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해적
63화. 해적
로벨과 어린 집사는 3, 4층 고층건물이 즐비한 주택가와 시끌시끌한 시장을 지나서 생선 비린내가 가득한 부둣가에 도착했다.
에르나 왕국 사절단 함대가 제1부두를 차지하고 있어 본래 1부두로 들어와야 할 대형 선박은 부두 밖 정박지에 불쌍하게 모여 있었다.
“다시 봐도 크네요.”
어린 집사가 오베리아 갤리선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세계에서 가장 큰 갤리선이었다. 선체 높이가 성벽만 하고, 돛대 높이가 성탑만 했다. 정박 중이라 돛을 접었지만, 다 펼치면 로드릭 성을 덮을 수 있을 듯했다.
“저런 건 얼마나 할까요?”
로벨은 오베리아 갤리선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24만 페닝.”
“히익! 어떻게 알아요?”
“어제 본 갤리선보다 2배 크잖아.”
“...아하?”
물론, 가격과 덩치는 비례하지 않았다. 선박지식이 전무한 구닥다리 기사와 집사의 추론이었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기억을 더듬어서 선술집을 찾아갔다.
부두 앞에는 부두가 막혀서 할 일이 없어진 하역인부들이 술을 마시고, 욕하고, 싸우면서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기사인 로벨에게까지 시비를 걸지는 않았지만,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다.
“여러모로 민폐네요.”
“응.”
어린 집사는 술 취한 인부가 민폐라고 말했지만, 로벨은 에르나 왕국 사절단이 민폐라 이해했다. 두 사람의 성향 차이였다. 어느 쪽이든 로벨 일행에게 좋지 않은 것은 똑같았다.
어린 집사의 기억력이 우수해서 헤매지 않고 선술집을 찾아냈다. 그러나 돈을 받기는 쉽지 않았다.
“이게 뭐야?”
스윙 도어가 굳게 잠기고, ‘Closed’ 팻말이 걸려 있었다.
“낮에는 장사 안 하나?”
“그럴 리가요? 저기 술 취한 인부들은 어디서 술을 사다 마셨겠어요?”
“그러네?”
로벨은 고민하지 않고 롱소드를 뽑았다. 돈 욕심이 없어도 돈의 가치를 모르지는 않았다. 250페닝이면 살인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거금이다.
“앗! 잠깐...!”
어린 집사가 말렸지만 로벨은 주저 없이 자물쇠를 후려쳤다. 청동으로 된 자물쇠는 강철로 된 쇳덩이를 이기지 못하고 박살났다.
“이거 무단침입이라고요!”
“괜찮아.”
에릭 공작이 자신의 봉신이자 그랜드 챔피언인 로벨을 무단침입 따위로 투옥하지는 않을 것이다. 로벨은 스윙 도어를 발로 차고 성큼성큼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장, 나와.”
로벨은 롱소드를 위압적으로 휘두르며 바텐더를 찾았다. 어린 집사가 쪼르르- 따라와 말렸다.
“아이참! 영주님도! 밖에서 자물쇠를 잠갔잖아요? 안에 있을 리가 없죠!”
“아, 그런가?”
로벨은 머쓱해서 콧등을 긁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어린 집사가 잘못 생각했다. 주인장만 자물쇠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으으... 살려... 살려주...”
로벨과 어린 집사는 서로를 보고 재빨리 카운터 바 뒤로 다가갔다. 흉터 많은 바텐더가 바 아래 쓰러져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로 거무칙칙한 얼룩이 보였다. 핏자국이었다.
“다쳤어요!”
“응.”
로벨은 바텐더의 몸을 억지로 돌렸다. 바텐더는 흉악한 외모와 달리 가녀리게 비명을 질렀다.
“흐아아앙!”
“아, 미안.”
로벨은 건성으로 사과하고 상처 부위를 살폈다. 이마가 깨져서 피가 흐르고, 팔다리에 타박상이 가득하며, 오른쪽 날개 뼈 아래에 싸구려 대거가 꽂혀 있었다. 추론컨데, 술병으로 머리를 내리치고 발로 마구 밟다가 대거를 꽃은 듯했다. 그런데 마무리가 어설펐다.
로벨은 가장 치명적인 대거를 살폈다. 나무 손잡이 위로 녹슨 쇠붙이가 만져졌다.
“상처는 깊지 않아. 오히려 파상풍을 걱정해야겠는데?”
로벨은 그릇 닦는 수건을 끌어 모아 상처에 대고 말했다.
“강도야?”
“해적... 해적입니다.”
“도시에 무슨 해적이야?”
의식이 온전치 못한 바텐더를 대신해 어린 집사가 설명했다.
