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바쁜 날
87화. 바쁜 날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화살도, 파도처럼 밀려오는 창칼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울프 용병단이지만, 눈에 들어오는 모든 용병을 물어뜯으려 하는 18살 사춘기 마녀 앞에서는 찍소리하지 못했다.
“거참. 괜한 말을 해가지고.”
“누가 좀 달래보쇼.”
결국, 존중 비슷한 것을 받아온 애꾸눈 볼포스가 중재 비슷한 것을 시도했다.
“이보시오, 마녀 아가씨.”
“왜요! 왜! 왜 불러요!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허풍쟁이 제이콥이 눈치 없이 애꾸눈의 옆구리를 꾹꾹 찔렀다.
“그냥 둡시다. 소박맞은 처녀잖소.”
“누가 소박맞아요! 크앙!”
마녀 키르케가 떡갈나무 지팡이를 붕붕 휘두르며 달려들었고, 울프 용병단은 체력단련을 열심히 시켜준 펄프 대장에게 감사하며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도주했다. 마녀는 아무도 물어뜯지 못했고, 그래서 더더욱 화가 났다.
“크아앙!”
“대체 왜 저러지?”
로벨은 정수리로 김을 모락모락 피워내는 수행원을 보고 의아해했다.
‘목적지에 와서 좋아하는 건가?’
로벨은 안장에 두 손을 얹고 고개를 들었다. 해안 쪽으로 비스듬히 솟다가 바다 앞에서 칼로 뚝 잘라낸 듯 절벽이 되는 언덕 위에 성이 있었다.
‘저기가 절벽성이구나.’
성 크기만 보면 로드릭 성하고 비슷하지만, 성벽 높이에 절벽 높이가 더해져서 까마득히 높아 보였다.
“헤르만 백작이 숨을 만하네.”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정말 난공불락 요새였다. 후방은 바다가, 측면은 절벽이 지켜주고, 유일한 입구인 정면은 좁고 경사져서, 공성병기는 고사하고 돌격대를 100명 이상 투입하기도 힘들었다. 만약 로벨이 공성측 지휘관이라면, 성안의 식량 사정이 안 좋기를 바라며 고사(枯死)작전을 쓸 것이다.
‘그거 말고 방법이 없으니까.’
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불러모아 로드릭 가문의 깃발을 높이 올리게 했다. 그리고 무기와 갑옷을 살피고, 머리를 풀었다가 다시 묶은 후 차분하게 명령했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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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성 언덕길에는 눈 덮인 시체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적의 사기를 꺾고, 공성병기의 진입을 방해하기 위해 일부러 놔두었다. 까마귀와 승냥이가 고기농장으로 애용하는지 눈알과 팔다리가 멀쩡한 시체는 많지 않았다.
“전염병이 걱정도 안 되나?”
“겨울이라 괜찮은 모양이지.”
성벽 위에 초병이 로벨 일행이 발견하고 나팔을 짧게 두 번 불었다. 군호가 어찌되는지 몰라도 박력이 약한 것이 싸우자는 뜻은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긴장을 놓지 마라.”
애꾼꾼 볼포스가 아바레스트에 쿼럴을 올리며 허풍쟁이와 발가락 일당에게 명령했다.
철벽성의 성문이 열리고, 로벨의 컴포지트 아머보다 2배쯤 비싸고 3배쯤 화려한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기사가 나왔다. 몸에 딱 맞춰진 날렵한 구조와 관절을 꼼꼼히 감싸는 보호대와 화살을 빗겨내기 위해 섬세하게 새겨진 빗금 등이 저택 한 채 값을 짐작하게 했다.
“저자는...”
로벨은 기억을 더듬었다. 얼굴이나 목소리가 아니라 갑옷으로 정체를 알아냈다. 거인의 발에서 헤르만 백작을 수행하던 기사 중 하나였다. 썩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로벨 로드릭 남작? 정말 남작이군. 이곳에 무슨 일이오?”
로벨은 딱딱하게 대답했다.
“헤르만 백작을 만나고 싶소.”
“먼저 이유를 들어도 되겠소?”
로벨은 눈썹을 팔자로 모았다. 수행기사라면 어차피 알게 될 테니 목적을 밝혀도 상관없지만, 병사를 버리고 도망간 기사라 비위를 맞춰주고 싶지 않았다. 로벨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주인의 것을 가로챌 생각이오?”
그러나 정치꾼을 보필하는 기사라 쉽지 않았다.
