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빛처리
81화. 빛처리
재무관을 납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영주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이니 가장 크고 가장 화려한 집을 찾아 노크하면 끝이었다.
“누구시오?”
“치안관? 징수관?”
“재무관이오.”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복부에 주먹을 꽂아주었다. 본의 아니게 저녁식사로 보리빵과 맥주를 먹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흐에엑!”
마녀 키르케는 감탄인지 한탄인지 아리송한 탄성을 질렀지만, 발가락 슈미츠 등은 경악이 확실한 비명을 질렀다.
“어이구! 기사 나리! 노인네를 그리 패면 어쩝니까요!”
“으아아악! 그게 문제냐! 재무관이라고! 영주의 재무관!”
로벨은 ‘그게 왜?’하는 표정을 짓고 재무관을 뒤집어 포획한 사슴 묶듯이 팔다리를 하나로 묶었다. 곰발 베버가 하얗게 질려서 ‘최소 교수형... 재수 없으면 참수형...’ 등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로벨은 거리낌이 없었다.
재무관이라 해봐야 자유민이니, 귀족이자 기사인 로벨이 처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재무관의 고용주인 도반 도트넘 백작이 국왕폐하와 귀족원에 고발하면 일이 복잡해질 수 있었다.
로벨은 발가락 슈미츠에게 말했다.
“정체를 숨기는 게 좋겠지?”
꺼릴 것이 많은 용병들은 열렬히 동의했다. 그러나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정체를 숨길 거면 가면이나 복면을 준비했어야 했다.
“로벨 로드릭 남작! 그랜드 챔피언 아닙니까! 이게 무슨 짓입니까!”
재무관은 팔다리 묶여서 짐짝처럼 실린 것치고 활발히 소리쳤다. 로벨은 당황해서 거짓말했다.
“아, 아닌데? 나 아닌데?”
“거짓말 마십시오! 프란시스 시티 토너먼트에서 보았으니까!”
직업이 직업이라 기억력이 좋은 모양이다. 하지만 처세술이 안 좋았다. 로벨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 알면 안 되는데...”
“아, 안 되다니요?”
“도반 도트넘 백작에게 말할 거 아니야. 그럼 안 되지. 몇 가지만 물어보고 풀어주려 했는데...”
“허억! 살려주십시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로벨은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죽여서 입을 막지도 않았다. 손수건을 둘둘 감아서 재갈 물리고, 혹시나 따라올지 모를 추격대를 피하기 위해 강철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강철성에 실망한 마녀 키르케를 위로했다.
“아참, 강철산에는 철이 있어.”
“정말요?”
“응. 철광이 많으니까.”
역시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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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관을 납치한 일은 범죄라는 사실만 빼고 아주 훌륭한 일이었다. 용병을 일일이 세고, 창고를 하나하나 뒤질 필요 없이, 그냥 대거만 들이밀면 되었다.
“150명! 150명입니다!”
강철성에서 고용한 용병이 150명이었다. 도적을 쫓아내거나, 몬스터를 소탕하는 일을 하기에는 숫자가 지나치게 많았다.
로벨은 재무관은 두툼한 살갗을 꼭꼭 찌르며 확인했다.
“전쟁? 누구랑?”
“그건 저도 모릅니다! 영주님만, 도반 도트넘 백작님만 아는 일입니다!”
“도반 백작의 독단이야? 아니면 볼프 사트로 후작의 소집령이 내려온 거야?”
“우리 영주님, 도반 백작님의 독단입니다! 히익! 남작님! 칼! 칼 좀 치워주십시오!”
로벨은 재무관의 피부를 살짝 찢어 피를 빼냈다. 백 마디 말보다 피 몇 방울이 효과적이었다. 재무관은 본래 겁이 많은지, 아니면 상대가 악명 높은 로벨 로드릭이라 겁을 먹었는지 묻지도 않은 것을 술술 털어놓았다.
“볼프 후작님은, 그러니까 우리 영주님의 주군께서는 전쟁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비열한 습격, 아니! 오해요! 오해가 분명한 토너먼트 습격사건 때도 프란시스 공작가와 전쟁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셨습니다.”
로벨은 두 차례나 마주쳤던 볼프 사트로 후작을 떠올렸다. 예의 바르고 유쾌해서 호감 가는 기사였다.
“그런데 왜 전쟁이 일어난 거야?”
“우리 영주님 때문입니다!”
