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봄
74화. 봄
매년 55일은 정복왕 샘 포클의 건국 기념일이었다.
이날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토너먼트 시합이 열리고, 건국기념식을 가장한 사교파티가 벌어졌다. 그러나 올해에는 많은 것이 달랐다.
허버트 페르젠 백작이 충성서약을 철회하고, 포비아 왕국 깃발과 페르젠 가문 깃발을 나란히 올렸다. 자신이 볼탄 반도의 지배자라 선언한 것이다. 그러자 볼트 헤르만 백작이 기다렸다는 듯 군사를 일으켰고, 에디즈 자작, 루카스 자작 등도 봉신을 소집해 전쟁을 준비했다. 볼탄 반도 남부가 4조각, 아니 5조각으로 쪼개지고 있었다.
“페르젠 백작, 헤르만 백작, 에디즈 자작, 루카스 자작... 그리고 또 누구죠?”
“누구긴 누구예요? 우리 영주님이지!”
로벨은 페르젠 백작뿐만 아니라, 그 누구의 소환에도 응하지 않았다. 사실상 중립 선언이었다.
그러나 난세에는 적 아니면 친구라는 이분법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페르젠 백작은 배신이라 생각할 거요. 자기 사람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을 테니까.”
“흥! 착각은 자유죠!”
한편, 이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 포비아 국왕도 침묵했다. 나이가 어리고 정치에 무관심한 이유도 있지만, 제후들의 내정이라 명분이 약한 이유도 있었다. 왕실에 반기를 들었다면 모르나, 하나 같이 왕가의 깃발로 충성을 표시하고 있으니 충성스러운 기사들의 땅을 함부로 뺏을 수 없었다.
“머리를 투구걸이로 생각하는 양반들이 이럴 때는 비상하단 말이죠.”
그런 이유로, 페르젠 백작의 봉신이자 가시성의 주인인 헤일러 남작과 싸우는데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애꾸눈 볼포스가 안대를 고쳐 쓰고 중얼거렸다.
“사실 도움이 필요 없지.”
어린 집사가 애꾸눈 볼포스를 돌아보았다.
“우리는 60명이고, 저쪽은 120명인데요?”
“헤일러 남작과 그 종자를 제외하면 전원 농민병이오. 진형을 보아 급한 대로 훈련시킨 모양이지만, 경험의 차이를 메울 정도는 아니오.”
애꾸눈 볼포스는 아바레스트를 어깨 걸치고 자신의 소대를 찾아갔다. 애꾸눈을 마지막으로 크로스보우맨 3개 소대가 전투준비를 마쳤다.
로벨은 눈을 가늘게 뜨고 4피트 남짓한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온다.”
로벨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아니면 로벨과 똑같이 판단했는지 펄프 대장이 숏소드를 하늘 높이 들고 명령했다.
“1열 사격 준비!”
“사격 준비!”
제1소대가 파비스 사이로 빠져나와 크로스보우를 견착했다. 거리가 200야드가 넘지만 바람이 좋고 지대가 높아서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쏴라!”
파파파팡-!
20발의 쿼럴이 언덕을 가로질렀다. 명중 여부를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파비스 뒤에 몸을 숨기고 재장전에 들어갔다. 그 사이 전우들이 움직였다.
“2열 사격 준비!”
제2소대가 크로스보우를 견착했다. 제1소대의 사격으로 발사각을 가늠할 수 있었다.
“쏴라!”
20발이 날아오고, 몇 초 안 지나 20발이 다시 날아왔다. 헤일러 남작군은 부실한 방패에 기대어 살의를 실어 나르는 쇠촉을 맞이했다.
“3열 사격 준비!”
펄프 대장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첫 번째 사격이 공포라면, 두 번째 사격은 혼란이고, 세 번째 사격은 절망이었다. 전술을 모르는 병사도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직감했다.
“쏴라!”
세 번째 쿼럴이 쏟아졌다. 방패와 방패 사이로 파고들어 팔다리를 꽉! 물었다. 실전경험이 부족한 농민병은 비명을 지르며 방패를 떨어트렸다. 본인뿐만 아니라 옆 전우까지 위태롭게 하는 실수였다.
“1열 사격 준비!”
처음으로 돌아와 크로스보우맨 1소대가 앞으로 나왔다. 네 번째 사격은 죽음을 불러왔다.
“쏴!”
한 층 정교해진 쿼럴이 맨몸이 된 헤일러 남작군을 덮쳤다. 삽시간에 열댓 명이 쓰러졌고, 그 두 배의 숫자가 자리를 이탈해 도주했다.
