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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59화 (59/605)

59화. 명검

59화. 명검

겁이 많지만 호기심도 많은 토끼 한 마리가 수풀 속에서 낯선 짐승들을 훔쳐보았다. 본인 딴에는 잘 숨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뾰족한 귀와 토실토실한 엉덩이가 삐죽 나와 엉성했다. 산새가 기분 상한 듯 푸드득! 소리를 내며 둥지를 떠났다.

“어어? 조심해, 임마!”

“너나 조심해라!”

로드릭 마을 장정 20명과 울프 용병단 20명이 산새 둥지 아래에서 소란을 피웠다.

“교대! 교대하자!”

“얼마나 했다고 교대야?”

“니가 와서 해봐!”

로벨이 골라온 힘 좋은 사내들은 벌목용 도끼부터 장작용 도끼까지 다양한 도끼를 가지고 800살 먹은 떡갈나무와 씨름했다. 떡갈나무와 원수진 탓은 아니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손바닥에 침을 퉤! 뱉고 도끼를 잡았다.

“저 속에 뭐가 있긴 있습니까?”

“...아마도?”

로벨도 확신이 없었다. 요정왕이 말한 ‘갈라진 틈이 있는 오래된 떡갈나무’가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신령하거나 신비스러운 느낌이 나지 않았다. 허풍쟁이는 도끼를 세차게 휘두르며 말했다.

“떡갈나무는! 좋은 땔감이니까! 장작으로는! 쓸 수 있겠지요!”

쿵! 쿵! 쿵! 딱!

나무 찍는 소리 중간에 묘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풍쟁이가 도끼를 놓치고 반걸음 물러났다.

“어?”

“모두 멈춰!”

로벨은 즉시 작업을 중지시키고 허풍쟁이가 찍은 곳을 살폈다. 허풍쟁이 주위로 힘 좋은 사내들이 모여들었다.

“뭣이여? 뭐가 있어?”

“나도 몰라. 돌땡이를 때린 것 같은...”

로벨은 나무에 꽂힌 도끼를 비틀어서 빼내고 나무속을 살폈다. 거칠지만 따뜻한 나무 안쪽에 매끄럽고 차가운 쇳덩이가 있었다. 로벨은 요정왕이 알려준 이름을 불렀다.

“흐룬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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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전설의 명검 흐룬팅을 햇살에 비춰보았다.

칼날은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거무스름하고, 손잡이는 금가루를 칠한 것처럼 반짝였다. 수백 년 동안 방치되었음에도 오늘 막 벼린 것처럼 날이 살아있었다.

“내 땅에 이런 게 있는 줄 몰랐네.”

로벨이 즐겨 쓰는 롱소드보다 길이가 한 뼘 짧고 폭이 두 마디 좁았다. 손잡이가 길어서 양손으로도 쓸 수 있지만, 아무리 봐도 한손검에 어울렸다.

“기왕이면 롱소드로 주지.”

요정왕이 들으면 퍽 서운할 소리였다. 로벨도 양심은 있는지라 조금 반성했다.

로벨은 로드릭 마을의 유일무이한 대장장이를 찾아가 흐룬팅에 딱 맞는 칼집을 부탁하고, 덤으로 이빨 빠진 롱소드의 손질도 맡겼다. 올해 40살이 된 자칭 낫과 괭이 제작의 달인은 흐룬팅을 감상하며 감탄했다.

“이거 정말 대단한 명검이군요! 제 평생에 이런 검은 처음 봅니다.”

그리고 이빨 빠진 롱소드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에 비해 이건 부엌칼만도 못하군요. 예전에 쓰던 멋진 놈은 어쩌고 이따위를 쓰십니까?”

“노스폴드 시티 대장장이 길드장이 만든 칼이야.”

“오오! 이제 보니 이것도 명검이군요! 균형도 잘 맞고 그립감도 훌륭합니다!”

“......”

아무래도 그쪽 길드 출신인 모양이다. 로벨이 한심하게 쳐다보자 대장장이는 딴청을 피우며 말을 돌렸다.

“두 자루 다 쓰실 생각입니까?”

“그래야 할 것 같아.”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휘둘러 손에 익힌 롱소드였다. 성검, 명검, 전설의 검이라 해도 손에 익은 검보다 마냥 좋지는 않았다.

“얼마쯤 걸려?”

“날을 세우고, 집을 맞추는 작업이니, 두어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그럼 시작해.”

