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75화 (75/605)

75화. 폭력성

75화. 폭력성

로벨은 아멧을 벗어서 옆구리에 끼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펄프 대장과 애꾸눈 볼포스의 크로스보우맨 소대를 중심으로 코골이 바디의 스피어맨 소대가 선두, 외팔이 더치의 풋맨 소대가 후미에 위치했다. 로드릭 성의 전 병력이었다.

“영주님?”

어린 집사가 뚜껑 달린 맥주 조끼를 꺼내주었다. 목이 말라서 아멧을 벗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로벨은 괜스레 미안해서 한 모금 마셨다.

“루카스 자작이면 후계자 전쟁 때 본 기사죠?”

“그때는 남작이었어.”

로벨은 후계자 전쟁이 끝나고 논공행상 자리에서 만난 루카스 자작을 떠올렸다. 전(前) 사트로 후작의 보급부대를 격파한 공을 인정받아 바위성의 주인이 되었다.

“그치만 회색산에서 패배했잖아요.”

“상대가 안 좋았어.”

상대가 늑대의 왕이라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이후 로벨이 회색산을 점령하고, 전공을 인정받아 회색산의 주인이 되었으니 루카스 자작의 자존심이 상했을지도 모른다.

“그깟 늑대인간 하나 못 잡은 작자가 우리 영주님 땅을 넘보다니, 주제를 모르는군요.”

“그 늑대인간은 나도 못 잡... 아니야.”

로벨은 맥주 조끼를 돌려주고 깃발 넘어 먼 곳을 보았다.

구불구불한 흙길 저편에 일가족이 모여 사는 작은 농가가 있었다. 닭 모이를 주는 아낙이 울프 용병단을 보고 화들짝 놀라서 어딘가로 소리쳤다. 텃밭을 가는 남편과 아들이 뛰어와 아내와 동생을 집안으로 숨겼다. 어린 집사가 이해한다는 듯 중얼거렸다.

“시절이 수상하니까요.”

“응.”

‘정통성 전쟁’이라 불리는 이번 전쟁은 지난 전쟁과 아주 달랐다. 페르젠 백작을 비롯해 너도나도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어서 누가 적인지, 어디가 전장인지 알 수 없었다. 상자 속의 구슬처럼 이리저리 튀며 아무 곳이나 두드렸다.

루카스 자작도 그런 구슬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해도 감히 우리 영주님에게 도전하다니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군요!”

“가볍게 여기면 안 돼.”

로벨은 한숨을 쉬었다. 건국 기념일 이후 30일 남짓한 시간 동안 총 세 번 싸웠다. 페르젠 백작의 봉신이 두 번이고, 루카스 자작의 용병단이 한 번이었다. 그리고 지금 루카스 자작의 본대를 상대하기 위해 네 번째 출진 중이었다.

“저기 겁쟁이 데비가 와요!”

로벨은 오른손을 살짝 들었다. 펄프 대장이 “전군 정지! 전군 정지!” 외친 후 빠르게 다가왔다.

“루카스 자작군은?”

겁쟁이 데비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1.5 마일 떨어진 구름 평야에 주둔 중입니다. 숫자는 200명 정도입니다.”

로벨은 겁쟁이 데비가 다녀온 방향을 보았다. 나지막한 언덕과 밤나무 숲에 가로막혀 잘 보이지 않았다.

“200명이라...”

적지가 않지만, 피할 만큼 많지도 않았다. 로벨은 손을 살짝 들었다가 앞으로 뻗었다.

“전군 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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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의 공기에는 독특한 냄새가 있었다. 긴장, 공포, 분노, 후회 등이 뒤섞인 고약한 냄새였다.

“전군 정렬! 전군 정렬! 들창코! 네 자리로 가! 뭐야? 여긴 2소대다! 정신 안 차리냐!”

로벨은 전투마를 몰아 울프 용병단 진형을 한 바퀴 돌았다. 잘 훈련된 용병들은 소대 단위로 뭉쳐서 체스판의 말처럼 움직였다. 체스와 차이점이 있다면 말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는 20명의 인간이란 것과 차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피어맨 10보 전진!”

로벨이 명령하자 코골이 바디가 숏 스피어를 휘둘렀다.

“10보 전진!”

로벨은 스피어맨 소대가 자리 잡기 전에 연거푸 명령했다.

“풋맨 우익으로! 아군을 백업한다! 크로스보우맨! 전 소대 사격준비!”

로벨의 명령은 소대장을 통해 행동으로 옮겨졌다. 로벨은 펄프 대장과 코골이 바디 사이에서 구릉 위 루카스 자작군을 관찰했다.

루카스 자작군 용병 50명과 징집병 150명으로 구성되었다. 바위성만으로 모을 수 있는 병력이 아니니 휘하 봉신들의 병력까지 긁어모았을 것이다. 루카스 자작 옆에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기사가 몇 명 있었다.

어린 집사가 랜스, 워 해머, 메이스 등을 챙겨서 로벨 옆으로 다가왔다.

“며칠 전에 용병단을 날려먹고도 용케 저만큼 모았네요.”

