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트롤
88화. 트롤
봄이 찾아왔지만, 추위는 쉬이 떠나지 않았다.
더벅머리 지미는 전쟁과 굶주림 중 후자가 더 무서워 절벽성에 남았다. 그러나 칼바람이 살을 도려내는 호딩에서 얼음 같은 창 자루를 쥐고 2시간째 서 있자니 세 번째 고려사항으로 추위를 넣지 않을 것이 후회되었다.
더벅머리 지미는 창을 바꿔 쥐고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아, 춥다. 올 거면 빨리 좀 와라.”
그러자 옆 동료들이 황당해 했다.
“이 상황에서 추위가 느껴지냐?”
병사들은 더벅머리 지미가 ‘용감하다’, ‘대담하다’ 칭찬했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였다. 더벅머리 지미는 현실감을 잃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군이 절벽성 3면을 둘러쌌다. 남은 한 면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였으니, 사실상 포위된 것이다.
지미와 달리 전쟁터를 일터로 생각하는 전문 용병 150명과 체구는 작지만 폭력성과 잔악성에서 용병에게 뒤지지 않는 고블린 400마리와 그 무리 속에서 머리와 어깨가 불쑥불쑥 튀어나와 있는 10여 마리의 트롤 군단이었다. 투구와 갑옷은 고사하고, 쇠붙이가 달린 창도 얼마 안 되는 헤르만 백작군이 상대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하아... 죽지 않으면 살겠지.”
해가 가장 높이 뜬 제6시.
고블린 100마리가 조잡한 나무방패를 머리에 이고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인간의 군대와 달리 대열이 엉망이지만, 세 자리 숫자가 움직이는 것은 대단한 위압감이었다.
“오, 온다!”
“제길! 진작에 도망칠걸!”
수비병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욕설을 쉬지 않고 내뱉는 사람부터 옛 신을 애타게 찾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덕벅머리 지미는 고블린보다 성탑 위에 갑옷을 입은 기사에게 집중했다. 절벽성의 주인이자 지미의 주인인 볼트 헤르만 백작이었다. 클로즈 헬멧(Close Helmet) 때문에 표정을 볼 수 없지만, 주위 기사들의 반응을 보아 행복하지 않은 듯했다.
헤르만 백작이 오른손으로 고블린을 가리켰다. 그러자 기사 한 명이 깃발을 잡고 앞으로 숙였다. 더벅머리 지미의 소대장이 벼락처럼 소리쳤다.
“사격 준비!”
“아! 깜짝아!”
사격이라고 하지만, 가난한 농부의 아들인 지미에게 활이나 쇠뇌 같은 고급무기는 없었다. 설령 줘도 다룰 줄 몰랐다. 그런 지미를 위해 유구한 역사를 가진 투척무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더벅머리 지미는 자신의 머리통만한 돌을 여장 위로 끌어올리고 신중하게 희생양을 골랐다. 고블린은 생김 비슷비슷해서 특별히 마음에 드는 녀석을 고를 수 없었다.
‘저놈들이 볼 때도 비슷하겠지?’
“사격!”
더벅머리 지미는 가장 가까운 고블린에게 돌을 던졌다. 괭이질로 단련된 근육에 12파운드 무게와 12피트 높이가 더해지자 고블린의 조잡한 방패를 부숴버렸다. 고블린의 비명이 애처롭게 울렸다.
“좋았어!”
더벅머리 지미는 다시 돌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여기서 더벅머리 지미의 기억은 끝났다. 고블린이 쏜 화살이 기가 막힌 포물선을 그리며 지미의 머리를 뚫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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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탑 위의 헤르만 백작은 숨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지휘관이 움츠리면 병사도 움츠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피할 만큼 위험하지도 않았다. 고블린이 쏘는 조잡한 화살은 포클랜드 시티의 장인이 만든 플레이트 아머에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물론,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화살을 소진시키려는 것이군.”
수행기사가 안심하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고블린을 부리는지는 모르지만, 저 미개한 놈들로는 성벽을 넘지 못합니다. 사다리도 다룰 줄 모르는...”
그때, 고블린이 방패를 집어던지고 성벽에 달라붙었다. 어린애처럼 작은 손으로 돌기와 틈새에 매달렸다.
“산과 계곡을 오르내리는 놈들이다. 이런 성벽도 잡을 곳이 있으면 오르겠지.”
헤르만 백작은 남 일처럼 중얼거렸다. 수행기사들은 딱딱한 클로즈 헬멧을 안타깝게 보았다. 호수성을 잃은 뒤로 10년은 더 늙은 듯했다.
