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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67화 (67/605)

67화. 공격

67화. 공격

로벨은 허풍쟁이 제이콥에게 아밍 더블릿과 컴포지트 아머를 입혔다. 기사의 보물 제1호라 할 수 있는 갑옷을 타인에게 입히니 씁쓸하고 착잡했다. 하지만 본인 몸값보다 비싼 갑옷을 입는 허풍쟁이도 편하지는 않았다.

“꼭, 꼭 제가 해야 합니까?”

“시끄럽고 영광인 줄 알아요.”

어린 집사가 백 플레이트 고정끈을 조이며 타박했다. 허풍쟁이가 마음에 안 들지만, 허풍쟁이 이외에는 사람이 없었다.

펄프 대장은 울프 용병단을 지휘하기 때문에 안 되고, 외팔이와 애꾸눈은 덩치가 안 맞는데다, 눈에 띄는 특징이 있어서 안 되었다. 결국 로벨과 체구가 비슷하고, 신용할 수 있으며, 넉살 좋은 연기가 가능한 사람은 허풍쟁이 제이콥 밖에 없었다.

“이거 생각보다 무겁습니다요? 어어? 투구! 투구가 작아!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아 좀! 엄살 부리지 마요!”

로벨은 한숨을 푸욱- 쉬고 튜닉 위에 브리간딘(Brigandine)을 입었다. 사슬과 철편이 촘촘하게 짜여 있어서 컴포지트 아머보단 못해도 좋은 갑옷이었다.

어린 집사가 허풍쟁이 머리통에 아멧을 두드려 넣으며 말했다.

“큰 도련님이 종자일 때 입던 갑옷이죠?”

“...응.”

로벨은 감상에 빠지기 싫어서 서둘러 무기를 차고 가죽 장갑을 끼었다. 옷이 사람을 만드는 법이라, 저가 옷과 갑옷을 입으니 기사가 아니라 곱상하게 생긴 용병처럼 보였다.

로벨은 뻣뻣하게 굳은 가짜 기사 허풍쟁이의 등을 두드리고 격려했다.

“아무 문제 없을 거야.”

“만약에 들통 나면 어찌합니까요?”

“그럴 리 없어.”

로벨은 마녀 키르케를 믿었다. 마녀의 작전대로만 따르면 정말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한편, 마녀는 하루 종일 창고에 갇혀서 심통 난 아야와 이야카를 달래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그런데 오늘도 창고에 들어가자.”

“크르릉... 컹! 컹!”

아야가 이빨을 보이고 항의했다. 로벨은 합리적인 의심을 보냈다.

“너희들, 사람 말 알아듣는 거지?”

“킁! 킁킁!”

“아우우-!”

아야와 이야카는 갑자기 땅에 코를 박거나 하늘을 향해 하울링했다. 그래서 의심이 한층 깊어졌다.

“이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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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남작군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성문을 열고 나갔다.

모건 아만다 남작군은 기다렸다는 듯 철사자 용병단을 올려보냈다. 잉그비아 왕국에서 온 150명의 중장보병대가 발을 맞춰 전진했다.

붉은 수염 용병단이 거친 들불 같다면, 철사자 용병단은 조용한 해일 같았다. 천천히 걸어올 뿐인데 위압감이 대단했다.

로벨은 파비스를 땅에 내려놓고 과묵한 몬트, 코골이 바디, 겁쟁이 데비 등에게 속삭였다.

“좋아. 시작하자.”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겁쟁이 데비였다. 여자인 로벨보다 목소리 톤이 높고, 작은 일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만큼 제격이었다.

“으아아아-! 죽기 싫어! 난 죽기 싫다고!”

겁쟁이 데비는 파비스를 팽개치고 철사자 용병단 반대편으로 도주했다. 사전에 알고 봐도 놀랄 만큼 연기가 대단했다.

외팔이 더치가 덩치만큼이나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탈영이다! 탈영이다!”

로벨이 고개를 끄덕이자 과묵한 몬트와 코골이 바디 등 20명의 용병이 겁쟁이 데비를 따라 도주했다.

“제기랄! 나도 못해 먹겠다!”

“이런 건 계약서에 없었잖아!”

로벨은 도망치는 용병들 사이에 섞여서 따라 달렸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발을 쿵쿵! 굴리며 화를 냈다.

“느그들은 뭣들 하냐! 저것들을 조져라!”

‘그런 말 쓰지 마...’

로벨은 허풍쟁이가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멈춰 서서 말투를 고쳐줄 수 없었다. 완벽한 연극을 위해 애꾸눈 볼포스 이하 울프 용병단 명사수들이 크로스보우를 높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준!”

로벨은 이를 악물고 뛰었다. 워낙 준족이라 가장 먼저 도망친 겁쟁이 데비를 거의 따라잡았다. 애꾸눈은 고용주의 안전을 확인한 후 명령했다.

“발사!”

