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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70화 (70/605)

70화. 무적무패

70화. 무적무패

로벨은 울타리를 따라 걸었다.

새로이 정비한 목초지는 어린 집사의 욕심이 적극 반영되어서 무척 넓었다. 가볍게 걷다 보니 영지민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지까지 나왔다. 산책보다 행군에 가까운 거리였다. 목동은 고귀한 영주님을 걷게 해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저 때문에, 저 때문에 정말 죄송합니다.”

로벨은 살짝 웃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야.”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로벨이 아무리 단순해도 울프 용병단을 동원하면 더 쉽고 더 빠르게 로시난테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일찍 들어가면 뭐라 하니까.’

로벨은 시간 때우기 좋다고 좋아하다가 양심에 찔려서 ‘소를 구하는 것도 영주의 일’이라 중얼거렸다. 목동은 속내를 모르고 감격해서 로벨을 우러러보았다. 영지민 사이에서 로벨의 평가 한층 높아질 듯했다.

목동은 자상한 영주님을 위해 열정적으로 수색을 펼쳤다. 그리고 열정이 부끄럽게 간단히 흔적을 찾았다.

“영주님! 여기 울타리가 망가졌어요!”

“...응.”

로벨은 생각보다 쉽게 끝나서 아쉬워했다.

“울타리를 부수고 나갈 줄이야!”

“부실하니까.”

부족한 자재와 빈약한 재주로 만든 울타리였다. 인간이 발로 차도 부술 수 있으니, 1,200파운드의 소가 들이박으면 간단히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왜?”

로벨은 목동을 따라 울타리를 살피다가 이상한 것을 찾았다.

“울타리가 안쪽으로 부서졌어요. 그리고 여기 보세요.”

“도끼 자국?”

울타리 파편 중 하나가 깨끗하게 절단되어 있었다. 어떻게 봐도 3인치 남짓한 뿔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로벨은 나무토막을 집어던지고 결론 내렸다.

“가출이 아니야.”

“그, 그럼...!”

“그래. 납치야.”

@

로벨은 심각한 얼굴로 ‘로시난테 납치 사건’이라 명명했다. 조금 웃기긴 해도, 영주의 자산인 소를 도둑맞은 것은 분명 큰일이었다. 목동은 마른침을 삼키고 물었다.

“그럼 어떡하죠?”

“구출해야지.”

로벨은 롱소드 폼멜를 만지작거리며 북쪽 숲을 보았다. 로벨의 영지 밖이라 뭐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넌 돌아가도 돼.”

“아, 아뇨! 영주님을 보필하겠습니다!”

목동은 가슴을 두드리고 소리쳤다. 딱히 도움이 될 거 같지 않지만 말리지 않았다.

로벨과 목동은 소도둑이 지나간 길을 따라갔다. 소도둑은 도둑질이 서툰 건지 조심성이 부족한 건지 흔적을 많이 남겼다. 물웅덩이를 첨벙첨벙 밟으며 진흙을 뿌렸고, 잔가지와 잡풀을 마구 부러트렸다. 가장 결정적인 흔적은 로시난테가 푸짐하게 싸놓은 똥이었다. 목동은 두 번째 똥 무더기를 발견하고 울먹였다.

“로시난테... 자기를 구해달라고... 이렇게 단서를...”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로시난테의 구조신호인지, 그냥 건강한 소화활동인지 모르지만, 그 덕분에 소도둑 일당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럼 이게 텃새지! 환영식이냐?”

“아, 꼬우면 때려치우라고!”

로벨은 목동을 끌어당겨서 갓길에 숨었다. 전력탐색이 먼저였다.

‘배틀 액스 하나, 숏 스피어 하나, 부주 둘, 소도둑이 아닌가?’

도둑치고 무장이 좋았다. 용병이나 전문 도적 같았다. 목동이 겁에 질려서 속닥였다.

‘영주님, 네 명이에요. 너무 많아요.’

‘네 말이 맞아. 로시난테가 걱정이야.’

너무 작게 말해서 의사소통이 안 되었다. 로벨은 아주 짧게 고민 후 결정했다.

‘직접 물어보자.’

로벨은 칼자루에 손을 올리고 한 걸음 나와 소도둑 앞을 가로막았다. 소도둑 일당은 깜짝 놀라 무기를 추켜들었다.

“너, 넌 뭐야?”

“그러는 너희는?”

“야, 이 자식아! 내가 먼저 물었잖아!”

로벨은 소도둑의 반응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외모, 복장, 말투, 행동까지 전형적인 용병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실업자 된 용병 떨거지일 것이다.

로벨은 소도둑의 정체를 파악했지만, 소도둑은 로벨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했다.

“이 자식도 도적인가?”

“혼자인데?”

“그럼 뭐야? 그냥 미친놈이야?”

