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69화 (69/605)

69화. 목동

69화. 목동

로벨 로드릭 남작의 승전 소식이 볼탄 반도 곳곳으로 퍼져갔다. 조지 도트넘 남작부터 벌써 세 번째 승리였다. 한 번 이기면 운이고, 두 번 이기면 실력이고, 세 번 이기면 확신이 되는 법이다. 로벨 로드릭의 이름 앞에는 무적, 무패, 최고, 최강 등의 호칭이 붙었다

로벨 로드릭 영지와 가까운 이웃 영주들은 승전 축하를 가장한 뇌물을 보내왔다. 무적무패의 무용담이 아니어도,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밉보여서 안 될 세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집사의 입이 귀에 걸렸다.

“성 두 채, 마을 세 곳, 영지민이 900명이 넘고, 소금광산과 부두, 그리고 100명의 용병단을 가졌죠. 우리 영주님이니까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 이웃 영주님이었으면 비명 질렀을 거예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 아닌데요?”

마녀 키르케가 손으로 입꼬리를 당겨서 어린 집사의 얼굴을 흉내 냈다. 어린 집사는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다.

로벨은 창가로 피신하며 건성으로 말렸다.

“그만. 그만해.”

어린 집사는 마녀의 정수리를 깨물었고, 마녀는 울먹이며 집무실 밖으로 도망쳤다. 어린 집사는 내친김에 늑대 남매도 발로 차서 쫓아냈다. 아야와 이야카는 억울하다는 듯 컹컹 짖으며 마녀를 따라갔다. 로드릭 성의 서열정리가 끝났다.

“쬐그만 것이 까불고 있어!”

로벨은 강제된 평화에 만족하고 롱소드를 손질했다. 숫돌로 칼날을 세우고, 정향유로 윤이 나게 닦았다. 그래도 예기와 광택이 살아나지 않았다.

로벨은 한숨을 쉬고 흐룬팅을 뽑았다. 그리고 다른 의미로 난감해 했다. 흐룬팅은 롱소드와 달리 이빨 하나 나가지 않았다. 수백 년 동안 녹슬지 않은 전설의 검이니, 며칠 관리 안 했다고 상할 리 없었다. 로벨은 기름칠만 조금 하고 도로 넣었다.

“프란시스 시티에서 가져온 전리품 감정이 끝났어요. 후추는 지난번하고 비슷하고, 상아는 2,500페닝, 진주는 4,000페닝이에요. 총 9,750페닝! 토너먼트 최고 상금하고 비슷해요. 소금 판매대금까지 들어왔으니까, 에... 울프 용병단 결원을 보충하고도 7,220페닝이 남아요! 우와! 이걸로 뭐하죠?”

로벨은 고민하는 시늉 좀 하고 말했다.

“배를 사자.”

“갤리선이요?”

“코그(Cog).”

로벨은 아만다 마을의 망가지고 방치된 어선을 설명했다. 어린 집사는 또 남 좋은 일 한다며 투덜거렸지만 반대하지 않았다. 200명의 영지민을 굶어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일단 먹고 살게 해놔야 세금도 걷고 노역도 부릴 수 있었다.

“어선 정도면 직접 만드는 편이 싸지 않을까요?”

“배 만들 줄 알아?”

“저야 모르죠.”

어린 집사는 항상 당당했다. 로벨은 맥 빠져서 도로 앉았다.

“그러고 보니까 아만다 마을을 관리할 사람이 문제네요.”

“그람 형제 중 하나 보내.”

“징수관도 징수관이지만...”

로벨은 집무실 밖을 보았다. 로벨처럼 예민하지 못한 어린 집사는 몇 마디 더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펄프 대장이 무거운 발소리를 내며 계단을 올라왔다.

“My Lord,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선물!”

어린 집사가 벌떡 일어났다. 기대하고 고대하던 소식이었다.

로벨은 소드 벨트를 허리에 차고 일어났다.

“가자.”

@

에릭 공작의 전령은 지난 환영연회 때 본 공작의 수행기사였다.

무장을 간소하게 했지만, 잘 단련된 몸과 잘 손질된 곱슬머리가 누가 봐도 기사였다. 고용주 덕분에 기사에 대한 경외심이 강해진 울프 용병단은 바짝 긴장해서 메인 홀을 둘러쌌다.

“손님이 왔다고?”

“영주님!”

허풍쟁이 제이콥이 2층에서 내려오는 로벨과 어린 집사를 보고 소리쳤다. 비로소 긴장감이 누그러졌다. 에릭 공작의 전령은 울프 용병단의 반응을 재미있게 보았다.

‘로벨 로드릭 남작이 있으면 공작 가문의 기사도 무섭지 않다는 건가?’

로벨은 허풍쟁이 제이콥에게 그만 나가라고 손짓하고 전령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오, 서...”