“막아라! 저 냄새나는 놈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
기사들이 악을 쓰지 않아도 병사들은 최선을 다해 막고 있었다. 나무창을 수직으로 세워서 머리를 찌르고, 바위를 던져서 얼굴을 뭉갰다. 그러나 고블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조잡한 숏보우라도 3, 40발씩 쉬지 않고 날아오면 희생자가 생길 수밖에 없다. 가슴을 부여잡고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병사와 팔다리를 붙들고 눈물콧물 쥐어짜는 병사가 점점 늘어갔다.
그러나 1개 중대병력으로 절벽성을 넘는 것은 무리였다. 고블린은 인간이 알 수없는 소리로 소란을 피우다가 빠르게 후퇴했다.
“저놈들이 물러난다!”
“사, 살았다!”
그러나 기뻐하기는 일렀다. 적의 병력은 600명이었고, 고블린은 300마리 이상 남아있었다.
“전투준비! 제2파가 온다!”
고블린 100마리가 방패를 올리고 다시 접근했다. 헤르만 백작군은 조금 전 전투를 몇 번이고 반복해야함을 직감했다.
“제, 제길!”
“역시 도망쳤어야 했다니까!”
헤르만 백작은 수비병의 공포에 신경 쓰지 않았다. 성벽 위에 남은 화살과 돌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침부터, 아니, 열흘 전부터 수시로 반복한 질문을 또다시 했다.
“오늘 며칠이지?”
“62일입니다.”
수행기사는 덤덤하게 답했다. 무슨 의미로 묻는지 알지만, 달리 대답할 말이 없었다. 헤르만 백작의 컨틀렛이 우드득! 소리를 내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표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로벨 로드릭 남작... 약속을 어길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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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성에서 피 튀기는 싸움이 진행되는 시각.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육지에서 난 것을 바다에 돌려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웨엑!”
“아놔, 이제 진정되었는데... 우웩!”
로벨은 더 이상 나오는 것도 없는 펄프 대장을 안쓰럽게 보았다. 등이라도 두드려주고 싶었지만, 저 소리와 냄새를 맡으면 겨우 가라앉은 뱃멀미가 다시 도질 것 같아 그만뒀다.
이안 선장이 ‘육지놈들이란...’ 어쩌고 중얼거리며 선교로 올라왔다.
“선주님, 절벽성이 보입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 100명은 푸른고래 호를 타고 볼탄 반도를 반 바퀴 돌아 절벽성에 이르렀다. 로드릭 영지의 해군력이 총동원된 군사작전이었다.
“...총동원입니까?”
“왜? 맞잖아?”
아무튼, 열흘이나 걸린 대항해였는데,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로벨은 해안절벽 위에 우뚝 솟은 성을 보았다. 육지에서 볼 때보다 크고 장엄했다.
“최대사거리가 얼마나 되지?”
“800야드까지 날아가긴 하지만,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려면 300야드까지 좁히는 것이 좋습니다.”
로벨은 절벽성까지 거리를 가늠하고 말했다.
“어차피 상륙해야 하니까.”
“접근합니까?”
“응.”
이안 선장은 노예장을 걷어차며 전속전진을 명령했고, 노예장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선장의 명령을 실행했다.
“좆 빠지게 저어라!”
로벨은 펄프 대장을 부르려다가 헛구역질하는 모습을 보고 애꾸눈 볼포스를 불렀다.
“사격 준비해. 우선 해안의 고블린을 몰아낼 거야.”
“사격 준비!”
울프 용병단이 자랑하는 60명의 크로스보우맨이 일제히 스티럽스를 위로 올렸다. 쿼럴이 닿기에는 조금 멀지만, 쿼럴보다 크고 강한 무기가 있어서 문제없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무기. 팔코넷 2문이 좌측으로 포신을 내밀었다.
울프 용병단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포병 소대가 투덜거렸다.
“배 위에서 쏴본 적이 없는데.”
“600명이나 있잖아. 아무나 맞겠지.”
“우리 편이 맞으면 어떡하냐?”
“저기 우리 편이 있었냐?”
전(前) 헤르만 백작군 출신이 섞여 있는 모양이다. 로벨은 설마 저 큰 성을 실수로 맞추진 않겠지 생각하며 롱소드를 뽑았다.
“사격개시.”
“사격!”
“Fire!”
횃불이 화약접시에 닿자 포구가 15파운드 돌덩어리를 토해냈다.
