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투구
91화. 투구
덜컹- 덜컹- 덜커덕- 덜컹-
로벨은 전(前)주인의 핏자국이 남아 있는 샐릿(Sallet:모자형 투구)을 만지작거리다가 머리에 푹 눌러썼다. 바이저를 내리면 얼굴 대부분을 가릴 수 있었다. 기사 종자 더블린을 잘 아는 사람이라도 가까이 와서 말을 걸기 전에는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늙은 말은 느리지만 끈기 있게 걸어갔다.
숲이라 부르기에는 앙상하고, 들이라 부르기에는 울창한 오솔길을 지나 산책하기 좋은 나지막한 언덕을 넘자 수평선이 보일 만큼 커다란 호수가 나타났다.
로벨은 셀릿의 바이저를 올리고 중얼거렸다.
“버팅거 호수야.”
짐칸을 덮은 방수포가 꿈틀거렸다. 볼탄 반도에서 가장 큰 호수로 요정과 기사의 전설이 살아 숨쉬는 명소였다.
‘키르케가 보면 좋아했을 텐데...’
버팅거 호수의 잔잔한 물결은 햇살을 수천, 수만 개의 알갱이로 쪼개어 별빛처럼 뿌렸다.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이 푸른 호수와 눈 덮인 나무하고 대비되어 실물 크기의 그림이 되었다. 호수의 요정을 사모해 한평생 독신으로 살았다는 기사 버팅거의 심정이 조금 이해되었다.
‘그 덕분에 후계가 방계로 이어져서 지금의 볼트 헤르만 백작이 나왔지만...’
로벨은 헤르만 백작을 떠올리고 잇소리를 냈다. 아름다운 동화에 현실이 묻으니 더 이상 아름답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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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호수를 따라 이동했다.
풍경은 아름답지만, 칼바람이 몰아쳐서 그리 즐거운 길은 아니었다. 방수포 안에서 숨 죽여 낄낄거리는 용병들이 부러웠다. 그러나 잠시 뒤 추위도, 수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에디즈 자작군이야.”
로벨은 호수성으로 통하는 관문에서 멈췄다. 로벨의 것보다 투박한 컴포지트 아머를 입고, 황소도 때려잡을 대형 플레일을 소지한 에디즈 자작의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는 로벨을 보고 대뜸 욕을 퍼부었다.
“이 굼벵이 자식! 지금이 몇 신데 이제야 와!”
로벨은 세 가지 이유로 안심했다. 하나는 덩굴성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하나는 자신의 변장이 그럴듯하다는 것이고, 마지막 하나는 마중 나온 에디즈 자작군이 10명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로벨은 고삐를 당겨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에디즈 자작의 기사와 병사들은 식량이 도착한 줄 알고 경계심 없이 수레 주위로 모여들었다.
로벨은 셀릿을 벗고 납작하게 눌린 머리카락을 털었다.
“너 뭐야? 더블린이 아니잖아?”
기사가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덩치에 비해서 조심성이 많았다.
“이놈! 더블린은 어디 갔느냐?”
로벨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친구는 못 올 거요.”
“뭐?”
“하지만 만나게 해줄 수는 있지.”
기사는 로벨의 정체가 심상치 않자 플레일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로벨이 좀 더 빨랐다.
“울프 용병단!”
애꾸눈 볼포스 이하 9명의 울프 용병단이 일제히 방수포를 걷고 일어났다. 그냥 일어나도 심장에 안 좋은 영향을 줄 텐데, 손에 쿼럴이 장전된 아바레스트와 크로스보우가 있어 기타 장기까지 심각한 손상이 우려되었다.
“저, 적이다!”
“정답!”
“쏴라!”
울프 용병단은 가장 가까운 병사에게 쿼럴을 쏘았지만, 애꾸눈 볼포스는 마침 투구를 안 쓴 기사를 표적 삼았다. 공들여서 깎고 다듬은 쿼럴이 기사의 오른쪽 눈으로 빨려 들어갔다.
“끄어어...”
기사는 멀쩡한 왼쪽 눈을 도르륵 굴리다가 풀썩 쓰러졌다. 애꾸눈은 아바레스트를 어깨에 걸치고 고용주의 입버릇을 흉내 냈다.
“그러게 투구를 써야지요.”
기사의 경우는 운이 좋았다. 애꾸눈만큼 사격 솜씨가 좋지 못한 울프 용병단은 주로 가슴을 노렸다. 뿌리가 쇠로 된 나무에 꽂힌 병사들은 단번에 죽지 못해 괴로워했다.
“으아앗! 적이다! 습격이다!”
