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84화 (84/605)

84화. 가을

84화. 가을

로벨은 심기가 몹시 안 좋았다. 그래서 로벨의 아랫사람 되는 울프 용병단과 로드릭 마을주민도 덩달아 좋지 못했다.

“대체 왜?”

인간이 사고(思考)하기 시작한 이래 무수히 많이 던져진 질문. 그러나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은 적 없는 질문이었다.

어린 집사를 포함해 메인 홀에 모인 모든 사람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펄프 대장을 노려보았다. 자연히 질문한 로벨도 펄프 대장을 쳐다보았다.

펄프 대장은 제물, 희생양, 마녀사냥 등의 단어를 떠올리며 어렵게 입술을 떼었다.

“영주님과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기 때문 아닐까요? 실제로 강철성은 두 번 쳐들어와서 두 번 다 지지 않았습니까?”

“그건 조지 도트넘 백작이야.”

“아니, 뭐, 형제는 한 가지에서 난 열매 같은 거니까...”

“펄프 대장.”

로벨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펄프 대장은 고용주가 가끔씩 예민해지는 그날임을 깨닫고 식은땀을 흘렸다. 그때, 펄프 대장을 구원할 용감한 용병이 나타났다.

“영주님! 영주님! 제가 알아냈... 습니... 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환하게 웃으며 메인 홀로 들어오다가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말끝을 흐렸다.

로벨은 추측만 늘어놓는 펄프 대장을 물리고 허풍쟁이 제이콥을 가까이 불렀다.

“뭘?”

“헤르만 백작이 에디즈 자작의 덩굴성을 공격하는 사이, 도트넘 백작이 헤르만 백작의 호수성을 점령했다고 합니다요. 그러니까 작정하고 빈집을 노린 것입지요!”

펄프 대장 이하 용병들은 과장되게 웃었다.

“헤르만 백작은 빈집 내주는 게 특기인가?”

“학습능력이 없네.”

“머리가 썩 좋아 보이지 않더라.”

그러나 말이 많고 눈치가 없는 허풍쟁이가 헤르만 백작을 비호했다.

“그렇게 바보는 아닙니다요. 이번에는 수비 병력을 제법 두었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합니다요.”

“왜?”

“트롤 10마리가 성문을 부쉈다고 하니까요.”

“트롤이 10마리?”

트롤은 키가 9피트나 되고, 힘이 좋아 전투마를 맨주먹으로 때려죽였다. 오크나 고블린과 비교가 안 되는 흉포한 몬스터였다.

“설마 10마리나 되려고요? 그렇게 우르르 몰려갔으면 소문이 났을 텐데요?”

“소문은 과장되지 마련이오.”

“허나 연기가 나는 곳에는 불이 있는 법이지.”

로벨은 허풍쟁이 제이콥에게 턱짓했다. 허풍쟁이는 목을 가다듬고 이야기했다.

“헤르만 백작은 절벽성으로 피해서 농성 중이라 합니다요. 에디즈 자작도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해 두 백작의 눈치만 보고 있구요.”

로벨은 의자등받이에 몸을 묻고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왜 헤르만 백작일까?”

로벨의 다시 질문했다. 펄프 대장의 말대로 로벨이 부담스러워서, 허풍쟁이 제이콥의 말대로 허술한 성을 노렸다 해도, 하필 헤르만 백작인지 알 수 없었다. 몬스터를 포함한 600명의 군사면 좀 더 가까운 페르젠 백작의 파도성을 노려도 충분했을 것이다.

애꾸눈 볼포스가 그럴듯한 답을 내놓았다.

“영주님, 아만다 남작의 편지를 기억하십니까?”

“응.”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류트 공자와 헤르만 백작이 모종의 관계가 있는 듯 이야기했습니다.”

로벨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정황을 보면 헤르만 백작은 류트 공자를 옹립하지 않고, 스스로 볼탄 반도의 지배자가 되려 하고 있습니다.”

“류트 공자, 도반 도트넘 백작, 헤르만 백작이 한패인데, 헤르만 백작이 배신해서 응징했다?”

로벨은 곰곰이 생각한 후 긍정했다.

“그럴듯해.”

어린 집사가 빽! 소리 질렀다.

“뭐가 그럴듯해요! 그런 일이면 헤르만 백작을 암살하는 편이 깔끔하죠! 악마추종자인지 악마추론자인지 마법사란 작자가 그거 하나 못할까요?”

마녀 키르케가 발끈해서 반박했다.

