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92화 (92/605)

92화. 집

92화. 집

로벨 로드릭 남작은 지난 1년간 지리멸렬하게 싸우던 호수성과 덩굴성을 단 이틀 만에 점령했다. 하루에 성 하나씩을 점령했으니, 볼탄 반도의 귀가 있고 눈이 있는 사람은 모두가 경악했다. 물론, 정상적인 상황과 정석적인 방법이 아니라 운이 상당 부분 차지했지만, 그렇다 해도 볼탄 반도 전쟁사에 유례없는 업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킬 수 있냐는 건데...”

호수성 성벽에 로드릭 가문 깃발이 걸리기 무섭게 도반 도트넘 백작군이 몰려왔다.

애꾸눈 볼포스는 전통에 남은 쿼럴을 세고 한숨을 쉬었다.

“맨몸으로 걸어와도 못 막겠군.”

“저쪽에 쿼럴이 좀 있던데?”

마당발이 무기고에서 활과 화살을 가져오며 말했다. 공짜라고 되는대로 쓸어온 듯 한 가득이었다.

“영주님은?”

“그 자작이랑 이야기 중.”

마당발은 롱보우의 시위를 하나씩 당겨보았다. 장력이 너무 강하면 금방 지치고, 장력이 너무 약하면 갑옷을 뚫지 못했다. 기사나 기사 종자를 잡을 것이 아닌 이상 50에서 55파운드 위력이 적당했다.

마당발은 적당한 롱보우를 고른 후 화살을 하나씩 손질했다. 애꾸눈이 핀잔주듯이 말했다.

“성 밖을 걱정할 상황이 아니야.”

“그건 그렇지.”

애꾸눈은 몸을 돌려 호수성의 연병장을 보았다. 총 187명의 장정이 무장한 채로 모여 있었다. ‘포로’가 된 에디즈 자작군이었다.

“저놈들까지 적이 되면 정말 답이 없다.”

최고 지휘관이 사로잡히고, 지휘권을 계승 받아야 할 기사들이 모두 죽은 상황에서, 그저 갈 곳이 없어 남은 병사들이었다. 말이 좋아 포로지, 사실상 대치 중인 적군이었다.

울프 용병단이 흔한 말로 일당백이라지만, 정말 100명을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그저 영주님을 믿는 수밖에...”

“그것도 그렇지.”

애꾸눈과 마당발은 로벨이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에디즈 자작을 상대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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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덕목 중에 강철 같은 체력과 비단 같은 감수성은 있을지언정 충분한 설득력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고등교육을 받은 젠트리들이나 챙기는 것이고, 기사는 오직 명령과 복종을 할 뿐이었다. 물론, 기사에게도 전통있는 설득기술이 하나 있었다. 둘 중 하나가 피를 봐야 끝나는 결투였다. 로벨은 기사의 설득기술에 강한 유혹을 느꼈다.

“다시 말하지만, 경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소.”

“글쎄. 명예와 죽음은 선택이 가능할 듯 하오만.”

로벨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로벨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 중인 에디즈 자작은 눈에 띄게 움찔했다. 부러진 코가 아직도 욱신거렸다. 로벨은 주먹을 풀고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아내와 어린 아들이 있지 않소.”

가족이 거론되자 코피와 함께 빠져나간 투지가 돌아왔다.

“내 가족은 무사하오?”

“가장 신뢰하는 부하에게 경호를 맡겼으니 걱정 마시오.”

외팔이 더치를 언제부터 신뢰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에디즈 자작은 힘을 빼고 얼굴의 반을 가린 붕대를 더듬었다. 코뼈가 부러지고 기사가 죽어서 억하심정에 강짜를 부리긴 했지만, 로벨의 말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로벨에게 협력하지 않으면 거점도 없이 도반 도트넘 백작과 싸워야 할 상황이었다.

에디즈 자작은 로벨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약속할 수 있소?”

“내 검을 걸고 약속하오.”

로벨은 흐룬팅을 뽑아 수직으로 세웠다. 생김새부터 범상치 않은 명검이라 신뢰가 가산되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에 맞서 싸우면 성과 가족을 고스란히 돌려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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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반 도트넘 백작군은 호수성과 절벽성과 덩굴성 사이에서 포위당했음을 깨달았다.

포위를 뚫은 가장 이상적인 전술은 각개격파지만, 상대가 성을 가지고 있다면 눈을 조금 낮출 필요가 있었다.

호수성의 병력은 로드릭 남작과 에디즈 자작 연합 200명, 절벽성의 병력은 로드릭 남작과 헤르만 백작 연합 250명, 덩굴성의 병력은 로드릭 남작군만으로 40명이었다. 이쯤 되자 공감능력이 평균 이상인 도반 도트넘 백작의 기사들은 분통을 터트렸다.

“로벨 로드릭! 이 빌어도 못 먹은 놈은 안 끼는 곳이 없구나!”