석공이 공들여 깎은 포탄은 바다와 모래사장을 빠르게 비행한 후 정말 억세게 운이 없는 고블린 머리를 날리며 산산이 깨졌다. 직격당한 고블린은 즉사했고, 그 주변의 고블린도 돌조각에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크로스보우맨! 발사!”
“발사!”
천둥과 벼락에 당황한 고블린 머리 위로 쇠와 나무로 된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로벨은 점점 가까워지는 해변을 보며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해안 쪽 병력만 치고 빠질 거야. 깊이 들어가지 마.”
“외팔이, 너한테 하는 말 같은데?”
“뭐? 외팔이가 나 말고 또 있어?”
로벨은 긴장을 풀기 위한 잡담을 용서하고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이 보이는 것이 그리 깊지 않았다. 로벨은 난간을 훌쩍 뛰어넘어 땅에 내려섰다. 초봄의 얼음장 같은 바닷물이지만, 피 냄새와 화약 냄새로 달궈진 몸을 식히기에는 부족했다. 로벨 뒤로 울프 용병단 풋맨 소대가 동시다발적으로 뛰어내렸다.
“가자! 울프 용병단!”
로벨은 롱소드를 양손으로 틀어쥐고 물보라를 뿌리며 돌진했다. 고블린의 얼빠진 얼굴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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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백작의 기사들은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 하늘을 보았다가 함성에 다시 바다를 보았다. 중형 갤리엇에서 포탄과 화살을 발사하고, 이어서 무장한 군사까지 쏟아냈다.
“오오! 로드! 저쪽을 보십시오!”
“로벨 로드릭 남작군입니다!”
지원군의 등장은 숫자와 상관없이 사기를 북돋워준다.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생기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올 줄은 몰랐군.”
헤르만 백작의 목소리가 미미하게 떨렸다. 헤르만 백작을 오랫동안 수행한 기사들은 자신의 주군이 감격을 넘어 감동했음을 알아챘다.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정말 현명합니다. 육지로는 저 많은 병력의 경계를 뚫고 기습할 수 없었을 겁니다!”
“게다가 대포를 싣고 오다니. 정말 놀라운 자입니다.”
헤르만 백작은 성탑 외곽에서 전황을 살폈다. 20여 명의 용병이 200마리의 고블린을 훑어내고 있었다. 가장 앞에서 날뛰는 기사가 특히 압권이었다. 고블린을 짚단 베듯이 베며 나아가는데, 3초 이상 버티는 자가 없었다.
“저것이 그랜드 챔피언의 실력인가?”
헤르만 백작은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옛날 옛적에 사라져서 기억조차 희미한 호승심이었다.
헤르만 백작은 롱소드를 뽑아 직접 명령했다.
“고트 경! 주디 경! 성 밖으로 나가 적을 몰아내라! 단, 멀리까지 쫓지는 마라! 로벨 남작이 물러나는 시기에 맞춰 철수해라!”
“예스, 마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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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고블린을 7마리째 베어내고 걸음을 멈췄다. 44파운드 갑옷을 입고 해변을 뛰면서 적의가 가득한 괴물을 상대하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피 냄새에 적응되자 흥분이 가라앉았고, 흥분이 가라앉자 피로가 몰려왔다. 로벨을 뒤따르는 외팔이 더치의 풋맨 소대도 비슷했다.
“기사 나리. 하아. 천천히 좀. 하아. 갑시다요. 하아.”
외팔이 더치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로벨은 절벽성을 올려다보고, 성으로 가는 길에 양탄자처럼 깔린 도반 도트넘 백작군을 둘러보았다. 헤르만 백작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는지 성 앞이 소란스러웠다.
퍼펑! 펑-!
푸른고래 호에서 계속 포격했다. 이안 선장이 직접 통제하는지 정확도와 발사속도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뀌이익!”
고블린이 펄쩍 뛰며 스파이크 클럽을 휘둘렀다. 로벨은 칼을 올리기도 귀찮아서 컨틀렛으로 클럽을 쳐내고 카우터로 안면을 후려쳤다. 코피가 극적인 포물선을 그리며 해변에 뿌려졌다.
“좋아. 물러나자.”
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도반 도트넘 백작은 불청객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영주님! 트롤이 옵니다!”
로벨은 고개를 돌렸다. 인간보다 작은 고블린 무리를 인간보다 훨씬 큰 트롤이 가르며 달려왔다. 동작만 보면 쉬엄쉬엄 뛰는 것 같은데, 덩치가 커서 그런지 로벨이 전력질주하는 속도와 비슷했다.
로벨은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롱소드를 치켜들었다.
“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