“수완이 좋아.”

“하지만 싸움은 못하죠.”

“그건 글쎄...”

로벨은 루카스 자작군의 진형을 살폈다. 프리랜서로 구성한 용병단을 정면에 세우고, 롱 스피어와 파이크를 가진 농민병을 양익에 배치하고, 아처 부대를 후미에 두었다. 정석적인 진형이었다. 바꿔 말하면 효과가 검증된 진형이었다.

“저건 깨기 힘들겠어.”

깨려면 깰 수 있지만, 울프 용병단의 피해가 상당할 것이다. 로벨은 성으로 후퇴해서 수성할까 고민했다.

‘그럼 영지민의 피해가 늘어나잖아.’

로벨은 어느 쪽이 손실이 큰지 고민했다. 그때, 눈이 좋은 애꾸눈 볼포스가 소리쳤다.

“영주님! 백기입니다!”

로벨은 정신 차리고 전장을 보았다. 루카스 자작이 종자 하나만 대동하고 구릉을 내려왔다. 머리 위로 하얀 깃발이 펄럭였다. 정황상 항복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로벨은 어린 집사에게 손을 뻗었다.

“백기.”

“예? 예예!”

어린 집사는 라이트 랜스에 하얀 손수건을 묶었다. 마음이 급한 탓에 두 번쯤 잘못 묶었다. 그 사이 루카스 자작이 양군의 중간지점에 도달해 백기를 흔들었다.

“여, 여기요! 근데 혼자 가시면 안...”

로벨은 랜스를 받고 전투마 옆구리를 때렸다. 어린 집사는 발을 동동 굴리며 펄프 대장에게 따라가라 소리쳤다. 노련한 펄프 대장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크로스보우를 준비시켰다.

크로스보우맨은 가장 잘 만들어진 쿼럴을 고르고 골라 크로스보우 몸체에 올렸다. 만에 하나 로벨이 기습을 받으면 루카스 자작에게 아낌없이 선물할 생각이었다.

로벨은 백기를 어깨에 걸고 전장 한복판으로 전투마를 몰았다. 살인에 특화된 도구를 가진 300명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로벨은 긴장감을 줄이기 위해 속도를 조금 늦췄다. 그러자 성질 급한 루카스 자작이 소리쳤다.

“로벨 로드릭 남작!”

로벨은 라이트 랜스를 땅바닥에 꽂고 바이저를 올렸다. 그랜드 챔피언 위명에 어울리지 않게 계집처럼(?) 곱상한 얼굴이라 금방 알아보았다. 루카스 자작은 목소리를 낮추어 한결 부드럽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오, 남작. 폭풍의 성에서 보고 처음이군.”

로벨은 루카스 자작의 군대를 둘러보는 시늉한 후 말했다.

“내 땅에는 무슨 일이오.”

“경의 힘이 빌리고자 찾아왔소.”

“내 힘을?”

루카스 자작은 전투마 옆구리를 차서 조금 전진했다. 창이 닿지 않을 거리, 그러나 친밀감을 표시하기 좋은 거리였다.

“난 페르젠 백작과 다르오. 볼탄 반도를 지배할 야심도 없고, 경과 같은 용장을 봉신으로 삼을 배짱도 없소.”

“그럼?”

“우리의 땅을 지키자는 말이오.”

루카스 자작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울프 용병단이 짤막하게 소리치며 크로스보우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공격 신호가 아니었다.

“이 전쟁에서 누가 이긴들,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그래서?”

“스스로를 지킬 힘을 가져야 하오. 본인과 남작이 손을 잡으면 어느 누구도 넘보지 못할 힘이 생기오.”

로벨은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어디까지 ‘그럴 듯’이었다. 로벨은 속지 않았다.

“사흘 전 용병단을 보냈지.”

“그건 착오가 있었소. 경도 용병단을 부리니까 알겠지만, 워낙 못 배워먹은 놈들이라...”

“그 못 배워먹은 놈들 말은 다르더이다.”

로벨은 랜스를 뽑아 앞을 겨냥했다. 루카스 자작의 말이 겁을 먹고 갈기를 흔들었다. 훈련되지 않은 말은 뾰족한 물건을 본능적으로 무서워했다.

“루카스 자작, 당신은 기사의 자격이 없소.”

“뭐, 뭐요?”

“페르젠 백작과 헤르만 백작이 싸우는 틈을 타 군사를 일으키고, 헤일러 남작이 전사한 틈을 타 가시성을 점령했지. 그리고 용병들을 보내 내 전력을 탐색하고, 여의치 않자 교묘한 말로 동맹을 요구하는군. 졸렬한 기회주의자요.”

로벨은 루카스 자작이 반박할 틈을 주지 않고 쏘아붙였다. 이런 모욕을 받아 본 적 없는 루카스 자작은 말을 잇지 못했다.

“으으윽...!”

루카스 자작은 랜스를 앞으로 뻗었다. 그러나 잘 훈련된 로벨의 전투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로벨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발했다.

“자신이 기사임을 증명하고 싶다면 결투를 받아주겠소.”