로벨은 대장간 구석에 방치된 모루에 앉아서 팔짱을 끼었다.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뜻이었다. 대장장이는 로벨을 힐끔거리며 작업을 시작했다.

롱소드 슴베의 고정 못을 빼서 손잡이를 분리하고 칼몸을 화로에 집어넣었다. 체중을 실어 풀무질을 몇 번 한 다음 그냥 내버려두고 흐룬팅의 칼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칼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칼집을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공간이 남아서 흔들려도 안 되고, 공간이 없어서 칼날이 맞닿아도 안 됩니다. 칼날이 금방 상하는 데다, 칼을 뽑을 때 턱! 하고 걸릴 수 있으니까요.”

대장장이는 손질이 끝난 목판 두 개를 꺼내서 신중하게 단면을 깎기 시작했다. 도제 시절 많이 해 본 솜씨인 듯 손을 놀릴 때마다 톱밥이 한 움큼씩 떨어져나갔다. 흐룬팅의 길이와 폭에 맞춰 기본 틀을 잡았다.

“그리고 칼집이 없으며 칼이 이놈 저놈 가리지 않고 찌르지 않겠습니까? 심지어 주인까지 찌를 수 있지요. 어이구! 끔찍한 일입니다.”

대장장이는 칼집의 단면을 이리저리 돌리며 꼼꼼히 살핀 후 딱 붙였다. 눈대중으로 깎은 듯 한데 거푸집으로 찍어낸 것처럼 똑같았다. 대장장이는 시험 삼아 흐룬팅을 꽂아보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제가 칼집 만들기만 15년을 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칼 만들기를 안 가르쳐준 스승 놈을 원망해서도 아니고요.”

칼집 위에 둥근 쇠테를 박고, 칼집 아래 쇠못을 박아 칼집을 한 덩이로 만들었다. 그리고 사슴 가죽을 씌워서 마무리했다. 칼집 만드는 솜씨만 보면 노스폴드 시티의 대장장이 길드장보다 나았다.

“영주님을 보면 칼집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나?”

대장장이는 빙그레 웃고 화로에서 롱소드를 꺼냈다. 슴베만 남은 칼날이 불기운을 머금고 활활 타올랐다.

“칼날이 없으면 쓸모가 없고, 손잡이가 없으면 휘두를 수 없고, 칼집이 없으면 안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잘 만든 칼이라 하면 날과 손잡이와 칼집이 모두 좋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다수 기사님은 날만 세우거나 손잡이만 장식하지요.”

대장장이는 불타는 롱소드를 모루 위에 올리고 망치를 휘둘렀다. 탕! 탕! 탕! 요란한 망치질 소리에 뒷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영주님은 좋은 칼집을 가지고 계십니다. 영지민을 지켜주시는 분이니까요. 그 칼집을 부디 소중히 다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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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소드 벨트 오른쪽에 흐룬팅, 왼쪽에 롱소드, 뒤쪽에 대거를 차고 뿌듯하게 성으로 돌아왔다.

성문을 지나자 친근한 얼굴들이 보였다.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애꾸눈 볼포스가 뉴 로드릭 마을에서 돌아왔다.

“흠! 흠흠! 언제 왔어?”

로벨을 몸을 비스듬히 돌리고 인사했다. 흐룬팅을 자랑하려는 의도가 빤히 보였다. 하지만 어린 집사는 칼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영주님! 어디 갔다가 이제야 오세요!”

“왜?”

“이것 좀 보세요!”

어린 집사는 성질을 내면서도 집사의 품격을 잃지 않았다. 로벨은 뉴 로드릭 마을의 호구조사가 잘못되었나 걱정하며 어린 집사가 공손히 내미는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어린 집사가 왜 성질났는지 알았다.

“초대장?”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초대장이라고요! 그것도 공작이 직접! 직접 초대했다고요!”

로벨은 프란시스 공작가 인장을 확인 후 내용을 살폈다. 어린 집사 말대로 에릭 공작의 친필 초대장이었다.

“그러네?”

로벨이 명성 높은 그랜드 챔피언이라고 하지만, 수백 명이 넘는 공작가 봉신 중 말석이었다. 에릭 공작이 손수 초대장을 보낼 위치가 아니었다. 어린 집사가 손톱을 깨작거리며 말했다.

“혹시... 아니죠? 아니겠죠?”

“아닐 거야.”

로벨과 어린 집사는 로벨의 정체에 대한 암시적인 표현을 주고받았다. 마녀 키르케가 두 눈에 의문을 담고 쳐다보았다.

