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보리
77화. 보리
페르젠 백작이 스톤헤드 요새 공략에 열을 올리는 사이, 헤르만 백작은 버팅거 시티를 포함한 볼탄 반도 동부 지방을 장악하고 1,200명이나 되는 대군을 모았다. 페르젠 백작의 군사보다 2배가 많았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와아! 1,200명이요?”
“우리 영지 인구보다 많잖아?”
페르젠 백작도 크게 놀랐다.
페르젠 백작은 프란시스 시티 점령을 포기하고 검은산으로 이동해 수비태세를 갖추었다. 네 자릿수의 병력이 엄청나긴 하지만, 투구도 갖추지 못한 농민병이 대부분임을 감안하면 해볼 만했다. 어린 집사가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그래서 누가 이겼어요?”
헨리 상단주는 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흘을 싸웠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요?”
“에디즈 자작이 빈 집이 된 호수성을 점령하면서 끝이났습니다.”
로벨은 입술을 모아 ‘오호?’ 소리를 냈다. 그 정도면 점잖은 반응이었다.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은 입을 쩍! 벌렸고, 애꾸눈 볼포스는 ‘어부지리... 견토지쟁...’ 어쩌고 동방대륙의 속담을 중얼거렸다.
“헤르만 백작은 허겁지겁 철군해야 했고, 기사들을 소집한지 40일이 지난 페르젠 백작도 뾰족한 수 없이 파도성으로 물러났습니다.”
로벨과 로벨의 측근들은 종잡을 수 없는 전쟁의 방향에 놀라면서도 허탈해했다.
“그럼 아무도 소득이 없네요?”
“에디즈 자작이 호수성을 손에 넣었잖아요?”
“헤르만 백작이 총력을 다하면 오래 못 버틸 것이오.”
이후 전개는 전쟁을 잘 모르는 마녀 키르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장기화되고, 고착화되어 지리멸렬한 소모전이 될 것이다.
로벨은 이번 전쟁의 발단이자 가장 큰 피해자를 지목했다.
“에릭 공작은 어떻게 됐어?”
“에릭 공작은... 그러고 보니 에릭 공작의 이야기가 없군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장미성에서 기도나 하고 있겠죠.”
어린 집사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펄프 대장과 애꾸눈 볼포스도 끈 떨어진 연이라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로벨 일행이 에릭 공작의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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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릭 영지에 잠시 잠깐 평화가 찾아왔다. 용병들은 햇빛 좋은 곳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무기와 갑옷을 손질하고, 농부들은 삽과 괭이를 나눠 쥐고 텃밭을 보기 좋게 다듬었다.
“그래서 내가 한마디 했지! 엉덩이를 흔든 것은 난데, 내가 왜 돈을 줘야 하지?”
“으하하핫! 맞다! 맞아!”
얼마 전 죽다 살아난 신입 용병 들창코가 크로스보우의 시위를 새로 갈며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좋다고 껄껄 웃다가 쿼럴이 아니라 손톱을 숫돌에 갈고 비명 질렀다.
로벨은 전투마를 빗질하다가 한숨 쉬었다. 용병의 농담은 용병이 아니면 웃기 힘든 종류였다. 깊이 고찰하면 공감할 수 있을 듯한데,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이 귀 따갑게 떠들어 대는 탓에 집중할 수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요! 다시 생각해보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시오. 이 이상 병력을 쪼갤 수 없소.”
어린 집사가 루카스 자작의 바위성을 공격하자고 주장했지만, 펄프 대장은 그럴만한 여력도 없거니와 설령 루카스 자작령을 점령해도 수비병력이 분산되어 로드릭 성과 마을이 위험하다 주장했다. 로벨은 골치가 아파서 대충 얼버무렸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나중은 늦는다니까요!”
로벨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전투마를 쓰다듬고 브러쉬를 양동이에 던져 넣었다. 어린 집사는 움찔해서 뒷말을 삼켰다. 그때, 분위기를 전환할 사람이 나타났다. 성문에서 보초근무 서는 용병이 입으로 노크 소리를 내고 마구간으로 들어왔다.
“영주님, 성 밖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가만, 손님이 아닌가?”
로벨, 어린 집사, 펄프 대장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영주와 영주의 양손이 집중하자 용병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저, 저번에 왔던 기사 나리입니다. 그 뭐냐, 켈트인가 켄트인가...”
로벨과 펄프 대장보다 어린 집사가 기억력이 좋았다.
