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여름
78화. 여름
“사다리! 사다리를 가져와라!”
“정신 차려, 신입!”
“제길! 기름이다! 피해!”
화살, 통나무, 돌, 기름 등이 15피트 성벽 위에서 쏟아져 내렸다. 성벽을 올라가야 하는 울프 용병단 ‘제2중대’에게는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3열 사격 준비!”
울프 용병단은 재빨리 자리를 교대해 크로스보우를 올렸다. 펄프 대장의 사격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애꾸눈 볼포스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서 방아쇠를 당겼다. 파앙-! 아바레스트를 떠난 철제 쿼럴은 300명의 장정이 빚어내는 뜨거운 공기를 가로질러 불붙은 장작을 꺼내는 루카스 자작군의 머리에 꽂혔다.
그 덕분에 켈트 경이 이끄는 제2중대가 통구이 될 위기를 넘겼다.
“물러나라! 물러나라!”
로벨은 기름에 젖은 제2중대가 물러나자 예비대를 투입했다.
“머를 경, 교대하시오.”
머를 브릭 경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하프 소드(Hand and Half Sword: 한 손으로 다루는 중검)를 뽑았다.
“제3중대! 나를 따르라!”
켈트 경은 본진까지 후퇴해서 무덤덤한 로벨과 한심하게 쳐다보는 어린 집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실패했습니다, 마로드.”
“기름을 씻고 부상자를 치료해.”
로벨의 두 번째 가신이 된 켈트 레슬러 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휘하 병력을 모아 후방으로 빠졌다.
펄프 대장이 제3중대 돌격 타이밍에 맞춰 순차사격을 실시했다. 쿼럴이 쉬지 않고 성벽을 넘어갔다. 눈대중으로 쏘는 견제사격이지만, 간혹 재수 없는 병사가 쿼럴에 맞아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어린 집사가 적진의 동향을 유심히 관찰하며 말했다.
“한두 번만 흔들면 무너지겠는데요?”
“그 전에 항복하면 좋겠는데...”
로벨은 성벽 너머로 바위성을 올려다보았다. 로벨에게 두 차례 패배한 루카스 자작의 본진이었다.
“아앗! 머를 경이 성벽을 넘었어요!”
정확히는 머를 경 휘하의 용병 하나가 끈덕진 저항을 뚫고 여장을 뛰어넘었다. 그 용감한 용병은 흥분한 수비대 창날에 벌집이 되어 쓰러졌지만, 뒤따라 올라오는 용병들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억세기로 유명한 바위성 영지민이지만, 전쟁과 살인의 프로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성벽 위에 오르는 용병이 늘어갈수록, 성벽 아래로 던져지는 영지민도 늘어났다.
로벨은 롱소드를 뽑아 외팔이 더치에게 명령했다.
“지금이야! 전군 돌격!”
로벨이 지휘하는 제1중대, 그러니까 ‘진짜’ 울프 용병단이 병장기를 휘두르며 돌진했다.
“가자! 싸우자! 이기자!”
“저 성은 우리 꺼다!”
어린 집사가 입술을 삐죽였다.
“쳇. 그럼 얼마나 좋아.”
와아아아아!
챙! 챙챙!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 쇠와 뼈가 부딪치는 소리, 뼈와 뼈가 부딪치는 소리, 성벽 아래로 병장기 소리가 번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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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오랜 고민 끝에 에릭 공작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에릭 공작을 동정해서도, 에릭 공작이 정의로워서도, 에릭 공작에게 빚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충분한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릭 공작은 공작가문의 비자금을 아낌없이 내주었고, 로벨은 그 돈으로 200명의 프리랜서를 고용했다.
“제3중대가 성문을 장악했습니다!”
“펄프 대장! 따라와!”
편의상 제2중대, 제3중대라 부르지만, 30일 단기계약이라 진짜 울프 용병단은 아니었다. 에릭 공작의 비자금이 무한대로 솟아나는 것이 아닌 이상 유지비도 생각해야 했다. 그래도 비싼 돈을 들여 선발한 용병들이라 실력이 좋았다.
로벨은 전투마를 몰아 빠끔히 열리는 성문을 박차고 뛰어들어갔다.
“으아앗! 죽어랏!”
성문 수비병이 악에 바쳐 부주를 휘둘렀다. 로벨은 롱소드를 휘둘러 창대를 쳐내고 고삐를 뒤로 당겼다. 전투마가 앞발을 올려 수비대의 가슴을 걷어찼다. 인마일체의 멋진 솜씨였다.
“루카스 자작은?”
머를 브릭 경이 성벽 계단을 구르다시피 내려오며 보고했다.
“아성(Keep)에 숨었습니다!”
“펄프 대장! 머를 경을 도와 잔당을 처리해! 외팔이 더치와 풋맨 소대는 나를 따라와! 루카스 자작을 잡는다!”