그러나 루카스 자작은 결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헤일러 남작과 달리 영리하고, 냉철하며, 겁이 많았다.

“로벨 로드릭 남작, 오늘이 지나기 전에 후회하게 될 거요.”

“그건 두고 봐야지.”

루카스 자작은 말머리를 돌리고 도망치듯, 아니, 로벨이 쫓아올까봐 정말 도망쳤다. 로벨은 코웃음을 흘리고 울프 용병단 진영으로 돌아왔다. 펄프 대장이 슬쩍 물었다.

“My Lord, 저 자작놈이 뭐라고 합니까?”

로벨은 랜스에 묶인 손수건을 풀어 바람에 실려 보냈다. 새하얀 손수건은 인어의 바다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남서풍을 타고 루카스 자작군을 향해 날아갔다. 로벨은 회담 내용을 각색하고 요약했다.

“두고 보재.”

펄프 대장이 어리둥절해서 다시 물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로벨은 가벼워진 랜스로 적진을 가리켰다. 50여 명의 롱보우가 전진하고 있었다.

“지금.”

“이런 젠장!”

펄프 대장은 숏소드를 뽑아 울프 용병단을 지휘했다.

“애꾸눈! 허풍쟁이! 전투준비!”

로벨은 손가락보다 작아진 루카스 자작을 노려보았다.

‘헤일러 남작이 더 나았어.’

울프 용병단과 루카스 자작군에서 동시에 명령이 흘러나왔다.

“아처!”

“크로스보우!”

로벨은 어린 집사에서 물러나라 말하고 바이저를 내렸다. 시야가 좁아진 만큼 집중력이 향상되었다.

“발사!”

“쏴라!”

전장 위로 화살이 날아 올라왔다.

죽음의 냄새가 한층 강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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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에 관심이 있다면, 혹은 무기나 사냥을 좋아한다면, 활과 쇠뇌의 차이점을 한 번쯤 고찰해 보았을 것이다.

숏보우와 롱보우는 장전속도가 빠르고 사격각도를 폭넓게 조절할 수 있지만, 기량에 따라 위력과 명중률이 차이나며, 체력소모가 심해 금방 지치는 단점이 있었다.

크로스보우와 아바레스트는 장전속도가 느리고 곡사로 쏘기가 어렵지만, 개개인의 차이가 없이 일정한 위력을 꾸준히 발휘할 수 있었다.

이처럼 활과 쇠뇌는 장단점이 뚜렷해서 어느 쪽이 더 우수하다 딱 잘라 말할 수 없었다.

“쟤네들 뭐야? 징집병 아니야?”

“바위성은 원래 사냥꾼이 많은 동네야!”

그러나 지금 울프 용병단에게 묻는다면 롱보우가 위력적이라 말할 것이다. 파비스와 파비스 주위로 50발의 화살이 후두둑- 내리꽂혔다.

“겁먹지 마! 싸구려 돌촉이다! 2열 사격 준비! 발사!”

돌촉이라도 잘못 맞으면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 갑옷이 부실한 용병들은 전전긍긍했다.

펄프 대장이 3소대까지 사격한 후 로벨에게 소리쳤다.

“저쪽이 고지대라 힘듭니다!”

“그래도 바람이 도와주잖아.”

“간신히 안 밀리는 정도입니다!”

펄프 대장이 앓는 소리 했지만, 전황은 그리 불리하지 않았다. 울프 용병단의 사격 솜씨도 훌륭한 편이었다. 울프 용병단이 세 명 쓰러질 동안 루카스 자작군도 다섯 명이 쓰러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군인과 사냥꾼의 차이가 드러났다.

전쟁경험이 부족한 사냥꾼은 아버지가, 형제가, 친구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냉정할 수 없었다. 화살이 엉뚱한 곳으로 빗나가기 시작했다.

“저놈들 벌써 지친 것 같은데?”

“그럼 그렇지! 1열 사격 준비!”

더불어 100파운드 이상의 장력을 가진 시위를 연거푸 당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냥할 때는 한 발에서 두 발, 정말 많이 쏴도 세 발이면 끝이 나기에 한 자리에서 쉼 없이 쏘는 일이 없었다. 10발 이상 쏘자 하나둘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명중률의 차이가 벌어지자 사상자의 숫자도 차이가 생겼다. 울프 용병단 한 명이 부상당할 동안 루카스 자작군 다섯 명이 피를 뿌렸다. 루카스 자작이 화급히 전술을 바꾸었다.

“적 용병단이 돌격합니다!”

“이 거리에서?”

100야드가 약간 넘었다. 절반쯤 뛰어도 지칠 거리였다. 로벨은 전투마에서 내려 롱소드와 워 해머를 양손에 들었다.

“외팔이 더치! 따라와!”

“우오오! 싸움이다!”

외팔이 더치가 손도끼로 바클러를 두드리며 사기를 북돋았다. 그동안 허드렛일만 해온 풋맨들은 억눌렀던 폭력성을 일제히 폭발시켰다.

“죽이자!”

“죽이고 빼앗자!”

로벨은 뭘 빼앗을 생각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구릉 아래로 밀려오는 쇳덩이를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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