로벨의 뒤통수로 쿼럴이 쏟아졌다. 뒤쳐진 몇 명이 쿼럴에 맞아 쓰러졌다. 쇠촉을 빼서 죽지는 않겠지만, 죽을 만큼 아프기는 할 것이다. 허풍쟁이는 모양만 그럴듯한 롱소드를 뽑아서 날뛰었다.

“몽땅 잡아라! 잡아서 끌고 와라!”

긴장 탓에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래도 달리 생각하면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처럼 들렸다. 펄프 대장이 적절하게 제지했다.

“영주님! 철사자 용병단이 코앞까지 왔습니다! 철수해야 합니다!”

사실 철사자 용병단은 깜짝 쇼에 당황해서 멈춰서 있었다. 하지만 마녀의 대본상으론 언덕을 절반쯤 올라왔기에 그냥 이어갔다.

“크으윽! 할 수 없다! 철수하라! 성으로 돌아와라!”

로벨이 관람할 수 있는 연극은 여기까지였다. 성에서 멀어져서 가짜 로벨도, 울프 용병단도, 철사자 용병단도 보이지 않았다.

로벨을 포함한 ‘탈영병’ 20명은 개울을 첨벙첨벙 건너서 로드릭 영지 밖으로 씩씩하게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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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쟁이 데비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물었다.

“속았을까요?”

코골이 바디가 촉 없는 쿼럴에 맞은 허벅지를 주무르며 투덜거렸다.

“화살까지 쏘았는데, 속았겠지.”

크로스보우는 전장에서 쓰이는 살인도구라 촉이 없어도 위력이 작지 않았다. 머리에 맞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얌마, 괜찮냐?”

“제길! 안 괜찮아! 분명 늙다리 잭슨이야! 그 영감탱이 돈 갚기 싫어서 나를 죽이려고...”

코를 안 골아도 시끄러운 것을 보아 멀쩡했다. 그때 자나 깨나 과묵한 몬트가 입술을 떼었다.

“다음이 문제입니다.”

로벨은 케틀 햇(Kettle hat)을 손질하다가 과묵한 몬트를 올려다보았다.

“1개 랜스로 성을 점령할 수 있습니까?”

로벨은 익숙지 않은 케틀 햇을 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식시간이 끝났다. 다시 걸을 시간이다. 로벨은 출발을 명령하고 과묵한 몬트에게 말했다.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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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이 직접 지휘하는 20명의 울프 용병단은 하룻밤을 꼬박 걸어서 아만다 영지에 도착했다. 코골이 바디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소리쳤다.

“흐으음...! 제대로 왔군!”

서풍에 스며든 바다냄새가 적진이란 증거였다.

로벨은 말없이 롱소드를 뽑았다. 야간 행군의 피로와 아침 햇살의 나른함에 젖어있던 용병들은 쇳소리에 정신 차리고 무기를 챙겼다.

“병력이 많지 않을 거야.”

2개 용병단과 100여 명의 징집병을 로드릭 성으로 보냈으니, 영지에는 최소한의 수비 병력만 남아있을 것이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거침없이 마을로 쳐들어갔다. 메기수염을 기른 용병이 중얼거렸다.

“이거 옛날 생각나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작전을 옛날에도 한 적이 있어?”

“아니. 도적질하던 시절이 생각난다고.”

로벨은 기분이 나빠서 메기수염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메기수염처럼 생각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 아침 일찍 물을 길으러 나온 아만다 마을 아낙들이 로벨을 보고 기겁해서 소리 질렀다.

“도, 도적이다! 도적떼가 나타났다!”

“도적 아니야!”

로벨은 영지민이 무장하기 전에 영지를 장악하려고 속도를 높였다. 과묵한 몬트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쫓아가면 진짜 도적 같습니다.”

로벨은 못 들은 척하고 아만다 마을을 가로질렀다.

아만다 마을은 소문대로 작고 초라한 마을이었다. 지붕은 태풍 한번 몰아치면 날아갈 듯 부실하고, 장대에 걸린 그물은 헤지고 찢어져서 정어리나 잡을 수 있을까 의심되고, 해변에는 멀쩡한 어선보다 망가져서 방치된 조각배가 더 많았다. 꼬마들은 삐쩍 말라서 로벨 일행이 흉흉한 무기를 들고 지나가는데도 반응하지 않았다.

“뭣이여? 도적들이여?”

“네놈들한테 줄 거 없다! 썩 나가!!”

헐벗은 사내들이 몽둥이를 들고 나왔다. 어린 집사보다 가는 팔다리를 보니 싸울 기분이 나지 않았다.

“...꺼져.”

로벨이 롱소드를 위협적으로 휘두르자 사내들은 손에 든 것을 버리고 아이들을 챙겨서 도망쳤다. 로벨은 한심한 기분이 되어서 울프 용병단에게 명령했다.

“여긴 볼 것 없어. 성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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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만다 성은 로드릭 성만큼이나 오래된 고성이었다. 그래도 영주의 성이라 성 아랫마을보단 방비가 되어 있었다. 로벨 일행이 언덕을 올라가자 수비대가 나팔을 불어 위험을 알렸다.

