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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62화 (62/605)

62화. 수염

62화. 수염

로벨은 하품을 참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지금 로벨이 있는 장미성 회의장에서는 각 분야의 장인, 명인, 달인들이 모여서 자신의 지식을 뽐내고 있었다. 그런데 본인들 빼고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300년 전 동방의 이븐 시나가 편찬한 <의학정전> 이후 지금껏 괄목할만한 의술의 발전이 있었소이까?”

“무슨 말씀이오? 동방의학의 뿌리를 따지면 고대 서방의학으로 이어지는 것은 상식하오. 이븐 시나의 의학서 또한 칼레노스의 의학서와 닮아있지 않소?”

“1천 년 전 의사를 거론하는 것은 오히려 똥칠이외다.”

“300년 전이나 1천 년 전이나.”

“뭐요?”

“뭐? 왜?”

로벨은 수염이 근사한 노(老)신사들이 멱살 잡는 것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떠드는 것보다 한결 나았다.

에릭 공작은 시종일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학자들의 논쟁을 경청했다. 로벨은 공작이 의학에도 조예가 있나 보다 감탄했는데, 가만히 보니 감탄사가 한 박자씩 늦었다. 그냥 아는 척하는 중이었다.

‘공작 역할도 쉬운 게 아니구나...’

로벨은 누가 봐도 예술가처럼 생긴 대머리 남자들이 옛 신을 형상화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논쟁하는 것을 잠깐 보고, 악동처럼 행동하는 노인과 노인처럼 행동하는 소년이 물질변이, 성질변화, 화학반응 어쩌고 떠드는 것을 보았다. 역시나 공용어가 아니었다.

“지루한가?”

에릭 공작이 나직이 속삭였다. 로벨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대답하지 않았는데, 에릭 공작이 곁눈질하는 것을 보고 뒤늦게 말했다.

“아닙니다.”

에릭 공작은 시선을 앞으로 돌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늘 만찬 이후에 그렉 페럿 경이 검술시연을 보일 걸세. 포비아 왕국 검술과 비교해서 우열을 논하는 자리가 될 테고, 십중팔구 검술시합으로 이어질 걸세.”

로벨은 장미성 구석에서 시녀들과 시시덕거리는 그렉 페럿 경을 보았다. 나이는 25, 6살쯤 되었을까, 기사로서 전성기인 나이였다. 에르나 왕국인 특유의 파란 눈과 반 곱슬 머리카락이 매력적이었다. 키가 크고 잘생긴 데다, 성격까지 좋아서 시녀들은 물론이고 귀부인들도 호감을 보였다. 로벨은 롱소드 손잡이를 두드려 쇳소리를 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에릭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믿겠네.”

@

정점에 이른 학자와 예술가가 반나절 동안 토론했지만, 무엇 하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내가 옳고 너는 틀렸지만, 손님 된 도리로 참아준다’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싸움판에 끼지 않은 요리사의 경연장으로 초대되었다. 에릭 공작의 요리사와 루드 덴 백작의 요리사는 어깨동무라도 할 듯 친해져서 신나게 요리를 내왔다.

‘진정한 평화는 위장에서 나온다.’

로벨은 옛 선인의 격언을 중얼거리고 이른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어린 집사가 애타게 찾던 각종 향신료가 듬뿍 사용된 만찬용 요리였다. 소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등이 부위별로 썰려 나오고, 포비아 왕국에서는 보기 힘든 게 요리, 새우 요리, 거북이 요리 등도 쉼 없이 올라왔다.

로벨은 어린 집사가 보면 좋아했겠다고 생각하며 뭐부터 맛볼지 탐구했다.

“그랜드 챔피언 아니시오?”

가장 무난한 양 뒷다리를 잡아 뜯는데, 익숙한 호칭이 들려서 멈칫했다. 기사들이 연회장 한쪽에 몰려있었다.

‘나 아니구나.’

그렉 페럿 경은 귀부인뿐만 아니라 기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로벨은 넓적다리를 물어뜯으며 중얼거렸다.

‘나도 그랜드 챔피언인데...’

로벨이 인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흔한(?) 자국의 그랜드 챔피언보다 외국의 그랜드 챔피언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에릭 프란시스 공작 휘하에 포비아 왕국 그랜드 챔피언이 있지 않소이까?”

“로벨 로드릭 남작 말이오?”

“소문에는 한 번도 진 적이 없다고 하던데, 정말이오?”

연회장의 시선이 로벨에게 집중되었다. 로벨은 양고기를 오물거리다가 힘겹게 삼켰다.

