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68화 (68/605)

68화. 바다

68화. 바다

로벨은 모건 아만다 남작이 어떻게 철사자 용병단과 붉은 수염 용병단을 고용했는지 알게 되었다.

“숫자가 하나, 둘, 셋, 넷... 5만 5천 페닝?”

시골 영주가 취급할 액수가 아니었다. 로벨은 자금 출처를 파악하기 위해 장부를 펼쳤다가 빼곡한 숫자에 질려서 도로 덮었다. 동방 숫자(10진법, 아라비아 숫자)도 어려운데, 고전 숫자(12진법, 로마 숫자)라 속된 말로 쇠와 말똥이 가득한 기사의 뇌로 분석할 수 없었다.

로벨은 자세를 바꾸고 장미 인장이 찍힌 편지들을 읽었다. 필체가 안 좋고 문장이 어색한 것을 보아 서기관이 쓴 편지가 아니었다. 하긴, 이런 비밀 내용을 서기관에게 쓰게 할 군주는 없을 것이다. 그럼 친필 편지인데...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아니었다.

‘글씨가 달라.’

로벨은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친필 편지를 가지고 있었다. 모건 아만다 남작이 가진 친필 편지와 완전히 달랐다.

‘프란시스 공작을 자칭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로벨은 ‘5만 5천 페닝을 지원할 테니 로벨 로드릭 남작을 공격하라’는 내용을 읽었다. 그 전후 내용은 다른 편지에서 이어졌다.

로벨 로드릭 남작은 페르젠 백작의 충복이니-편지가 조금 꾸겨졌다- 로벨 로드릭 남작을 치면 파도성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파도성이 군사를 일으키면 ‘정의’와 ‘명예’를 수호하는 호수성의 헤르만 백작이 공개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공작 가문의 내전을 바라고 있어.’

로벨은 편지를 앞뒤로 돌려보았다. 어디에도 발신자가 나와 있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보낸 편지인지 추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프란시스 공작을 자칭하고, 5만 페닝을 선뜻 지급하며, 호수성과 연줄이 있는 사람이 여럿일 리 없었다.

“류트 프란시스 공자.”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이복동생이자, 지난날 후계자 전쟁을 일으킨 모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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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끝났다.

류트 프란시스 공자와 내통한 편지가 발견되었으니, 모건 아만다 남작의 파멸은 기정사실이었다. 로벨이 생각할 일은 손에 넣은 무기를 어떻게 사용할지였다.

‘나도 나지만 주군도 큰일 날 뻔 했잖아?’

에릭 공작의 오른팔과 왼팔이라 할 수 있는 페르젠 백작과 헤르만 백작이 싸우면 좋아할 것은 류트 공자와 사트로 후작이었다. 아니, 한 명 더 있었다. 로벨은 류트 공자가 망명한 나라를 떠올렸다.

‘잉그비아 왕국.’

류트 공자, 사트로 후작, 그리고 잉그비아 왕국의 악마추종자가 한통속처럼 느껴졌다. 누가 주체인지 모르지만, 볼탄 반도에 피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My Lord, 여기 계십니까?”

로벨은 편지와 장부를 브리간딘 안쪽에 넣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들어와.”

방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집무실로 들어오는 과묵한 몬트도 그리 생각했는지 조용히 웃었다. 하지만 이곳은 적진이었다. 조심성이 많은 용병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지시하신 대로 조치했습니다. 다음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로벨은 창밖을 보았다. 아침이라 부르기는 조금 늦고, 점심이라 생각하기는 너무 일렀다.

“피곤하지 않아?”

“예? 아닙니다. 버틸 만합니다.”

“다른 용병들은 아닐 거야.”

로벨은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전령이 도착하고, 병사를 빼내려면, 아무리 빨라도 이틀은 걸릴 거야. 오늘은 이만 쉬도록 해.”

과묵한 몬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집무실을 나갔다.

“그럼 나도...”

로벨은 모건 아만다 남작에게 사과하고 먼지투성이 몸을 오동나무 침대에 던졌다.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성을 점령하고, 성질 사나운 귀부인을 상대하고, 볼탄 반도를 뒤흔드는 음모까지 파해 쳤으니, 로벨이 암만 철인이라도 배겨낼 수 없었다. 로벨은 숫자 셋을 세기도 전에 곤한 숨소리를 내며 곯아떨어졌다. 확실히 숫자에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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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 용병단은 성 밖 경계와 포로 감시로 교대근무를 섰지만, 로벨은 지휘관의 특권으로 8시간을 푹 자고, 배가 고파서 일어났다.

“으아아-암!”

