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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76화 (76/605)

76화. 손가락

76화. 손가락

로벨과 울프 용병단 풋맨은 20야드 앞으로 나가 밀집대형을 형성했다.

크로스보우맨을 지키면서, 80야드를 질주한 적군을 상대하기에 적절한 위치였다.

“우오오오오!”

“와라! 와라!”

로벨은 롱소드와 워 해머를 부딪치며 암사자처럼 포효했다. 루카스 자작의 용병단도 지지 않고 힘껏 소리 질렀다.

성질이 급해 가장 빨리 뛰어온 루카스 자작 용병이 방패를 팽개치고 몸을 띄웠다. 로벨은 반대로 몸을 낮추고 롱소드를 비스듬히 찔러 올렸다. 로드릭 마을 최고의 대장장이가 정성껏 벼려낸 칼날이 흉부를 매끄럽게 찢어발겼다.

로벨은 절명한 용병을 어깨로 받아 밀치며 피에 젖은 롱소드를 뽑았다. 숨 돌릴 틈이 없었다. 피를 뿜으며 넘어가는 용병 뒤로 49명의 용병이 밀어닥치고 있었다.

“우아아아아아!”

“다 덤벼!”

울프 용병단은 병장기 앞세워 루카스 자작 용병단의 돌진을 받아냈다. 쿵! 파도가 바위를 때리는 듯한 광경이었다. 한 덩이로 울리던 함성이 물방울처럼 흩어져 욕설이 되고 비명이 되었다. 피가 치솟고 신체의 일부가 날아다녔다.

“죽어라! 죽으라고!”

“끄아아! 내 팔!”

머리 위로 화살이 날아다니고, 쇠와 가죽을 두른 짐승이 날뛰니, 이곳이 바로 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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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사정거리에 들어온 용병 머리통에 워 해머를 꽂아주고, 반대방향으로 롱소드를 크게 휘둘렀다. 오른팔과 칼날이 하나 되어서 완벽한 반원을 그렸다.

깡!

바부타(Barbuta: 눈, 코, 입을 T자로 드러낸 투구)를 눌러쓴 용병이 로벨의 롱소드를 튕겨냈다. 프리랜서치고 상당한 실력이었다.

“제법이야!”

로벨은 워 해머를 절명한 용병의 저승길 선물로 양보하고, 롱소드를 양손으로 잡아 휘둘렀다. 포클랜드 검술학회가 공인한 소드 마스터 솜씨였다. 용병은 첫 번째와 두 번째 공격은 잘 받아냈지만, 세 번째 공격에서 손이 꼬이고, 네 번째 공격에서 손목을 베였다. 용병은 바스타드 소드를 떨구고 당황해서 소리쳤다.

“자, 잠깐...!”

검술실력은 좋은데 전투경험이 별로였다. 로벨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목을 날려버렸다. 그런 다음 어이가 없어 중얼거렸다.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 ‘잠깐’이라니?’

어디 산골짜기에서 검술훈련만 하다가 내려온 모양이다. 로벨은 실전의 참혹함을 배웠으니 만족하라 위로하고 다음 상대를 찾았다.

20명 대 50명의 싸움이지만, 20명의 울프 용병단이 좀 더 유리했다. 수년간 단체 훈련한 용병단과 급조된 프리랜서 집단의 차이, 20야드를 걸어온 체력과 80야드를 질주한 체력 차이, 그리고 혼자서 서너 명씩 상대하는 그랜드 챔피언의 차이였다.

로벨은 여섯 번째 적을 쓰러트리고 숨을 고를 겸 잠시 멈췄다.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화살보다, 숨이 덜 끊어져 헐떡거리는 여섯 번째 용병보다, 컨틀렛 틈새로 스며드는 핏물이 더욱 신경 쓰였다.

“기사 나리! 기사 나리!”

외팔이 더치가 피칠갑한 몰골로 시체를 넘어 다가왔다. 오우거가 따로 없었다. 로벨은 자신도 비슷한 꼬라지일거라 생각하고 한숨 쉬었다. 외팔이 더치가 손도끼에 흐르는 핏물을 뿌리며 소리쳤다.

“저놈들이 도망갑니다요! 기사 나리도 이쪽으로 오시지요!”

로벨은 시야를 가리는 바이저를 올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루카스 자작의 용병단이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조금 이른 후퇴였다. 싸울 수 있는 용병이 아직 20명이나 남아있었다. 울프 용병단 풋맨 소대의 남은 전력보다 2배 많았다. 승부를 포기할 상황이 아니었다.

“예비대가 움직입니다!”

“예비대?”

로벨은 구릉으로 시선을 돌렸다. 루카스 자작군 양익의 스피어맨이 내려오고 있었다. 창 한 자루에 조잡한 클로스 아머를 입은 농민병이지만, 그 숫자가 100명이었다. 로벨도 울프 용병단 스피어맨 소대를 움직였다.