로벨은 용병들 반응에 의아해 하다가 뒤늦게 이유를 알았다. 로벨이 입고 있는 옷은 마로 만든 평범한 튜닉이었다. 고급 무명으로 만든 우플랑드도, 사슬이 주렁주렁 달린 아밍 더블링도 아니었다. 롱소드와 흐룬팅을 차고 나오긴 했지만, 귀족으로 여길만한 단서가 부족했다.

“아, 미안.”

로벨은 힌트를 주지 못한 점을 사과했다. 그러나 용병들은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다.

“저 칼 봐봐.”

“값 좀 나가겠는데?”

용병들의 눈에 탐욕이 일렁거렸다. 귀족으로 태어나 기사로 자라난 로벨에게는 퍽 낯선 반응이었다.

“내 칼?”

로벨은 롱소드를 뽑았다. 에르나 왕국 그랜드 챔피언이 혹평하긴 했지만, 그래도 한 도시의 장인이 만든 무기였다. 제대로 관리도 안 된 용병의 무기보단 우수했다. 용병은 배틀 액스를 치우고 손짓했다.

“다른 칼도 내놔.”

아무래도 칼을 준다는 뜻으로 이해한 모양이다. 로벨은 싱긋 웃고 롱소드를 휘둘렀다. 곡괭이처럼 잡은 숏 스피어를 부러트리고, 머리 위로 치켜 올리는 배틀 액스 도끼머리에 칼날을 걸어 위로 튕기듯이 쳐올렸다. 두 용병이 순식간에 무기를 잃었다. 아니, 한 명은 잃었고, 한 명은 빼앗겼다.

“기본이 안 되어 있어.”

로벨은 롱소드를 수직으로 세우고 앞뒤로 까딱까딱 움직였다. 칼날에 걸린 배틀 액스가 원심력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광대의 접시 돌리기하고 비슷한데, 접시와 비교가 안 되게 크고 무거운 전쟁용 도끼라 무시무시했다. 로벨의 힘과 기술을 엿볼 수 있었다.

로벨은 도끼를 돌리며 어린 종자를 가르치듯이 설명했다.

“너희들을 죽이지 않는 이유는 하나뿐이야. 그러니까 대답 잘해. 로시난테 어디 있어?”

“로, 로시난테?”

“3살짜리 암소야.”

목동이 나무 뒤에서 정정해 주었다.

“4살입니다!”

용병들은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로벨 말고도 숨어있는 사람이 더 있었다. 놀람과 당황이 경계와 공포로 바뀌었다. 그래서 인간이 사회를 구성한 이래 유서 깊게 사용된 협박을 사용했다.

“우, 우리가 누군 줄 알아?”

“누군데?”

로벨은 솔직하고 담백한 성격이었다. 용병들은 악쓰듯이 말했다.

“우린 울프 용병단이다! 울프 용병단을 알고 있겠지?”

“울프 용병단?”

“그래! 볼탄 반도에서 가장 강한 용병단이지!”

배틀 액스가 땅에 떨어졌다. 용병들은 로벨이 겁먹거나 최소한 당황했다고 믿고 좀 더 강하게 나갔다.

“무적무패의 기사! 로벨 로드릭 남작님을 모시고 있다! 네깟 놈은 칼을 뽑기도 전에 해치울 기사님이지!”

“이제 알아 모시겠냐?”

“조용히 꺼지면 오늘 일은 봐주겠다!”

로벨은 어이가 없어서 웃지도 못했다. 다행히 로벨 대신 웃어줄 목동이 있었다.

“킥... 키킥... 깔깔!”

목동은 숨죽여 웃다가 결국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로벨은 혹시나 해서 물었다.

“나 알아?”

“네놈 따위를 어떻게 알아!”

로벨은 뒤통수를 긁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자기소개가 익숙지 않아 힘들었다. 보통은 어린 집사가 ‘이분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샘 포클 폐하를 모시던 아몬드 프란시스 공작의 충직한 기사 로랑 로드릭의 11대 손...’ 식으로 로벨의 가문과 정통성, 그리고 시시콜콜하지 않은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때, 어린 집사만큼은 못해도 로벨을 소개해줄 사람이 숲 속에서 가죽 벗긴 곰처럼 생긴 외팔이 사내가 뛰쳐나와 소리쳤다.

“야! 개와 돼지의 잡종 같은 놈들아! 내가 저녁 먹기 전까지 복귀하라고 몇 번을 말했... 어? 기사 나리?”

“외팔이 더치?”

외팔이 더치는 머리 위로 치켜든 몽둥이를 슬그머니 뒤로 숨기고 말했다.

“아니? 기사 나리가 이 외진 곳에 무슨 일입니까요? 그것도 수행원이 없이요?”

로벨은 자칭 울프 용병단을 힐끔 보고 말했다.

“이 사람들은?”

“이번에 뽑은 울프 용병단 신참입니다. 실력을 확인하고, 겸사겸사 추수제에 쓸 고기도 구하라고 사냥을 시켰습니다. 이놈들아! 이분이 우리의 물주... 아니, 고용주이신 로벨 로드릭 남작님이시다!”