헤일러 남작이 작은 깃이 달린 랜스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돌진해! 돌진하라! 우리가 2배 더 많다! 근접전이 되면 이길 수 있다!”
아무리 삽과 괭이의 마스터라 해도 조금 어려운 요구였다.
로벨은 바이저를 내리고 어린 집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랜스.”
“어? 어? 영주님이 안 나서도 될 거 같은데요?”
“확실히 마무리해야지.”
어린 집사는 원뿔 모양의 해비 랜스를 올려주었다. 로벨은 랜스를 길게 잡고 손잡이를 랜스 레스트에 걸었다.
“이럇!”
로벨은 전투마의 옆구리를 박찼다. 펄프 대장은 화급히 사격을 중지시켰다. 로벨은 컴포지트 아머를 입어서 안전하지만, 로벨의 전투마는 그렇지 못했다.
“쏘지 마! 나보다 비싼 분이다!”
펄프 대장은 전 소대 사격대기로 명령을 바꾸고 느긋하게 로벨의 돌격을 감상했다. 그랜드 챔피언의 랜스 차칭은 언제 봐도 일품이었다.
“네 이노옴!”
헤일러 남작도 깃발 달린 랜스를 흉갑에 걸고 박차를 가했다.
“안 됩니다! 저자는 그랜드 챔피언인...”
헤일러 남작의 종자들이 만류했지만 소용없었다.
‘기사답네.’
로벨은 아멧 속에서 미소 지었다. 기사다운 용기가 싫지 않았다.
로벨은 햇살을 쪼개고 바람을 가르는 창날에 집중했다. 깃발이 달린 랜스는 공기역학으로 균형 잡기가 쉬웠다. 더불어 깃이 펄럭일 때 상대방의 시야를 어지럽히는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무모해.’
로벨의 명성 중 7할은 마상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잘 다듬어진 창과 건강한 말이 있다면 결코 지지 않았다.
쾅-!
해비 랜스와 배너 랜스가 엇갈리고, 이어서 두 마리의 전투마가 엇갈렸다. 그러나 기사들은 엇갈리지 않았다.
로벨의 헤비 랜스가 헤일러 남작의 고짓 플레이트를 깨트리고 목을 찔렀다. 제아무리 단단한 갑옷이라도 마주 달려온 랜스 차칭을 버틸 수 없었다. 설령 갑옷이 버텨도 사람은 버틸 수 없었다.
헤일러 남작은 말 위에서 떨어져 땅바닥을 뒹굴었다. 갑옷을 벗길 필요가 없었다. 목이 부러져 절명했다.
“우오오오-!”
로벨은 머리가 부러진 랜스를 높이 들고 소리 질렀다. 고요해진 전장에서 로벨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펄프 대장이 숏소드를 휘두르며 따라 소리쳤다.
“우아아아! 우리의 승리다! 울프 용병단의 승리다!”
승리의 함성은 적을 압박하는 효과가 있었다. 60명이 일제히 소리 지르자 헤일러 남작군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주했다. 영주가 죽었으니 눈치 볼 사람도 없었다.
“로벨 로드릭 남작 만세!”
“로벨 로드릭 남작군의 승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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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가 부실한 전리품을 둘러보고 무척 아쉬워했다.
“생포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리고 잠시 뒤 정말 아쉬운지 다시 투덜거렸다.
“귀족을 죽이는 것은 명예롭지 못하잖아요? 왜 죽인 거예요?”
로벨은 승전하고도 혼나는 게 억울해서 변명했다.
“그리 쉽게 죽을 줄 몰랐어. 그리고 전쟁 중에 일어난 일은 명예와 상관없어.”
“헤일러 가문의 가시성이 얼마나 부자인 줄 알아요? 하아. 포로로 잡았으면 못해도 5,000페닝을 뜯어냈을 텐데.”
“아, 그런 이유야?”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짧고 형식적인 개선식을 받으며 로드릭 마을로 돌아왔다. 울프 용병단 3개 소대로 2배의 병력을, 그것도 사상자 없이 박살냈지만, 누구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로벨이 이기는 것은 당연하니까 당연히 이겼다는 분위기였다.
성으로 들어오자 허풍쟁이 제이콥이 노스폴드 시티에서 정보를 모아왔다.
“페르젠 백작군은 스톤헤드 요새를 공격 중이고, 헤르만 백작군은 이틀 전 팔콘 요새를 점령했습니다요.”
