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94화 (94/605)

94화. 전설

94화. 전설

로벨은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나란히 놓고 숫돌을 내려놓았다. 이 전설적인 칼들은 이름값을 과하게 했다.

‘손댈 게 없잖아.’

무기를 손질하는 것은 직업인 동시에 취미였다. 칼을 날카롭게 갈고 광이 나게 닦을 때 정신이 집중되고 심신이 안정되며 자신감이 차올랐다.

‘에이!’

로벨은 숫돌을 치우고 기름 주머니를 꺼냈다. 그런데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최근에 일이 많아서 신경 쓰지 못했다. 로벨은 고개를 돌려 어린 집사를 불렀다.

“혹시 창고에 정향유가...”

어린 집사의 자리를 차지한 아야가 하품하며 돌아보았다.

“아?”

로벨은 건망증을 탓했다. 어린 집사는 사흘 전 애꾸눈 볼포스, 외팔이 더치 등과 함께 버팅거 시티로 떠났다. 공장이란 것이 돈만 주면 뚝딱 생기는 것이 아니라, 부지를 확보하고, 시설을 준비하고, 인부를 고용하고, 판로를 개척해야 했다. 어린 집사가 아무리 유능해도 여름까지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고기와 채소를 절이는 식품공장이라 자본과 기술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린 집사의 주장대로 염색공장을 차렸으면 큰코다쳤을 것이다.

“창고에 정향유가 있으려나.”

로벨은 무안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야는 다시 하품하고 앞다리에 턱을 괴었다.

로벨은 보물 1호와 2호가 된 명검들을 챙겨서 집무실을 나왔다. 마녀 키르케가 점심을 준비하는지 주방에서 맛있는 냄새가 올라왔다. 계단을 내려가자 이야카가 헥헥 거리며 뛰어왔다. 마녀에게 재롱을 피우다 왔는지 입가에 뭐가 잔뜩 묻어있었다. 로벨은 이야카의 주둥이를 대충 닦아주고 메인 홀을 지나 성 밖으로 나갔다.

“그래 가지고 고양이 한 마리 잡겠냐?”

“고양이는 개가 잡아야죠.”

“개가 없으면 늑대가 잡고.”

“으하핫! 이 녀석들! 말본새가 아주 귀여운데?”

“귀여워서 경동맥이 끊어질 때까지 깨물어 주고 싶네.”

로드릭 마을의 꼬마들이 성으로 놀러 왔다. 그 꼬마들과 정신연령이 비슷한 용병들은 자신의 무기를 쥐여 주고 찌르는 법과 휘두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로벨은 부모들이 보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뭐해?”

“앗! 기사 나리!”

“야, 내놔! 내놔!”

용병들은 자신의 무기를 되찾아 온몸으로 근면성실한 문지기임을 주장했다. 어린 집사나 펄프 대장이 보았다면 일단 정강이를 깠겠지만, 로벨은 성격상 혼내거나 훈계하지 못했다. 그냥 참거나, 그냥 죽이는 편이었다.

“혹시 기름 있어? 정향유나 동백유 같은 거.”

“정향유요? 그런 비싼 건 없습니다요.”

“양털유는 조금 있는뎁쇼.”

“그건 됐어.”

로벨은 자재창고로 걸어가다가 마음을 바꿨다. 어린 집사의 성격상 값비싼 정향유를 창고에 보관할 리 없었다. 어린 집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어린 집사의 방을 뒤지는 편이 좋을 듯했다.

“그렇다면...”

로벨은 어린 집사의 프라이버시를 약 2초에 걸쳐 충분히 고려한 후 1층 주방 옆에 자리한 어린 집사의 침실로 향했다. 그러나 난관이 남아있었다. 꼼꼼하고 의심 많은 어린 집사는 자리를 비우면서 방문을 3중으로 잠가놓았다.

로벨은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 다른 자물쇠를 앞에서 난감해 했다.

“기사님? 뭐하세요?”

고깔모자 대신 보닛(bonnet)을 두른 마녀 키르케가 기둥 뒤에서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로벨은 변명하듯이 중얼거렸다.

“뭐 좀 찾으려고. 중요한 건 아니지만...”

마녀 키르케는 로벨과 어린 집사의 방을 번갈아 보고 배시시- 웃었다.

“문 열어드릴까요?”

“어떻게?”

“으헤헷! 제가 마법사란 것을 잊으면 안 되죠!”

“오호?”

