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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93화 (93/605)

93화. 보험

93화. 보험

로벨은 기분이 아주 좋았다. 방방 뛰며 반겨주는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와 아야와 이야카 때문이기도 하고, 공사가 끝나 조용한 로드릭 성 때문이기도 하고, 허리에 찬 명검 아론다이트(Arondight)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 좋아요?”

“응!”

헤르만 백작은 호수성을 탈환한 로벨에게 감사의 뜻으로 서 버팅거의 검, 아론다이트를 선물했다.

어린 집사는 성을 찾아 줬는데 꼴랑 칼 한 자루 주냐고 투덜거렸지만, 펄프 대장이 성 한 채 값이라 넌지시 알려주자 탐욕에 빠졌다.

“그거 팔면 마구간도 수리하고, 건초창고도 짓고, 하인도 몇 명 고용하고...”

“안 돼.”

“영주님은 흐룬팅이 있잖아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와아! 욕심도 많아!”

로벨은 아론다이트가 마음에 쏙 들었다. 예리함은 흐룬팅보다 떨어지지만, 강도가 좋아 바위를 내려쳐도 이빨 하나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3.2피트 길이의 롱소드였다. 포클랜드 검술학회 공인 롱소드 마스터에게 정말 매력적인 요소였다.

로벨은 펄프 대장, 외팔이 더치, 마녀 키르케, 심지어 아야와 이야카에게도 자랑했다. 무기를 밥벌이 도구로 삼는 용병과 기사의 전설을 좋아하는 마녀가 부러워했다.

“저걸 팔면 밥벌이 할 필요가 없을 텐데...”

“그런 이유로 부러워하지 마.”

“호수의 요정과 만났어요?”

“...뱀파이어는 만났어.”

로벨은 어린 집사와 함께 로드릭 성을 한 바퀴 돌았다. 꼭 칼자랑 때문은 아니었다. 공사가 끝난 만큼 이것저것 살필 것이 많았다.

로드릭 성이 새롭게 단장했다. 기본 뼈대는 역사와 전통이 새겨져 있는 목재성이지만, 성문 옆에 높이 16피트짜리 석재 성탑을 쌓고, 석재 성벽으로 빙 둘렀다. 성 안은 지난날하고 별 차이가 없지만, 성 밖에서 보면 제법 그럴듯한 석재성처럼 보였다.

“여기 엉망이잖아요!”

아니, 성 안도 바뀐 것이 있었다. 공사에 쓰고 남은 폐자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돌 한 덩이, 나무 한 토막이 모두 영주의 것이라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폐자재라도 쓸모가 있었다. 깨진 돌을 투석무기로 사용할 수 있고, 부러진 나무는 장작이나 바리게이트로 사용할 수 있었다.

“돌은 성벽으로, 나무는 창고로 옮겨.”

“누가요?”

로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부들은 공사비를 아끼기 위해 해산시켰고, 울프 용병단은 전후 포상으로 휴가를 보냈고, 영지민은 봄 농사가 바빠 부르기 힘들었다.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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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소매를 걷고 돌과 나무를 하나하나 옮기기 시작했다. 고귀한 영주님이 구슬땀을 흘리자 보다 못한 펄프 대장이 성 아랫마을로 내려가 용병들을 잡아왔고, 늙은 촌장이 기겁해서 청년들을 스무 명 보냈다. 그 덕분에 그럭저럭 정리가 되어갔다.

로벨은 구유통에 머리를 박았다가 꺼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창공으로 가르며 푸른 물방울을 땅에 뿌렸다. 어린 집사가 질색하며 수건으로 꺼내들었다.

“그런 짓 좀 하지 마요! 체통이 없잖아요!”

“더워서.”

로벨은 어린 집사가 머리카락을 닦는 동안 얌전히 앉아 기다렸다. 그러다 문뜩 어린 집사의 키가 부쩍 컸음을 깨달았다. 얼마 전만 해도 가슴 높이밖에 안 왔는데, 이제는 턱 아래까지 올라왔다. 로벨은 괜스레 부끄러워 아무 말이나 꺼냈다.

“우리 예산이 얼마나 남았어?”

“어엇!”

“왜?”

“아, 아뇨. 영주님이 예산에 관심을 가져서...”

어린 집사는 헛기침하고 말했다.