“마법사는 암살자가 아니에요!”

“아니긴! 저번에 찾아온 마녀 보니까 암살자보다 더하던데요!”

펄프 대장은 떽떽거리는 목소리에 귓구멍을 후비고 말했다.

“진정들 하시오. 지금 중요한 것은 헤르만 백작이 아니니까.”

“그럼요? 도반 도트넘 백작?”

“아니오. 볼프 사트로 후작이오.”

메인 홀의 시선이 다시 펄프 대장에게 집중되었다. 이번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사트로 후작가의 다른 봉신들은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의 독단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볼프 사트로 후작이 어떻게 나오느냐?”

“그렇습니다. 후작의 결정으로 전쟁이 확대될 수도, 축소될 수도 있습니다.”

로벨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는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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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남쪽에서 백작과 자작이 쌈박질하는 사이, 먼 북쪽에서 겨울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정열을 잃은 식물들은 자신의 일부를 죽였고, 열정을 잃은 동물들은 깊고 어두운 곳으로 땅속으로 사라졌다.

로벨은 옆구리에 화살구멍이 난 가죽 망토를 꺼내 입고, 애꾸눈 볼포스, 허풍쟁이 제이콥 등 10명의 크로스보우맨을 대동해 북쪽 숲으로 나왔다. 2년 만에 치르는 늑대 사냥이었다.

“이쪽으로 온다! 사격준비!”

“나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 덫을 놓아 사냥할 생각 없을까? 내 고향의 사냥꾼은 하루종일 덫만 놓던데?”

“이건 그냥 사냥이 아니야. 훈련이지. 겸사겸사 위험을 줄이는 거고.”

늑대들은 숲에 먹을 것이 없으면 마을로 나와 어슬렁거렸다. 가축을 물어 가면 그나마 다행이고, 사람을 해칠 때도 있었다.

“아야랑 이야카가 있으면 쉬울 텐데요.”

“안 돼.”

로벨은 아야와 이야카는 데려오지 않았다. 동족이 사냥당하는 것을 보고 충격 받을까 걱정도 되고, 야성이 깨어나 도망갈까 우려도 되었다. 사람 손에서 자랐다 해도 늑대는 늑대였다.

“쏴라!”

10여 발에 쿼럴이 헐벗은 나무 사이를 가로질렀다. 바람을 등지고 달려온 늑대들은 사람 냄새도, 쇠 냄새도 맡지 못하고 쓰러졌다.

“깨갱-!”

“깽!”

쿼럴에 맞지 않은 늑대들은 방향을 바꿔서 반대방향으로 도주했다. 그 수가 많지 않았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크로스보우를 어깨에 걸고 쓰러진 늑대들에게 다가갔다.

“다섯 마리 잡았습니다!”

허풍쟁이가 소리치자 숨이 붙어있는 늑대가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로벨이 전투마를 몰아 쓰러진 늑대 곁으로 다가갔다.

“고통을 덜어줘.”

“아, 예.”

허풍쟁이는 대거를 뽑아 늑대를 겨누었다. 늑대는 숨을 헐떡거리다가 황갈색 눈을 꼭 감았다. 죽음을 받아들인 모양이다. 날카로운 칼날이 가죽을 찢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핏물을 짜냈다.

애꾸눈 볼포스가 아바레스트를 재장전하고 물었다.

“반대쪽으로 다시 몰까요?”

로벨은 도망간 늑대 숫자를 헤아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정도면 됐어.”

울프 용병단은 쾌재를 부르며 늑대의 꼬리, 발톱, 가죽 따위를 벗겼다. 절반은 숲의 주인인 노벨이 세금조로 가져가지만, 절반은 사냥에 참가한 용병들의 몫이었다.

로벨은 아야와 이야카가 보지 못하게 하라고 잔소리하고 빼빼 마른 숲 저 먼 곳을 보았다.

북풍이 바짝 마른 나뭇잎이 쓸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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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로드릭 영지의 사람들은 사방에서 몰아치는 전쟁의 태풍 속에서 평온하게 겨울을 준비했다.

사냥을 대대적으로 치러서 고기와 가죽을 확보하고, 짚 꾸러미를 새로 만들어 지붕과 침대를 갈고, 남는 것을 소와 말 먹이로 저장했다.

수염이 까뭇까뭇 자리기 시작한 청년들은 능숙하게 양털을 벗겼고, 가슴이 소담하게 부풀기 시작한 처녀들은 수려하게 물레를 감았다.

