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65화 (65/605)

65화. 선전포고

65화. 선전포고

일년 중 가장 무덥고, 가장 빛나고, 가장 역동적인 계절이 숨 가쁘게 지나가고 있었다.

산과 숲과 들판을 어슬렁거리는 동물들은 옛 신의 은총으로 배불리 먹고 부쩍 자랐다. 번식기가 가까운 일부 동물들은 짝을 찾아 애타게 울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바야흐로 생명의 계절, 성장의 계절, 사랑의 계절이었다. 그것은 인간도 예외가 아니었다.

로벨 일행은 빵빵한 배를 붙잡고 프란시스 시티를 나왔다. 에르나 왕국 사절단 환영 연회에 쓰고 남은 음식이 산더미라, 체면만 몰수하면 죽기 직전까지 먹고 마실 수 있었다.

“이런 일만 있으면 돈 안 받아도 될 텐데.”

“으흐흐... 돈 주고 일해야지.”

그리고 용병들은 체면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어린 집사가 뚱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그 말 진짜죠?”

갑자기 분위기가 싸아- 해졌다. 울프 용병단은 기침을 하거나 구름모양을 살피며 딴청 피웠다.

어린 집사는 용병이 짊어진 상아와 짐말이 끄는 대포를 살피고 로벨 곁으로 돌아갔다. 값비싼 것을 보아 기분이 한층 좋아졌다.

“선물이 뭘까요?”

로벨은 전투마 위에서도 자연스럽게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대단한 습관이었다.

“글쎄?”

“페르젠 백작님은 후추랑 비단을 보냈는데, 설마 그보다 못한 것은 아니겠죠?”

“아마도?”

로벨은 전투마의 갈기를 빗다가 문뜩 뒤따라오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에릭 공작의 선물을 상상하며 히죽히죽 웃는 어린 집사, 버드나무가지를 휘두르며 콧노래 부르는 마녀 키르케, 목을 쭉 빼고 타박타박 걷는 아야와 이야카, 무뚝뚝한 얼굴로 앞만 보는 애꾸눈 볼포스, 요령 좋게 꾸벅꾸벅 졸면서 걷는 허풍쟁이 제이콥,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지 껄껄 웃는 늙다리 잭슨과 겁쟁이 데비...

“흐음.”

로벨은 다시 앞을 보았다. 구불구불한 흙길이 초원 너머 먼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실낱같은 길을 따라 언덕을 넘고, 강을 건너고, 숲을 지나면, 낯익은 얼굴이 가득한 로드릭 마을이 나올 것이다.

로벨 일행은 여름의 향기를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

로벨이 로드릭 성문을 지나자 펄프 대장과 그람 형제가 마중 나왔다. 뉴 로드릭 마을을 책임진 세 사람이 성에 와있으니 심상치 않았다. 로벨은 애꾸눈 볼포스에게 해산을 명령하고 전투마에서 내렸다.

“여긴 무슨 일이야?”

펄프 대장은 새치 섞인 머리를 긁적이고 간단히 설명했다.

“뉴 로드릭 마을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로벨은 마크 하몬 남작의 손님인가 싶어서 조심했다. 그 괴기스러운 죽음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절반만 맞았다. 하몬 남작의 손님인 동시에 로벨의 손님이었다. 그리고 하몬 남작의 죽음은 설명할 필요 없었다.

“로벨 로드릭 남작 되시나요? 소문대로 잘생기셨군요.”

펄프 대장 뒤에서 키가 크고 아름다운 여자가 나왔다. 수염이 굵은 울프 용병단은 물론, 솜털뿐인 어린 집사까지 감탄할 정도로 빼어난 미인이었다.

“누구야?”

“크르릉...”

보기 드문 미인 앞에서 냉정한 것은 로벨과 늑대 남매뿐이었다.

로벨은 눈이 풀려서 헤벌쭉 웃는 부하들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남다른 반응을 보이는 한 사람을 찾았다. 마녀 키르케는 떡갈나무 지팡이를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었다.

“왜 그래?”

“저 사람... 마녀에요.”

“뭐?”

“사기(邪氣)가 가득해요. 원념이... 원념이 너무 많아요.”

로벨은 롱소드 손잡이를 꽉 쥐고 물었다.

“악마추종자?”

“그건 모르겠어요.”

로벨은 악마추종자라 확신했다. 조지 도트넘 백작, 마크 하몬 남작, 거스 깁스 남작을 찾아간 것처럼, 마침내 로벨을 찾아온 것이리라.

악마추종자는 사뿐사뿐 걸어왔다.

“로벨 로드릭 남작님?”

“응.”

로벨은 악마추종자가 수작을 부리면 즉시 목을 칠 작정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하지만 악마추종자는 예의 바르고 정중했다.