“가로챌만한 것이나 되오? 그리 큰 것을 가져올 사람처럼 안 보이는데?”
로벨은 말싸움으로 8살 꼬마도 못 이긴다. 로벨이 입을 꾹 다물자 허풍쟁이가 ‘티 내며’ 속삭였다.
“쳇. 도와주러 온 사람한테 무슨 태도야? 그냥 도트넘 백작이랑 손잡자니까.”
허풍쟁이의 중얼거림에 수행기사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용병 따위가 대화에 끼어들어서 몹시 불쾌했지만, 그 내용이 불쾌함을 무마해서 화내지 못했다.
“우리를 도와준다고?”
로벨은 칼자루에 손을 올리고 허풍쟁이가 거들어준 우위를 누렸다.
“헤르만 백작에게 안내하시오. 경에 의해 마음이 바뀌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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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절벽성에 대한 감상을 일부 수정했다. 외부에서 볼 때는 웅장했지만, 내부로 들어오니 노스폴드 시티의 뒷골목보다 못했다.
바위로 된 땅이라 지하실을 만들지 못했고, 그 때문에 감옥, 무기고, 저장고 등이 모두 지상에 있었다. 안 그래도 절벽 위의 좁은 땅인데 건물이 난잡하게 늘어서서 뒷골목이 되었다. 그 골목길에 200명 정도 되는 헤르만 백작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로벨은 병든 병아리마냥 축 늘어진 병사들을 보고 말했다.
“1,200명의 군사를 모았다고 들었소만.”
수행기사가 어금니를 바드득- 갈았다.
“전세가 불리하자 도망쳤소. 신의라곤 없는 놈들 같으니!”
‘신의가 없기로는 헤르만 백작을 따라갈 기사가 없지 않소?’
로벨은 혀끝에 감도는 말을 내뱉지 않기 위해 입을 꾹 다물었다.
로벨은 관심사를 돌려서 텅 빈 마구간과 쥐가 숨어있는 곡물창고를 구경했다. 용케 지금까지 버텼구나 감탄이 나왔다. 상황을 보아 로벨이 돕지 않으면 눈이 녹기 전에 죽거나 항복할 것이다.
로벨은 퀴퀴한 냄새가 나는 무기고와 활짝 열린 감옥까지 살핀 후 헤르만 백작이 기다리는 아성으로 들어갔다.
헤르만 백작이 메인 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았는데, 고상한 표정은 아니었다. 흰머리도 지난번보다 많아진 듯했다.
“어서 오시오, 로벨 로드릭 남작.”
로벨은 기어이 참지 못하고 비아냥거렸다.
“그래도 만났을 때는 인사하는군. 헤어질 때만 하지 않는 것이오?”
로벨은 거인의 발에서 몰래 도망친 일을 비꼬았다. 그러나 헤르만 백작은 화내지 않았다.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화낼 기력이 없는 듯했다.
로벨을 안내한 수행기사가 한쪽 무릎을 꿇고 힘차게 고했다.
“My Lord! 로벨 로드릭 남작이 은혜를 갚고자 주군을 돕겠다고 합니다!”
로벨은 어이가 없어서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헤르만 백작의 얼굴이 바뀌었다.
“나를 돕겠다고?”
“은혜 부분은 빼고. 그렇소.”
“어째서?”
“개인적인 이유요. 하지만 백작에게 좋은 일이겠지.”
헤르만 백작은 자세를 바꿨다. 허리가 조금 삐딱해졌다.
“하긴, 경은 도트넘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지.”
정확히는 조지 도트넘 백작하고만 사이가 안 좋았지만,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허나 그런 이유로 남의 전쟁에 끼어들진 않을 테지. 목적이 무엇이오?”
“백작도 잘 알지 않소.”
“내가?”
“류트 공자가 악마추종자와 손잡았다는 것. 그리고 도반 도트넘 백작이 악마추종자의 일원이란 것 말이오.”
헤르만 백작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로벨은 쐐기를 박기 위해 증거를 제시했다.
“백작은 오크가 출몰했을 때 가장 먼저 군사를 모아 달려왔소. 마치 오크가 남하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오.”
거리가 가까운 페르젠 백작조차 준비를 끝마치지 못했는데, 사흘거리가 떨어진 호수성에서 100명의 용병을 모아 찾아왔다.
“...재미있군.”
“오크와 싸우는 것도 소극적이었소. 그때는 페르젠 시티의 상권을 약화시키는 것이 목적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소. 오크가 악마추종자, 즉 류트 공자의 군사였기 때문이오.”