신입 용병과 사냥꾼 형제 사이에 시비가 생겨 주먹이 오간 것과 숲지기 아들이 멧돼지에 치여 정강이뼈가 부러진 것과 촌장의 손녀딸이 쌍둥이를 낳은 것이 가장 큰일이었다. 즉, 별일 없었다.

성 위에서 내려다보는 로벨과 펄프 대장에게는 그저 심심하고 평화로운 마을의 일상이었다.

로벨은 시선을 바꿔서 기존 성벽을 넘기 시작한 석재 성탑을 올려다보았다.

“볼프 사트로 후작은?”

펄프 대장이 두 마디 정도로 길어진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조용합니다.”

“역시?”

“예. 도반 도트넘 백작의 독단적인 군사 활동으로 사트로 후작가와 무관하단 뜻입니다.”

로벨은 펄프 대장을 따라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중후한 용병과 달리 매끄럽기만 했다.

“그럼 프란시스 공작가와 사트로 후작가가 다시 싸울 일은 없겠네.”

“프란시스 공작가문이 남아있다면 그렇...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로벨은 눈을 한번 흘겼지만 타박하지 않았다. 펄프 대장은 괜히 추운 척하면서 말했다.

“눈이 내리면 전쟁이 끝날 겁니다.”

“그리고 봄이 오면 다시 시작하겠지.”

로벨은 성벽을 따라 조금 걸었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싸우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저러다 정들지...’ 로벨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결정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을 치자.”

“...예?”

‘저녁에는 고기스튜를 먹자’ 수준의 뉘앙스라 조금 늦게 반응했다. 로벨은 조곤조곤 설명했다.

“류트 공자의 수족이며, 악마추종자의 일원이야. 그리고 볼프 사트로 후작을 조종하는 주전파 수장이기도 하고. 이 기회에 도반 도트넘 백작을 축출하면 여러 사람이 행복해질 거야.”

“...축출하러 가는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을 겁니다.”

로벨은 오래 생각했는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지금밖에 기회가 없어. 강철성에서 멀리 떨어졌고, 헤르만 백작과 싸우고 있고, 사트로 후작이 돕지 않아. 지금이 아니면 류트 공자 일당을, 아니, 악마추종자 패거리를 잡을 수 없어.”

류트 공자를 제거한다고 볼탄 반도의 혼란이 가라앉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향후 이어질 더 큰 혼란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가을입니다. 곧 겨울이 시작되고요. 이 시기에 움직이는 것은 우리 애들도, 봉신들도 달가워하지 않을 겁니다.”

“움직이는 것은 봄이야.”

“그때까지 도트넘 백작이 기다려주겠습니까?”

“기다릴 거야.”

로벨은 기사의 감으로, 그리고 영주의 경험으로 확신했다.

“지금 군사를 물리면 아무 소득 없이 병력만 낭비한 거야. 헤르만 백작이 항복할 때까지, 혹은 휴전을 맺을 때까지 무조건 버틸 거야. 그럴 작정으로 호수성을 점령했을 테니, 그곳에서 겨울을 날 거야.”

“그럼 영주님께서도 호수성을...”

“내가 원하는 것은 전쟁을 끝내는 거야. 땅에 욕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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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렸다. 여름에 못다 한 역할을 이제야 하려는 듯 펑펑 쏟아냈다.

영지민은 지붕을 새로 올린 자신의 선견지명에 스스로 감탄하며, 가을에 비축한 식량을 알뜰히 축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반면, 공사가 안 끝난 로드릭 성은 몰골이 영 좋지 않았다. 로벨은 눈이 미끄러워 성벽 공사를 잠시 중단시켰다. 쌓다가 멈춘 성은 옛날의 낡은 성보다 후줄근해보였다.

“역시 중도에 멈추면 안 되는 거야”

그 말은 여러 기사에게 적용되었다.

가장 먼저 일어났으나 예상치 못한 저항에 힘만 소진한 페르젠 백작, 그런 페르젠 백작의 뒤통수를 노렸다가 도리어 뒤통수를 맞은 헤르만 백작, 자신이 감당 못 할 싸움에 끼어들었음을 깨달은 에디즈 자작과 루카스 자작은 뒷방으로 밀려났다.

이제 볼탄 반도의 패권싸움은 조용히 힘을 키운 로벨 로드릭 남작과 장외에서 난입한 도반 도트넘 백작으로 좁혀졌다. 두 기사 모두 중도에 멈출 생각은 없었다. 겨울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올해의 겨울은 작년과 달리 더디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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