“저는 진리탐구회 수석 마법사 폴리 슈트라고 합니다.”

“진리탐구회?”

“아참, 남작님은 조금 다른 이름으로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럼 다시 소개하지요. 악마추종자 폴리 슈트입니다.”

악마추종자 폴리 슈트는 희고 가지런한 앞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

로벨은 롱소드를 뽑을지 말지 고민하다가 일단 몇 마디 나눠보기로 했다. 다만, 호의적인 말은 나오지 않았다.

“너희가 저지른 짓을 알아.”

악마추종자는 빙긋 웃었다. 혼을 쏙 빼놓을 듯한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저희가 무슨 짓을 저질렀습니까?”

“명예로운 기사들을 타락시켰지.”

악마추종자는 입술을 잡아당기고 웃었다.

“영주님은 살인자가 아니라 살인자가 사용한 칼을 교수형에 처하시나요?”

“뭐?”

“저희는 꿈을 이룰 수 있게 힘과 지혜를 빌려줬을 뿐이에요. 영지민을 착취하고, 살해하고, 제물로 사용한 것은 영주님이 말한 ‘명예로운 기사’가 한 짓이지요.”

로벨은 잠시 침묵한 후 말했다.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칼을 손질하는 법부터 배워야 해. 그리고 수천, 수만 번 휘둘러서 기술을 갈고 닦아. 그래야 비로소 칼을 다룰 수 있는 거야.”

“갑자기 무슨...”

“너희가 한 짓은 아무것도 모르는 7살짜리 시동에게 다짜고짜 칼을 쥐여 준 거야. 올바르지 않아.”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이 깜짝 놀랐다. 로벨이 화내서가 아니라, 논리정연하게 말해서였다. ‘우리 영주님이 아니야!’, ‘혹시 바꿔치기 당한 거 아니오?’ 그러나 평소의 로벨을 알지 못하는 악마추종자는 놀라지 않고 반박했다.

“직접 겪지 않고 판단할 수 없는 일이죠.”

“무슨 뜻이야?”

“로벨 로드릭 남작님에게도 칼을 줄 수 있어요. 쇠토막으로 된 장난감이 아니라,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위대한 칼 말이에요.”

“필요 없어.”

로벨은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딱 잘라 말했다. 그러나 악마추종자는 실망하지 않았다.

“흔히들 그리 말하지요. 하지만 인간이라면, 그것도 권력을 가진 사내라면 야망이 없을 수 없어요. 영주님도 다르지 않겠죠.”

악마추종자는 햇살 한 줌 쬔 적 없어 보이는 투명한 손을 뻗었다. 로벨은 롱소드를 움켜쥐고 뭘 하려는지 지켜보았다.

“어둠 속의 어둠을 밝히는 자, 거짓 속의 거짓을 보이는 자, 우물 속의 우물을 기르는 자.”

마녀 키르케가 떡갈나무 지팡이를 파이크처럼 세우고 소리쳤다.

“기사님! 저 마녀를 막아요! 사악한 흑마법이에요!”

로벨은 악마추종자를 막지 않았다. 희고 가냘픈 손이라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악마추종자의 두 눈이 주먹만하게 커졌다.

“너, 너, 로벨 로드릭이 아니...”

로벨은 더 이상 말을 하게 두지 않았다. 롱소드를 뽑아 깔끔하게 목을 후려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반응이 조금 늦게 나왔다. 어린 집사가 깜짝 놀라 소리치고, 허풍쟁이 제이콥이 계집애처럼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진짜 끔찍한 일은 죽은 악마추종자 몸뚱이에서 일어났다.

끼야아아아아아아-!

끼이이이이익-!

꺄아아아-!

악마추종자의 잘린 목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로벨은 패닉에 빠진 어린 집사를 끌어당겼다. 피 대신 흘러나오는 것이 정상일 리 없었다.

검은 연기는 한 덩어리로 뭉쳐서 수십, 수백 개의 얼굴이 만들었다. 주름진 노인도 있고, 조막만한 꼬마도 있고, 늠름한 남자도 있고, 어여쁜 여자도 있었다. 수많은 얼굴들이 공포, 좌절, 분노, 슬픔 등의 표정을 지은 후 빠르게 흩어졌다. 조금 전까지 발그레해서 헤헤 웃던 울프 용병단은 이제 하얗게 질려서 구역질했다.

로벨은 우플랑드 소매로 입을 막고 악마추종자의 시체를 뒤집었다.

“이게 진짜 정체야.”

젊고 아름다운 숙녀가 사라지고, 주름살 가득한 노파의 얼굴이 되었다. 펄프 대장이 어이없어 중얼거렸다.

