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요정왕
58화. 요정왕
로벨은 크로스보우 위에 쿼럴을 얹고 주위를 경계했다. 이질감의 정체를 알자 공포가 밀려왔다. 마녀 키르케가 말한 마도의 길에 접어든 것이다.
“영주님?”
사냥꾼 찰드도 덩달아 숏보우에 화살을 메겼다. 그러나 로벨과 달리 위험을 자각하지 못해 긴장하지 않았다.
“영주님, 이제 곧 어두워질 겁니다요. 일단 숲지기 오두막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찾아보는 것이 어떻습니까요?”
“저희까지 길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용병들이 오두막에 올지 몰라요.”
사냥꾼 삼부자가 차례로 조언했지만, 로벨은 대답하지 않았다. 뱀파이어의 왕이 다시 찾아왔다면, 그래서 촌장의 손녀딸 루시처럼 꼬마와 용병들을 납치했다면 한시가 급했다.
로벨이 망설이는 사이 나무 그림자가 짙어졌다. 숲 전체에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오두막, 멀어?”
“아닙니다. 가깝습니다요.”
로벨이 결정하자 사냥꾼 찰드가 활짝 웃으며 앞장섰다. 하지만 이변은 일상에서 벗어났기에 이변이다.
사냥꾼 찰드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어? 어라? ”
로벨은 조금 늦게 이변을 알아챘다. 사냥꾼 찰드의 말과 달리 아무리 걸어도 풍경이 똑같았다.
“길을 잃은 거야?”
로벨은 점잖게 물었지만, 손에 장전된 크로스보우가 들려있어서 점잖게 들리지 않았다. 사냥꾼 찰드는 화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이 숲에서 반평생을 보냈습니다요!”
“그럼?”
“그러니까, 그게, 저 거북이 바위를 지나면 여기 두 갈래 밤나무가 나오고, 저쪽에 죽은 떡갈나무가 있어야 하는데... 왜 안 보이지... 왜...”
로벨은 한숨을 쉬고 허리 뒤에서 대거를 뽑았다. 사냥꾼 찰드는 기겁해서 두 팔로 머리를 감쌌다.
“자,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으아악!”
로벨은 두 갈래 밤나무에 X 표시를 새기고 도로 칼집에 넣었다. 그리고 사냥꾼 찰드 요청에 응답했다.
“응.”
“...예. 감사합니다.”
사냥꾼 찰드의 두 아들은 겁 많은 아비를 안쓰럽게 보았다. 사냥꾼 찰드는 폐렴이라도 걸린 듯 연신 기침하며 앞장서 걸었다. 로벨은 머리를 가로젓고 사냥꾼 삼부자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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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 찰드의 말이 맞았다. 익히 아는 길을 지나도 처음 자리로 되돌아왔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반복되자 더 이상 실수라 생각할 수 없었다. 사냥꾼의 두 아들이 심각한 목소리로 속닥였다.
“어두운 숲에서 방향을 잃고 제자리를 빙글빙글 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우린 길을 잃은 게 아니잖아? 여긴 우리가 잘 아는 영주님 숲이야!‘
“그런데 왜 못 나가는 거야?‘
“혹시 마법이 아닐까? 아니면 저주?”
로벨도 심각하긴 마찬가지였다. 두 갈래 밤나무에 X 표시를 추가했다. 벌써 네 번째 표시였다.
“적어도 꼬마와 울프 용병단이 왜 사라졌는지는 알았네.”
“허억! 그럼 저희도?”
“그런 것 같아.”
로벨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무 위에 별이 촘촘한 밤하늘이 걸려 있었다.
“여기 올라가서 시야를 확보할 수 있을까?”
“그야 가능은 하지만...”
사냥꾼 찰드는 하늘 같은 영주님의 눈치를 한번 보고 말했다.
“지금은 어두워서 위험합니다요.”
“그래? 그럼 아침까지 보류하자.”
로벨은 다른 방법을 고심했다. 숲에서 굶어 죽을 생각은 없으니, 최악의 경우 불을 지르는 것까지 고려했다.
“저기, 영주님, 이거 혹시 마, 마법입니까요?”
“글쎄.”
“영주님은 마녀를 부리잖습니까. 마법을 깨트릴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사냥꾼 삼부자가 희망에 찬 얼굴로 보았다. 로벨은 심히 부담되어 시선을 피했다.
“마법인지 아닌지 아직 몰라.”
로벨이 불분명하게 말하자 사냥꾼 찰드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럼 누구 짓인지도 모르는군요.”
“그건 알 거 같아.”
로벨은 밤나무 껍질을 만지며 말했다.
“늑대의 왕, 뱀파이어의 군주, 마도의 수호자라 자칭하는 족속들 짓이야.”
