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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64화 (64/605)

64화. 긴 행사

64화. 긴 행사

기사의 힘 중 7할은 잘 손질된 무구에서 나온다.

아무리 몸을 단련해도 창칼을 튕겨낼 수 없고, 검술의 달인이라도 쏟아지는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로벨은 로드릭 성에 두고 온 컴포지트 아머가 간절히 그리웠다.

챙!

흐룬팅은 롱소드보다 짧고 가벼웠다. 그래서 도리어 다루기가 힘들었다.

“칫.”

로벨은 하프 파이크 간격으로 들어가지 못해 옆으로 돌았다. 흐룬팅의 날카로움을 살려서 무기파괴를 시도했지만 각이 나오지 않았다. 창대를 조금 깎았을 뿐이었다.

‘롱소드를 쓸걸 그랬나?’

로벨은 그렉 페럿 경을 힐끔 보았다.

그렉 페럿 경은 랑게스 메서뿐만 아니라 롱소드에도 일가견이 있는 듯 신명나게 싸웠다. 가드로 커틀러스를 막고, 폼멜로 턱을 올려치고, 칼날을 내리찍어 장작 쪼개듯 쪼갰다. 벌써 네 명 째였다.

‘그나마 다행이야.’

로벨은 오른쪽으로 발을 옮기는 척하다가 왼쪽으로 옮겼다. 로벨을 줄곧 뒤쫓던 해적은 관성적으로 창날을 왼쪽으로 돌렸다. 로벨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간격 안으로 파고들어 목에 예쁜 띠를 그려주었다.

촤악-!

쇠도 끊는 칼날이라 사람 목은 종이처럼 갈랐다. 하프 파이크 해적은 피를 분수처럼 뿌리며 넘어갔다. 기도가 잘려서 비명이 없었다.

“벌써 다섯 놈이 당했다!”

“그랜드 챔피언! 그랜드 챔피언이야!”

해적들이 겁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로벨은 승리를 예감했다. 그러나 두 자릿수 인원이 모인 곳에는 우수한 인재가 하나쯤 있는 법이었다. 전술적인 안목을 가진 해적이 사기를 북돋았다.

“안 돼! 물러서지 마라! 저놈들도 지쳤다! 지금 조져야...!”

퍽!

전술적인 해적의 머리가 옆으로 훽! 꺾였다. 관자놀이 왼쪽에 깃대가, 오른쪽에 쇠촉이 솟아나 있었다.

“쿼럴?”

로벨과 그렉 페럿 경과 해적들은 일제히 부두로 눈을 돌렸다. 경박하고 경솔한, 그러나 로벨에게는 친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군것질거리가 너무 질기잖아?”

“잘 다지면 먹을 만할 거야!”

“우엑! 너나 실컷 먹어라!”

그리고 품위 없는 잡담이 따라왔다. 로벨은 활짝 웃었다.

“울프 용병단!”

로벨의 부름에 응해 울프 용병단이 일제사격을 개시했다. 20발의 쿼럴이 부두 위를 지나 푸른고래 호 곳곳을 때렸다. 붉은 물을 가득 담은 가죽 주머니도 예외가 아니었다. 해적선 갑판이 핏물로 얼룩졌다.

그렉 페럿 경은 배 난간 아래 몸을 숨기고 물었다.

“저자들은 뭐요?”

“내 부하요!”

“주인이 있는데 쿼럴을 쏜단 말이오? 쯧쯧. 평소에 좀 잘해주지 그랬소?”

“...그런 거 아니오.”

첫 발은 절대 빗나가지 않는 애꾸눈 볼포스의 저격이었다. 로벨에게 피하라는 경고였다.

로벨은 울프 용병단의 사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벌떡 일어났다. 팔에 박힌 쿼럴을 붙잡고 눈물 콧물 짜는 해적의 머리를 분리해주고, 살아 보겠다고 엉금엉금 기어가는 해적의 뒤통수에 칼날을 담가주었다.

“후우...”