옆 동료가 두 발을 맞아준 덕분에 목숨을 건진 에디즈 자작의 병사들이 무기를 꼬나들었다. 그러나 지휘관을 잃은 농민병은 울프 용병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울프 용병단은 짐칸에서 뛰쳐나와 갈피를 못 잡는 에디즈 자작군을 도륙했다. 칼에 찔리고 도끼에 찍혀서 먼저 간 기사를 따라갔다.
“살려줘! 살려줘!”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병사가 무기를 팽개치고 호수성으로 도주했다. 하지만 그냥 보낼 수 없었다.
“크로스보우 준비! 살려보내면 안 돼!”
애꾸눈은 장전이 오래 걸리는 아바레스트 대신 만만한 신입 용병의 크로스보우를 빼앗아 등자를 밟고 시위를 끌어당겼다.
“뭐야? 내 꺼야!”
“잠깐 빌리자.”
애꾸눈은 시위를 너트에 걸고, 쿼럴을 몸체에 올리고, 신중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일련의 과정이 10초가 걸리지 않았다.
“오우! 빠른데?”
쿼럴은 완만한 포물선을 그린 후 도망가는 병사의 등을 콕! 찔렀다. 멀리서 보면 가볍게 두드린 거 같은데, 당사자는 그리 느끼지 않는지 앞으로 고꾸라졌다.
“오! 명중이다!”
“좋아. 시체를 숨겨.”
로벨은 혹시 숨어있는 병사가 있는지 주위를 수색했고, 울프 용병단은 시체를 끌고 와 타고 온 수레에 차곡차곡 쌓았다.
“살려... 살려줘요... 나, 난 죽을 수...”
“어? 살아있네?”
숨이 붙어있으면 친절하게 숨통을 끊은 후 옮겼다. 그 과정에서 살인자가 할 법한 행동, 그러니까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다. 장작을 패듯 머리통을 쪼개고 시체를 쌓았다. 여러 명이 합심하자 금방 정리되었다.
로벨은 폴드런을 두드리고 서배튼으로 땅을 찬 후 발가벗겨진 에디즈 자작 기사를 씁쓸하게 보았다. 천성이 기사라 목숨을 빼앗은 것보다 무기와 갑옷을 빼앗은 것이 미안했다.
“영주님, 준비 끝났습니다.”
로벨은 죽은 병사의 갑옷으로 갈아입은 울프 용병단에게 명령했다.
“호수성에 잠입하자. 목표는 에디즈 자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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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성은 육각형으로 지어진 웅장한 석재성이었다. 육지 쪽은 높고 호수 쪽은 낮아 가장 작은 성탑과 성벽은 호수 아래에 잠겨있었다. 흡사 치맛자락을 살포시 들고 호수에 한쪽 발에 담근 소녀처럼 보였다. 멀리서 보면 호수에 성이 비쳐서 두 개의 성이 맞붙어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볼탄 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이라죠?”
“어라? 장미성이 아니었어?”
“난 폭풍성으로 알았는데?”
“지들 성이 가장 아름답다고 우기니까.”
로벨은 울프 용병단의 잡담을 듣고 한마디 했다.
“로드릭 성이 가장 예뻐.”
“에이, 그건 아니죠.”
“그건 좀...”
“아야와 이야카가 웃겠습니다요! 으헤헷!”
울프 용병단은 고용주를 닮아 솔직했다.
로벨은 입술을 비틀고 ‘자칭’ 가장 아름다운 성을 바라보았다. 호수 덕분에 방어해야 할 면적이 줄었지만, 그것을 참작해도 수성에 용이한 구조는 아니었다.
“지대가 낮고, 접근이 쉬워. 수성병력이 공성병력만큼은 있어야 막을 수 있어.”
“하긴, 언덕 위에 성을 짓는 것이 일꾼들 고생해보라고 하는 짓은 아니죠.”
“공격하기 쉽다는 말은 지키기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지.”
에디즈 자작이 200명 남짓한 병력으로 두 번이나 점령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로벨은 10명으로 점령을 시도 중이었다.
“영주님, 성문이 열립니다.”
로벨은 바이저를 반만 올리고 성벽을 둘러보았다. 창을 끌어안고 발을 동동 굴리는 병사, 화톳불을 뒤적이며 불씨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병사, 여장에 기대 앉아 옆 사람과 수다 떠는 병사 등등이 보였다. 식량을 가지러 간 기사가 수레와 함께 돌아온 줄로 여기는 듯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만...”
“내 뒤를 바짝 따라와.”