“족속이라니! 너무해!”
로벨은 크로스보우를 겨드랑이에 끼고 방향을 돌렸다. 사냥꾼 찰드와 그 아들들이 세월을 역행한 것이 아닌 이상, 저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누구냐!”
로벨은 굵은 떡갈나무 가지 위에서 발을 동동 굴리는 존재를 보았다.
크기는 성인 남자의 팔뚝만하고, 금가루를 뿌린 것처럼 반짝이는 날개가 있었다. 옷을 입지 않았지만, 외형만으로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검은자위만 가득한 두 눈에 호기심을 담고 로벨과 사냥꾼 삼부자 내려다보았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시각에서 인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로벨은 주저 없이 방아쇠를 쥐었다.
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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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를 떠난 쿼럴은 밤공기를 가르며 날카로운 파공음을 냈다.
초속 300피트로 발사된 쇠촉은 눈 깜짝할 사이 거리를 지우고 '그것'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로벨은 자신의 사격솜씨를 책망하지 않고, 표적이 너무 작다고 불평했다.
“칫.”
‘그것’은 멍하니 있다가 쿼럴이 숲 저편으로 사라진 뒤에야 나무 뒤에 숨어 호들갑을 떨었다.
“와악! 쐈어! 정말 쐈어! 너무해! 너무해!”
로벨은 오두방정이 너무하다 생각하며 사냥꾼 찰드에게 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사냥꾼은 하얗게 질려서 활시위를 당기지 않았다.
“요정... 요정왕... 오벨론...”
로벨과 달리 사냥꾼은 저 꼬마를 잘 아는 듯했다. 로벨은 미안한 감정을 담아 슬쩍 물었다.
“친구야?”
“그, 그럴 리가요! 저건, 아니, 저분은 숲을 지키는 신령한 요정의 왕입니다요! 절대 사악한 것이 아닙니다요!”
로벨은 복잡한 얼굴로 요정과 사냥꾼을 번갈아 보았다.
“늑대의 왕하고 다른 거야?”
“늑대의 왕을 알아?”
요정왕이 밤나무 줄기 옆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물었다. 로벨은 아무래도 잘못 짚었다고 생각했다. 저런 꼬마 요정을 무자비한 늑대의 왕이나 음흉한 뱀파이어 군주와 동일시하기 어려웠다. 로벨은 크로스보우를 내리고 말했다.
“몇 번 부딪쳤어.”
“그 싸움꾼이랑 싸우고 살아있다고? 너 보기보다 대단한 꼬마구나?”
로벨은 세상에 어떤 꼬마보다도 작은 꼬마 요정왕에게 꼬마 소리를 듣자 웃음이 나왔다. 요정왕은 그러거나 말거나 혼자 말하고 혼자 납득했다.
“음. 음. 그래서 다짜고짜 쇠덩이를 날렸구나. 늑대의 왕을 만났으면 그럴만하지. 우리가 나쁜 놈처럼 보일 거야. 암.”
“우리?”
“우리 마도의 수호자 말이야.”
로벨은 크로스보우를 올렸고, 요정왕은 재빨리 나무 뒤에 숨었다.
“쏘지 마! 쏘지 말라고! 난 평화주의자야! 러브 앤 피스! 몰라?”
“...몰라.”
“하여간! 인간들은 예나 지금이나 이후로나 항상 야만적이라니까!”
아쉽게 크로스보우가 장전되지 않아 야만성을 자랑할 수 없었다. 로벨은 대거를 던져볼까 고민하다가 보류했다.
“우리를 숲에 가둔 게 너야?”
“내가 하긴 했는데, 의도한 것은 아니야! 오해하지 마!”
로벨은 대거 손잡이를 고쳐 쥐고 말했다.
“뱀파이어 군주가 아니었구나.”
“뱀파이어의 왕도 알아?”
요정왕은 눈을 반짝였다. 생긴 것만큼이나 호기심이 많아 보였다.
“주름이 없는 거 봐서 나이가 많지 않은데, 우리 수호자를 참 많이 만났네?”
“그러게... 왜 자꾸 내 앞에 나타나는 거지?”
로벨도 정말 궁금했다. 요정왕은 깔깔 웃었다.
“가끔 있어. 인과의 테두리에서 통통 튀어 다니는 사람. 난 그런 사람을 많이 봤어. 샘 포클, 넥스 네일, 오르크 파우스트, 알비니티 본드...”
로벨은 이해 못 할 소리에 관심두지 않았다. 대거를 만지작거리며 제안했다.
“우리를 내보내 줘.”
“내가 숲을 떠나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내 용병들도?”
“물론이지.”
“그럼 빨리 떠나.”
로벨이 으르렁거리자 요정왕은 떼쓰듯이 말했다.
