다. 바이란 경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질책했다.

“주군께 무슨 말투인가! 충성맹세를 벌써 잊었는가!”

“충성을 저버린 것은 경이 아니오!”

펄프 대장은 막사 밖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봐도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기사와 로벨 로드릭 남작의 기사였다. 충성하는 대상이 다르니 타협이 되지 않았다.

‘기사 나리들도 피곤하게 사는구만.’

로벨은 상황을 간단히 정리했다.

“나는 에릭 프란시스 공작에게 충성하오.”

로벨의 선언에 켈트 경의 호흡이 빠르게 진정되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그리고 경들은 내게 충성하지.”

로벨은 켈트 경에게서 바이란 경으로 시선을 옮겼다.

“도대체 뭐가 문제요?”

그러나 켈트 경이 대답했다.

“반역자를 공격하지 않은 것이 문제요!”

“바이란 경 말이오?”

“아니오! 페르젠 백작 말이오!”

로벨은 지금 상황에서 페르젠 백작이 거론된 이유를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켈트 경은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쓰며 말했다.

“로벨 로드릭 남작, 남작에게는 충성을 바치는 기사와 잘 훈련된 용병단이 있소. 그리고 2천 명이 넘는 영지민을 부릴 수 있지. 왜 페르젠 백작을 공격하지 않는 것이오?”

로벨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이유는 수도 없이 말할 수 있지만, 무엇을 말해도 켈트 경이 납득하지 않을 듯했다.

“적을 치기는커녕 반역자인 헤르만 백작과 에디즈 자작을 도와 도반 도트넘 백작을 몰아내지 않았소. 경의 저의를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소?”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손잡이를 꽉 쥐고 켈트 경의 급소를 공격했다.

“경들에게 성을 준 것이 누구인지 떠올리시오.”

“물론... 그것은 고맙게 생각하오.”

켈트 경이 주춤하자 바이란 경이 역공을 가했다.

“바로 그거요! 내게 영지를 하사한 것을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아니라 로벨 로드릭 남작이오! 기사가 땅을 내려준 주군에게 충성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오?”

“닥치시오!”

두 기사가 다시 칼자루를 쥐었다. 갑옷이 아니라 평복이었으면 멱살을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지금 기세면 갑옷도 꾸겨서 멱살 잡을 듯했다. 그만큼 뜨겁고 험악했다.

로벨은 켈트 경의 말을 정리해서 차분히 물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께서 허버트 페르젠 백작을 공격하라고 지시했소?”

“본인이 생각한 것이오. 그러나 바이란 경은 반대했지.”

“바이란 경의 생각은?”

“주군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그 주군이 에릭 공작을 지칭하는지, 로벨을 지칭하는지 모호했다. 로벨은 상황이 정리되자 한결 편하게 중재할 수 있었다.

“페르젠 백작을 죽인다고 전쟁이 끝날 것 같소?”

“물론 아니오! 헤르만 백작과 에디즈 자작도 처단해야지! 반역자가 모두 사라져야 전쟁이 끝나오!”

“그러면 또 다른 영주들이 들고일어날 뿐이오. 벌써 그런 조짐이 있소.”

로벨은 행상인과 자유민 농장을 약탈하며 몸을 불리기 시작한 영주들을 지적했다. 로벨이 행상인을 보호하는 것은 공장 건설을 위한 자금 마련인 동시에 새로운 세력이 출몰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주군의 뜻은 무엇이오.”

로벨의 호칭이 돌아왔다. 로벨은 자신감을 보이기 위해 억지로 미소 지었다. 조금 어색하지만 무표정보단 나았다.

“에릭 공작의 정통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최우선이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윌리엄 프란시스 공작의 적법한 후계자이며, 볼탄 반도의 정당한 주인임을 인정받으면 반역자들은 절로 고개를 숙이고 도적들은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오.”

“그것을... 어찌한다 말이오.”

“정통성을 해친 자를 찾아 자백 받으면 되오.”

“옛 신의 사제를?”

“그리고 옛 신의 사제를 조종한 류트 공자와 악마추종자 일당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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