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89화 (89/605)

89화. 덩굴성

89화. 덩굴성

로벨은 움직일수 있는 근육은 한 번씩 움직였다. 그리고 기사의 본능과 지난 5년의 경험으로 결론 내렸다.

‘싸울 수 있다!’

로벨은 고블린의 피로 번들거리는 롱소드를 머리 옆에 세우고 트롤의 간격을 가늠했다. 트롤의 덩치와 트롤이 휘두르는 쇠망치의 길이를 볼 때 약 8.2피트. 공격을 피한 후 간격을 좁혀서 목을 쳐야 했다. 트롤이 망치를 높이 드는 순간, 로벨도 몸을 움직였다.

“쿠와아!”

“타핫!”

콰광-!

로벨과 트롤의 무기가 교차하기 직전에 로드릭 산(産) 돌덩어리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둥글게 깎은 포탄이 바다를 가로질러 트롤의 가슴을 시원하게 꿰뚫었다.

“쿠룩?”

트롤은 쇠망치를 높이든 자세로 굳었다. 커다란 눈알을 굴려서 가슴을 훔쳐보고 다시 힘없이 중얼거렸다.

“꾸르룩...”

그리고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풀썩 쓰러졌다.

로벨은 치켜든 롱소드 폼멜로 머리를 긁었다. 두꺼운 아멧 때문에 긁는 느낌이 나지 않았으니, 그저 황당함을 표시하는 제스처였다.

흉측한 괴물이 쓰러졌으나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군은 물론이고, 울프 용병단도 그리 신나지 않았다.

“야! 임마! 기사 나리가 맞을 뻔했잖아!”

“아, 아니? 저게 왜 저리로 날아가지?”

“너 꼬마 집사가 알면 10년 감봉이다.”

로벨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다시 끌어올렸다. 롱소드로 푸른고래 호를 가리키며 명령했다.

“뭐해? 후퇴해!”

로벨의 명령은 적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도반 도트넘 백작은 지금껏 아끼던 주력 용병단을 투입했다. 고블린보다 긴 무기와 튼튼한 갑옷을 가진 용병은 위협적이었다. 용병은 해변으로 이동해 신속하게 정렬했다.

“사격 준비!”

100여 개의 크로스보우가 푸른고래 호를 아래에 두고 하늘로 올라갔다.

“사격 개시!”

파파팡-! 팡-!

시위가 풀리고, 활대가 펼쳐지고, 뾰족한 무게추를 가진 쿼럴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수평선 위로 비행하던 쿼럴은 거부할 수 없는 중력에 이끌려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그 끝에는 파도를 부수며 허겁지겁 뛰어가는 로벨과 울프 용병단 풋맨 소대가 있었다.

“저놈들이 화살을 쏜다!”

“뛰어!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뛰어!”

로벨과 울프 용병단 주위로 쿼럴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퐁- 퐁퐁-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빗물보다 날카롭고 무거웠다.

“끄악!”

“숀이 화살에 맞았다!”

“제길! 계속 가!”

로벨은 등에 쿼럴이 박힌 울프 용병을 보고 방향을 바꿨다. 푸른고래 호에서 펄프 대장으로 추정되는 고함이 들려왔다.

“영주님! 그냥 오십시오!”

로벨은 고용인의 지시 따위 듣지 않았다.

“숀! 일어나!”

왼손잡이 숀은 화살에 맞고 의식을 잃었다가 차디찬 바닷물에 머리를 박고 정신이 돌아오는 흔치 않은 경험 중이었다.

로벨은 왼손잡이 숀을 억지로 일으켜서 부축했다. 그 사이 도반 도트넘 백작군의 2차 사격이 시작되었다.

“저깟 화살...!”

로벨에게는 ‘저깟 것’이 맞았다. 크로스보우로는 컴포지트 아머의 단단한 장갑을 뚫지 못한다. 그러나 하이드 아머, 그것도 흉갑 하나만 딸랑 입은 왼손잡이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로벨은 왼손잡이를 앞으로 당겨서 감싸 안았다. 스스로 방패가 되었다.

틱! 팅-!

로벨의 판단은 옳았다. 백 플레이트에 두 발인지 세 발인지 부딪치고 튕겨 나갔다.

“...잘 쏘는데?”

로벨은 적을 칭찬하면서 왼손잡이를 살폈다. 가늘지만 숨이 붙어 있었다.

“으으... 기사 나리...”

“일어나. 은퇴하기 이르잖아.”

로벨은 다시 걸음을 떼었다. 왼손잡이 숀은 정신을 놓았는지 피식- 피식- 웃었다. 고블린과 용병들이 바짝 뒤쫓아 오고 있지만, 로벨과 함께 있으니 왠지 죽을 것 같지 않았다.

@

로벨 로드릭 남작군의 개입으로 절벽성 전투는 소강상태에 빠졌다.

도반 도트넘 백작군이 로드릭-헤르만 연합군보다 2배 더 많았지만, 성벽과 바다 뒤에 숨어 있는 적을 일망소탕할 정도는 아니었다.