로벨은 기지개를 켜다가 이곳이 모건 아만다 남작의 집무실임을 깨달았다. 적진 한복판에서 늘어지게 잠을 잤다. 로벨은 무방비한 행동이 부끄러워서 머리와 옷매를 가다듬고 진즉에 일어난 것처럼 집무실을 나갔다. 물론 통하지 않았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난 한참 전에...”

“코까지 골며 주무시길래 깨우지 않았습니다. 조금 이르지만 저녁을 드시지요.”

“......”

로벨은 군말 없이 울프 용병단 사이에 앉았다.

식량창고를 약탈했는지 먹거리가 풍부했다. 밀과 보리, 순무, 배추, 당근 한 자루, 계란 한 상자, 훈제 정어리 열 두름, 그리고 꿀에 절인 사과 한 항아리가 있었다.

로벨은 절반쯤 비워진 항아리에서 가장 맛있게 절여진 사과를 꺼내 한 입 깨물었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달았다.

“마음에 쏙 들어. 이번 일만 아니었으면 친구가 되어도 좋았을 거야.”

“사과 때문에 말입니까요?”

과묵한 몬트가 실소했다. 하지만 겁쟁이 데비와 코골이 바디는 그럴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재료들은 훌륭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솜씨 좋은 요리사가 없었다. 코골이 바디가 주방에서 가장 큰 냄비를 가져와 채소와 고기를 몽땅 넣고 스튜를 끓였다. 메기수염이 구시렁거렸다.

“여물 쑤는 것도 아니고...”

“이게 바로 ‘영원한 스튜’야! 별미라니까?”

“여기 콩이 있다!”

“양파도 찾았다.”

“그럼 넣어! 막 넣어!”

맛은 보장 못 하지만, 양은 충분히 많았다. 감옥에 가둔 포로들 몫까지 만들었기 때문이다. 로벨이 숟가락을 꺼내며 중얼거렸다.

“포로한테 배식한다고?”

몸값을 받을 수 있는 귀족이면 모를까,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 평민에게 식량을 나눠주는 일은 흔치 않았다. 군량을 아끼고, 저항할 힘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겁쟁이 데비와 코골이 바디가 국자를 휘저으며 변명했다.

“우리 식량이 아니라서, 어, 그냥 주려고 했습니다.”

“어차피 내일이면 떠날 건데, 괴롭혀서 뭐합니까요?”

“...떠나?”

로벨이 숟가락을 물고 중얼거렸다. 그 한마디에 20명의 용병이 동작을 멈췄다. 마녀 키르케도 따라 하지 못할 마법이었다. 과묵한 몬트가 신음을 흘리며 물었다.

“아만다 남작과 싸울 생각입니까?”

로벨은 겁쟁이 데비에게 그릇을 내밀며 말했다.

“응.”

마법이 한층 강력해졌다. 울프 용병단은 그릇을 던지고 숟가락을 휘두르며 열변을 토했다.

“적은 500명입니다! 불가능합니다!”

“지금은 500명이 아니지만... 아무튼 10배가 많습니다!”

“여긴 성벽이 부실합니다. 반나절도 못 버틸 겁니다.”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한 후 대안을 밝혔다.

“그럼 성벽을 고치자.”

“...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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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 용병단은 성문을 굳게 닫고, 빗장을 단단히 걸고, 버팀목을 빽빽하게 대었다. 그걸로 안심이 안 되어서 성문 뒤에 바리게이트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로벨은 꽉 막힌 성문을 보고 난감해 했다.

“이럼 못 나가잖아?”

울프 용병단은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못 들어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로벨은 고개를 가로젓고 버팀목을 줄이라고 지시했다. 울프 용병단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명령을 따랐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고, 모건 아만다 남작군이 성 밖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열 시간이 빨랐다.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얼마나 놀랐을지 짐작이 되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성벽 위에 올라 모건 아만다 남작군을 구경했다.

“숫자가 많이 줄었습니다.”

“응. 펄프 대장이 수고한 모양이야.”

그래도 400명 가까이 되었다. 로벨의 울프 용병단보다 20배 많았다. 정상적으로 맞서 싸울 수 있는 병력차가 아니었다.

로벨은 노을빛에 붉게 타오르는 갑옷을 가리켰다.

“저 기사가 모건 아만다 남작이지?”

과묵한 몬트가 시력을 돋구기 위해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성문 열어.”

로벨은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과묵한 몬트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해서 움직이지 않았다. 로벨이 계단 중간에서 다시 말했다.

“뭐해?”

“나, 나가실 겁니까?”

“응.”

로벨은 마구간에 걸린 수건을 창에 묶어 백기를 만들었다. 그때까지 성문이 열리지 않았다.

“열라니까?”