“뭐가 아니에요?”

어린 집사는 찔끔해서 버럭 소리쳤다.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로벨은 친필 초대장을 다시 훑어보았다. 수도원 학교와 시립 학교에서 교육받은 서기관보단 못하지만, 기사치고 유려한 문장이었다. 로벨이 작게 감탄하는 사이, 겨우 여유가 생긴 어린 집사가 로벨의 허리를 보았다.

“그런데 그 칼은 뭐에요? 못 보던 칼인데요? 설마! 칼을 또 산 거예요? 얼마 주고 샀어요! 손잡이가 삐까번쩍한 것이 한두 푼이 아닌 것 같은데! 으이구! 내가 못 살아!”

로벨은 자랑할 타이밍을 놓쳐서 해명을 먼저 해야 했다.

“사, 산 거 아니야. 나무에서 캐낸 거야.”

“끄아아! 거짓말을 해도 좀 성의 있게 하세요!”

“진짜야. 진짜라니까?”

로벨의 해명을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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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몇 벌 안 되는 옷 중 가장 깨끗한 옷을 챙겼다. 프란시스 시티까지 사흘이 걸리는 만큼 여행복과 연회복을 따로 준비했다.

“여차하면 내뺄 수 있게 갑옷을 입고 가는 것이 어때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

로벨은 성 밖으로 나와 수행원을 살폈다. 어린 집사가 노파심을 부려서 애꾸눈 볼포스, 허풍쟁이 제이콥, 과묵한 몬트, 겁쟁이 데비 등 울프 용병단의 핵심 멤버들로 구성되었다. 마녀 키르케와 아야와 이야카는 덤이었다. 로벨은 어린 집사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화제를 바꿨다.

“뉴 로드릭 마을 일은 잘됐어?”

“아, 그럼요. 성인 남자 117명, 성인 여자 131명, 이 중에 45세 이상 노인이 25명이고, 나머지는 15살이 안 된 어린아이에요. 인두세로 227페닝을 걷을 수 있을 거예요.”

“그래?”

로벨은 전투마에 짐을 올리고 꽁꽁 묶었다.

“구울 사냥은?”

“실패했어요.”

로벨은 마녀 키르케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시무룩하다 했더니, 아야와 이야카가 생각만큼 잘 해주지 않은 모양이다.

“왜?”

“저 식충이들이 찾으라는 구울은 안 찾고 여우만 쫓아다녀서요.”

로벨은 하핫! 웃었다.

“여우는 많이 잡았어?”

“그랬으면 화가 안 나죠. 여우란 여우는 죄다 쫓아내고 한 마리도 못 잡았어요. 하여간 저 멍충이들! 확 잡아먹을 수도 없고!”

“우리 애들 그만 구박해요!”

어린 집사가 손찌검하는 시늉하자 마녀 키르케가 빼액! 소리 질렀다. 사실 어린 집사가 때려봐야 송아지만한 늑대들은 아파하지도 않았다.

로벨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헥헥- 거리는 늑대 남매를 쓰다듬고 전투마에 올랐다. 로벨이 출발준비를 끝내자 애꾸눈 볼포스가 기수에게 손짓했다.

“기수,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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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근 1년 만에 프란시스 시티로 향했다. 볼탄 반도 북부에서 최남단까지 가로지르는 여행이라 쉽지 않았다.

어린 집사는 숏소드가 불편한지 자꾸 위치를 바꾸며 말했다.

“기회가 되면 향신료 좀 사와야겠어요. 한 상자만 구해도 이문이 꽤 남을 거예요.”

“쉽지 않을걸?”

“후추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사프란은 더더욱 바라지 않고요. 소박하게 생강 정도만 구해도 만족해요. 아! 설탕도 좋아요.”

어린 집사는 돈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 에릭 공작에 대한 걱정을 싹 잊었다. 어린 집사다운 태도였다.

볼탄 반도 남부는 평화로웠다. 강인한 농부들은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 농사를 짓고, 나무를 캐고, 돼지를 쳤다.

로벨은 20여 가구의 작은 마을을 가득 채운 돼지무리를 흐뭇하게 구경했다. 시끄럽고, 냄새나고, 위험하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라 따뜻했다. 마녀 키르케가 침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맛있겠다.”

“...흠.”

로벨은 자신이 이상한 건지, 마녀가 이상한 건지 조금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 답은 늑대가 알려주었다. 아야와 이야카도 돼지를 보며 침을 주르륵- 흘렸다.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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