“해적 깃발만 떼면 해적인지 산적인지 어떻게 알아요?”
“아?”
“걔네도 사람인데 먹고 살려면 항구로 들어와야죠.”
로벨과 어린 집사가 딴 이야기하자 바텐더가 커다란 신음으로 관심을 돌렸다.
“제3부두... 으윽... 푸른 고래... 해적단... 돈을 가져갔...”
로벨을 제3부두가 어느 쪽인지 떠올리며 어린 집사에게 명령했다.
“의사를 데려와.”
“저 의사가 어디 있는지 몰라요.”
“성에 많잖아. 아무나 잡아와.”
“그 양반들은 귀족들 주치의인데...”
“로벨 로드릭이 찾는다고 전해. 이유 없이 거절하면 그 잘난 지식이 흐룬팅보다 쓸모 있는지 실험하게 될 거라고 말해.”
어린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선술집을 나갔다. 그러다 문뜩 중요한 것이 생각나서 돌아보았다.
“그럼 영주님은 뭐하고요?”
로벨은 위스키 마개를 어금니로 뽑아 퉤! 뱉고 바텐더 상처에 쏟아 부었다. 상처소독과 더불어 각성하는 효과가 있었다. “끄아아악!” 로벨은 상처에 절반만 붓고 남은 위스키를 마시게 했다.
“소리치는 거 보니까 안 죽겠어.”
그리고 아직도 머뭇거리는 어린 집사에게 말했다.
“난 돈 찾아야지. 걱정 말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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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응급조치를 마치고 롱소드를 챙겨 들었다. 부상자를 혼자 남겨두기가 미안해서 한마디 했다.
“운 좋으면 살 거야.”
“감사, 감사합...”
“운 나쁘면 죽으니까 감사하지 마.”
“......”
로벨은 선반 위에서 술을 꺼내 쥐여주고 의사가 올 때까지 정신 차리라고 충고했다.
“기사 나리.”
“응?”
“조심... 하십시오.”
로벨은 피식- 웃었다.
“조심할 것은 해적이야.”
로벨은 어두운 선술집을 나와 빛과 생기가 가득한 제3부두를 향했다. 그러나 곧 한 가지 실수를 깨달았다. 제3부두는 프란시스 시티에서 가장 많은 배가 들어오는 곳이었다. 소형 무역선부터 고기잡이 어선까지 수십 척의 배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하나하나 찾을 수도 없고...’
로벨은 전문가의 지혜를 빌리기로 했다. 술병을 옆구리에 끼고 볼라드에 앉아 고성방가하는 취객을 찾아갔다. 얼굴만 봐도 한평생을 부두에서 일한 인부였다.
“푸른 고래 해적, 알아?”
취객은 로벨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정신 나간 개처럼 웃었다.
“해적? 푸헤헷! 도시에 해적이 어디 있습니까요?”
로벨은 ‘역시 그런가?’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부두에서 일하는 인부도 모르면 일일이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 뭐냐, 해적 비슷한 것이라면 좀 알지요. 에취! 푸른 고래라고 했습니까요?”
“알아?”
“우헤헤! 제가 몸이 좀 안 좋아서... 기사 나리가 자비를 베풀면 기억이 날지도 모릅니다요.”
로벨은 손에 든 롱소드를 보여주었다. 취객은 움찔했지만 강단이 있어서 쉽게 굽히지 않았다. 로벨은 바닷사람의 배짱에 감탄하고 롱소드를 휘둘렀다. 취객의 누더기를 X 자로 갈랐다. 취객은 로벨과 롱소드와 자신의 앞섬을 차례로 보고 두 박자 반 정도 늦게 소리쳤다.
“흐이이이익-! 살인이다! 살인이야!”
“호들갑 떨지 마. 옷만 잘랐어.”
로벨은 롱소드를 칼집에 넣었다. 가드와 로켓(Locket)이 부딪치며 딱! 소리를 내었다. 우아한 납검이었다. 헌데 결과물이 우아하지 못했다. 오른쪽으로 벨 때 조금 실수했는지 핏물이 주륵- 흘렀다. 취객은 얼빠진 얼굴로 피를 닦고 로벨을 올려다보았다. 로벨도 조금 당황했다.
“어? 베였어?”
결과적으로 두 번 협박할 필요는 없었다. 취객은 술에서 깨어나 술술 불었다.
“7번째! 7번째 배! 파란 깃발! 선수에 고래 눈깔이 그려져 있습니다요!”
“고래 눈깔 몰라... 아무튼 파란 깃발이지?”
로벨은 술값 뜯으려다 피를 뜯긴 취객을 내버려두고 정박 중인 갤리선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취객은 잠꼬대하듯이 중얼거렸다.