“켈트 경? 에릭 공작의 수행기사잖아요?”
로벨과 펄프 대장은 허리춤을 더듬어 무기를 확인했다. 요즘 같은 시기에 외지에서 온 기사를 웃는 낯으로 대하기는 힘들었다.
로벨은 롱소드와 흐룬팅을 뽑기 좋게 고치고 말했다.
“혼자야?”
“예? 예. 혼자 왔습니다.”
“어디 있어?”
“성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애꾸눈이랑 외팔이를...!”
펄프 대장이 성 안의 병력을 모으려고 했지만, 로벨이 어깨를 잡아 제지했다.
“소란 피우지 마.”
“허나...”
“성으로 들어오지 않은 것은 나를 믿지 못해서야. 소란을 피우면 즉시 떠날 거야.”
로벨은 조용히 성문으로 향했다.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은 서로를 한번 보고 로벨을 따라갔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 보낼 수 없었다.
로벨은 절반만 열린 성문을 지나 성 밖으로 나갔다. 지난번과 달리 필드 아머(Field Armor: 기병용 판금갑옷)를 입은 켈트 경이 랜스를 꼿꼿이 세운 채 기다리고 있었다.
“서 켈트.”
“서 로벨.”
기사답게 간단히 인사를 나누었다.
켈트 경은 못 본 사이에 얼굴이 바뀌어 있었다. 살이 빠져서 볼이 움푹 파이고, 곱슬거리는 장발이 짧아지고, 자신감 대신 피로감이, 장난기 대신 비장함이 흘렀다.
‘나도 비슷한가?’
로벨 역시 잦은 전투로 체중이 줄고 피부가 상했다. 그래서인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퍽 안쓰러웠다.
“고생이 많소이다.”
“경만 하겠소?”
켈트 경은 앞뒤가 모두 뾰쪽한 알베니아 왕국풍 랜스를 땅에 꽂고 말했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로벨은 롱소드와 흐룬팅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경은 이 전쟁에서 누구와도 손잡지 않고 중립을 지켰소. 그 이유가 무엇이오?”
“충성심?”
“농담하지 말고 진심으로 답하시오.”
기사답게 기사를 잘 알았다. 로벨은 귀찮아서 되물었다.
“그걸 왜 알고 싶소?”
“그래야 경을 주군에게 모실 수 있으니까.”
로벨의 눈썹이 아래로 내려왔다.
“에릭 공작이 여기 와 있소?”
“대답하시오.”
로벨은 수염 한 가닥 없는 턱을 만지며 고민했다. 그리고 어린 집사에게도 말한 적 없는 본심을 털어놓았다.
“치사해서.”
“치사?”
“입안에 든 것도 바칠 것처럼 굴더니, 기회가 생기자 안면몰수하고 땅 내놔 작위 내놔 덤비는 꼴이 추하고 더러워서.”
“...그것뿐이오?”
“이것 말고도 몇 가지 더 있지만, 개인적으로 그렇소.”
켈트 경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내가 경을 잘못 봤군.”
“나를 어찌 보았소?”
켈트 경은 헛기침으로 넘어갔다.
“주군께 안내하겠소. 따라오시오.”
그리고 멋지게 떠나면 좋겠지만, 기사 체면에 걸어갈 수 없으니 전투마를 꺼내와 안장을 올리고 등자를 조절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켈트 경을 창을 짚고 굳건하게 서서 점심을 사러가는 용병들과 양젖을 가져오는 아낙들의 구경꺼리가 되었다.
“거 좀 서두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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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어린 집사만 대동하고 켈트 경을 따라나섰다. 볼탄 반도의 절반을 지배하던 대영주이자 두 차례나 전쟁을 일으킨 원흉을 찾아가는데 긴장감이 없었다.
로드릭 마을 북쪽에서는 보리농사가 한창이었다. 농부들은 무릎까지 올라온 보리줄기를 헤집으며 잡초를 뽑고 덜 자란 보리싹을 솎아냈다. 좁은 땅에 싹이 너무 많이 나면 실하지가 못했다.
‘사람도 마찬가지야.’
볼탄 반도의 정세와 닮아 있었다. 좁은 땅에 주인 행세하는 기사가 너무 많았다. 로벨도, 에릭 공작도 뿌리 뽑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보리싹이었다.
켈트 경은 노래 부르며 일하는 농부들을 보고 말했다.
“이곳 영지민은 생기가 넘치는군.”