“서 켈트요.”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서재로 안내했다. 기사인 만큼 영지민처럼 대할 수 없었다. 어린 집사가 ‘아이참! 아이참!’ 소리를 내며 주방으로 달려갔다. 와인도, 홍차도 없으니 내올 것이 애매했다. 다행히 켈트 경은 기호품에 관심이 없었다. 소매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내려놓았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님의 하사품이오.”

로벨은 봉투의 끈을 풀고 내용물을 꺼내보았다. 뻣뻣한 고급종이에 빽빽한 단어가 가득했다.

“이것이 무엇이오?”

“선박 권리서요.”

“선박?”

“축하하오. 경은 푸른 고래 호의 선주가 되었소.”

로벨은 푸른 고래 호를 떠올리고 3초쯤 뒤에 감탄했다. 켈트 경은 푸짐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공작께서는 오베리아의 준마를 선물하려고 했소만, 경이 류트 프란시스 공자와 모건 아만다 남작의 반란을 진압했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기뻐하며 갤리엇을 선물하기로 결정했소. 더불어, 아만다 남작령을 정식으로 수여하며, 경의 작위를 자작으로 올릴 것을 검토 중이오.”

어린 집사가 옆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있었으면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끼야아아!”

“.....”

서재 밖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엿듣고 있었나 보다. 켈트 경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나직이 속삭였다.

“그러나 좋아할 일은 아니오.”

“어찌해서?”

“정적이 생길 테니까.”

로벨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켈트 경은 로벨이 순도 100% 토종 기사임을 깨닫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전공을 쌓으면 쌓을수록, 총애를 받으면 받을수록 시기하는 자가 늘어나오. 처신을 잘해야 하오. 훗날 이 작은 장원에서 무지렁이 농부들과 어울리던 시절이 그리워질지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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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예의상 하룻밤 쉬어 가라고 권했지만, 켈트 경은 물 한 잔 얻어 마시고 로드릭 성을 떠났다. 페르젠 백작에게도 볼일이 있으며, 기왕 대접받을 거면 파도성에서 대접받고 싶다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는 소리를 했다.

“지가 기사면 다야? 재수 없어. 퉤!”

어린 집사는 외팔이 더치에게 배운 대로 침을 찍! 뱉었다.

로벨은 선박 권리서를 꼼꼼히 살폈다.

‘선종 갤리엇(Galiots). 선명 푸른 고래. 전장 98.4피트. 폭 16.4피트. 높이 22.9피트. 24개 노를 사용하는 아이란드 왕국 갤리엇. 용도 강습함/수송함. 소유주 로벨 로드릭 남작...’

로벨과 어린 집사는 소유주 부분에서 히죽히죽 웃었다. 주방으로 도망친 마녀 키르케가 슬그머니 다가와서 손뼉을 짝! 쳤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왜? 왜 그래?”

“흥! 복수하려고 왔군요!”

어린 집사가 싸울 태세를 갖췄지만, 마녀 키르케는 신경 쓰지 않고 선박 권리서를 살펴보았다.

“와! 선물이 배였어요?”

“응. 아주 큰 배야.”

“프란시스 항구에서 본 해적선이죠?”

마녀 키르케도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그리고 쥐 잡아먹은 뱀처럼 씨이익-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 큰 배가 어디 있을까요?”

로벨과 어린 집사는 서로를 보았다. 전령으로 온 작자가 선박 권리서 한 장 달랑 주고 사라졌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성 밖으로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잡아와! 아니! 모셔와!”

“으아아! 말 타고 간 기사를 어떻게 잡아요!”

“내 말! 내 말 가져와!”

@

로벨과 어린 집사가 전투마에 안장을 올리고 허둥지둥 가죽끈을 묶을 때, 켈트 경도 뭘 빼먹었는지 깨닫고 머쓱하게 돌아왔다. 숙련된 선장을 고용해서 아만다 항으로 보냈으니, 늦어도 사흘 뒤에 도착할 거라 전한 후 다시 떠났다. 서두르는 폼이 많이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하여간 기사들이란.”

“너도 몰랐잖아.”

로벨과 어린 집사는 투덜거리며 전투마를 도로 넣었다. 산책하러 나가는 줄 알고 좋아하던 전투마는 시무룩해져서 여물통에 머리를 박았다. 로벨은 아만다 마을까지 거리와 시간을 계산하고 좋아했다.

“이틀이나 시간이 있다는 거지?”

“놀 생각이면 포기하세요.”

“왜?”

어린 집사가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추수기가 코앞이에요. 할 일이 태산이라구요. 작황을 확인하고, 세수를 측정하고, 방앗간을 점검하고, 곡식창고를 청소하고...”

“그런 건 집사가...”

