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66화 (66/605)

66화. 수비

66화. 수비

성 마르틴.

1명의 미망인을 위해 100명의 기사와 결투하고, 100명의 순례자를 위해 1,000명의 야만인과 싸운 위대한 기사. 그 명예와 신앙심을 기려서 결투와 전쟁의 수호성인으로 시성(諡聖)되었다.

“그러고 보니 영주님을 성 마르틴의 재림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죠?”

“응. 도박꾼이었지.”

로벨과 어린 집사는 소리 내어 웃었다. 외팔이 더치는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로벨과 어린 집사도 웃을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얼굴을 굳히고 진지하게 성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척! 척! 척! 척!

사람이든 사물이든 세 자릿수가 모이면 개성이 사라지고 집단성만 남았다. 지금 로드릭 성 앞의 군대가 그러했다. 키가 다르고, 덩치가 다르고, 이목구비와 피부색이 조금씩 다르지만, 500개의 개성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저 모건 아만다 남작군이었다.

“너무 많잖아!”

로벨 로드릭 군은 울프 용병단 77명과 징집병 80명으로 총 157명이었다. 아만다 남작군과 비교하면 병력은 3배 차이나고, 무장과 경험은 그 이상 차이났다. 펄프 대장이 적군 깃발을 확인 후 보고했다.

“잉그비아 왕국의 철사자 용병단과 네일 공국의 붉은 수염 용병단입니다.”

지난 사트로 후작가 전쟁 때 볼탄 반도로 들어온 외국 용병단이었다. 로벨은 한숨을 쉬고 물었다.

“저 녀석들 비싸지 않아?”

“저희보다 비싼 것은 확실합니다.”

“아만다 남작은 부자가 아니야. 저들을 어떻게 고용했을까?”

“영지를 판 것 아닐까요?”

“훼까닥 돌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그래도 로벨 로드릭 군이 아주 불리하지는 않았다.

낡고 오래되긴 했지만 성이 있고, 전쟁 전문 용병단이 있고, 수성에 특화된 영지민이 있으며, 국경 요새에서나 볼 수 있는 최첨단 사석포(射石砲)도 있었다.

로벨은 어제저녁 죽을 둥 살 둥 성벽 위로 끄집어 올린 팔코넷 2문을 돌아보았다.

“저거 쓸 줄 알아?”

“화약이랑 돌이랑 넣고 불붙이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응. 모르는구나.”

그래도 노력이 헛고생은 아니었다. 전쟁 경험이 풍부한 철사자 용병단과 붉은 수염 용병단은 대포를 보고 쉬이 접근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시간을 끌 수 없어. 아만다 남작이 마을과 농작물에 불 지르기라도 하면...”

전쟁에서 이겨도 겨울을 나기가 어려워진다. 펄프 대장이 굵은 수염을 긁으며 말했다.

“전면전을 치르는 것이 어떻습니까?”

어린 집사가 짜증내며 따졌다.

“150대 500인데요?”

“우리가 언덕을 차지하고 있잖소. 그리고 길이 좁아서 30명 이상 올라오지 못하오. 그 이상 밀어 넣으면 지들끼리 얽혀서 난장판이 되지.”

“피해가 문제잖아요! 피해가! 오늘 30명이 죽으면 내일은 120명으로 싸워야 해요!”

“적군은 400명으로 싸워야 할 거요.”

로벨은 숫자가 지나가자 머리를 휙휙 저었다.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은 로벨의 결정을 기다렸다.

“펄프 대장 말이 맞아.”

“영주님!”

“싸움을 피하면 추경지에 불을 지를 거야. 가을 농사를 망치면 400명의 영지민을 살릴 수 없어. 성 밖으로 나와 싸운다는 것을 보여줘야 해.”

“으으...”

어린 집사는 가을 농사를 망친다는 말에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

“울프 용병단을 성문 앞에 집합시켜. 전투를 치를 거야.”

@

하루 중 가장 뜨거운 제9시.

로벨은 펄프 대장을 비롯한 울프 용병단 77명을 이끌고 성문을 나섰다. 로드릭 가문의 깃발을 높이 세우자 아만다 남작군 진영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언덕 중간에 파비스를 설치하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펄프 대장의 말대로 길이 좁고 경사가 가팔랐다. 성벽과 성탑이 없어도 해볼 만했다. 로벨은 흠집이 많이 난 아멧을 앞뒤로 둘러보며 물었다.

