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채찍
90화. 채찍
로벨은 수염이 참 멋지다고 생각하며 롱소드를 비틀었다. 중년 병사의 입과 코에서 핏물이 왈칵 쏟아졌다. 잘 다듬어진 카이저수염이 붉게 물들었다.
로벨은 피를 피하기 위해 빈틈을 내주는 초보적인 실수를 하지 않았다. 롱소드를 잡아당겨서 뒤로 휘둘렀다. 용감하지만 신중하지는 못한 기사 종자의 목이 날아갔다. 기합을 지르는 표정 그대로 땅에 떨어져서 자못 괴기했다.
로벨은 착잡한 얼굴로 롱소드를 회수했다. 전투가 막바지에 접어든 듯 성 안 곳곳에서 울려 퍼지던 비명이 잦아들었다. 애꾸눈 볼포스와 외팔이 더치가 병장기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다가왔다.
“이놈들이 전부 같습니다.”
“으하하핫! 도망칠 수 있을 때 도망쳤어야지!”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피해는?”
“두 놈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심각하진 않습니다.”
로벨은 팔다리가 하나쯤 잘려야 ‘심각하다’ 말하는 베테랑 용병의 정서를 고려했다.
“성문을 봉쇄하고 무기를 모아.”
“성문을 닫아라! 성문을 닫... 야! 대머리! 전리품을 나중에 챙기고 성문 닫으라고!”
“납작코, 절름발, 무기고를 찾아라.”
울프 용병단은 흥분하지도, 불안해하지도 않고 신속하게 움직였다. 아만다 성부터 바위성까지 성을 점령한 경험이 풍부한 역전의 용사들다웠다.
로벨은 애꾸눈 볼포스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아성의 문을 지나 메인 홀로 들어갔다. 로벨이 지나간 자리에는 피에 젖은 발자국이 새겨졌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 50명은 에디즈 자작의 덩굴성을 기습 점령했다. 수비 병력이 10명 남짓이라 어렵지 않았다. 충성심이 지나치게 강한 기사 종자가 필사적으로 저항하지만 않았다면 아무 피해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기사 종자는 죽이고 싶지 않았는데...’
로벨 정도 되는 기사가 서임도 받지 못한 풋내기를 살해하는 것은 명예롭지 못했다. 꼭 명예가 아니어도 큰 오라비가 떠올라 내키지 않았다. 포로로 잡아 몸값을 받는 편이 좋았을 듯했다.
“어쩔 수 없지.”
로벨은 기둥 앞에서 잠시 멈췄다. 덩굴성의 중심이었다.
로벨이 멈추기를 기다린 것처럼 코골이 바디가 찾아왔다.
“기사 나리! 에디즈 자작의 식솔을 잡았습니다!”
“식솔?”
“부인과 아들입니다!”
로벨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사보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것이 귀부인이었다. 기사는 아무리 사납고 까칠해도 합법적으로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지만, 귀부인과 어린아이에게는 불가능했다.
“침실에 가둬. 감시 붙이고.”
“저기, 그게, 귀부인 마님이 기사 나리를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 뭐라더라? 명예를 아는 기사라면 적의 아내를 곤란하게 한다?”
“적이라도 귀부인을 곤란하게 하지 않는다.”
“아, 예! 맞습니다! 거 참, 왜 이리 어렵게 꼬아서 말하지.”
로벨은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렸다. 귀부인이 까다로운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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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즈 자작의 부인은 키에 비해 몸이 부실한 30대 귀부인이었다. 가난해서인지, 검소해서인지 무명으로 짠 코타르디(Cotehardie)를 입고 값싼 호박으로 만든 브로치를 착용했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당신이 로벨 로드릭 남작인가요?”
“그렇소.”
에디즈 부인은 여자라고 해도 믿어줄 만큼 곱상한 그랜드 챔피언을 올려다보았다.
“소문하고 다르군요.”
“소문?”
“8피트가 넘는 거구에 신전 기둥을 뿌리 뽑는 괴물이 아니란 뜻이에요.”
“신전 기둥을 왜 뽑... 아니오. 됐소.”
로벨은 머리를 흔들고 코골이 바디 이하 용병들에게 밥 먹고 오라고 명령했다.
검소하다 못해 삭막한 침실에 로벨과 에디즈 모자만 남았다.
“미리 말해두지만, 부인과 아들을 해칠 생각은 없소.”