“전 뉴 로드릭 마을이랑 아만다 마을을 둘러봐야 한다고요! 그리고 이것도 원래 영주님이 할 일이잖아요! 점심 먹고 촌장네 집으로 가세요!”

로벨은 찍소리 못했다. 혹시나 도와줄 사람이 있을까 주위를 둘러봤는데, 조금 전까지 옆에 있던 마녀 키르케, 펄프 대장, 심지어 허풍쟁이 제이콥까지 사라지고 없었다. 로벨은 전투마와 함께 시무룩해졌다.

“켈트 경 말이 맞았어. 땅이 커져도 좋을 게 하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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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로드릭 마을 촌장을 따라 추경지를 돌아보았다. 개울가에 위치한 밀밭은 그럭저럭 평년 수준이지만, 새로 개간한 호밀밭과 귀리밭은 예전만 못했다. 촌장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저치들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저치들의 아들딸이 뉴 로드릭 마을로 떠나서 다행입니다.”

“그래?”

로벨은 추수용 낫을 손질하는 농부를 구경하면서 말했다.

“추수제 준비는 잘 되어가?”

“올해도 헨리 상단주에게 고기를 부탁하려고 합니다.”

“어린 집사가 많이 사지 말래. 늙은 양을 몇 마리 잡으면 되니까.”

“그리하겠습니다.”

로벨은 농부들 사이를 기웃거리며 본의 아니게 작업을 방해하다가 촌장의 간곡한 권유를 받아 방앗간으로 향했다.

방앗간 관리인은 로드릭 마을의 목구멍이라 할 수 있는 수차(水車)를 점검하고 있었다.

수차가 고장 나거나, 수량이 풍부하지 않을 때는 인력으로 방아를 찍기도 하는데, 그 노동력이 만만치 않았다. 성인 남자가 온종일 절구질해도 빵 하나 만들 양밖에 나오지 않았다.-물론, 일가족이 모두 먹을 크기의 빵이다- 결국은 방앗간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용량에 따라 세금이 부과되었다.

일부 악덕 영주는 방앗간 이용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강제로 이용하게 하지만, 로벨과 로드릭 마을주민한테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어때?”

“여, 여, 여, 영주님!”

방앗간 관리인이 깜짝 놀라 일어나다가 수차 회전축에 머리를 찍었다. 로벨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방앗간 관리인의 회전축을 쾅쾅! 두드리며 로벨을 안심시켰다.

“고장 안 났습니다! 아주 튼튼합니다!”

“아니, 네 머리가... 됐어. 괜찮아 보이네.”

방앗간 관리인은 방앗간에 들어온 곡물에 세금을 걷고, 영주와 영지민 몰래 착복하는 경우도 있어서, 영지민에게는 징수관만큼이나 인식이 안 좋았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로드릭 마을과는 조금 먼 이야기였다.

“문제없지?”

“예예. 올여름에 비가 적게 와서 걱정했는데, 지금 보니까 가을걷이 끝날 때까지는 아무 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도울 일은?”

“어이구! 아닙니다! 이곳 일은 제가 알아서 싹싹 처리하겠습니다.”

로벨은 방앗간을 한 바퀴 둘러보고 목초지로 향했다. 징수관이나 방앗간 관리인과는 좀 다른 이유로 백안시되는 직업종사자가 있었다. 마을 밖에서 홀로 지내는 목동이었다.

가축을 이끌고 장원 밖을 떠돌아다니는 목동은 절반쯤 이방인이었다. 마을사람과 쉽게 섞이지 못했다. 거기다 가축을 자유자재로 부리고, 날씨와 별자리에 밝으며, 짐승의 습성과 식물의 특징을 잘 아는 탓에 종종 마법사로 오해받기도 했다.

“로시난테! 이 녀석! 어디 있어?”

로벨은 귀에 착착 감기는 이름에 미소 지었다. 마녀 키르케가 지어준 이름을 그대로 쓰는 듯했다.

“로시난테!”

로벨은 목동의 어깨를 두드리고 물었다.

“도와줄까?”

“아, 감사합... 기사님!”

“영주님이야.”

“그럼 영주님!”

“왜 불러?”

“아, 아니, 그냥 놀라서 외친 말이었습니다.”

로벨은 입술을 끌어당기며 웃었다. 목동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소가 사라졌어?”

“예... 정말 송구합니다. 영주님의 소중한 소인데...”

“자주 있는 일이야?”

“그, 그렇지 않습니다! 소들은 혼자 다니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로시난... 아니, 사라진 소는 원래 얌전한 녀석이라 무리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는데... 이상하게 그 녀석만 사라졌습니다.”

로벨은 롱소드 손잡이에 왼팔을 올리고, 갑자기 살려달라며 절하는 목동에게 친절하게 말했다.

“그럼 같이 찾아보자. 울타리가 있으니까 금방 찾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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