로벨은 기억을 뒤적여서 단편적인 정보를 꺼내보았다. 조지 도트넘 백작을 비롯한 강경파 봉신들이 전쟁을 종용했다.
“아랫사람에게 휘둘릴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로벨은 조지 도트넘 백작을 떠올리며 중얼거렸지만, 재무관은 도반 도트넘 백작을 말하고 있었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영주님은, 도반 백작님은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형처럼 소머리 괴물이야?”
로벨은 반쯤 농담으로 말했다. 그러나 재무관은 진지했다.
“웨일 백작님을 살해한 것도, 조지 백작님을 괴물로 만든 것도 도반 백작님입니다. 33명의 처녀 피로 사악한, 사악한 마법을 부렸습니다. 그 흔적이 지금도 지하감옥에 남아있습니다.”
로벨과 마녀 키르케가 서로를 보았다.
“정말?”
“저, 정말입니다! 정말이고말고요! 볼프 후작님을 조종해 전쟁을 일으킨 것도, 조지 백작님을 전장에서 죽게 한 것도, 모두 영주님이 꾸민 짓입니다! 도반 도트넘 백작 말입니다!”
로벨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가 아래로 축 처졌다. 무언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그 고민이 자신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믿는 재무관은 새우처럼 굽어진 몸을 꿈틀거리며 빌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보살펴야 할 늙은 어머니와 어린 자식들이...”
“어린 자식은 무슨... 장성해서 제 갈 길 갔겠구만.”
발냄새 베커가 웃었다. 자포자기한 모양이다. 로벨은 눈알을 굴리는 용병도, 애원하는 재무관도 신경 쓰지 못했다. 쇠와 말똥이 가득한 기사의 뇌는 새로 얻은 정보를 처리하느라 과부하에 걸릴 지경이었다.
“강철성의 새 주인이 악마추종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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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재무관을 풀어주고 조곤조곤 협박했다.
“오늘 일은 떠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주인을 배신한 것이 들통 날 테니까.”
“그,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로벨 정도 되면 납치가 아니라 살인을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국왕 폐하나 귀족원이 나서서 벌을 줘도 끽해야 피해보상인데, 그조차도 몇 푼 되지 않았다.
귀족원 회의를 소집할 수 있는 프란시스 공작과 사트로 후작은 각자 일로 바빠 도반 도트넘 백작이 저글링과 텀블링을 동시에 하면서 요구해도 응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애당초 전쟁을 코앞에 둔 도반 도트넘 백작이 재무관의 명예 따위를 위해 나서줄 리 없었다. 군사기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재무관의 목만 날아갈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귀족 밑에서 일한 재무관은 귀족들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가봐.”
재무관은 굽신굽신 절하고 구르지 않을까 염려되는 속도로 산을 내려갔다. 발가락 슈미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병사들을 끌고 오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로벨은 자신 없이 중얼거렸다. 사실 확신할 수 없었다. 납치당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로벨 로드릭을 목격했다는 식으로 보고할 수 있었다. 발냄새 베커가 펄쩍 뛰었다.
“그럴지도라니요? 150명이라지 않습니까요! 이제 어쩌실 겁니까?”
로벨은 바위 사이에 난 풀을 요령 좋게 뜯어먹는 전투마를 잡아왔다. 그리고 걱정 가득한 일행에게 자신감을 보였다.
“도망가자.”
“......”
“아니면 싸울까?”
“당장 도망갑시다. 어디로 갈깝쇼?”
로벨은 강철산 남쪽을 가리켰다.
“왔던 길로 가자.”
“그쪽은 강철성하고 가까운데...”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야. 산으로 끌고 왔으니 서쪽으로 돌아갈 거라 생각할 거야. 그쪽으로 병사를 보낸 사이 우린 숲을 지나가자.”
“그럴듯한 말씀이긴 한데, 잘 될까요?”
로벨은 이견 따위 받지 않았다. 마녀 키르케를 태우고 강철성 마을을 동쪽으로 돌아갔다.
재무관이 약속대로 침묵했는지, 아니면 로벨의 노림수가 맞아떨어졌는지 숲을 가로지를 동안 병사 비슷한 것을 보지 못했다.
로벨은 추격군에 대한 걱정을 털어내고 새로 알게 된 일에 집중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이 악마추종자라니.’
웨일 백작의 죽음, 조지 백작의 괴물화, 전쟁과 몬스터 출몰이 설명되었다. 로벨은 어두컴컴해지는 동쪽을 힐끔 보았다.