“코골이 바디! 오른쪽으로! 적의 좌익을 맡아!”

코골이 바디의 스피어맨 소대가 루카스 자작군의 좌익을 향해 진군했다. 숫자가 절반밖에 안 되지만, 무장이 크게 앞서니 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 남은 적의 루카스 자작군의 우익이었다.

“크로스보우 1, 2소대로 상대하면...”

“그럴 필요 없어.”

로벨에게도 예비대가 있었다. 어린 집사까지 고작 7명뿐인 소대지만, 그 위력은 크로스보우 3개 소대에 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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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쟁이 데비가 해머를 휘둘러 수레바퀴 뒤에 말뚝을 박아 넣었다. 그러나 사실 바퀴보다 바닥이 걱정이었다. 농작물이나 실어 나르는 수레라 그리 튼튼하지 않았다. 어린 집사가 발을 동동 굴리며 재촉했다.

“왜 이리 굼떠요? 빨리빨리 하세요! 우리 영주님이 위험하잖아요!”

“첫 실전이잖소. 집사가 이해하쇼.”

겁쟁이 데비는 툴툴거리고 용병들에게 손짓했다. 겁쟁이 말대로 첫 실전이라 신중의 신중을 더했다. 거리를 재고, 풍향을 재고, 화약량을 잰 다음 천천히 포구를 끌어올렸다.

팔코넷 2문이 울부짖는 늑대처럼 머리를 치켜들었다.

“대, 대포다!”

루카스 자작이 대포를 알아보고 비명 질렀다. ‘후퇴해라!’ 혹은 ‘흩어져라!’ 소리친 듯한데, 구릉 아래로 내려간 스피어맨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로벨은 롱소드로 땅에 짚고 밀려 내려오는 50명의 징집병을 보았다.

‘너희도 싸우는 것이 싫을 거야.’

저들도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들이고, 형제이고, 친구일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미안한 감정이 가득했다.

‘주인을 잘못 만난 탓이지.’

“Fire!”

천둥을 닮은 폭음이 울리고, 벼락을 닮은 돌덩이가 떨어졌다. 로벨의 감상은 과거형으로 바뀌었다. 남편이었고, 아들이었고, 형제였으며, 친구였던 고기파편이 되었다.

돌로 된 포탄은 땅을 닿는 순간 두 조각으로 쪼개져 적진을 휘저었다. 머리가 가로막으면 머리통을 터트리고, 몸이 가로막으면 몸통을 짓뭉개고, 다리가 가로막으면 다리를 절단했다. 단 두 방 쐈을 뿐인데 10명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다. 정신적인 부상자를 더하면 50명이 전멸했다.

“아버지! 아버지!”

“저걸 어떻게 막아!”

“나, 난 죽기 싫어! ”

루카스 자작군은 창을 버리고 뒤돌아 도망갔다. 외팔이 더치 이하 풋맨들이 껄껄 웃었다.

“저 겁쟁이들 보쇼!”

“저런 놈들이 우리와 싸우려고 했나?”

대포의 느린 장전속도를 모르는 탓이지만, 설령 재장전 시간 동안 안전하다고 알려줬어도 눈앞에서 일어난 처참한 광경에 패닉을 일으켰을 것이다.

로벨은 롱소드를 칼집에 밀어 넣고 땅에 떨어진 메이스를 주웠다. 전황이 기울기 시작했다. 루카스 자작의 아처 부대는 울프 용병단이 장기 삼은 3열 사격에 극심한 피해를 입었고, 프리랜서 용병단은 로벨과 풋맨 소대에 패퇴했고, 창을 쥐여 보낸 100명의 징집병은 겁쟁이 데비와 코골이 바디에게 와해되었다. 이제 루카스 자작과 휘하 기사만 남았다.

외팔이 더치가 얼굴에 묻은 핏물을 쓸어내고-그래서 온통 빨개졌다- 물었다.

“기사 나리, 이제 어찌합니까요?”

로벨은 메이스를 휘둘러 길이와 무게를 가늠한 후 말했다.

“왕을 잡아야지.”

“왕이요?”

로벨은 구릉 위로 전진했다. 하늘을 수놓던 화살도 뜸해지고, 비명과 욕설도 잦아들었다. 코골이 바디가 아직 싸우고 있지만, 펄프 대장과 애꾸눈 볼포스가 지원하면 금방 정리될 싸움이다. 루카스 자작의 프리랜서 용병단은 승부가 갈렸다고 판단하고 꽁무니를 내뺐고, 억지로 끌려온 징집병은 전의를 잃고 항복했다.

로벨은 구릉 위로 올라가 루카스 자작에게 메이스를 겨냥했다.

“체크메이트.”

전투 전 로벨이 내린 평가가 정확했다. 루카스 자작은 말머리를 돌려 도망쳤다. 비굴하고, 초라하고, 기사답지 못한 모습이었다.

외팔이 더치가 꽁지 빠지게 달아나는 기사를 보고 희열에 차서 소리쳤다.