아무튼, 도반 도트넘 백작군의 최대 위기였다.

“안전제일주의라면 포위공격을 받기 전에 강철성으로 철수할 테고, 물불 안 가리는 성격이면 헤르만 백작 배후를 치기 전에 공격을 시작할 테지.”

“어느 쪽일까?”

“네 녀석이 백작이라면 어떡하겠냐?”

로벨은 크로스보우를 바삐 손질하면서도 한가한 입을 쉬게 두지 않는 울프 용병단을 내려다보았다.

“협상을 시도할 거야.”

“누구랑? 헉! 기사 나리!”

울프 용병단은 기척 없이 등장한 로벨에게 깜짝 놀라 소리쳤다. 시위를 묶기 전에 놓쳐 손가락에 피멍이 든 용병도 있었다. 젊은 용병이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협상이요?”

“이곳에 모인 세력은 우리까지 총 넷이야. 어느 한쪽만 끌어들여도 2대 2의 구도를 만들 수 있어.”

“누구랑 협상합니까요?”

“아마도...”

로벨은 말끝을 흐리고 성벽을 올라갔다. 울프 용병단은 어리둥절해서 고용주의 뒤통수를 쫓았다.

“아마도? 아마도 누구요?”

“영주님!”

성벽 위에서 도반 도트넘 백작군을 감시 중인 애꾸눈 볼포스가 소리쳤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정답이었다.

로벨은 애꾸눈 옆에서 도반 도트넘 백작군을 보았다. 인간들의 질서정연한 진형과 고블린의 부산스러운 집단이 확연히 구분되었다.

“사람이 올 거야.”

애꾸눈은 여타 용병보다 이해가 빨랐다.

“백기를 기다리십니까?”

“응.”

그날 저녁, 로벨의 짐작대로 도반 도트넘 백작이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협상하러 온 사람과 협상하는 방법은 예상과 달랐다.

로벨은 바람 한 점 없는데 꺼지는 촛불을 보고 롱소드를 잡았다.

“오랜만이오, 로벨 로드릭 남작.”

로벨은 고블린, 납치, 악마추종자, 북쪽 숲, 기사님 등의 단서에서 이자를 연상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뱀파이어의 군주 드라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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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만남이지만 수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사람이 있다. 기약은 없지만 언젠가 다시 볼 것 같은 사람도 있다.

“나를 기억하니 영광이오. 허나 소개를 다시 해야겠소. 오늘은 도반 도트넘 백작으로 찾아왔으니.”

“왜 강철성의 주인은 죄다 괴물이야?”

“괴물이라니, 너무하오. 우리 또한 근본은 인간과 다를 것이 없거늘.”

“인간 같지 않은 소리하네.”

뱀파이어의 군주, 도반 도트넘 백작은 종족과 직업과 성별과 나이에 맞지 않게 상큼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남작의 무용에 정말 감탄했소. 300년만 일찍 태어났으면 이 대륙에 다시없을 업적을 남겼을지도 모르겠소.”

로벨은 이 와중에도 쑥스러워하는 대범함을 보였다. 도반 도트넘 백작은 소리 내어 웃었다.

“아, 물론 남자로 태어났을 때 말이오.”

로벨의 표정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성난 늑대처럼 콧등이 일그러지며 벼락처럼 롱소드를 뽑았다.

“너... 어떻게 알았지?”

“직업상 처녀에게 민감해서 말이오. 그리 털 세우지 마시오. 로벨 로드릭 남작이 여자라는 것보다 도반 도트넘 백작이 뱀파이어라는 것이 더 큰 비밀이니.”

로벨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뱀파이어가 어떻게 낮에 돌아다니는 거야?”

“오랜 편견이오. 사냥하기 좋은 시간대에 활동할 뿐이지, 고운 해님과 사이가 나쁘지는 않소. 더불어 관에서 자지도 않고, 마늘을 싫어하지도 않소. 개울도 잘 건너다닌다오.”

“...말뚝은?”

“어느 동물이나 심장에 말뚝 박으면 죽소.”

로벨은 생물학자와 민속학자가 오랫동안 조사해온 뱀파이어의 진실을 들었지만, 관심이 없어서 금방 잊었다. 로벨은 롱소드를 겨냥한 채 물었다.

“나를 찾아온 이유는?”

도반 도트넘 백작은 칼끝을 유심히 보았다. 줄에 매달아 놓은 듯 작은 흔들림도 없었다. 로벨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늑대의 왕이 탐낼만하군.’

도반 도트넘 백작은 빙그레 웃었다.

“이미 짐작하듯이, 협상을 위해서요.”

“구체적으로?”

“본인의 목적은 볼트 헤르만 백작이오. 그 외에는 관심이 없소. 볼트 헤르만 백작을 처단하면 호수성을 양보하겠소.”

“뭐야?”