로벨은 숨을 돌릴 겸 그렉 페럿 경을 돌아보았다. 로벨과 비슷한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쪼개고, 부수고, 부러트렸다. 운이 좋아 쿼럴을 피한 해적들은 줄행랑을 쳤다. 로벨은 그냥 보내줄 의사가 없었다. 그것은 그렉 페럿 경과 울프 용병단도 마찬가지였다.

“어딜 도망가?”

“모조리 죽여라!”

잠시 뒤, 해적선 갑판에는 숨 쉬는 해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

로벨은 배 난간에 앉아 피에 젖은 소매와 신발을 털었다. 스무 명 가까운 해적을 해치운 기쁨보다 어린 집사가 화낼 것이 걱정이었다.

그렉 페럿 경이 로벨 옆에 앉아 롱소드를 지팡이처럼 짚고 말했다.

“일곱이오.”

“응?”

그렉 페럿 경은 갑판 위에 너부러진 시체를 하나씩 지목하며 말했다.

“본인은 일곱 놈 해치웠소. 경은?”

로벨은 조금 늦게 이해했다. 누가 더 많이 해치웠는지 따져보자는 말이었다. 대련에서 진 일이 담아둔 모양이다.

‘후우... 애도 아니고...’

로벨은 자신이 해치운 해적 숫자를 계산해보았다. 여섯 명이었다.

“...열둘이오.”

“거짓말! 많아야 대여섯 놈이잖소!”

“저들은 내 부하요. 내 부하가 해치운 것은 내가 해치운 것과 마찬가지요.”

그렉 페럿 경은 입을 쩍- 벌렸다. 대놓고 억지 부리니 반박하기가 쉽지 않았다. 로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롱소드도 내 것이오. 내 칼로 해치웠으니 내가 해치운 것이오. 19대 0이오.”

“머, 뭐라고?”

“큰 도움은 안 되었지만, 마음은 감사히 받겠소.”

로벨은 롱소드를 빼앗아 가슴 앞에 세우고 칼집에 넣었다. 그렉 페럿 경은 어이가 없어서 허허 웃다가 나중에는 그냥 껄껄 웃었다. 허풍쟁이 제이콥과 늙다리 잭슨이 속닥였다.

“시체 쌓아놓고 왜 웃는 거야?”

“미친놈인가 봐. 야야, 눈 마주치지 마라.”

@

로벨은 애꾸눈 볼포스에게 상황을 보고받았다.

“운이 좋았습니다.”

어린 집사가 난리 치는 통에 무작정 부두로 나왔는데, 운이 좋아 옷이 X자로 찢어진 인부를 발견하고, 자연히 푸른고래 해적선을 찾아냈다. 중간에 약간의 폭력이 동원되었지만, 로벨도 애꾸눈도 문제 삼지 않았다.

“어린 집사는?”

“마녀 키르케와 함께 선술집으로 갔습니다.”

로벨은 허풍쟁이 제이콥과 용병 둘을 지목해서 선술집으로 보내고, 나머지 울프 용병단은 푸른고래 호를 지키게 했다. 그리고 로벨은 장미성으로 돌아가 에릭 공작에게 해적 일을 보고했다.

에릭 공작은 눈살을 찌푸리고 딱 한마디 했다.

“사절단이 와있네.”

일을 키우지 말라는 뜻이었다.

도시 안에서 해적이 출몰한 것은 치안 부재로 여겨질 수 있었다. 비웃기, 비꼬기, 트집 잡기, 과장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에게 빌미를 줄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로벨과 그렉 페럿 경이 나포한 푸른고래 해적선은 전공기록 없이 프란시스 공작의 소유로 넘어갔다.

어린 집사가 재주는 영주님이 넘고 공은 공작님이 챙긴다며 입술을 삐죽였지만, 법적으로나 관례적으로나 정당한 조치였다.

“이곳은 프란시스 시티니까.”

“그렇죠. 그러니까요. 에릭 공작님이 왕이잖아요. 그깟 배 한 척 못 주나?”