“상당히 빠듯해요. 이번 공사에 5만 7천 페닝이 소모되었어요. 게다가 푸른고래 호가 발이 묶여서 교역도 못했고요. 소금값이 조금 오르긴 했지만, 가격변동이 크지 않은 상품이라 대단하지 않아요. 역시 그 아론인지 아롱인지 팔아서...”

로벨은 괜히 물었다고 생각하며 허리를 끊었다.

“보리 수확이 끝나면 여유가 생기겠지?”

“그것까지 포함해서 3,500페닝 정도요.”

로벨은 좀 적다고 생각하다가 픽- 웃었다. 350페닝도 만지기 힘들던 때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갑자기 예산은 왜요?”

로벨은 호수성에서 줄곧 생각한 것을 방금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공장을 만들자.”

“그거 좋지요! 그런데 어떤 공장이요? 양조공장? 염색공장? 가만, 어디다 만들지가 더 중요하네요. 프란시스 시티가 좋긴 한데, 거긴 땅값이 너무 비싸고, 노스폴드 시티가 사트로 시티랑 페르젠 시티를 연결하니까...”

로벨은 머리 위에 방치된 수건을 치우고 말했다.

“버팅거 시티.”

“버팅거 시티요?”

“회색산하고 가깝잖아.”

영리한 어린 집사는 금방 이해했다.

“식품공장! 맞죠?”

“맞아.”

버팅거 시티 인근 지역은 버팅거 호수의 풍부한 수량 덕분에 농작물이 잘 자랐다. 순무, 배추, 토마토, 올리브 등등을 회색산의 소금으로 절이면 겨울과 봄에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볼트 헤르만 백작의 입김이 강한 곳인데, 뭐, 칼 한 자루로 끝나지 않을 공이 있으니까 문제없겠죠. 그럼 문제는 자금이군요.”

어린 집사는 턱을 괴고 중얼거리다가 로벨의 허리를 게슴츠레 쳐다보았다.

“역시 그 칼을 팔아서...”

“도, 돈 나올 곳이 있어!”

로벨은 어린 집사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빽! 소리쳤다. 어린 집사가 의아하게 보았다.

“어디서 돈이 나와요? 전쟁 때문에 토너먼트도 안 열리는데?”

“전쟁 중이니까 벌 수 있어.”

어린 집사의 표정이 의심에서 경악으로, 그리고 허무함으로 바뀌었다.

“설마? 진심이세요?”

“진심이야.”

어린 집사는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남들도 다 하는 짓이지만... 우리 영주님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아니지. 아니야. 지금까지 안한 게 이상하지...”

“무슨 소리야?”

“다른 영지를 약탈하려는 거잖아요?”

“아냐! 그 반대야!”

로벨은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음을 반성하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안 선장이 알려준 건데, 에르나 왕국에는 ‘해상보험’이란 것이 있다고 해.”

“저도 알아요. 해상무역에 실패하면 투자금을 일부 돌려받는 제도죠?”

“그거랑 비슷해. 로드릭 가문의 이름으로 행상인을 보호하는 거야.”

“그건 용병사업이잖아요?”

“아니야. 용병은 보내지 않아. 보낼지도 모르지만. 일단 보내지 않아.”

“무슨 소리에요?”

로벨은 생각을 다듬어서 단어로 내보냈다.

“로벨 로드릭의 이름으로 이 상인의 물자를 보호한다고 알리는 거야. 그래. 내 깃발을 주면 되겠다. 깃발을 보고도 상인을 해치거나 상품을 빼앗으면 그때 복수해주는 거지. 빼앗긴 것도 되찾아주고.”

어린 집사의 턱이 땅에 닿을 듯 떨어졌다. 로벨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믿기지 않는 발상이었다. 성장한 것은 어린 집사만이 아닌 모양이다. 로벨은 좀 더 고민한 후 말했다.

“꼭 행상인만 대상으로 할 필요는 없어. 자유민 농장이나 자유도시도 고려해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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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그랜드 챔피언. 무적무패의 기사. 하루에 하나씩 성을 점령하는 전쟁 전문가. 성 마르틴의 환생이라 불릴 만큼 고결하며, 정복왕 샘 포클의 재림이라 불릴 만큼 위대했다.

그 로벨 로드릭이 볼탄 반도의 행상인을 보호하겠다고 나서자 도적과 도적이나 진배없는 지방 영주들은 비상이 걸렸다.