“머, 뭐야? 저 정신 나간 기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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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취객이 알려준 7번째 배 앞에서 딱 멈췄다. ‘고래’라는 웅장한 이름과 달리 2, 30명 정도 탑승할 수 있는 소형 갤리선이었다. 16피트 남짓한 돛대 위에 검푸른 깃발이 펄럭였다. 로벨은 ‘고래 눈깔’을 감상하며 중얼거렸다.
“여긴가?”
그리고 엉성한 판자를 건너서 갑판 위로 올라갔다. 양해를 구하지 않은 무단승선이기에 당연히 반발이 나왔다. 술병을 흔들며 뱃노래 부르던 해적이 불쑥 올라온 로벨에게 화를 내었다.
“너 뭐야?”
“너 해적이야?”
해적의 삶에서 질문을 질문으로 답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무심코 반문했다.
“뭐?”
“해적이냐고.”
술기운 때문일까, 아니면 본래 객기가 많았을까. 해적은 어깨를 건들거리며 로벨 앞으로 다가갔다.
“보아하니 시골에서 힘 좀 쓰는 기사 나리 같은데. 우린 무서울 게 없어. 나리 혼자 어쩔 건데?”
로벨은 몸으로 대답했다. 롱소드를 번개처럼 뽑아 해적의 머리통을 쪼개주었다. 해적은 이마까지 파고든 칼날을 보려는 듯 눈알을 뒤집다가 스르륵- 허물어졌다. 로벨은 대화가 안 되는 해적을 치우고 다른 해적에게 목적을 밝혔다.
“내 돈 내놔.”
“저거, 저거 완전 미친놈이잖아?”
“기습이다! 전투준비!”
로벨은 갑판 위 해적의 숫자와 무장을 보고 여유를 부렸다.
‘세 명. 커틀러스(Cutlass) 둘과 하프 파이크 하나.’
컴포지트 아머가 없어도 충분히 해볼 만했다. 그러나 노 젓는 갤리선이 고작 세 명-죽은 해적까지 네 명-으로 움직일 리 없었다. 갑판 해치가 열리고, 자칭 푸른 고래 해적단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로벨은 숫자를 다시 세어야 했다.
“...아홉, 열, 열하나...”
로벨은 열둘에서 숫자 세기를 포기하고 탈출할 곳을 찾았다. 일단 후퇴해서 울프 용병단을 데려와야 할 듯했다. 그때, 부두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누구요? 로벨 로드릭 남작 아니오?”
로벨은 해적들을 견제하느라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해적들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랜드 챔피언이다!”
로벨은 자신의 이름이 해적에게도 알려졌나 보다 하고 으쓱했다. 그러나 해적이 지칭한 것은 새로 등장한 목소리였다. “영차” 소리와 함께 낯익은 목소리의 주인이 해적선 갑판으로 올라왔다.
“이런 곳에서 또 보오?”
로벨은 비로소 이 도시에 그랜드 챔피언이 한 명 더 있음을 떠올렸다.
“그렉 페럿 경?”
로벨은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뜻밖의 사람에게 깜짝 놀랐다.
“여기서 뭐하시오?”
그렉 페럿 경은 어깨를 으쓱이고 대답했다.
“본인은 본디 바닷사람이오. 골치 아픈 장미향보다 바다 냄새가 낫소.”
“본인을 따라온 것은 아니오?”
“본인이? 경을? 왜?”
“...아니면 됐소.”
로벨은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그렉 페럿 경이 도와주면 울프 용병단을 불러올 필요가 없었다.
“그나저나 칼 한 자루만 빌려주시오.”
도움이 될지 조금 의심되었다.
“기사란 작자가 칼도 없이 다니시오?”
“어느 기사가 부러트려서 말이오. 기왕이면 그 흐룬팅을 빌려...”
로벨은 롱소드를 던져주고 흐룬팅을 뽑아 중단세를 잡았다. 그렉 페럿 경은 입맛을 쩝! 다시고 롱소드를 두어 번 휘둘렀다.
“이거 영 못 쓰겠구먼. 이런 칼은 어디서 주워오는 거요?”
“노스폴드 시티 대장장이가 만든 칼이오.”
“거기가 어딘지 모르지만 당장 모가지 자르시오. 에르비아 시티의 도제만도 못하오.”
로벨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소리 없이 웃었다. 스무 명 가까운 해적이 앞에 있지만, 조금도 긴장되지 않았다. 그렉 페럿 경 돕는다면 20명이 아니라 30명도 상대할 수 있을 듯했다. 진짜로 30명이 달려들면 도망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