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71화 (71/605)

71화. 만월

71화. 만월

로벨은 어린 집사만 대동하고 출발하려 했는데, 펄프 대장이 모반자가 다스리던 마을이라 무슨 위험이 있을지 모른다며 외팔이 더치를 비롯한 울프 용병단 10명을 수행원으로 붙였다.

“그럼 저도 갈래요!”

“컹! 컹컹!”

외팔이 더치가 짐을 싸자 마녀 키르케가 지기 싫은 듯 떼를 쓰며 따라왔다. 그러자 아야와 이야카도 꼬리 흔들며 따라붙었다.

“음...”

로벨은 예정보다 몇 배나 많아진 ‘아만다 마을 시찰 일행’을 내려다보았다. 각종 병장기를 짊어진 용병들과 송아지만한 늑대들이 퍽 흉흉했다. 영지민이 놀라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어린 집사가 전투마에게 당근을 먹이며 딴 이야기했다.

“성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해요.”

“너?”

“영주님 성 말고요. 아니아니, 영주님 성이지만 로드릭 성 말고요.”

로벨은 바다가 보이는 아만다 성을 떠올리고 미소 지었다. 어린 집사가 우물거리는 전투마를 쓰다듬고 말했다.

“머를 브릭을 기사로 임명해서 성을 맡기는 게 어떨까요?”

“머를 브릭?”

“영주님 종자요! 소금 광산 관리 중이잖아요.”

“아, 알아. 알고 있어.”

로벨은 기사 종자 이름을 두어 번 중얼거렸다. 어린 집사는 엄한 마녀를 노려보고-‘저 마녀한테 바보 증상이 옮은 거야!’-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소금 광산에는 펄프 대장이나 애꾸눈 볼포스를 보내야겠어요.”

“외팔이는?”

로벨을 수행하는 외팔이 더치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어린 집사는 단칼에 잘랐다.

“외팔이는 숫자 100도 못 세잖아요? 안 돼요. 안 돼.”

외팔이 더치가 덩치에 안 맞게 기가 죽었다. 로벨은 외팔이를 위해 출발을 명령했다.

기수를 자처한 마녀 키르케가 첫걸음을 떼고, 정찰병을 흉내 낸 아야와 이야카가 앞장서 달려나갔다. 물론 1마일도 안 가서 팔 아프다고 징징거리고 밥 달라고 슬그머니 돌아올 것이다.

로벨은 마녀 뒤를 따르며 물었다.

“늙다리 잭슨은 어때?”

“왜요?”

“언제까지 용병 일을 할 수 없잖아. 늙거나 부상 당한 용병은 소금광산으로 돌리려고.”

어린 집사는 재미있는 농담이란 듯 웃었다.

“일 못 하면 자르면 되죠. 뭐하러 그래요?”

“사기진작?”

“그런 건 은화 몇 개로 충분해요.”

“그래도.”

“흐으음... 어차피 광부를 감독할 사람은 필요하니까. 한번 생각해 볼게요.”

어린 집사는 정말 생각만 했지만, 로벨은 결정 난 것처럼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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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영주가 온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아만다 마을 주민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러나 딱히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못 먹고 못 씻은 영지민들은 로벨의 깨끗한 얼굴을 훔쳐보며 수군거렸다.

“피도 눈물도 없는 기사라고 하더이다.”

“귀족놈들이 뻔하지.”

“세금을 얼마나 올리려나.”

특히 모건 아만다 남작군에 소속되었던 젊은 사내들은 대놓고 적개심을 보였다. 며칠 전만 해도 죽고 죽이는 사이였으니 로벨과 울프 용병단이 반가울 수 없었다. 외팔이 더치가 바클러를 두드리며 말했다.

“눈깔들이 건방진데요? 원활한 주종관계를 위해 몇 놈 손봐주는 것이 어떻습니까요?”

어린 집사가 기가 막혀서 소리쳤다.

“그런 식으로 굴지 말라고요!”

“그럼 저 싸가지 없는 눈깔들을 그냥 두오?”

외팔이가 손도끼를 꺼내 영지민을 가리키자 영지민는 깜짝 놀라서 시선을 사방팔방으로 돌렸다. 어린 집사가 나직이 속삭였다.

“일에는 순서란 것이 있어요. 아무 이유도 없이 때리고 죽이면 안 돼요. 일단 꼬투리를 잡은 다음에 본보기로...”

마녀 키르케가 징그러운 벌레 보듯이 어린 집사를 보았다. 어린 집사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검증된 영지 경영법이라고요!”