로벨은 기뻐하며 자리를 양보했다. 마녀 키르케는 어디선가 떡갈나무 지팡이를 꺼내 심호흡했다.

“자물쇠를 여는 마법이 있을 줄은 몰랐...”

“이야압!”

마녀 키르케는 이야카가 깜짝 놀라 뛸 만큼 우렁찬 기합을 지르며 자물쇠를 후려쳤다. 깡-! 기세만 보면 성문도 쪼갤 수준이지만, 현실은 지팡이를 놓치고 눈물을 찔끔찔끔 흘렸다.

“히잉... 아프다...”

로벨은 한심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조언했다.

“그런 마법이면 망치를 사용해.”

“망치를 쓰면 마법이 아니잖아요.”

로벨은 한숨을 짧게 쉬었다. 그러나 마녀 키르케의 마법은 끝나지 않았다.

“진짜 마법을 보여드릴게요. 으으으음! 짜잔!”

마녀 키르케는 앞치마에 손을 넣더니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그건 뭐야?”

“성에 갇힌 공주님을 구하기 위한 사전 준비! 보물창고부터 비밀통로까지!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마법의 열쇠 꾸러미입니다!”

마녀 키르케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한 마법이었다. 로드릭 성에는 보물창고도, 비밀통로도 없으니까.

“언제 그런 걸 만든 거야?”

“식자재 꺼낼 때마다 어린 집사한테 허락받기 귀찮아서 창고 열쇠를 몇 개 복사했는데요, 하다 보니 재미있어서 이것저것 다 복사했어요.”

“어린 집사가 알면 가만 안 있을 텐데...?”

“그럼 기사님이랑 저랑 둘만 아는 비밀로 해요.”

“컹!”

“아참! 이야카까지 셋만 아는 비밀로 해요. 쉿! 너 누나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 알았지?”

“컹컹!”

로벨은 주인 몰래 창고열쇠를 복사하고, 주인에게 비밀을 지키라 당부하는 마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심했다.

로벨은 마녀 키르케에게 손짓했다. 마녀는 착한 일 하고 칭찬을 기다리는 꼬마처럼 헤벌쭉 웃었다. 로벨은 칭찬 대신 열쇠 꾸러미를 빼앗았다.

“압수.”

“어? 왜요! 그거 만드는데 석 달이나 걸렸다고요!”

로벨은 “권력남용! 부당조치!” 따위로 항의하는 마녀 키르케를 무시하고 열쇠를 하나씩 맞춰보았다.

자물쇠는 고가의 물건이라, 가난한 시절이 길었던 로드릭 성에는 많지 않았다. 4, 5번 맞춰서 3중 자물쇠를 모두 풀 수 있었다. 로벨은 마녀 키르케의 솜씨에 감탄하고 어린 집사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린 집사에게 이 방을 내려준 이후 처음이었다.

마녀 키르케도 어린 집사의 방에 처음 들어온 듯 감탄했다.

“서재보다 책이 많아요!”

책장이 모자라 책상, 선반, 방 모퉁이까지 종이뭉치가 쌓여 있었다. 로벨은 산더미처럼 쌓인 종이들을 훑어보고 말했다.

“책이 아니야.”

로드릭 마을의 인구와 가축을 기록한 촌적부, 뉴 로드릭 마을의 농지면적과 생산량을 정리한 장부, 소금광산의 생산량과 소금값 변동에 따른 통계, 분기별 지출 현황, 울프 용병단 계약서, 푸른고래 호 계약서, 아만다 마을주민의 체납현황, 가시성과 바위성의 자원현황 등등. 로벨이 질겁할 숫자와 기호가 빼곡했다.

“이 많은 일을 혼자 하고 있단 말이야?”

로벨이 활약하면 할수록 어린 집사의 일거리가 늘어났다. 그런데도 불평 한 번 하지 않았으니 새삼 대단하고 대견했다.

로벨은 서랍을 뒤져서 기름 주머니를 찾았다. 뚜껑을 열어보니 상쾌한 냄새가 났다. 검소하고 절약정신이 투철한 어린 집사가 사용할 물건이 아니었다. 로벨을 위해 구입한 최상품 정향유였다. 마녀 키르케가 코를 벌렁거리며 중얼거렸다.

“어린 집사는 기사님을 정말 좋아하나 봐요.”

로벨은 방에서 나가자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나도 집사를 좋아해.”