“정말 마녀(Hag)잖아?”

@

악마추종자의 생뚱맞은 환영으로 어수선한 귀가가 되었다.

그람 형제는 뉴 로드릭 마을의 동향을 보고한 후 서둘러 로드릭 성을 떠났다. 키에 비해 소심한 멀대 그람이 마녀, 저주, 재앙 등의 단어를 중얼거렸다.

“저주가 아니에요. 오히려 해주(解呪)에 가까워요.”

로벨의 착한 마녀가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펄프 대장은 나쁜 마녀의 시체를 불태우고 돌아와 물었다.

“저 마녀가 무슨 짓을 한 거요?”

“마법을 쓴 거죠.”

“그러니까 무슨 마법이냐고 묻는 거요.”

마녀 키르케는 롱소드를 손질하는 로벨을 힐끔 보고 말했다.

“전 사랑과 우정과 믿음의 드루이드라 몰라요. 왜 웃어요? 진짜라니까요? 아무튼 숲의 마법은 알지만, 흑마법은 몰라요.”

펄프 대장은 찝찝한 얼굴로 말했다.

“마녀와 얽혀서 좋은 일이 없는데...”

“저도 마녀잖아요?”

“마녀(Hag) 말이오. 마녀(Witch) 말고.”

펄프 대장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마녀 키르케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로벨은 펄프 대장에게 시신처리를 보고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뉴 로드릭 마을에서 외팔이 더치를 불러와.”

“무슨 이유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예감이 안 좋아. 악마추종자란 자들이 무슨 일을 꾸밀 것 같아.”

펄프 대장은 설마하며 물었다.

“이미 죽었으니 끝난 것 아닙니까?”

“악마추종자가 한 명일 리 없어.”

로벨은 예감은 잘 맞는 편이다. 하지만 구체적인지는 않았다.

다음날, 성 밖에 전령이 도착했다.

어린 집사는 에릭 공작이 보낸 선물이 도착한 줄 알고 잠옷 차림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에릭 공작의 전령이 아니었다. 선물은 더더욱 아니었다.

전령은 성문 밖에서 고풍스러운 양피지를 펼쳐들고 소리쳤다.

“나 모건 아만다 남작이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봉신 로벨 로드릭 남작에게 고한다.”

전령은 성벽 위로 튀어나온 크로스보우를 보고 잠시 말을 멈췄다. 로벨이 성문 밖으로 나오자 간신히 아만다 남작의 전언을 이어갔다. 긴장한 듯 목소리가 떨렸다.

“나 모건 아만다는 조지 도트넘 백작의 사촌이자 거스 깁스 남작의 오랜 벗으로 명예로운 복수를 행하고자 맹세했다. 성 마르틴의 축일을 기점으로 전쟁을 선포하니, 로벨 로드릭 남작은 부끄럼 없이 심판을 맞이하라.”

로드릭 마을 남서쪽 아만다 마을 영주가 전쟁을 선포했다. 로벨은 화내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냥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전쟁?”

@

로벨이 기억하기로 아만다 남작의 마을은 로드릭 마을보다 작은, 속된 말로 깡촌이었다.

인구는 200명 남짓인데, 농사를 짓지 못해 매년 수가 줄고 있었다. 인어의 바다와 접해있기는 하지만, 항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산물이 있는 것도 아니라 고기잡이배 몇 척이 전부였다.

로벨은 선전포고문을 정독한 후 벽난로에 집어던졌다. 불을 때지 않아 태우지 못했지만, 심정을 알리기는 충분했다. 어린 집사가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강철성의 소머리 백작도 한 수 접어주는 우리 영주님인데, 그깟 깡촌 영주가 무슨 배짱을 부린 걸까요?”

“바보는 아니니까 믿는 구석이 있겠지.”

“혹시 강철성의 새 주인이 뒤를 봐주는 걸까요?”

“그럴 힘이 없을 거야.”

웨일 도트넘 백작과 조지 도트넘 백작의 초상, 페르젠 백작군의 약탈과 영지민의 이탈 등으로 예전과 같은 힘이 없었다.

“그럼 악마추종자일까요? 어제 죽은 마귀할멈의 복수를 하려고 아만다 남작을 조종하는 걸까요?”

“그건... 가능성이 있어.”

로벨은 날짜를 계산해 보았다. 성 마르틴의 축일까지 닷새 남았다. 마상시합처럼 깃발 흔들며 레디! 파이트! 하고 싸우지 않으니, 어떻게 진행될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었다.

“우선 용병을 모으자. 회색산의 병력을 절반쯤 데려와.”

“마들린 브런치도요?”

“그 이름이 아니잖아. 마... 마... 아무튼 그 친구는 그냥 있으라고 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