‘벌써?’

로벨은 성미 급한 기사들과 한입밖에 못 먹은 양고기를 번갈아 보았다. 예상한 일이지만, 예상보다 빨리 시작되었다.

기사들 속에서 키도 크고, 눈도 크고, 코도 큰 기사가 한 걸음 나왔다.

“로벨 로드릭 남작, 배도 꺼트릴 겸 칼춤 한번 추는 것이 어떻소?”

로벨은 양다리를 안타깝게 보다가 내려놓았다. 그리고 에릭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메인 홀의 시선이 에릭 공작에게 집중되었다. 에릭 공작은 호스트의 재량을 한껏 발휘해서 대련을 허락했다.

“식전 행사로 나쁘지 않지. 로벨 경, 어울려주게.”

기사들은 물론, 시종과 학자들까지 모두 기뻐했다. 자발적으로 식탁을 치우고 자리를 내주었다.

‘익숙한 느낌인데...’

밥 먹다 말고 싸우는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 오늘은 결투가 아니라 대련이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긴장감이 작지 않았다. 사절단장 루드 덱 백작이 심판을 자처했다.

“양국의 우호를 다지는 자리인 만큼 상대방을 상하게 하지 마시오. 일국을 대표하는 명예로운 기사들이니 잘 처신하리라 믿소.”

그렉 페럿 경은 자신의 종자를 불러서 랑게스 메서(Langes Messer)를 뽑았다. 길이는 롱소드와 비슷한데, 외날이고, 날 폭이 한 마디 정도 두꺼웠다. 그렉 페럿 경은 메서를 팔(八)자로 휘두른 후 가슴 앞에 수직으로 세웠다.

“그럼 한 수 배우겠소.”

로벨도 롱소드를 뽑아 역시 수직으로 세웠다.

“얼마든지.”

갑작스럽지만 놀랍지는 않은 그랜드 챔피언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

로벨은 그렉 페럿 경의 자세를 살피며 중단세에서 상단세로 자세를 바꿨다. 외날 무기인 메서는 한 방 한 방이 위력적이지만, 사전 동작이 크고 변화가 적었다.

‘일반론이지...’

로벨은 메서 팩션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렸다. 그런 단순한 검술로 그랜드 챔피언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조심성이 많으시군. 그럼 먼저 가리다.”

그렉 페럿 경이 한 걸음 크게 내디디며 메서를 휘둘렀다. 검풍이 일어날 만큼 강력한 수직베기였다. 그러나 로벨이 기다린 공격이기도 했다.

“뻔해!”

로벨은 반걸음 물러나 칼끝을 주먹 하나 차이로 피하고, 그렉 페럿 경의 텅 빈 상체에 역으로 수직베기를 넣었다. 흠 잡을 곳 없는 절묘한 반격이었다. 그러나 일국을 제패한 그랜드 챔피언은 남달랐다. 크고 무거운 메서를 그대로 두고 몸만 움직여서 롱소드를 피했다.

“그쪽이야말로 뻔하오.”

“이런!”

그렉 페럿 경은 메서를 회수하는 대신 그대로 쳐올렸다. 로벨은 볼품없이 굴러서 역(逆) 수직베기를 피했다. 관객 사이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재미난 기술이네?”

“제대로 할 마음이 들었소이까?”

로벨은 롱소드를 양손으로 파지하고 중단세를 취했다.

‘강해...’

그렉 페럿 경은 메서를 어깨에 걸치고 옆으로 한 걸음 떼었다.

‘하지만 그 괴물들만큼은 아니야.’

로벨은 조지 도트넘 백작과 늑대의 왕을 떠올렸다. 긴장이 조금 풀렸다.

“다시 해봅시다.”

그렉 페럿 경이 또다시 묵직한 수직베기를 날렸다. 로벨은 롱소드를 비스듬히 올려 흘려보내고 가드로 머리를 노렸다. 그렉 페럿 경은 염소처럼 목을 돌려 피하고 이어서 몸까지 돌리며 회전베기를 날렸다. 로벨은 뒤로 껑충 뛰어서 참격을 피하고 재빠른 찌르기를 넣었다. 그렉 페럿 경은 기다란 메서의 칼자루를 이용해 롱소드를 쳐냈다.

“대, 대단하군!”

“이것이 그랜드 챔피언인가?”

일반인은 눈으로 쫓는 것조차 힘든 공방이었다.

로벨과 그렉 페럿은 상대방의 실력이 어느 정도 감잡히자 좀 더 적극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롱소드와 메서가 사납게 부딪치며 불꽃을 뿌렸다.