“계속해 보시오.”
“모건 아만다 남작의 편지내용과 도반 도트넘 백작의 돌발행동도 설명해야 하오?”
헤르만 백작은 시간 낭비하지 않고 인정했다.
“말 타고 짝대기나 휘두르는 평범한 기사인 줄 알았는데, 놀라울 정도로 날카롭군.”
로벨은 마녀 키르케와 애꾸눈 볼포스 추리라고 고백하지 않았다. 헤르만 백작은 비스듬히 굽은 허리를 똑바로 펴고 말했다.
“내가 경을 잘못 보았듯, 경도 나를 잘못 보았소.”
“어떻게?”
“난 류트 공자에게 충성맹세한 적 없소. 그저 류트 공자의 힘을 일부 이용했을 뿐이지.”
“류트 공자 생각은 다른 듯 하오만.”
“그래서 이리되었지.”
헤르만 백작은 세상 다 산 노인처럼 허허 웃었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의 반의반도 안 되니 노인이라 할만 했다.
로벨은 결심을 굳히고 말했다.
“백작은 사악하오.”
“인정하오.”
“또한 비열하고 야비하며 저질스럽소.”
헤르만 백작의 수행기사가 칼자루를 움켜쥐고 노호성을 터트릴 준비했다. 하지만 로벨이 먼저 말했다.
“그러나 아직은 인간이지. 저 밖에는 인간의 탈을 벗어 던진 괴물이 있소.”
“악마추종자?”
“그렇소. 본인은 악마추종자 도반 도트넘을 처단하고 볼탄 반도에 평화를 선물할 것이오.”
헤르만 백작의 얼굴에 생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로벨과 헤르만 백작은 번거로운 절차 없이 간단하게 합의했다.
“성 조지아의 축일까지 군사를 모아 오겠소. 그때까지 쓰러지지 말고 버티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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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에디즈 자작의 도움을 받기 위해 하루 더 시간 내어 덩굴성을 찾아갔다. 그러나 에디즈 자작을 만나기도 전에 성문에서 쫓겨났다. 로벨은 당황하고, 마녀 키르케는 화를 냈는데, 애꾸눈 볼포스는 차분했다.
“에디즈 자작의 성격이 조금... 좋게 말하면 조심성이 많고, 나쁘게 말하면...”
애꾸눈은 적당한 표현을 찾다가 포기했다.
“나쁘게 말해도 조심성이 많습니다. 용병도 쉽게 고용하지 않는 작자이니, 적이 될 것이 분명한 그랜드 챔피언을 만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만나도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 겁니다요. 괴팍한 기사 나리라고 소문이 자자합지요.”
허풍쟁이가 한마디 거들었다. 베테랑 용병 두 사람이 긍정할 정도면 뜬소문이 아닐 것이다.
로벨은 전투마를 옆으로 돌려서 후계자 전쟁 시절부터 고생한 덩굴성을 구경했다. 덩굴성에 대한 소감을 마녀 키르케가 대표했다.
“덩굴성인데, 덩굴이 없네요?”
이 주변은 숲이 많고, 호수와 늪이 가까워서 이끼나 덩굴 같은 기생식물이 많이 자랐다. 그런 환경은 성에도 영향을 끼쳐서 평화로운 시기에는 덩굴이 성벽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오곤 했다. 그러나 전쟁이 나면 적에게 이로울 수 있는 덩굴을 모두 베어내야 했다.
“전쟁이 많았으니까.”
기사들이 사는 곳이 모두 그렇지만, 덩굴성만큼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드물었다.
발냄새 베커가 수행원을 대표해서 물었다.
“이제 어디갑니까요?”
로벨은 인상을 찌푸렸다. 숫자에 약해도 에디즈 자작의 병사가 없으면 도반 도트넘 백작군을 맞서기 힘들다는 것은 짐작했다.
“그래도 할 수 없지.”
로벨은 성벽 위에서 경계심을 아끼지 않고 보내는 에디즈 자작군을 힐끔 본 후 말머리를 돌렸다. 겁쟁이를 싸우게 하는 것은 싸우는 사람을 말리는 것보다 어려웠다.
“내년 봄까지 바쁜 날을 보내야 할 거야.”
로벨을 오랫동안 보필한 애꾸눈이 정확한 명령으로 바꿔서 전달했다.
“로드릭 성으로 돌아간다!”
로벨은 깃발을 높이든 허풍쟁이를 따라가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봄이 오면 더 바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