“알고 있어요.”
“어떻게?”
“로벨 로드릭 남작은 명예로운 기사라고 입을 모아 칭찬하지요. 정말 명예로운지, 아니면 명예로운 척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죠. 힘없는 아녀자를 덮쳐서 공들여 쌓은 이미지를 망치지는 않을 테니까요.”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기사에게 대단히 모욕적인 말이었다. 에디즈 부인이 남자였다면 장갑을 벗어 뺨을 후려쳤을 것이다.
로벨은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차분히 토했다.
“본인을 왜 보자고 했소.”
로벨이 끝까지 예의를 지키자 에디즈 부인은 미소 지었다.
“소문이 아주 틀리지만은 않군요.”
“또 무슨 소문이오?”
“로벨 로드릭 남작은 연인의 수호자라죠?”
로벨은 조금 전의 불쾌함을 잊을 만큼 당황했다. 그러나 에디즈 부인은 진지했다.
“제 남편을 살려주세요.”
“죽일 생각은 없소.”
“다른 사람은 생각이 있을 거예요.”
“내 병사들은 내 허락 없이 행동하지 않소.”
“남작의 적을 말하는 거예요.”
대화가 뜬금없이 흘러갔다. 로벨은 좀 더 집중하기로 했다.
“나의 적?”
“볼트 헤르만 백작과 도반 도트넘 백작이요. 그들이 남편을 해치지 못하게 도와주세요.”
로벨은 에디즈 부인이 세상일을 하나도 모르는 온실 속 화초라고 생각하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뭔가 착각한 거 같소만. 난 그들의 주군도, 친구도 아니오.”
“그래도 하실 수 있어요.”
“어떻게?”
“그들보다 먼저 내 남편을 쳐부수세요.”
로벨은 에디즈 부인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생각보다 똑똑하고, 상상 이상으로 멍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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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즈 자작은 ‘권력’이나 ‘야망’ 같은 단어와 거리가 멀었다. 자연히 ‘전쟁’이나 ‘정복’ 같은 단어와도 사이가 안 좋았다. 그런 에디즈 자작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도 있지만, 에디즈 부인과 에디즈 영지민은 소박한 영주를 좋아했다.
에디즈 자작은 자작위와 영지를 계승받은 후 10여 년 동안 조용히 지내왔다. 전쟁은 고사하고 흔한 마상시합조차 나간 적이 없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날을 연장해갔다. 그러나 윌리엄 프란시스 공작이 사망하고, 두 아들이 충성을 요구하면서 삶이 바뀌었다.
에디즈 자작은 평화를 위해 선택해야 했고, 그 선택을 위해 싸워야 했다. 전쟁이 끝난 뒤로도 피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류트 공자에게 충성한 영주들이 하나둘 숙청되었다. 에디즈 자작은 몸을 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괜찮았다. 사트로 후작이 전쟁을 선포하고, 첫 번째 타겟으로 덩굴성을 고르지만 않았다면, 지난 일은 인생에서 한 번쯤 찾아오는 굴곡 정도로만 여겼을 것이다.
에디즈 자작은 사트로 후작군에게 패해 포로가 되었고, 주인 잃은 덩굴성은 뺏고 빼앗기는 깃발이 되었다. 전쟁의 참화는 여린 자작의 영혼을 불태웠다.
두 가문의 전쟁은 익히 알려졌듯 로벨 로드릭 남작과 허버트 페르젠 백작의 반격으로 끝이 났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은 강철성을 반환하는 조건으로 에디즈 자작과 덩굴성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지난날의 에디즈 자작은 돌아오지 않았다.
“헤르만 백작과 사이가 틀어진 것도 그때부터였어요. 사트로 후작군의 공격을 받아 헤르만 백작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백작은 들어주지 않았지요.”
로벨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자가 원래 좀 그렇소. 이기적이고 치사하지.”
로벨은 의자를 가져와 아주 편하게 이야기를 감상 중이었다. 분위기만 보면 귀부인들이 수다 떠는 것 같았다.
에디즈 부인은 어느새 잠든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세상이 아무리 변했어도, 우리는 착한 남편과 자상한 아버지를 사랑해요. 그이가 더 이상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무슨 수로?”
에디즈 부인은 조금 길게 침묵했다. 창문 밖에서 외팔이 더치의 걸쭉한 욕지거리와 울프 용병단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에디즈가 움찔했다. 그리고 에디즈 부인이 입을 열었다.