“올까?”

펄프 대장은 팔콘 요새에서 주워와 지금껏 애용한 숏소드를 뽑았다.

“올 겁니다. 이런 기회도 없으니까요.”

적은 병력을 이끌고 성문을 나온 것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수백의 군대를 이끄는 자라면 거부할 수 없는 종류였다.

펄프 대장의 장담대로 아만다 남작군이 움직였다. 검은 바탕에 붉은 물결무늬가 새겨진 깃발이 앞장섰다. 네일 공국에서 온 붉은 수염 용병단이었다. 북부 바바리안의 후예들답게 수염이 무성하고 기골이 장대했다. 외팔이 더치가 투덜거렸다.

“고향사람하고 싸우는 것은 내키지 않는데...”

“용병한테 고향이 어디 있냐?”

“쳇! 용병은 부모 형제도 없는 괴물이냐?”

외팔이는 불평과 달리 바클러를 고쳐 매고 손도끼를 뽑았다. 전장에서 진정한 가족은 전우뿐이었다. 붉은 수염 용병단이 대오를 갖추고 언덕을 올라왔다. 펄프 대장이 숏소드를 높이 들고 명령했다.

“크로스보우 준비!”

크로스보우라고 통칭했지만, 애꾸눈 볼포스의 아바레스트를 비롯한 잡다한 투사 병기가 있었다. 각종 시위가 당겨지고, 길고 짧은 화살이 앞에 놓였다.

붉은 수염 용병단은 파비스를 쓰지 않았다. 라운드 실드, 카이트 실드, 호플론(Hoplon: 청동으로 만든 원형방패)까지 다양한 방패를 치켜들었다.

“누가 야만족 아니랄까봐 방패도 무식하게 크네!”

“시끄럽다! 발사!”

40개의 화살이 언덕 아래로 쏟아졌다. 거리가 가깝고 저지대로 쏜 화살이라 거의 직사였다. 붉은 수염 용병단은 방패 뒤에 몸을 숨기고 버텼다. 파파팍! 팍! 까강! 운이 좋은 화살은 방패 사이로 파고들거나, 방패가 가리지 못한 발목을 맞혔지만, 대다수의 화살은 크고 두꺼운 방패에 가로막혔다.

펄프 대장 거리를 가늠한 후 2차 사격을 명령했다.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많은 피해를 줄 수 있었다. 붉은 수염 용병단의 몇 명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3차 사격은 없었다.

“스피어 준비!”

펄프 대장은 숏소드를 칼집에 욱여넣고 급조한 롱 스피어를 주워들었다. 다른 울프 용병도 창을 챙겼다. 길이와 모양이 제각각인 창이 언덕 아래를 겨냥했다. 가장 긴 창은 벌써 닿을 거리였다.

붉은 수염 용병단은 방패를 집어 던지고 글라디우스, 배틀액스, 워 해머 등 난전에 어울리는 단병기를 꺼내 들었다. 네일 공국인의 전투방식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울프 용병단의 지휘관이 네일 공국인이었다. 펄프 대장은 고향의 전술을 잘 알고 있었다.

“당겨!”

울프 용병단은 일제히 창을 뒤로 당겼다. 지난 몇 달 동안 수없이 반복훈련한 보람이 있었다.

붉은 수염 용병단은 스피어맨에게 딱 좋은 13~14피트 거리에서 당황하여 멈칫했다. 펄프 대장은 이를 악물고 다시 명령했다.

“찔러!”

70개 창날이 살을 뚫고 뼈를 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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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격돌에서 우위를 차지했지만, 아쉽게도 지속하지 못했다. 붉은 수염 용병단은 백병전을 장기 삼는 정예부대였다. 크로스보우 등 원거리에 치중된 울프 용병단이 대적하기 힘들었다. 울프 용병단이 지금껏 버티는 것은 고지대의 이점과 로벨 로드릭의 무용 덕분이었다.

“하?”

로벨은 배틀 액스를 쌍으로 휘두르는 붉은 수염 용병에게 혀를 내두르고 롱소드를 휘저었다. 오른쪽 도끼를 쳐내고, 반동으로 왼쪽 도끼를 쳐내고, 무방비하게 드러난 가슴을 시원하게 갈랐다.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보통 사람은 흉내 내지 못할 행동이었다.

“어... 어?”

고향땅에서는 공포의 쌍도끼, 혹은 학살의 쌍도끼라 불리었을지 모를 용맹한 용병은 끝내 믿기지 않는 얼굴로 죽음을 맞이했다.