“아아, 나와 함께 싸우자는 뜻이 아니오. 지금쯤 절벽성에서 군사를 끌고 나왔겠지. 내가 그들을 상대할 동안 그저 잠자코 있기만 하시오.”

로벨은 어이가 없어 따졌다.

“그 말을 어떻게 믿어? 헤르만 백작군을 박살낸 다음에 나를 공격할지도 모르는데?”

“이런! 신뢰가 부족하군?”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을 신뢰할 리가 있나.”

로벨은 도반 도트넘 백작의 협상안을 기각하고 역으로 제안했다.

“이제 내 조건을 들어. 고블린과 트롤을 두고 강철성으로 돌아가. 그럼 추격하지 않겠어.”

“하하! 몬스터를 ‘두고’ 말이오?”

“당연하지! 내 땅을 공격할지도 모르잖아?”

로벨은 로드릭 성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더불어 300마리가 넘는 고블린이 뿔뿔이 흩어지면 헤르만 백작과 에디즈 자작의 군사를 지속적으로 소모시킬 수 있었다.

“남작도 인간이었군.”

“너희와 달리.”

“그래서 매력적이오.”

도반 도트넘 백작은 뭇 처녀들을 유혹한 매혹적인 미소를 짓고 돌아섰다. 로벨은 다급하게 물었다.

“잠깐! 그런데 왜 헤르만 백작을 죽이려는 거야?”

“볼트 헤르만 백작은 마도의 수호자와 맺은 계약을 져버렸소.”

“무슨 계약?”

“그건 말해줄 수 없소. 프라이버시가 있어서.”

도반 도트넘 백작은 소문 없이 등장한 것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로벨은 잠깐 동안 주위를 경계하다가 차갑게 식은 초를 다시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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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반 도트넘 백작은 약속을 성실히 이행했다. 기사와 용병만 이끌고 이탈했다. 주인을 잃은 고블린과 트롤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서로를 때리고, 할퀴고, 울부짖다가 헤르만 백작군이 등장하자 뿔뿔이 흩어졌다. 마당발은 롱보우의 시위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이걸로 끝난 건가?”

애꾸눈은 동의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일지도 모른다.”

“응?”

“이 전쟁은 헤르만 백작과 에디즈 자작의 전쟁이야. 도트넘 백작과 저 괴물들은 일종의 해프닝이었지.”

“어, 그런가?”

그러자 젊은 용병이 끼어들었다.

“그치만 우리 영주님이 계시잖아요. 영주님이 중재하면 백작이고 자작이고 싸울 생각을 못 하겠죠.”

애꾸눈은 젊은 용병을 보고, 거기에 동조하는 다른 용병들도 보았다. ‘로벨 로드릭’을 고용주나 용병대장 이상으로 여기는 어떤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긴, 이런 말도 안 되는 싸움에서 승리하니까.’

애꾸눈은 성벽 밖을 내다보았다. 헤르만 백작과 그의 기사들이 호수성으로 다가왔다. 그에 맞춰 로벨과 에디즈 자작이 성문 밖으로 나갔다.

‘자,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헤르만 백작과 손잡고 에디즈 자작을 처치해 덩굴성을 손에 넣을 수도, 에디즈 자작과 손잡고 헤르만 백작을 척결해 호수성을 손에 넣을 수도 있다. 혹은 백작과 자작을 모두 처치하고 볼탄 반도 동북부를 통째로 꿀꺽하는 모험을 벌일 수 있다. 만약 성공하면, 북서부 일대를 차지한 로드릭 영지와 합쳐서 볼탄 반도의 3분지 1을 지배하게 된다. 난세에 탄생한 정복왕... 아니, 정복영주가 되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시골 영주에서 볼탄 반도의 지배자라. 한 편의 서사시로군.’

그리고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애꾸눈 볼포스는 로벨 로드릭이란 기사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로드릭 남작, 에디즈 자작, 헤르만 백작이 말 머리를 가까이하고 숙덕숙덕 대화하기 시작했다. 총 500명의 병사들이 볼탄 반도의 역사가 걸린 회담을 지켜보았다.

얼굴을 마주해서 즐거운 사이가 아니라 회담은 아주 짧게 끝났다. 헤르만 백작이 군사를 뒤로 물렸고, 로벨과 에디즈 자작은 호수성으로 돌아왔다.

“오! 왔다! 내려가자!”

“잠깐! 같이 가!”

애꾸눈은 울프 용병단을 이끌고 로벨을 마중 나갔다.

“마로드!”

로벨은 에디즈 자작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후 애꾸눈에게 말을 몰았다. 얼굴이 강아지를 선물 받은 3살짜리 꼬마처럼 해맑았다.

“가자.”

애꾸눈은 혹시와 역시 사이에서 확인차 질문했다.

“어디로 말입니까?”

로벨은 정말 몰라서 묻느냐는 듯 활기차게 대답했다.

“집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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