“아직 살아있으니까.”
로벨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켈트 경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냥 이해한 척했다.
“심오한 말이오.”
무엇이 어떻게 심오한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며칠 전 소나기로 수위가 높아진 개울을 건너고, 몇 년째 벨까 말까 고민한 느티나무 아래에 이르렀다.
“말에서 내리시오.”
켈트 경은 로벨이 의문을 표시하기 전에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었다.
“My Lord, 로벨 로드릭 남작을 모셔왔습니다.”
어린 집사는 에릭 공작이 나무가 되었냐고 따지고 싶은 것을 분위기 때문에 참았다.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었다.
로드릭 마을보다 나이가 많은 느티나무 뒤에서 수도사처럼 후드를 푹 눌러쓴 사람이 나왔다. 코와 입 밖에 안 보이지만, 정체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My Lord.”
로벨은 무릎을 꿇고 기사의 예를 표시했다. 로벨은 페르젠 백작이나 루카스 자작처럼 충성서약을 물리지 않았으니, 아직 에릭 공작의 기사였다.
에릭 공작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후드를 벗었다. 켈트 경을 안쓰러워할 상황이 아니었다. 에릭 공작의 얼굴은 수척하다 못해 깡말라서 정말 고행하는 수도사라 여겨질 정도였다.
‘마음고생이 심했구나.’
로벨은 지난날 품위 넘치던 에릭 공작을 떠올리고 안타까움을 느꼈다. 피와 쇠로 점철된 로벨에게도 모성애 비슷한 것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한편, 어린 집사는 에릭 공작 주위 사람을 유심히 살폈다. 켈트 경 이외에도 두 명의 기사가 더 있었다.
‘그래도 인망이 있네?’
에릭 공작은 로벨을 일으키고 살갑게 말했다.
“경이라면 나와 줄 거라 믿었네. 역시 경은 기사 중의 기사야.”
로벨은 겸양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 공작은 수행기사에게 물러가라 지시하고 로벨을 개울 쪽으로 이끌었다.
“자네도 잘 알겠지만-이건 좀 안다- 내 처지가 우습게 되었네.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고, 동생이 동생이 아니라니, 실로 기가 막힐 일 아닌가.”
“옛 신의 사제가 한 말이 사실입니까?”
로벨은 눈치 없이 묻고 아차! 했다. 그러나 에릭 공작은 개의치 않았다.
“나도 모르겠네. 정말 모르겠어. 사제가 진실을 말한 건지, 아니면 류트의 꼬임에 넘어가 거짓을 말한 건지...”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집사의 말대로 옛 신의 사제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더욱이 야심 가득한 류트 공자와 사악한 힘을 가진 악마추종자가 활개 치니 무엇 하나 믿을 수 없었다. 로벨은 상념에 잠긴 에릭 공작을 애써 위로했다.
“프란시스 가문의 핏줄이 아니어도, 공작부인의 핏줄인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절반은 귀족이지 않느냐는 뜻인데, 위로가 영 좋지 않았다. 에릭 공작은 로벨을 돌아보고 맥없이 중얼거렸다.
“보통은 사특한 모함에 굴하지 말라고 격려하는데... 자네 참 진솔하구만?”
“아, 사특한 모함에 굴하지 마십시오.”
“이미 늦었네. 엎드려서 위로받는군.”
그래도 기분은 풀렸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켈트 경이 놀라서 쳐다보았다. 이번 전쟁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는 것을 보았다. 로벨은 켈트 경을 힐끔 보고 말했다.
“아직 공작님을 따르는 기사가 남아 있습니다.”
“켈트 경 말인가? 그래. 충성스러운 기사지. 하지만 힘이 없어.”
에릭 공작은 힘없는 기사들이 듣지 못하게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수많은 기사가 충성을 바쳤으나, 힘이 있는 자들은 돌아서고 남아있는 자들은 힘이 없네. 그래서 종종 의심한다네. 저들에게도 땅과 군사가 있었으면 과연 내 곁에 남았을까.”
“그것은...”
로벨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에릭 공작은 고개를 조금 숙이고 말했다
“이제 경 밖에 없네.”
로벨은 자신이 가진 힘을 떠올리고 물었다.
“제게는 100명 남짓한 병사와 오래된 성이 전부입니다. 제가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습니까.”
에릭 공작은 개울 건너 주먹보다 작게 보이는 로드릭 성을 구경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네. 나와 함께 힘을 키워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