‘볼프 후작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마법사 따위한테 영지를 뺏기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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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자 밤과 그림자가 하나가 되었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별빛으로는 손끝보다 먼 곳과 무릎보다 낮은 곳은 볼 수 없었다.
로벨 일행은 손바닥만한 개울가에서 야영을 준비했다. 여행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식사준비부터 취침준비까지 일사천리였다.
로벨은 전투마를 개울 가까이에 묶어두고 봇짐을 풀어 얇게 썬 염장고기를 꺼냈다. 마녀 키르케가 시무룩해졌다.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짜고 단단한 염장고기만큼은 질색했다. 보존을 위해 맛과 식감을 모두 포기한 탓이다. 특히 오래된 염장고기는 바닷물보다 짜고 참나무보다 단단해서 그냥 먹지 못할 정도였다. 다행히 로벨이 가져온 고기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 뚱보네에서 밥 먹고 나올 걸 그랬어요.”
“이것도 먹을 만해.”
로벨은 색이 변질되지 않은, 그나마 맛이 좋은 가운데 부위를 마녀에게 주었다. 마녀는 두 손으로 고기를 잡고 다람쥐처럼 오물오물 씹었다. 로벨은 마녀의 모습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발가락 슈미츠가 랜턴을 나뭇가지에 걸고 말했다.
“기사 나리, 불을 피울까요?”
“추워?”
“그건 아니지만, 야생짐승이 있을 수 있잖습니까.”
“추격꾼이 있을 수도 있어.”
“이런 밤이면 추격도 못 합니다. 걔네도 용병일해서 빌어먹고 살 텐데 위험한 짓은 안 하죠. 그리고 짐승보다 무서운 것이...”
“몬스터?”
최근 볼탄 반도 북쪽에서 몬스터의 준동이 잦았다. 노스폴드 시티를 공격한 오크 무리만 떠올려도 위험을 알 수 있었다. 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악마추종자의 소행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불을 보고 더 몰려오지 않을까요?”
마녀가 걱정하면 물었다. 그러자 발가락 슈미츠가 껄껄 웃었다.
“몬스터는 어둠에서 태어난 어둠에서 살아가는 어둠의 자식이오. 낮과 불을 싫어하오. 그 점에서는 짐승하고 차이가 없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닌데...”
로벨은 이미 환하게 밝혀진 랜턴을 보고 허락했다.
“알아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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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키르케는 모닥불 너머로 용병들을 노려보면서 진지하게 심문했다.
“곰발 아저씨는 손이 커서 곰발이고, 발냄새 아저씨는 발냄새가 심해서 발냄새 아저씨인데...”
“나 발냄새 안 심해! 발냄새를 싫어해서 발냄새야!”
발냄새 베커가 거세게 항의했지만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발가락 아저씨는 왜 발가락이어요?”
발가락 슈미츠는 젖은 나뭇가지를 모닥불에 넣었다.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타닥! 탁! 피쉭- 소리를 내었다.
“궁금하시오?”
“조금?”
발가락 슈미츠는 철편이 박힌 가죽부츠를 벗고 헝겊에 쌓인 왼발을 꺼냈다. 한 열흘 만에 신발을 벗었는지 냄새가 지독했다. 마녀는 발냄새란 별명이 엉뚱한 사람에게 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헝겊을 벗는 순간 별명이 발가락인 이유를 알았다. 엄지발가락을 제외한 4개가 뭉텅이로 잘려져 있었다.
“어릴 때 마차 바퀴에 깔려 으스러졌소. 당시 목수였던 아버지가 바스러진 발가락을 잘라주셨소.”
뼈가 으스러질 정도라면 높으신 귀족이나 가진 것이 많은 상인의 마차일 것이다.
“그 사람이 미운가요?”
“아니오. 그냥 사고였으니. 그리고 누구를 미워해도 될 만큼 착하게 살지 않았소.”
로벨은 아무도 안 보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칼끝 위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연이 하나씩은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미워하지.’
로벨은 긴 나뭇가지를 골라 반으로 부러트렸다. 뚜둑! 뚝! 하나를 부러트렸는데, 소리가 두 번 울렸다.
로벨은 모닥불을 휘젓는 척하면서 불붙은 장작을 위로 올렸다. 야영지의 범위가 10피트 정도로 넓어졌다. 그리고 나무와 나무 사이, 바위와 바위 사이로 미처 빛 처리를 하지 못한 쇠붙이가 반짝였다.
로벨은 불붙은 장작 멀찍이 던지고 롱소드를 뽑았다.
“기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