로벨 이하 풋맨들은 혼잡한 연병장을 가로질러 아성에 도착했다. ‘바위성’이란 별명에 걸맞게 성 일부가 자연석으로 되어있었다.
소문처럼 성 전체가 바위를 깎아 만든 것은 아니지만, 정면에서 보는 외벽은 통짜 바위로 되어 있었다.
“그래도 성문까지 돌로 만들진 않았네?”
“뭣들 하냐! 부숴버려!”
외팔이 더치 소대는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공성용 망치와 벌목용 도끼를 챙겨왔다. 울프 용병단에서 가장 힘이 좋은 풋맨은 손바닥에 침을 뱉고 있는 힘껏 망치를 휘둘렀다.
쾅! 쾅! 쾅! 쾅!
도끼와 망치가 날아갈 때마다 성문이 흔들리고 돌가루가 우르르 떨어졌다.
아무리 견고한 나무로 만들어도 반복되는 충격을 버틸 수 없었다. 방아 찍듯이 교대로 때리다 보니 마침내 성문에 구멍이 뚫렸다. 콰직-! 로벨은 흐룬팅을 뽑아 구멍에 찔러 넣었다.
“끄아악!”
운수 나쁜 병사가 눈먼 칼에 맞았다. 가죽을 찢고 피를 짜내는 촉감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흠!”
로벨은 흐룬팅 손잡이에 체중을 실어 내리그었다. 칼날이 문틈을 따라 미끄러지며 반쯤 부러진 빗장을 끊어냈다.
“막아! 막아랏!”
최후의 방어선이 열리고,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하는 루카스 자작군이 창을 찔렀다. 로벨은 컴포지트 아머를 믿고 몸으로 밀어붙였다. 깡! 까앙! 창날이 흉갑과 퀴스에 부딪쳐 튕겨 나갔다.
로벨은 충격에 한 걸음 물러났다가, 두 걸음 내디디며 흐룬팅을 휘둘렀다. 요정이 만들었다는 소문이 생길 만큼 날카로운 흐룬팅이었다. 창대와 투구와 머리통을 한꺼번에 잘라냈다.
로벨은 눈알이 뒤집힌 시체를 발로 차고 성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로벨을 뒤따라 들어온 외팔이 더치 및 울프 용병단이 로벨 좌우의 루카스 자작군을 덮쳤다. 칼과 도끼가 휘둘러질 때마다 핏물이 아치형으로 튀어 올랐다. 겁에 질린 비명이 빠르게 퍼지고, 빠르게 사라졌다.
로벨은 메인 홀에 홀로 서 있는 기사를 보았다.
“루카스 자작.”
“로, 로벨 로드릭 남작...”
친분이라 말하기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한 주군을 모신 기사였고 함께 싸운 전우였다. 로벨은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었다.
“피와 명예. 둘 중 하나 택하시오.”
루카스 자작은 머리를 숙이고 롱소드를 떨구었다. 피도, 명예도 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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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찾아오자 혼란스러운 볼탄 반도에 이변이 발생했다. 로벨 로드릭이 군사를 일으켜 수차례 마찰을 빚은 루카스 자작의 영지를 공격했다. 그리고 무적무패의 명성을 한층 더 높였다. 고작 닷새 만에 가시성과 바위성을 점령한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일관되었다.
“왜 가만히 있는 사자 코털을 뽑아 잡아먹히냐.”
“뭐?”
“사람들이 그리 말해요. 영주님이 사자라고요.”
아야가 귀를 쫑긋 세웠다. 마녀가 아야의 귀를 꼬집으며 말했다.
“우린 늑대인데요?”
“늑대 코털이라고 하면 위엄이 없잖아요.”
로벨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루카스 자작을 감옥에 보내고 전쟁을 종결지었다. 깃발을 바꾸고, 포고령을 내렸지만, 성품이 거친 바위성 영지민은 부모형제의 원수들을 곱게 보지 않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말썽을 피웠다. 그러나 로벨은 신경 쓰지 않았다.
“서 켈트를 바위성의 영주로, 서 바이란을 가시성의 영주로 임명한다.”
로벨은 에릭 공작의 충신이며, 명목상 로벨의 가신인 켈트 경 등에게 봉토를 하사했다. 처음부터 그리하기로 합의했으니 불만은 없지만, 로벨도 사람인지라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도 로드릭 성이 안전해졌으니까. 그걸로 만족하자.’
친(親) 에릭 공작 파벌이 볼탄 반도 북서부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 상황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페르젠 백작이었다.
페르젠 백작은 북쪽에 로벨 로드릭, 남쪽에 에릭 공작, 동쪽에 헤르만 백작을 두어 3면이 포위당했다. 페르젠 백작은 상식적인, 그래서 굴욕적인 제스처를 취해야 했다.
“페르젠 백작이 화친을 요청했어요.”