그깟 배가 2만 페닝짜리였으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대신 전리품은 마음껏 가져가라잖아.”

“그게 최소한의 양심인가 보죠.”

로벨과 어린 집사와 울프 용병단은 푸른고래 호의 선실을 열심히 뒤지고 있었다. 갤리선은 줄 수 없지만, 갤리선에 실린 것은 마음껏 챙기라는 에릭 공작의 관대한 배려였다. 어린 집사는 가장 비싼 것을 꿀꺽하면서 생색낸다고 투덜거렸다.

하지만 의미 없는 생색은 아니었다. 해적들이 어디서 한탕 하고 왔는지 전리품이 적지 않았다. 어린 집사가 간절히 찾아다니던 후추가 한 상자 있고, 크기는 작지만 깨끗한 상아가 한 묶음 있고, 알이 굵은 진주도 한 주머니 있었다.

어린 집사가 까무러칠 듯한 얼굴로 소리쳤다.

“우와! 우와! 이게 다 얼마야!”

그 외에도 밀가루 한 포대, 비스킷 한 자루, 염장고기 두 덩이, 쉰내 나는 맥주 한 드럼 등등이 나왔는데, 상태가 안 좋아서 전부 버렸다.

어린 집사가 후추 상자와 진주 주머니를 양손에 꼭 쥐고 물었다.

“이만한 돈이 있는데 왜 바텐더의 돈을 훔쳤을까요?”

“글쎄?”

로벨도 의문이었다. 로벨의 250페닝과 기타 내기 돈을 다 합쳐도 상아 한 묶음 가치가 안 되었다. 로벨과 어린 집사의 의문은 마녀 키르케가 풀어주었다.

“돈이 목적이 아니래요.”

마녀 키르케가 아야와 이야카를 끌고 갑판으로 올라왔다.

“어디 갔다 와요?”

“방금 전에 말한 바텐더 고치고 왔죠.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거예요.”

로벨이 말하면 저세상으로 떠났다는 뜻이지만, 마녀가 말했으니 아마 건강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그 바텐더가 원래 푸른고래 호 선장이래요. 그러니까 해적 두목인 거죠.”

“역시! 생긴 것부터 두목 같았어!”

어린 집사가 의심하지 않고 납득했다. 외모만 보면 해적 두목이 아니라 해적왕이라 해도 믿어줄 바텐더였다.

“해적질에 염증이 나서 저축금? 저장금? 아무튼 해적단의 비상금을 가지고 튀었나 봐요. 원래 에르나 왕국 남해에서 활동하는 해적인데, 옛 부하들을 피해서 여기 정착한 거라나? 설마 볼탄 반도까지 쫓아올 줄은 몰랐데요.”

“그럼 복수야?”

“우리 돈을 가지고 간 것은 부수익이고요?”

마녀 키르케가 재미있지 않냐는 듯 배시시 웃었다.

“그 때문에 기사님을 끌어들였으니 운이 없는 해적 아저씨들이네요.”

2층 수색을 끝날 때쯤, 선수 갑판에서 늙다리 잭슨이 찾아왔다.

“영주님, 이쪽으로 와보셔야겠습니다.”

어린 집사가 상아를 끙끙거리며 옮기다가 버럭 화를 냈다.

“어디 영주님보고 오라 가라 해요? 이리로 가져오세요!”

“가져올 수 있으면 어련히 가져오지 않았을까?”

로벨은 두 사람을 말리고 늙다리 잭슨을 따라갔다. 늙다리는 이물로 올라가 방수포를 확 걷었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덮어둔 우람한 쇳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 집사는 낑낑거리며 가져온 상아를 떨구고 감탄했다.

“대포잖아!”

정확히는 소구경 팔코넷(Falconet) 2문이었다. 지난 후계자 전쟁 때 허드슨 자작이 팔콘 요새에서 사용한 대포였다.

“에게? 꼴랑 2개네요?”