“벌써? 빠르네?”
펄프 대장이 네일 공국인 특유의 굵은 수염을 긁으며 말했다.
“갈팡질팡하는 기사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는 발 빠르게 움직여야겠지요.”
페르젠 백작은 용병 300명과 징집병 300명으로 프란시스 시티를 압박하고 있었다. 프란시스 시티는 볼탄 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일 뿐만 아니라 볼탄 반도 지배자의 도시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호전적인 페르젠 백작다운 진격전이었다.
“지금쯤 열이 받았을 겁니다.”
프란시스 시티를 수호하는 스톤헤드 요새는 600명의 군사로도 점령하기 힘든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총력을 기울여도 힘든 상황이니, 동부에서 밀려오는 헤르만 백작과 북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로벨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로벨을 견제하라고 보낸 헤일러 남작이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참패했으니, 펄프 대장 말대로 열이 머리끝까지 치솟았을 게 분명했다.
“또다시 군대를 보낼까요?”
“그럴 여유가 없을 걸?”
로벨은 잠깐 생각한 후 말했다.
“그리고 여유를 줄 필요 없어.”
로벨은 페르젠 백작에게 ‘난 중립. 아무튼 중립. 건들지 않으면 물지 않음’ 내용에 품위를 두 스푼 정도 가미한 편지를 작성했다. 펄프 대장이 내용을 보고 웃었다.
“건드리면 물겠다는 협박이군요.”
“앙!”
마녀 키르케가 두 손을 구부리고 늑대처럼 소리 냈다. 어린 집사 이외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효과가 있을까요?”
“한번 물려봤으니 쉽게 손을 뻗지 않을 거야.”
로벨은 뒤처리를 끝내고 펄프 대장 등에게 물러가라 손짓했다.
훈련과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간단한 전투였지만, 그래도 전투였고, 승리했으니, 술과 고기를 상으로 내렸다. 펄프 대장이 뭐라 말하자 떠들썩해졌다.
로벨은 메인 홀 의자에 앉아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펄프 대장도, 애꾸눈 볼포스도, 어린 집사도, 심지어 영지민들도 로벨이 이기는 것을 ‘당연하다’ 생각하지만, 정작 로벨에게는 무엇 하나 당연하지 않았다.
‘오늘은 이겼어.’
로벨은 의자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내일도 이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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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북해의 찬바람이 아니라 남해의 봄바람이 불어왔다. 봄을 알리는 철새가 지저귀고 눈 녹은 물이 흘러 시내를 이루었다.
봄이 되면 바쁜 것은 사람이나 가축이나 마찬가지였다. 농부들은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느라 손이 바쁘고, 봄을 처음 맞이한 새끼 양과 송아지들은 싹이 난 풀을 뜯느라 정신이 없었다.
“예끼! 이거 먹으면 안 돼! 예끼! 예끼!”
목동은 회초리를 휘둘러 새끼 양을 몰아냈다. 양은 소와 달리 뿌리까지 뜯어먹어서 조금만 방심하면 여름이 오기도 전에 목초지가 황폐해졌다.
“저쪽으로 가자. 어서 움직여.”
목동은 양떼를 몰아낸 후 한숨 돌렸다. 그러나 오래 쉴 수 없었다. 자신이 소인지 양인지 알지 못하는 송아지 한 마리가 양떼를 따라가는 것을 보고 서둘러 쫓아갔다. 송아지를 어미 소 옆에 붙여준 후 마을 쪽을 바라보았다.
“어라? 영주님이다!”
언덕 위의 목재성에서 수십 명의 용병이 꾸물꾸물 내려왔다. 봄이 시작된 뒤로 수없이 본 광경이라 새삼스럽지 않았다.
“또 전쟁하러 가나?”
목동은 갑옷 입은 영주님을 찾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가 가늘게 뜨기를 반복했다. 거리가 멀어서 확인할 수 없었다.
“음메-!”
송아지가 내보내 달라는 듯 칭얼거렸다. 맛있는 새싹도, 푹신푹신한 친구도 밖에 있으니 축사 안에 갇혀 있는 것이 답답할 만 했다. 목동은 회초리를 휘둘러 딱딱! 소리를 내었다.
“안 돼. 넌 아직 어리다고.”
“음메에에-!”
목동은 올해 태어난 송아지-로시난테 2세의 애원을 외면했다.
“여름까지 참아. 그때 마음껏 뛰놀게 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