로벨이 짜증내자 그제야 우르르 내려와 빗장을 치우고 성문을 열었다. 로벨은 백기를 어깨에 걸고 털레털레 성 밖으로 나갔다. 울프 용병단은 젊은 기사의 배짱에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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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아래 포진한 근 400명의 군대는 장엄했다.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굴리자 언덕이 들썩거렸다. 로벨은 언덕을 내려가지 않고 중간에 멈췄다. 모건 아만다 남작도 로벨이 내려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로벨이 백기를 한번 흔들자 곧 반응이 나왔다. 배서닛(Basnet:사냥개 머리모양 투구)과 플레이트 메일을 갖춘 모건 아만다 남작이 올라왔다. 로벨의 예상대로 혼자였다.

“로벨 로드릭 남작?”

“모건 아만다 남작이오?”

대답 없이 통성명을 마쳤다.

모건 아만다 남작은 케틀 햇과 브리간딘을 갖춘 로벨을 훑어보고 비웃었다.

“재미난 속임수였소. 이름 높은 그랜드 챔피언이 탈주병을 흉내 내며 빠져나갈 줄이야.”

로벨은 백기를 아래로 내리고 말했다.

“그 정도 가지고. 난 더욱 재미난 것을 찾았소이다.”

“...그게 무엇이오.”

배서닛의 촘촘한 숨구멍으로 긴장과 흥분이 새어나왔다. 로벨은 “류트 프란시스”라고 중얼거렸다. 바이저가 없는 케틀 햇이라 입모양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투구 때문에 확인할 수 없지만, 모건 아만다 남작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내 사람이 편지를 가지고 프란시스 시티로 가는 중이오.”

“그것은... 그것은... 증거가 되지...”

“남작의 꼼꼼한 성격은 부친의 영향이오? 아니면 어린 시절 가정교사가 우수했소?”

“무, 무슨 뜻이오?”

“남작의 장부가 꼼꼼하다는 뜻이요.”

모건 아만다 남작의 숨소리가 한층 커졌다. 로벨은 격정적인 반응을 보고 안심했다. 로벨은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천천히 말했다.

“이제 남작에게는 희망이 없소. 설령 나를 쓰러트려도, 그 다음은 성난 프란시스 공작과 싸워야 할 것이오. 남작이 굳게 믿는 호수성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가장 먼저 창을 내밀 것이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로벨은 웃음 참았다. 사실상 항복 선언이었다.

“레이디를 비롯해 남작의 사람들을 전부 풀어주겠소. 가지고 갈 수 있는 재산도 넘겨주리다. 그것을 챙겨서 볼탄 반도를 떠나시오.”

모건 아만다 남작은 발끈했다가 금방 침울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이 전쟁의 승자는 로벨이었다.

“어디로, 어디로 가란 말이오.”

“그것은 전쟁 전에 생각했어야지 않소?”

로벨은 코웃음 쳤다. 모건 아만다 남작은 조롱에도 화내지 않았다.

“에르나 왕국은 멀고, 잉그비아 왕국은 위험하오. 인어의 바다를 건너가는 것이 좋으나, 그런 연줄이 없다면 가까운 네일 공국으로 가시오.”

모건 아만다 남작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로벨은 백기를 땅에 꽂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모건 아만다 남작이 미친 척 덤비면 어찌하나 내심 조마조마했다.

‘어찌하긴? 도망쳐야지.’

로벨은 언덕 중간에 굳건하게 서서 400명의 병사와 대치했다. 모건 아만다 남작의 우렁찬 목소리가 잠깐 들리더니 일제히 영지 외곽으로 물러났다. 로벨은 빠른 퇴각에 만족하고 성으로 돌아왔다. 로벨 이상으로 초조하게 지켜보던 울프 용병단이 열렬히 반겨주었다.

“영주님! 영주님 만세!”

“영주님, 혹시 마법사였습니까?”

류트 공자의 편지를 알지 못하는 울프 용병단은 로벨이 세 치 혀로 400명의 병사를 물러나게 한 것처럼 보았다. 실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로벨은 우쭐해 하며 명령했다.

“레이디 아만다와 감옥에 가둔 병사들을 데려와.”

“석방입니까?”

“응. 그리고 보물창고의 귀중품도 꺼내와.”

욕심 많은 코골이 바디가 소심하게 반항했다.

“귀, 귀중품까지요? 아깝지 않습니까요?”

“그런 것은 그냥 줘도 돼. 난 더 큰 보물을 가질 거니까.”

울프 용병단은 ‘보물’이란 말에 눈을 반짝였다.

“그게 무엇입니까요?”

로벨은 아야와 이야카처럼 웃었다.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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