“갤리선에는 대포를 많이 싣지 못해요. 오베리아 갤리선도 20문이 넘지 못할 걸요? 잉그비아 왕국의 범선은 40문 정도 탑재한다고 들었지만... 아무튼 해적 주제에 대포라니! 이제 보니까 신식(?) 해적이잖아?”

후추와 상아에 관심이 없는 로벨도 대포에는 관심을 보였다.

“이거 가져가자.”

“그야 당연하죠! 내다 팔면 못해도... 못해도... 그런데 대포가 얼마죠?”

“아니. 안 팔아.”

어린 집사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로벨은 청동 포신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쓸 거야.”

@

2박 3일의 일정이 간신히 끝났다.

에르나 왕국 사절단은 약간의 선물과 '뜻깊고 보람 있는 방문'이란 보고서를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갈 채비했다.

“포클랜드 시티에 들려 국왕 폐하에게 인사드리고 에르비아 시티로 돌아갈 것이오.”

“무사 평안한 여정이 되기를 바라겠소.”

에릭 공작은 3일 동안 3년이 늙었고, 에릭 공작의 측근들은 그 두 배쯤 늙었다. 근심, 걱정, 정치, 음모, 암시 따위를 주고받느라 녹초가 되었다. 수십 명의 가신 중 유일하게 로벨만 잘 먹고 잘 자서 피부가 탱탱했다. 아무튼,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입지가 볼탄 반도를 넘어 유라피아 대륙에서 확고하게 되었다.

에릭 공작과 루드 덱 백작이 인사하는 동안, 그렉 페럿 경이 찾아와 손을 내밀었다.

“로벨 로드릭 남작, 1대 1 무승부요.”

로벨은 가상적국 그랜드 챔피언의 손을 물끄러미 보면서 말했다.

“내가 두 번 다 이긴 것 같소만?”

“이 작자가 끝까지...”

로벨과 그렉 페럿 경은 동시에 미소 지었다.

“다음번에는 남작이 에르비아 시티로 오시오. 내 근사한 수집품을 보여드리외다.”

“기회가 닿으면.”

그렉 페럿 경은 조교를 건너며 손을 한번 흔들었다.

에르나 왕국 사절단은 입항할 때처럼 박력 있게 출항했다. 도합 80개 노가 일제히 물을 잡아당기자 성채보다 커다란 선체가 바다로 미끄러져 나갔다. 삽시간에 부두에서 멀어졌다.

에릭 공작은 시종이 준비한 의자에 앉아서 한숨을 푹 쉬었다.

“드디어 끝났군.”

“수고하셨습니다.”

“성공적인 행사였습니다.”

에릭 공작의 가신들이 아부가 담긴 축하인사를 쏟아냈다.

로벨은 그러거나 말거나 점점 멀어지는 오베리아 갤리선을 구경했다. 돛을 펼치고, 활대를 조종해 바람을 받고 있었다. 크기가 크기다 보니까 동작 하나하나가 웅장했다. 그때, 에릭 공작이 로벨이 불렀다.

“로벨 로드릭 남작.”

로벨은 정신 차리고 에릭 공작 곁으로 다가갔다. 혼자 축하를 안 해서, 혹은 해적 무리와 싸워서 질책할까 덜컥했다. 그러나 에릭 공작은 푸짐하게 웃고 있었다.

“남작 덕분에 깍쟁이들 콧대를 눌러줄 수 있었네. 어제오늘 한결 다루기가 쉬웠어.”

“도움이 되어서 다행입니다.”

에릭 공작은 의자에서 일어나 옷매를 조금 고쳤다. 시종들이 재빨리 의자를 치우고 말을 끌고 왔다.

“조만간 선물을 하나 보내겠네. 분명 남작 마음에 들 걸세.”

에릭 공작은 가신과 병사들을 이끌며 장미성으로 돌아갔다. 프란시스 항구에는 로벨과 울프 용병단만 우두커니 남겨졌다.

“선물?”

긴 행사가 끝난 제1부두는 선원과 인부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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