마녀는 이야카의 귀를 가리며 속삭였다.

“착한 아이들은 저런 거 배우지 마세요.”

“늑대가 경영법을 왜 배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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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피폐한 부두를 둘러보았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바다에 떠 있는 배보다 해변에 방치된 배가 더 많았다. 부두에 정박한 배들도 상태가 좋지만은 않았다. 마지막으로 출항한 게 언제인지 노 아래에 바다 이끼가 잔뜩 끼어있었다.

“으으... 영주님 말씀대로 심각하네요.”

“이 사람들 대체 뭘 먹고 산 거지?”

로벨은 용병 두 명을 지정해서 명령했다.

“이곳 영지민을 모두 데려와.”

“모두 말입니까?”

“응. 한 사람도 빼지마.”

용병들은 영지민을 ‘모두’ 데려오라는 명령을 성심성의껏 수행해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노인과 걸음마도 못 뗀 갓난아이까지 몽땅 모아왔다. 덕분에 어린 집사의 일거리가 조금 줄었다. 아만다 마을주민은 35가구 194명이었다.

로벨은 지팡이를 짚고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노인을 위해 짧게 이야기했다.

“올해 인두세를 감면해 줄게.”

머리와 꼬리가 없어도 맛있는 말이 있었다. 영지민이 일제히 수군거렸다. 로벨의 호의와 배려는 이제 시작이었다.

“고장 난 배를 고치고 부족한 배를 만들어. 내가 도와줄게.”

“어, 어떻게 말입니까요?”

“한 가구당 100페닝씩 무이자로 빌려줄게.”

“백, 백 페닝!”

영세한 영지민에게 절대 적은 돈이 아니었다. 어린 집사가 다급히 살을 덧붙였다.

“빌려주는 거예요! 빌려주는 거! 내년 봄까지 배를 못 띄우면 영주님을 속인 거로 판단해서 채찍형에 처하고, 전 재산을 몰수하고, 저 남쪽 회색산의 혹독한 소금광산 광부로 보낼 거예요!”

소금광산 광부들이 들으면 서운할 소리였다. 광부일이 쉽지는 않지만, 급료도 좋고 처우도 좋아서 징벌처럼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으름장으로 효과가 있었다. 생각 없이 좋아하던 영지민들은 찔끔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오래 고민할 필요 없었다. 배를 띄울 수만 있다면, 2, 3년 안에 100페닝을 갚을 자신이 있었다. 아만다 마을 촌장이 의심을 떨치지 않고 물었다.

“그럼 영주님께서는 무엇을 얻으십니까?”

로벨은 별걸 다 묻는다는 듯 대답했다.

“너희들의 충성심.”

“충성만으로 배를 채울 수 없지요. 정녕 이자를 내지 않아도 된다 말입니까?”

그때, 마녀 키르케가 로벨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속닥였다.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았다. 로벨의 시선을 따라 194명의 영지민과 11명의 용병과 2마리의 늑대가 바다를 보았다.

볼탄 반도와 포클랜드 사이에 위치한 만(灣)으로 배 한 척이 들어오고 있었다. 인어의 바다에서는 흔히 볼 수 있지만, 교역항도, 거점항도 아닌 변방에서는 보기 드문 중형 갤리엇이었다.

“괜찮아. 난 배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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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고래 호는 26개 노를 사용해 부두 끝에 정박했다. 뱃일을 잘 모르는 로벨 등이 봐도 완숙한 솜씨였다.

“선장 이름이 뭐였지?”

“에... 그러니까...”

어린 집사는 선박 권리서를 꺼내보았다. 정식으로 임명된 것은 아니지만, 임시 선장의 이름이 나와 있었다.

“이안 에이버리에요. 에르나 왕국 사람인가 봐요.”

“꼭 해적 이름 같수다.”

푸른 고래 호에서 조교를 내리고 몇몇 사람이 내렸다. 선장, 항해사, 갑판장, 노예장 등등이었는데, 누가 선장인지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너 선견지명이 있구나?”

“진짜 해적이야?”

키가 크고 체구가 좋은 30대 중후반 사내였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얼굴은 선량한데, 본인이 가꾼 얼굴은 그렇지 못했다. 얼굴과 팔다리에 칼자국이 가득했다. 칼밥 좀 먹었다고 자부하는 용병조차 기가 죽을 정도였다. 퍽 인상적인 얼굴이었다. 그래서 로벨 등은 쉽게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술집 바텐더?”

“저 아저씨가 왜 저기 있어요?”