펄프 대장은 살아온 날이 자신의 반도 되지 않은 젊은 기사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런 식으로 볼탄 반도를 장악하는군? 대단한 기사 나리야.”

볼탄 반도에서 힘깨나 쓴다는 대영주들이 엎치락뒤치락하다가 힘을 잃자, 자신을 통제하는데 미숙한 지방 영주들이 새로운 질서 정립을 위해 실력행사를 시작했다. 징발을 가장한 약탈과 관세로 포장한 수탈을 수시로 일삼았다. 그 탓에 로벨 로드릭 가문의 깃발을 흔들며 항의하는 행상인 부부 따위는 기억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신중했어야 했다. 남편을 죽기 직전까지 때리고, 아내를 의식이 잃을 때까지 강간하기 전에, 그들이 필사적으로 흔든 깃발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했어야 했다.

무적무패의 기사 로벨 로드릭이 100명의 용병단을 이끌고 쳐들어오기 전에 말이다.

로벨은 피를 묻힌 아론다이트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렇게 보면 기사의 피나 농민의 피나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펄프 대장이 케틀 햇을 벗어 옆구리에 끼고 보고했다.

“무기를 소지한 병사는 전부 체포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은?”

“지시하신 대로 성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로벨은 메인 홀에 모인 오토 남작의 병사들을 보았다. 겨울에 내린 눈처럼 하얀 얼굴들이었다. 하늘 같은 영주님이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다가 단칼에 목이 잘리는 것을 보았으니 어떤 기분일지 대강 짐작됐다.

로벨은 고민하고 또 고민한 후 결정했다.

“손가락을 잘라. 두 번 다시 무기를 쥐지 못하게.”

울프 용병단은 즉시 대거를 뽑았다. 병사들 사이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난 약탈한 적 없어! 난 아니라고!”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나참, 안 죽인다잖아. 손가락 두 개만 내놔. 어어? 반항하면 세 개 자른다?”

오토 남작의 메인 홀에 피바람이 몰아쳤다. 펄프 대장은 피곤한 듯 깊은 주름을 만들고 물었다.

“이 성은 어찌합니까?”

“불태워.”

펄프 대장은 내키지 않는 듯 잠시 침묵했다.

“...꼭 그렇게 해야 합니까?”

로벨도 내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렇게 해야 이 짓을 두 번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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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은 바람보다 빠르게 퍼졌다.

‘로벨 로드릭 남작이 보호하는 상인을 건드리면 영주는 목이 잘리고 영지는 잿더미가 된다.’

지방 영주들은 물론이고, 자유도시의 건달조차도 로드릭 가문의 깃발을 가진 행상인을 해코지하지 않았다. 볼탄 반도를 순회하는 행상인들은 앞다퉈서 로드릭 성을 찾아와 계약을 맺고 깃발을 받아갔다. 이것은 ‘깃발 보험’이라 불리며, 로벨 로드릭의 영향력이 볼탄 반도 전체로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덤으로, 행상인의 잦은 방문 덕분에 로드릭 마을이 크게 번화했다.

어린 집사가 깔깔거리며 로벨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지미가 여관을 차렸어요!”

“촌장의 사위?”

“옛날 집을 개조해서 투숙객을 받나 봐요.”

로벨은 코딱지보다 조금 큰 지미와 루시의 집을 떠올리고 중얼거렸다.

“장사가 될까?”

“영주님이 알현을 하루에 한 번씩 받으면 당일치기로 지나가겠지만, 그렇지 않으니까요. 행상인이 하루씩만 머물러도 금방 부자가 될 걸요?”

로벨은 반색하고 말했다.

“영지의 발전을 위해서 알현을 보름에 한번으로 줄이면 어떨까? 장사가 잘 될 거야.”

“헛소리마세요.”

“허, 헛소리...?”

어린 집사는 보기만 해도 눈이 핑핑 돌아가는 장부를 펼치고 설명했다.

“자금은 충분히 모였어요. 앞으로도 계속 들어올 테고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짭짤하게 벌 것 같아요. 누구 아이디어인지 정말 대단해요.”

“에헴.”

“2만 페닝 정도면 버팅거 시티에 공장을 지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자세한 것은 직접 가서 확인해야겠어요.”

“직접 가려고?”

“겸사겸사 회색산에 들려서 소금광산도 확인하고요. 능구렁이 같은 잭슨에게 맡겨놓았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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