로벨은 쌍도끼의 이름을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전장에서는 비명 하나에 용병 하나가 사라지고 있었다.

“버텨라!”

로벨은 컴포지트 아머가 버텨주기를 바라며 다음 용병에게 달려들었다. 칼날이 짧은 글라디우스를 뱀브레이스로 쳐내고, 롱소드를 쥔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했다. 컨틀렛 너머로 묵직한 타격감이 전해졌다. 손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피를 털어낼 여유 없이 롱소드를 휘둘렀다.

오후 늦게 시작한 전투는 해가 지면서 끝이 났다. 붉은 수염 용병단은 승냥이처럼 매섭게 달려들다가 여우처럼 날래게 도망쳤다. 울프 용병단은 지쳐서 쫓을 생각도 못 했다. 펄프 대장과 애꾸눈 볼포스가 분풀이하듯 활을 쏘았으나 발이 심하게 느린 한 명을 겨우 잡았을 뿐이다.

로벨은 숨을 고르다가 철사자 용병단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서둘러 명령했다.

“철수해! 성으로 들어가!”

울프 용병단도 눈이 있었다. 허둥지둥 성문으로 후퇴했다. 펄프 대장은 파비스 챙기라고 고래고래 소리쳤고, 용병들은 꼬리에 불붙은 강아지마냥 말뚝은 두고 판자만 떼어서 후다닥 도망쳤다. 언덕 중간까지 올라온 철사자 용병단은 늑대가 아니라 강아지라고 조롱하다가 대포가 여장 사이로 머리를 내밀자 즉각 후퇴했다. 울프 용병단은 성벽 위아래에 주저앉아 큰 힘이 안 드는 공격수단, 즉 욕으로 응수했다.

“카악! 퉤! 남의 땅에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기웃거리냐!”

“잉그비아 촌놈들아! 네놈들 섬으로 꺼져라!”

로벨도 지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구간 앞에 털썩 앉아 피해를 보고받았다.

“전사자 19명, 부상자 7명입니다.”

“전사자가 너무 많아.”

“난전을 치른 것치고는 적은 편입니다. 위치가 좋아서 피해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로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농민병은 큰 도움이 되지 않으니, 전력의 1/3이 소모된 것이다. 전면전을 시도한 것이 조금 후회되었다.

“영주님! 영주님! 앗! 여기 계셨군요!”

어린 집사가 지푸라기와 양동이를 가져와 로벨의 갑옷을 닦았다. 피를 뒤집어써서 꿉꿉한데,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니 갑옷을 벗을 수 없었다. 아쉬운 대로 입은 채로 닦아야 했다.

“우악! 피로 목욕을 하셨네요? 오른팔 들어보세요. 겨드랑이 보이게 바짝 들어요.”

로벨은 어린 집사가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며 펄프 대장에게 물었다.

“적의 피해는?”

“아군보다 두 배 많습니다.”

“60명?”

로벨은 총병력 500에서 60을 빼고 아군과 비교해 보았다. 제법 고무적이긴 한데, 즐겁지는 않았다.

“내일도 나가 싸워야 할까?”

“가을 추수를 포기하고 성에서 싸우는 방법도 있습니다.”

로벨은 성벽 위의 애물단지를 힐끔 보고 말했다.

“저걸 쓸 수 있으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때, 성 뒤편에서 마녀 키르케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로벨은 멀쩡하다는 의미로 손을 흔들었다.

“아야랑 이야카는?”

“피 냄새 때문에 흥분해서 창고에 가뒀어요.”

마녀 키르케는 어린 집사를 도와 컴포지트 아머를 닦았다. 로벨은 잠깐 움찔했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마녀가 지푸라기를 물에 적시며 말했다.

“기사님은 왜 수비만 하세요?”

어린 집사가 어이없어서 웃었다.

“적이 500명인데 공격해요?”

“이제 440명이야.”

“그게 그거죠! 왼쪽 다리 뻗어요!”

로벨은 순순히 왼쪽 다리를 내주었다. 하지만 마녀는 순순히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아뇨. 아뇨. 저 밖에 무서운 용병 아저씨들 말고요.”

로벨과 어린 집사, 그리고 몰래 엿듣던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그럼 누구를 공격해?”

로벨이 되묻자 마녀 키르케가 도리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아만다 마을이란 곳이 멀리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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