“그이는 절벽성의 소식을 듣고 급하게 출발했어요. 그래서 식량을 많이 챙기지 못했죠. 기사들은 군량이라고 하죠?”
“그거... 좋은 정보군요.”
로벨은 관심을 보였다.
도반 도트넘의 병사는 600명이고, 그 인원이 호수성에서 겨울을 났으니, 호수성에도 식량이 많지 않을 것이다.
“더블린이 군량을 가지고 합류하기로 했어요.”
“더블린?”
“성에 남은 기사 종자에요.”
로벨은 자세를 바르게 고쳤다. 분위기에 휘말렸지만, 이곳은 적진이고 상대는 적장의 아내였다. 수다나 떨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 사람은...”
“알고 있어요. 죽었지요?”
“...미안하오.”
“싸우지 말고 항복하라고 말했는데... 그가 선택한 일이에요.”
에디즈 부인은 앙상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말했다.
“그리고 이건 제 선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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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꾸눈 볼포스가 미심쩍은 투로 말했다.
“그 부인을 믿습니까?”
“응?”
“솔직히... 말이 안 되는 이야기 같습니다. 옛날의 착한 남편이 그리워서 일부러 전쟁에서 지게하다니...”
외팔이 더치가 껄껄 웃으며 반박했다.
“왜 말이 안 돼? 헤르만 백작이나 도트넘 백작한테 잡히면 귀족이고 나발이고 괘씸죄로 맞아 죽을 텐데, 이왕이면 착해 빠진... 이 아니고, 자비로운 우리 기사 나리한테 잡히는 게 좋지.”
“애당초 잡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맞지 않아?”
“그럼 착해지지 않잖아?”
“...내 말이 그거다.”
애꾸눈은 외팔이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로벨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우리가 올 걸 몰랐을 테니, 적어도 함정은 아닐 거야.”
“허나, 최초 계획은...”
“도반 도트넘 백작은 이미 후퇴했을 거야.”
로벨은 좀 더 생각한 후 결정을 내렸다.
“여기서 잘하면 호수성을 포위할 필요 없이 싸움을 끝낼 수 있을 거야.”
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잔잔히 둘러보았다.
“10명만 있으면 돼.”
여기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면 아름다운 전우애가 되었을 테지만, 목숨 아까운 줄 아는 용병들은 슬금슬금 눈을 피했다. 로벨은 그 정도로 포기하지 않았다.
“성공하면 10페닝씩 줄게.”
역시 전우애보다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금화가 확실했다. 로벨은 애꾸눈을 포함한 10명의 ‘자원자’를 뿌듯하게 보았다.
“나머지는 외팔이와 함께 성을 수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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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컴포지트 아머를 벗고 에디즈 자작의 기사 종자, 더블린의 브리간딘을 입었다. 길이가 짧고 폭이 넓어서 이상하지만, 그걸 알아챌 정도면 얼굴이나 목소리로 알아챌 수 있을 테니 신경 쓰지 않았다. 애꾸눈이 아바레스트의 방아쇠를 점검하며 못내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이게 정말 통할지...”
“통할 거야.”
로벨은 수레를 덮은 방수포를 치웠다. 곡물자루를 치워서 텅 비었다. 로벨은 빈 수레를 가리키며 해맑게 웃었다.
“타.”
로벨은 덩치 좋은 용병들을 비좁은 짐칸에 욱여넣고 마부석에 앉아 늙은 말을 재촉했다. 정원을 한참 초과한 탓에 속도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심심하지는 않았다.
“여기 이상한 냄새나지 않아?”
“무슨 냄새?”
“내 방구냄새.”
부아앙-!
“이 새끼가!”
“야! 야! 나 아니야! 마당발이라고!”
수레가 들썩들썩했다.
“조용해.”
로벨은 늙은 말 대신 젊고 건강한 수레에 채찍질했다. 효과가 있어서 잠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요란한 코골이가 흘러나왔다. 작전 중에 처자는 간덩이 부은 범인을 잡기 위해 다시 들썩였다.
“조용하라니까!”
로벨은 철썩철썩 소리가 나게 채찍질했다. 자지러지는 비명이 흘러나왔다.
늙은 말은 인간들이 뭘 하든 관심주지 않고 겨울과 봄 사이를 느릿느릿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