“우리의 승리다!”

“로벨 로드릭 남작군의 승리다!”

“울프 용병단의 승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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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정신적인 만족감 이외에 아무 소득이 없었다.

루카스 자작과 그의 봉신들은 도망쳤고, 남은 것은 처치 곤란한 시체, 조잡한 병장기, 그리고 포로가 된 바위성 영지민 50여 명이 전부였다. 가난한 농사꾼과 사냥꾼이라 몸값을 받을 수도 없고, 적이 될 테니 풀어줄 수도 없었다.

“활을 못 쏘게 손가락을 자르면...”

어린 집사가 중얼거리다가 로벨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뒷말을 삼켰다. 피와 살점으로 장식한 갑옷 탓에 평소보다 무서웠다.

펄프 대장은 아군 시체를 수습하고 적군 시체를 불태웠다. 옛 신의 교리에 어긋나지만, 그냥 두면 전염병의 발생지가 될 테니 어쩔 수 없었다.

외팔이 더치와 애꾸눈 볼포스는 전리품을 긁어모았다. 간혹 쓸 만한 보어 스피어나 롱보우가 나왔지만, 대부분 불쏘시개로도 못 쓸 물건이었다.

어린 집사가 시체 타는 연기를 구경하며 말했다.

“피해가 커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겠죠?”

루카스 자작을 일컫는 것일 테지만, 울프 용병단도 남 일이 아니었다. 로벨이 이끈 풋맨은 8명이 전사하고 5명이 부상당했다. 펄프 대장이 지휘한 크로스보우 3개 소대는 10명이 전사하고 7명이 부상당했다. 로드릭 성의 병력이 3분의 1 줄어들었다.

로벨은 상처에 열이 올라 헛소리하는 크로스보우 제1소대 신입 용병 들창코를 안쓰럽게 보았다. 살아날 확률보다 고통 속에서 죽을 확률이 더 높았다. 어린 집사가 로벨의 생각을 읽고 위로했다.

“마녀가 치료해줄 거예요.”

“...응.”

로벨은 다른 부상자를 보았다. 뼈에 박힌 화살 파편을 긁어내며 비명 지르는 크로스보우맨, 뒤틀린 무릎을 교정하며 눈물 콧물 쥐어짜는 풋맨 등이 처참했다.

“부상자와 포로를 성으로 보내.”

“예. 알겠어요.”

로벨은 펄프 대장에게 뒷정리를 맡기고 부상자를 챙겨서 로드릭 성으로 돌아왔다. 음울한 개선식이었다.

춘경지에서 괭이질하던 농부들은 피투성이가 된 로벨과 울프 용병단을 보고 손을 멈추었다. 지금껏 못 보던 모습이라 작은 소란이 생겼다.

“우리 영주님이 이겼어요! 승리했어요!”

어린 집사가 힘껏 소리쳤다. 나이 많은 농부는 부상자만 돌려보냈음을 알고 안도했다.

“우리 영주님이 질 리가 없지.”

“그래도 많이 다쳤네요.”

로벨은 홀로 기운이 넘치는 전투마 위에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영주의 위엄과 기사의 자신감으로 영지민을 안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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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키르케가 무척 바빠졌다. 자상에 좋은 약초, 열을 내리는 숲 이끼, 진통효과가 있는 버섯 등등을 먹이고 바르며 치료했다.

로벨은 마녀 키르케에게 물을 길어주고 수건을 찾아주었다. 영주가 할 일은 아니지만, 영지의 소중한 병사가 죽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로벨이 성안 우물에서 물을 길을 때였다. 키는 작지만 다부진 몸을 한 행상인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로벨은 물통 내려놓고 핏자국이 남아있는 롱소드를 움켜쥐었다. 행상인은 깜짝 놀라 몸을 낮추었다.

“My Lord! 헨리 상단의 헨리 피터입니다!”

로벨은 행상인의 정체를 깨닫고 롱소드를 놓았다.

“헨리 상단주, 이 시기에 무슨 일이야?”

“어린 집사가 부탁한 약초와 붕대를 가져왔습니다. 마침 전투를 치른 모양이군요. 제때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금은?”

“방금 받았습니다.”

어린 집사답게 일처리가 빨랐다. 로벨은 다시 우물물을 기르며 말했다.

“그럼 볼일이 있어?”

“영주님께 고할 일이 있어 찾았습니다.”

로벨은 양동이를 채우고 땀을 닦았다. 여름이 코앞이라 한낮에는 부쩍 더웠다. 헨리 상단주는 지체 높은 귀족 나리가 일하는데 멀뚱멀뚱 서 있는 것이 어색해서 빠르게 보고했다.

“사흘 전 페르젠 백작과 헤르만 백작이 충돌했습니다.”

로벨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로벨이 없는 곳에서 볼탄 반도의 새 주인을 가리는 싸움이 벌어졌다.

“누가 이겼어?”

헨리 상당주는 애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누구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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