절벽성을 공격하면 갤리엇에서 대포를 쏘며 옆구리를 찌르고, 갤리엇에 화력을 집중하면 절벽성에서 우르르 몰려나와 뒤통수를 후려쳤다. 양쪽을 동시에 공격하는 시도도 했지만, 두 마리 토끼에 관한 격언을 실감했을 뿐 군사적인 성과가 없었다.

로벨은 바닷물로 병장기를 씻는 용병들을 안타깝게 보며 물었다.

“얼마나 남았어?”

이안 선장은 어리둥절해서 “네?” 하고 반문했지만, 로벨의 화법에 익숙한 펄프 대장은 철석같이 이해하고 즉답했다.

“쿼럴은 여유가 있습니다. 작년 가을부터 비축한 보람이 있습니다. 다만, 포환이 많지 않습니다.”

“왜?”

로벨은 로드릭 성에 산더미처럼 쌓인 돌덩어리를 떠올렸다. 로드릭 성 공사가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폐자재로 분류된 돌과 나무가 한 가득이었다.

“그게, 무게 때문에 많이 가져오지를 못했습니다.”

“아...”

포탄 하나가 12~15파운드인데, 100발만 가져와도 1,200파운드가 훌쩍 넘었다. 그리고 오늘 하루 쏟아낸 포탄만 100발이었다. 이안 선장이 위로가 안 되는 위로를 했다.

“포탄이 있어도 무리입니다. 내구성이 좋은 청동대포라도 이 이상 쏘면 깨집니다.”

로벨과 펄프 대장이 깜짝 놀라 이안 선장을 보았다.

“대포가 깨져?”

“저 단단한 게 어떻게?”

이안 선장의 흉터가 일제히 꿈틀거렸다. ‘기사와 용병이란 작자들이...’ 이란 표정이었다. 로벨과 펄프 대장은 헛기침하고 말을 바꿨다.

“나도 알고 있었어.”

“흠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지요.”

그리고 짐짓 진지한 척 도반 도트넘 백작군을 노려보았다.

“저쪽은 호수성에서 보급을 봤을 수 있어.”

“헤르만 백작군도 사정이 좋지 않을 겁니다.”

“장기화되면 불리해.”

로벨은 턱을 괴고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600명, 아니, 숫자가 줄어서 500명의 부대를 단기간에 격파할 방법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이럴 때 키르케가 있으면 기발한 전술을 짜줄 텐데.’ 로벨은 푸른 바다에 한숨을 토해냈다. 그때, 왼손잡이 숀이 선교 아래에서 로벨을 불렀다.

“저기, 기사 나리?”

누더기 같은 생가죽 갑옷도 갑옷은 갑옷이라 용케 목숨을 건졌다. 로벨은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기뻐했다.

“왜 나왔어? 내려가서 쉬어.”

“노예놈들 냄새 때문에 쉬지를 못합니다. 그냥 동료들과 함께 있겠습니다.”

로벨은 좋을 대로 하라고 허락했다. 그러나 왼손잡이 숀은 선교 아래에서 미적거렸다.

“할 말이 있어?”

“그게 아니고라, 그러니까,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펄프 대장과 이안 선장이 실소했다. 험상궂은 얼굴과 험악한 행동을 정체성으로 여기는 용병이 12살 소년처럼 몸을 빌빌 꼬니 웃음이 나올 만했다. 로벨은 같은(?) 남자가 봐도 반할 만큼 매력적으로 웃었다.

“괜찮아. 전우잖아.”

왼손잡이 숀은 기사와 용병,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를 뛰어넘는 ‘전우’란 말에 감동했다. 그리고 감동하면 말이 많아지는 성격이었다.

“기사 나리와 함께 싸운 것이, 거시기, 아만다 남작하고 싸울 때였는데, 그때도 그랬지만, 정말 기사 나리는 대단합니다. 정말 기사 나리를 따르기 잘한 것 같습니다. 에, 그러니까, 그렇습니다.”

왼손잡이 숀은 횡설수설하다가 주위에서 키득거리는 소리를 듣고 시뻘게져서 입을 다물었다. 로벨이 물러가라 말하자 꾸벅 묵례하고 도망치듯 동료들 속에 숨었다. 가는 곳마다 조롱과 야유가 흘러나와 잘 숨지는 못했다.

“...아만다 성?”

로벨은 지나치게 잦은 전쟁으로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옛 전쟁을 떠올렸다. 그리고 불현듯 깨달았다.

“도반 도트넘 백작의 총 병력이 몇이야?”

“600명입니다.”

“저기 나와 있는 병력은?”

“600명입니다.”

펄프 대장은 별 이상한 질문이라는 듯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러나 로벨의 이상한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600에서 600을 빼면?”

“어린 집사가 아니어도 대답할 수 있지요. 0명입니... 아아!”

로벨이 깨달은 것을 펄프 대장도 깨달았다.

“응! 호수성이 비었어!”