“큭!”

로벨이 신음을 흘렸다. 갑옷이 없기 때문에 피하거나 받아쳐야 하는데, 체력에서 밀렸다. 제때 피하지 못해 팔뚝이 살짝 베였다.

그렉 페럿 경의 어깨너머로 에릭 공작의 불안한 얼굴이 보였다. 중지할지 말지 고민하는 듯했다.

‘이건 반칙이지만...’

로벨은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롱소드를 크게 휘둘렀다.

“타핫!”

“벌써 포기한 것이오?”

그렉 페럿 경은 피식 웃으며 롱소드를 튕겨냈다. 그러나 처음부터 쳐내라고 휘두른 공격이었다. 로벨은 하늘로 들리는 롱소드를 그대로 놓고 왼손으로 흐룬팅을 뽑았다. 칼날이 짧은 만큼 발검도 빨랐다.

그렉 페럿 경은 입꼬리를 올렸다. 칼이 두 자루인 것을 알았을 때부터 이런 변칙술을 예상하고 있었다. 메서를 반 바퀴 돌려 칼날을 안쪽을 당겼다.

“내가 이겼소!”

로벨은 동의하지 않았다.

까득-!

쇠와 쇠가 부딪친 소리가 아니었다. 구태여 비유하면 쇳가루를 쌓아놓고 방망이로 후려친 소리였다.

“어라?”

그렉 페럿 경은 두 눈을 깜박였다. 재를 바른 것처럼 거무스름한 칼날이 목젖 앞에 있었다.

“분명히 막았...”

그렉 페럿 경은 메서를 올려보고 이해했다. 이상하게 가볍다 했더니 칼 허리가 뚝 부러져 있었다.

“으하핫! 이거 보통 칼이 아니구만!”

“흐룬팅이오.”

“흐룬팅? 전설에 나오는 요정의 검 말이오?”

“요정이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렉 페럿 경은 메서를 놓고 두 손을 살짝 들었다.

“이런 비장의 무기를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한 방 맞았군. 내가 졌소이다.”

그렉 페럿 경이 패배를 시인했다. 승부가 나자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나왔다. 에릭 공작은 흡족한 얼굴로 느릿느릿 손뼉 쳤고, 에릭 공작의 가신들은 휘파람 불며 열정적으로 손뼉을 부딪쳤으며, 에르나 왕국 사절단은 마지못해 따라 했다.

“휴우...”

로벨은 흐룬팅을 칼집에 밀어 넣었다. 이걸로 맡은 바 임무를 완수했다. 가상적국의 그랜드 챔피언을 이겼다는 기쁨보다 마음 편히 만찬을 즐길 수 있다는 기쁨이 더 컸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로벨 로드릭 남작, 실례가 안 된다면 몇 가지 묻고 싶소만...”

“경! 내 부탁이 하나 있소!”

“정말, 정말 흐룬팅이오? 요정이 만든 검이란 말이오?”

로벨은 전설의 검을 한 번만 휘두르게 해달라는 기사들과 탐구심이 넘치는 학자들 속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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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절단 축하연회는 2박 3일 동안 진행되었다. 로벨은 첫날 이후 여유가 생겨서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에게 고급진 요리를 가져다주고, 아야와 이야카를 산책시키고, 시종들과 주사위 도박하는 허풍쟁이 제이콥 일당을 두드려줄 수 있었다.

“영주님, 영주님, 돈 받으러 가요.”

“무슨 돈?”

“선술집에서 내기한 돈이요!”

이마에 혹이 난 허풍쟁이 제이콥과 늙다리 잭슨이 로벨을 돌아보았다. 도박한다고 쥐 잡듯이 잡은 양반이 도박을 했냐는 원망이었다. 로벨은 애써 변명했다.

“시종이 아니잖아.”

시종은 작위만 없을 뿐, 귀족이나 부르주아 가문 출신이었다. 평민 출신인 용병이 함부로 대할 상대가 아니었기에 로벨의 조치는 옳았다. 머리에 혹이 나고 등짝에 멍이 난 용병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빨리 가요! 빨리요! 500페닝이라구요! 거기 수염 난 말썽쟁이들은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요! 그럼 군것질거리라도 사다 줄라니까!”

평균 연령 31살의 말썽쟁이들은 서로를 보고 껄껄 웃었다.

“난 수염이 없는데...”

마녀 키르케가 서운한 듯 중얼거렸다. 아야와 이야카가 위로하듯 컹컹 짖었다. 하지만 아야와 이야카도 수염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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