용병들은 자칭 울프 용병단에서 타칭으로 인정받았지만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그러니까, 무적의 기사가...”

“저놈이 로벨 로드릭 남작이라고?”

로벨은 피를 털듯이 롱소드를 좌우로 휘두르고 칼집에 넣었다. 그러나 진짜 폭력은 끝나지 않았다.

“로시난테,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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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키르케가 세상 서럽게 엉엉 울었다.

“로시난테! 로시난테! 으아앙!”

책임감이 강한 로벨은 미안해했고, 감수성이 부족한 어린 집사는 짜증냈으며, 어차피 남 일인 펄프 대장 등은 재미있어했다.

“거, 울 거면 울고, 먹을 거면 먹고, 하나만 합시다.”

“시끄러워요! 야만인! 어떻게 로시난테를 잡아먹어요?”

“여기 다리살이오.”

“으아아앙! 로시난테!”

하지만 다리살을 거절하진 않았다. 마녀 키르케는 눈물 반 고기 반으로 배를 채웠다. 펄프 대장은 철부지 딸을 보듯이 보다가 로벨에게 말했다.

“영지 밖이라 영주님의 소인 줄 몰랐다고 합니다.”

어린 집사가 갈비살을 뜯으며 따졌다.

“그렇다고 가축을 잡아요? 그럼 사냥이 아니잖아요?”

“어떻게든 성과를 내려고 그런 모양이오.”

펄프 대장이 동업자 정신으로 애써 감싸주었다. 로벨은 로시난테의 뒷다리를 잡으며 말했다.

“내 허락 없이 소를 도축한 것은 큰 잘못이야. 하지만 모르고 그랬다니까 참작은 해줄게.”

“교수형은 면한 겁니까?”

“채찍 10대와 석 달 감봉.”

채찍 10대가 가볍지는 않지만, 자신이 아끼는 개를 죽였다고 눈알을 뽑은 어느 지방 영주에 비하면 관대한 처벌이었다.

애꾸눈 볼포스는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메인 홀을 나갔다. 펄프 대장이나 외팔이 더치보단 자신이 채찍을 잡는 게 나을 듯했다. 감옥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소도둑 일당에게는 희소식이었다.

펄프 대장은 적당히 하라고 눈짓하고, 로벨과 어린 집사가 채찍형에 관심 가지지 않게 말을 돌렸다.

“내일 아만다 마을로 가시지요?”

“응.”

“그러고 보니 아만다 마을이라 부르기가 이상하군요. 아만다 남작은 추방되었으니, 영주님 이름으로 로드릭 마을이라 불러야지 않습니까?”

“그럼 헷갈리잖아.”

“히히힛! 뉴-뉴 로드릭 마을인가요.”

어린 집사가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었다. 마녀 키르케도 따라 웃다가 자괴감이 들었는지 더욱 서럽게 울었다. 로벨은 귀를 한번 후비고 말했다.

“그냥 아만다 마을이야. 그곳 영지민도 그 이름이 익숙할 테니까.”

그때, 성 밖에서 찰진 채찍소리와 자지러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마녀 키르케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성 밖을 보았다. 로벨은 마녀 키르케가 놀라지 않게 설명했다.

“로시난테를 죽인 벌이야.”

“아, 음, 그래도 때리는 것은...”

마녀 키르케는 마음이 불편한지 꼼지락거렸다. 마녀 이미지에 안 맞게 심성이 착했다. 어린 집사가 뼈만 남은 갈비를 이야카에게 던져주었다. 철없는 이야카는 그것도 좋다고 물고 와작와작 씹었다.

“채찍형으로 끝난 것이 행운이죠. 채찍 10대면 후유증도 안 남는다고요.”

4명을 10대씩 때리다 보니 생각보다 제법 걸렸다. 펄프 대장은 신입 울프의 비명소리를 감상하며 말했다.

“푸른고래 호를 어찌하실 겁니까? 파실 겁니까?”

“교역선으로 쓸 거야.”

어린 집사가 아야 꼬리에 손을 닦으며 말했다.

“양모와 치즈가 생산되기 시작했으니까, 그걸 가지고 인어의 바다 남쪽 나라와 교역할 거예요. 노스폴드 시티에 파는 것보다 훨씬 많이 남겠죠.”

펄프 대장이 손가락 하나를 세우고 중대한 문제를 지적했다.

“배를 몰 줄 아는 사람이 없잖습니까.”

바다에 대한 지식이 ‘짜다’는 것 하나뿐인 포비아 왕국인과 네일 공국인이었다. 어린 집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영주님은 선주님이지 선장님이 아니잖아요. 에릭 공작님이 보낸 선장이 알아서 하겠죠.”

“흐음... 믿을 만한 친구여야 할 텐데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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