“여기서 싸울 게 아니라 호수성을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거점을 잃으면 보급을 끊기고, 보급이 끊기면 600명, 더욱이 생고기만 먹는 고블린과 트롤을 부릴 수 없습니다.”

“아니! 덩굴성이야!”

펄프 대장은 반성했다. 로벨의 화법에 익숙해지기에는 5년의 세월도 모자랐다.

“덩굴성이요?”

“응! 덩굴성을 공격해야 해!”

로벨은 확신에 차서 소리쳤다. 펄프 대장은 굳은 머리를 열심히 굴렸지만, 이안 선장은 진즉에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느긋하게 물었다.

“언제 출발하면 됩니까?”

@

절벽성 공방전이 7일째 접어들었다. 도반 도드넘 백작은 고블린 아처와 크로스보우맨을 해안가에 배치해서 갤리엇을 먼 바다로 몰아내고, 트롤 2마리를 앞세워서 절벽성을 공략했다.

피와 쇠가 맞물리는 것은 첫날과 마찬가지지만, 치열함과 절박함은 조금 떨어졌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아침밥을 함께 먹은 동료가 점심에 죽는 것도, 그 동료의 몸뚱이에서 고블린의 화살을 회수해 전통에 넣는 것도, 트롤의 망치질 소리와 버팀목을 가져오라는 소대장의 악다구니도, 고작 7일 만에 익숙해졌다.

“오늘은 공격이 뜸한데?”

그 뜸한 공격에 옆 소대장이 성벽 아래로 굴러떨어졌지만, 적응이 끝난 병사들은 그러려니 했다.

“저놈들도 지칠 때가 됐지.”

“아니. 저 괴물들 말고.”

성 밖에는 도반 도트넘 백작군 외에도 하나가 더 있었다.

오늘은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울리는 포성도, 심심하면 돌진하는 간 큰 기사도 없었다.

“어라? 그렇네?”

“도망친 거 아니야?”

용감한 병사가 여장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바다를 보았다. 푸른 물결 속에 돛을 접은 갤리엇 한 척이 외로이 떠 있었다.

“저기 있는데?”

“어제보다 좀 멀지?”

“화살이 떨어졌나?”

의문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의문의 숫자만큼이나 불안감도 커졌다. 저 갤리엇이 사라지면 절벽성이 함락된다. 신앙심이 깊은 병사가 옛 신의 상징물을 꺼내 입술을 맞추고 중얼거렸다.

“옛 신이시여. 당신의 신실한 백성을 구원하소서.”

게으름뱅이로 정평이 난 옛 신이 웬일로 즉각 반응했다. 헤르만 백작의 젊은 종자가 큰소리로 외쳤다.

“적군이 물러난다! 적군이 물러난다!”

병사들은 기뻐하지 않았다. 무기를 내려놓고 여장에 기대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오늘은 넘긴 건가?”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 거지...”

그러자 나이 어린 병사가 중얼거렸다.

“오늘까지요.”

“응?”

“저놈들이 물러나요.”

“아까 들었어.”

“아니. 아니요. 진짜 물러나요. 떠난다고요. 지금 도망치고 있어요!”

어린 병사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커졌다. 성벽 위의 병사들은 물론이고, 성벽 아래의 병사들도 허겁지겁 위로 올라와 도반 도트넘 백작군을 보았다. 어린 병사의 말대로 절벽성 앞에서 철수하고 있었다. 현실감이 부족한 병사가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가 이긴 거야?”

이해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었다. 기쁨과 흥분이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다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이겼어! 우리가 이겼어!”

“이제 살았다!”

“으하핫! 우리가 해냈어!”

@

헤르만 백작은 헬멧을 벗어 종자에게 주고 의자에 앉았다. 7일간의 전투로 수척해졌지만, 표정만큼은 7일 전보다 밝았다. 수행기사가 성 밖에서 들어온 첩보를 보고했다.

“호수성이 함락되었습니다.”

헤르만 백작이 소리 내어 껄껄 웃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은 눈치 못 챘겠지만, 고지대에 위치한 헤르만 백작은 하루 전 로벨 로드릭 남작이 별동대를 이끌고 북쪽 해안에 상륙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역시 로벨 로드릭 남작인가?”

그러나 기사의 표정이 이상했다.

“아닙니다.”

“뭐? 아니야?”

“에디즈 자작의 군사입니다.”

헤르만 백작의 표정이 마음에 안 찬 연애편지처럼 와락 꾸겨졌다.

“그 빌어먹을 놈이! 뒤통수치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는가!”

기사와 종자들은 그 덕분에 살았으니 화낼 일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분별력을 발휘했다.

“그럼 로벨 남작은! 그 잘난 그랜드 챔피언은 어디 있는가!”

수행기사가 성난 주군 앞에서 간 크게 미소 지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에디즈 자작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뭐야?”

“로벨 로드릭 남작이 덩굴성을 점령했습니다.”

헤르만 백작은 나잇값, 직위값 못하고 입을 벌렸다. 서로의 꼬리를 무는 기묘한 전쟁이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