로벨은 플레일을 짧게 잡고 성문을 통과했다. 그새 보고가 올라갔는지 에디즈 자작의 기사 하나가 화를 내며 다가왔다.
“처지 경! 왜 이리 늦었는가! 자작님이 얼마나 찾았는지 아는가!”
얼굴보다 무기와 갑옷을 먼저 살피는 것이 습관인 모양이다.
로벨은 슬그머니 바이저를 내리고 플레일을 어깨 뒤로 당겼다. 수행기사는 어리둥절해서 로벨을 올려다보았다.
“처지 경?”
이 무기의 주인이 처지 경인 모양이다. 수행기사는 비로소 이상한 점을 알았다. 버거넷(Burgonet: 사람 얼굴 모양의 투구) 때문에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처지 경보다 키가 크고 어깨가 좁았다.
“처지 경이... 아니야?”
깨달음이 조금 늦었다. 로벨이 플레일을 휘두르기 전에 깨달았으면 혹여나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퍽!
기사의 머리통이 찌그러졌다. 눈알이 한 마디 정도 튀어나오고. 혀를 깨물었는지 피가 왈칵 쏟아졌다. 성문 안팎과 성벽 위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뭐, 뭐야?”
“싸움 난 거야?”
로벨은 살점과 머리카락이 들러붙은 플레일을 치우고 롱소드를 뽑았다. 위기의식이 부족한 병사들을 위해 친절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난 도반 도트넘 백작을 모시는 서 머를 브릭이다! 강철성 만세! 돌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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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호수성의 아성으로 곧장 직진했다.
호수성은 200명의 병사가 정확한 사실을 전달받기에 지나치게 컸다. 도반 도트넘 백작군이 쳐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지는 가운데, 고작 10명의 병사가 성 안을 가로지르는 것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병사를 지휘할 기사가 줄줄이 당한 탓도 있지만, 습격한 적이 10명일 거라고는, 그들이 성 안에 들어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그러나 로벨의 계획도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뭐 이리 넓어?”
“제길! 어디 있는 거야!”
호수성은 로드릭 성보다 3배쯤 넓었다. 로드릭 성에서도 사람을 못 찾아 소리를 지르는데, 이 낯선 성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지나가는 병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에디즈 자작은 어디 있지?”
상황이 심각한 것은 알지만, 어떻게 심각한지는 모르는 병사였다. 위로 보나 아래로 보나 기사가 분명한 로벨이 질문하자 의심 없이 대답했다.
“식량창고로 가셨습니다!”
“식량창고가 어디야?”
“저쪽으로 나가면 바로... 어? 식량창고를 모릅니까?”
“응. 몰라.”
로벨은 눈치 빠른 병사의 복부에 롱소드를 담가주었다. 병사의 눈이 의심에서 경악으로, 그리고 초점이 없는 허무로 빠르게 변했다.
“이제 알지만.”
로벨은 애꾸눈 볼포스에게 식량창고 방향을 가리켰다. 애꾸눈과 울프 용병단은 크로스보우에 쿼럴을 얹고 좌우로 나눠져서 뛰어갔다. 로벨은 롱소드를 비틀어서 뽑은 후 핏물을 털어냈다.
“그냥 모른 척하지.”
“아앗! 적이다!”
“자작님을 지켜라!”
“언제 여기까지!”
울프 용병단과 에디즈 자작의 수행원이 충돌했다. 로벨은 바이저를 위로 올려 고정하고 롱소드를 두 손으로 잡았다. 더 이상 정체를 숨길 필요 없었다.
“하롤드 에디즈 자작!”
울프 용병단 두 명과 칼을 맞댄 중년 기사가 로벨을 보았다.
“...로벨 로드릭 남작?”
로벨은 땅을 박차고 뛰었다. 30피트 거리를 순식간에 지우고 롱소드를 수직으로 휘둘렀다. 무명(武名)이 높지는 않아도 기사는 기사였다. 에디즈 자작은 롱소드를 비스듬히 세워서 로벨의 수직베기를 흘려보냈다. 로벨은 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에디즈 자작이 잔인하게 웃었다.
“소문보다 못하군!”
로벨은 머리를 써서 반박했다. 몸이 앞으로 기운 상태에서 다시 땅을 박찼다. 일반적인 헬름보다 크고 울퉁불퉁한 버거넷이 에디즈 자작의 콧대를 때렸다. 코뼈가 부러지고 콧구멍에서 대량의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 광경을 본 애꾸눈 볼포스가 중얼거렸다.
“소문보다 과격하시지.”
로벨은 기절한 에디즈 자작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투구를 써야 한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