“원래 푸른 고래 호 선장이잖아요.”

전직 바텐더, 전전직 해적두목이 모자를 벗고 정중히 인사했다.

“푸른 고래 호 임시선장 이안입니다.”

“직업이 자주 바뀌네?”

이안 선장은 모자를 쓰고 웃었다. 누더기 봉제인형이 웃는 것 같아서 조금 무서웠다.

“해적 출신인 것이 들통 나서 술장사를 못 하게 됐습니다. 선원들은 해적을 좋아하지 않지요.”

“에릭 공작과는?”

“해적을 끌어들인 죄를 사면받는 조건으로 푸른 고래 호 선장직을 제안 받았습니다.”

“깔끔한데?”

로벨은 에릭 공작의 일처리에 감탄했다. 이만한 재주가 있으니 볼탄 반도의 절반을 지배하는 것이리라. 이안 선장은 생긴 것과 달리 매력 넘치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면이 아니어도 승낙했을 겁니다. 천성이 뱃놈이라 술잔 닦는 일은 근질근질해서 못하겠더군요. 생명의 은인이신 선주님 아래에서 정든 배를 몰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은 조건이 없지요.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에릭 공작의 조치로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로벨이 할 일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환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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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어린 집사는 이틀 동안 바쁜 시간을 보냈다. 아만다 마을의 호구조사를 끝내고, 사유재산을 확인한 후 투자 계약서를 작성하고, 푸른 고래 호 간부들과 인사를 나누고, 임금문제를 합의하고, 교역물품과 교역방향을 밤늦게까지 의논했다.

로벨은 골이 지근지근해서 잠시 쉬자고 말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성주이자 선주이자 고용주인 로벨은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지만, 그 아래에서 일하는 집사와 선장과 용병들은 쉴 수 없었다. 정확히는 어린 집사의 닦달로 쉬지 못했다.

“어디 가요!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요!”

“선주님이 쉬자고...”

“영주님이 죽으면 선장님도 따라 죽을 거예요? 아니죠? 그럼 앉아요!”

“거, 말이 좀 심하오. 고용인 주제에 죽네 사네...”

“전 그래도 되거든요? 펄프 대장도 얼른 앉아요!”

육지와 바다에서 가장 거친 일을 해온 사내들이 서로를 안쓰럽게 보고 자리에 앉았다.

“양모 생산시기인 90일과 330일에 맞춰서 출항한다고 가정하세요. 교역허가증이 필요 없는 항구가 어디어디라고 했죠?”

로벨은 진저리치고 2층 발코니로 나갔다. 그곳도 조용하지는 않았다.

“아우우우...!”

“아우우... 우?”

누가 늑대 아니랄까봐 아야와 이야카가 하울링하고 있었다.

늑대 남매는 보름달을 향해 목놓아 울다가 로벨이 나오자 눈치를 보며 울음을 그쳤다. 로벨은 양쪽 겨드랑이에 늑대를 하나씩 끼고 성 밖을 내다보았다. 만월이 뜬 바다가 아름다웠다.

파도가 모래를 쓸어내는 소리, 밤잠이 없는 바닷새의 투정부리는 소리, 술 취한 사내의 욕설과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도 아련히 들려왔다. 로벨은 눈을 지그시 감고 새로운 영지가 들려주는 속삭임을 감상했다. 그때, 마녀 키르케가 2층으로 올라왔다.

“기사님?”

로벨은 눈을 뜨고 물었다.

“안 잤어?”

“우리 아이들 간식 주려고요.”

마녀 키르케는 아야와 이야카에게 팔뚝만한 뼈다귀를 나눠주었다. 저만한 뼈가 나올 동물이라면 하나뿐이었다.

“로시난테?”

“흑... 로시난테는 우리 가슴 속에서 영원히 살아있어요.”

“살과 근육이 되어서? 아, 미안. 안 할게.”

로벨은 도끼눈을 뜬 마녀 키르케를 달래고 달과 별과 바다를 구경했다.

“먼 미래에, 우리는 저 바다로 나가게 될 거야.”

“에이, 전 바다가 싫은데요?”

로벨은 마녀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고 말했다.

“세상일은 모르는 거야. 우리가 못해도, 우리의 후손들은 먼 바다로 나갈 거야.”

마녀 키르케는 ‘후손’이란 말에 얼굴을 붉혔다.

기사와 마녀는 달빛이 번지는 수평선을 감상했다. 아야와 이야카가 뼈 갉아대는 소리가 조금 거슬리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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