로벨은 땀을 닦으며 돌아보았다. 어린 집사가 우물에서 막 길어낸 시원한 물과 그 물로 적신 차가운 수건과 봉인이 뜯긴 편지를 가지고 왔다. 로벨은 아침훈련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내 편지 열어본 거야?”
“누가 들으면 연애편지라도 훔쳐본 줄 알겠네요. 적이 보낸 물건인데 당연히 확인해야죠! 무슨 수작을 부렸을지 모르잖아요?”
로벨은 별 걱정 다 한다고 핀잔주고 페르젠 백작의 편지를 펼쳤다. 땀 때문에 얼룩이 조금 생겼다. 의미 없는 미사어구와 두리뭉실한 호칭 따위를 제외하면 보리수확이 끝날 때까지 군사 활동을 하지 말자는 내용이었다. 어린 집사가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지들이 먼저 쳐들어와놓고! 우리가 쳐들어갈 때 되니까 ‘싸우지 말자~’ 이 지랄을 하네요! 이 페르젠 백작 같은 페르젠 백작이...”
로벨은 해가 갈수록 거칠어지는 어린 집사의 말투를 우려하면서도 호기심을 먼저 보였다.
“페르젠 백작 같은?”
“요즘 유행하는 욕이에요. 뒤통수치고도 아무것도 못 얻어낸 바보 같은 사람이란 뜻이죠.”
로벨은 편지를 돌려주고 물통을 받아 머리에 끼얹었다. 달궈진 근육에 차가운 물을 뿌리자 쇠를 연마하는 기분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펑퍼짐한 우플랑드가 몸에 딱 달라붙어 조각처럼 다듬어진 육체가 드러났다. 어린 집사가 얼굴을 붉히고 투덜거렸다.
“그러지 말라고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누가 봐?”
어린 집사는 ‘제가 봐요!’ 라고 말할 수 없었다. 로벨의 몸을 똑바로 못 보고 시선을 이리저리 굴려야 했기 때문이다.
“왜 그래?”
로벨은 허리를 조금 숙여 어린 집사와 눈을 마주쳤다. 어린 집사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제가 뭘요? 아앗! 옷 가져올게요!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세요!”
로벨은 머리끈을 풀어 젖은 머리카락을 마구 털어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탓인지 한층 성숙해 보였다.
“저 녀석이 왜 저러지?”
다만, 몸만 성숙해져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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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확이 시작될 무렵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로벨의 영향력이 닿는 곳, 구체적으로 로드릭 성, 아만다 성, 가시성, 바위성 인근의 영주들이 자발적으로 충성을 바쳤다. 영지 인구가 100명도 안 되고, 병사가 한 자릿수에 불과한 군소 영주들이지만, 숫자를 합치면 제법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충성을 받은 것’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 로벨 로드릭이 볼탄 반도의 지배자 중 하나로 부상한 것이다.
“로버트 상단주입니다. 영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것은 약소하지만 제 성의입니다.”
“리암 브랜들리 남작이오. 명성 높은 그랜드 챔피언과 자리를 함께하니 가문의 영광이오.”
“에밋 에베넷입니다. 제 검과 제 말을 바치고자 합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로벨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귀족, 기사, 상인 행렬에 질렸고, 어린 집사는 행복에 겨워 비명을 질렀다. 그들이 바치는 '성의'만으로 로드릭 영지 1년 치 예산을 채웠다.
고난이 지나가면 영광이 도래하는 법이라, 희소식이 거듭 이어졌다. 이안 선장이 아이란드 왕국과 교역에 성공하고 아만다 항으로 돌아왔다. 어린 집사가 홀딱 반한 후추를 두 상자나 가져왔다. 500페닝이나 될까 말까 한 양모와 치즈를 가져가 5,000페닝 가치의 후추를 가져왔으니 어마어마하게 남는 장사였다. 어린 집사가 이마를 짚고 비틀거렸다.
“나, 나 좀 부축해요! 빨리요!”
순진한 로벨과 순수한 마녀 키르케가 양쪽에서 부축했다. 어린 집사는 헤벌레 웃었다.
“부자다! 부자! 영주님! 우리 부자 됐어요!”
1만 페닝 단위로 예산을 짜는 에릭 공작과 페르젠 백작이 보면 황당하겠지만, 로드릭 영지 기준에서는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였다. 이안 선장이 새까맣게 탄 얼굴로 웃었다.
“자금이 부족해서 많이 구할 수 없었습니다.”
“돈? 돈이요? 그깟 꺼 얼마든지 드리죠! 후추를 가져오세요!”
어린 집사가 신나서 떠들었다. 다음 항해에는 소금, 모피, 와인, 위스키 등도 가져가기로 했다.
“이 돈이면 배를 한 척 더 사서...”
로벨은 어린 집사를 현실로 끄집어냈다.
“그보다 급한 게 있잖아.”
“급한 거요?”
로벨은 발을 굴려 로드릭 성 바닥을 두드렸다.
“공사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