“성문 닫지 못하게 막아!”

로벨은 통나무로 된 성문을 가리켰다. 수비대가 얼마 안 되는지 성문이 닫히는 속도가 느렸다. 그래도 울프 용병단이 달리는 속도를 볼 때 아슬아슬했다.

로벨은 잇소리 내고 전력질주했다. 허벅지 근육이 터질 듯이 부풀어 땅을 박찼다. 말처럼 투다다닥- 달리고, 산양처럼 껑충껑충 뛰어서 성문 틈새로 몸을 집어던졌다. 몸을 최대한 비틀어서 두 뼘 남짓한 틈으로 아슬아슬하게 입성할 수 있었다.

“후우... 후우...”

로벨은 성 안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첫 공격치고 대단히 어색했다. 그것은 아만다 성 수비대도 마찬가지였다. 아침식사 중에 나왔는지 창 대신 숟가락을 가진 병사도 있었다. 로벨은 숨을 고를 겸 먼저 인사했다.

“안녕? 난 로벨 로드릭이야.”

아무리 말단 병사라도 전쟁 중인 상대측 영주 이름은 알고 있었다.

“그랜드 챔피언이다!”

“로벨 로드릭이다!”

로벨은 롱소드를 휘둘러 숟가락을 쳐내고 소리쳤다.

“울프 용병단!”

“와아아아!”

울프 용병단은 밤을 꼬박 새운 것치고 기세등등하게 등장했다. 성문을 열어젖히고, 숏 스피어, 워 해머, 워 피크 따위를 휘둘렀다. 기습당한 아만다 성 수비대는 무기라 부르기도 민망한 도구를 집어 던지고 항복했다. 포기를 모르는 일부 병사가 저항했지만, 숫자와 무장차이로 진압이 어렵지 않았다. 성 곳곳에서 단발적인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오래가지 않아 평소처럼 조용해졌다.

모건 아만다 남작이 500명으로 해내지 못한 일을 로벨은 20명으로 해냈다. 성을 먼저 점령한 것은 로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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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무기와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를 압류하고, 병사를 비롯한 성안의 모든 사람을 연병장에 모았다. 그중에는 모건 아만다 남작의 부인도 있었다.

“로벨 로드릭 남작! 주인이 없는 성을 기습하다니요! 비겁한 행동이에요!”

로벨은 어이가 없어서 반박했다.

“전쟁을 시작한 것은 본인이 아니라 아만다 남작이오.”

“정정당당하게 군대를 이끌고 싸워야지요! 아녀자가 있는 성을 공격한단 말이에요?”

“지금쯤 아만다 남작도 아녀자가 있는 성을 공격... 내가 왜 상대하고 있지?”

로벨은 머리를 가로젓고 과묵한 몬트를 불렀다.

“모건 아만다 남작에게 사람을 보내. 아, 그래. 마지막까지 저항한 병사가 좋겠어. 충성심이 높으니 최대한 빨리 소식을 전달할 거야.”

“다른 포로들은 어찌합니까?”

“병사들은 감옥에 가두고, 여자와 아이들은 성 밖으로 내보내. 아참, 레이디 아만다는 침실에 가두고 용병하나 붙여서 감시해.”

로벨은 지시를 내린 후 홀로 성(Keep)안을 조사했다.

아만다 성은 로드릭 성이 궁전처럼 보일 정도로 낡아빠진 성이었다. 영지민을 동원해 수시로 청소한 듯 거미줄 하나 없이 깨끗하지만, 세월의 흔적까지 지우지는 못했다. 목재가 뒤틀려서 금이 간 벽이나 발길에 마모되어 움푹 파인 계단 등이 지나간 세월을 알려주었다.

로벨은 계단을 오르다 작은 창문 앞에서 멈췄다. 머리 하나 내밀기 힘든 좁은 틈새로 바다가 보였다. 귀를 기울이면 파도 소리와 부지런한 바닷새 소리가 들려왔다.

‘전망이 좋아.’

로벨은 2층으로 올라가 모건 아만다 남작의 침실 겸 집무실을 찾았다. 성안의 사람을 모두 치워서 숨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로벨에게는 익숙한 고요함이었다.

성 구조가 조금 달라 엉뚱한 곳을 헤맸지만, 금방 침실 겸 집무실을 찾아냈다. 오동나무에 짚을 가득 채운 침대와 밤나무를 네모 반듯이 잘라 만든 책상이 좁은 실내를 꽉 채우고 있었다. 모건 아만다 남작의 초상화가 유일한 장식품이었다.

로벨은 텅 빈 갑옷 거치대를 살피고, 모건 아만다 남작의 초상화를 구경하고, 책상에 앉아 장부와 편지를 조사했다.

로벨이-사실은 어린 집사가-하는 일과 차이가 없었다. 세수, 지출, 하반기 예산안, 고발장, 초대장 등등... 로벨은 건성건성 서류를 넘기다가 낯익은 인장이 찍힌 편지를 발견했다.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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