@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수직으로 세웠다가 수평으로 뻗었다. 새하얀 칼날이 햇살이 쪼개어 알갱이를 뿌렸다.

아론다이트(Arondight). 기사 버팅거가 호수의 요정에게 받아 사악한 용을 처치한 전설의 검.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부터 창작인지 고찰할 필요가 있었다.

‘드래곤이 존재할 리 없잖아.’

마녀 키르케가 들으면 ‘오우거랑 트롤은 존재하는데, 드래곤은 존재하지 않아요?’ 라고 물었을 것이다. 로벨은 그 이유를 설명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까.’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위로 쳐올린 후 발을 한발 내딛고 어깨를 당겨서 한 바퀴 돌렸다. 자연스럽게 가로베기로 이어졌다.

‘그래도 좋은 검이야.’

크게 한 번 휘두르고, 작게 두 번 때리고, 한 발 빼며 찌르기로 마무리했다. 멋진 검무였다.

로벨은 가상의 적을 도륙한 후 아론다이트를 좌우로 털어 칼집에 넣었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이며 용병들에게 말했다.

“어때? 참 쉽지?”

“어딜 봐서!”

“저걸 따라하라고?”

“안 해! 안 해!”

로벨에 한 수 배우고자 옹기종기 모인 용병들은 짜증처럼 보이는 감탄을 토하고 자리를 떠났다. 검광이 사방팔방으로 번쩍번쩍해서 뭘 했는지 조자 알 수 없었다.

로벨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남은 제자를 살폈다.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마녀 키르케와 입을 다물지 못하는 꼬마들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늑대 남매뿐이었다. 마녀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그걸 하면 기사님처럼 무적이 될 수 있나요?”

로벨은 고민 후 대답했다.

“칼과 칼이 싸울 때는 지지 않아.”

“칼이 싸울 때요?”

“결투할 때 말이야.”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다시 뽑아 천천히 휘둘렀다.

“칼로 할 수 있는 공격은 9개가 전부야. 내려치기, 좌상베기, 좌베기, 좌하베기, 올려치기, 우하베기, 우베기, 우상베기, 그리고 찌르기. 폼멜로 때리거나, 가드로 밀치거나, 발로 차거나, 머리로 박는 변수를 쓸 수도 있지만, 그래도 결정적인 공격은 9가지에서 벗어나지 못해.”

머리가 큰 꼬마가 마녀를 따라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그 9개만 할 줄 알면 영주님처럼 되나요.”

“그건 아니야.”

로벨은 어깨를 조금 떨구었다.

“칼과 칼로 싸울 때, 갑옷이 없이 싸울 때만 유용해. 상대가 활을 쏘거나 창으로 찌르면 소용이 없어.”

“치사하다!”

“싸움에는 치사한 게 없어.”

소심해 보이는 눌린 머리 꼬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기사님이 될 수 있나요?”

로벨은 기사 가문에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의 질문은 아닐 것이다.

“갑옷과 말이 있어야 돼.”

“갑옷이요?”

“말은 비싸잖아요!”

“그래서 기사들은 부자군요?”

로벨은 더 이상 설명할 것이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My Lord! My Lord!”

로벨은 기사의 조건, 즉 갑옷과 말을 갖추고 등장한 사람을 보았다. 로벨의 첫 번째 기사이자 아만다 성의 주인인 머를 브릭 경이었다.

로벨은 어엿한 기사인 머를 브릭 경의 체면을 생각해 정중히 맞았다.

“머를 경? 경이 무슨 일이오?”

머를 브릭 경은 마녀 키르케와 꼬마들을 곁눈질했다. 의미가 분명한 눈짓이라 어지간히 눈치가 없는 꼬마 한 명 빼고는 알아서 떨어졌다. 그리고 눈치 없는 꼬마도 형에게 귀가 잡혀 끌려갔다. 머를 브릭 경은 주위가 조용해지자 나직이 보고했다.

“심상치 않은 동향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바위성의 켈트 경이 영지민을 징집해 군사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로벨은 어리둥절해서 대꾸했다.

“그게 왜? 그럴 수 있잖아?”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쉰 명의 용병을 고용하고, 화살을 대량으로 제작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해서 조사했더니, 토지세를 두 배로 올려 수확이 끝난 보리를 징발 중이라 합니다.

로벨은 머를 브릭 경이 왜 완전무장하고 찾아왔는지 알았다.

“경의 생각은?”

물으나마나한 질문이다. 머를 브릭 경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켈트 경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