“정말 너무해! 내가 이래 봬도 숲지기와 아이들의 수호자로 존경받는 반신(半神)인데!”
“난 숲지기가 아니고, 아이도 아니야.”
요정왕은 콧소리를 조금 냈다.
“내 눈에는 어린아이야. 늙은 인간 흉내 낼 거면 주름살부터 몇 개 그려봐.”
자신이 초월적인 존재임을 과시하는 듯한데, 나무 뒤에서 머리만 쏙 내밀고 말하니 위엄이 없었다.
요정왕은 나무줄기 뒤에 숨었다가 반대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늑대의 왕하고 싸울 정도면, 나이가 어려도 재주가 있는 거지?”
“응.”
로벨은 겸손 따위 치우고 담백하게 고백했다. 요정왕은 알기 쉬워서 좋아했다.
“그럼 너한테 줄게.”
“뭐를?”
“음... 북쪽으로 조금 더 가면 800살 먹은 떡갈나무가 있어. 이 숲을 만든 어르신 나무야.”
“나무를 준다고?”
“아니야! 그 나무줄기를 잘 보면 갈라진 틈이 있을 거야. 처음부터 갈라진 것은 아니고, 떡갈나무가 자라면서 그 자리에 꽂혀있는 칼을 집어삼킨 거야, 정말 신기하지 않아? 식물의 생명력은 정말 대단해! 운페르드도 그렇게 될 줄 몰랐을 거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어? 그러게?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
“...나한테 묻지 마.”
로벨은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를 합친 것 같은 요정왕 때문에 머리가 아파왔다. 요정왕은 한참 동안 중얼거리다가 겨우 처음으로 돌아왔다.
“아! 맞아! 그 떡갈나무 속에 칼이 있어!”
“칼?”
“흐룬팅(Hrunting). 요정의 검이라 불리는 무기야. 요정이 만든 것도 아니고, 요정이 쓸 수도 없는데, 왜 요정의 검이라 불리는지 의문이야. 왜지? 왜일까?”
“...나한테 묻지 말라니까.”
요정왕도 정답을 기대하지 않은 듯했다. 로벨이 대거에서 손을 떼자 슬그머니 나무줄기 밖으로 나왔다. 로벨은 경계를 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대하지 않았다. 저 꼬락서니를 보고 적대심을 갖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 말해. 내 숲에 무슨 볼일이지?”
“나도 몰라.”
“모른다고?”
“요정에게는 시간과 공간이 의미가 없어. 너희 인간들은 시간의 흐름에 일방적으로 몸을 맡기고 정해진 공간에서만 살아가지만, 우리 요정에게는 시간과 공간은 아무 의미가 없어. 너와 만난 것도 나에게는 먼 미래일 수 있고, 먼 과거일 수 있어.”
“이해가 안 되는데.”
“음음. 인간은 이해할 수 없을 거야. 평면 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는 높이의 개념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그럴 거야.”
로벨은 요정왕의 말을 기억해두었다. 똑똑한 어린 집사나 마녀 키르케에게 물어보면 쉽게 설명해줄 것 같았다.
“너희가 숲에 갇힌 것도 그래서야. 미안해. 하지만 난 이곳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이제 먼 곳으로 갈 거야. 아, 여기서 멀다는 개념은 거리개념이 아니라 시간개념인데, 이게 좀 상대적인 표현이라 사실은 그리 멀지 않을...”
로벨은 다른 것을 빼고 간다는 것에 집중했다.
“빨리 가!”
요정왕은 혀를 낼름거리고 다시 나무줄기 뒤로 쏙 숨었다. 로벨과 사냥꾼 삼부자는 나무줄기 반대쪽을 보았다. 그곳에서 다시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요정왕은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라졌네?”
“사라졌어.”
“사라졌다!”
사냥꾼 삼부자는 누가 부자지간 아니랄까봐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로벨은 화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풍경은 달라진 것이 없지만, 솜털을 곤두세우는 이질감이 사라졌다. 사냥꾼 찰드가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요정왕을 실제로 볼 줄이야.”
“아부지, 꿈을 꾼 것 같아요.”
로벨은 밤나무에 새겨넣은 X 표시를 확인했다.
“꿈이 아니야.”
나무껍질에 새겨넣은 표시가 하나하나 달랐다. 어떤 것은 수십 년 전에 새겨 넣은 것처럼 풍화되었고, 어떤 것은 방금 칼질한 것처럼 또렷했다.
“요정의 숲에서 하룻밤 놀고 집에 가니 백 년의 세월이 지나있었다는 동화가 있지?”
“예예. 요정왕의 이야기 중 하나입지요.”
“우린 하루를 보내지 않았으니까, 괜찮겠지?”
로벨의 말에 사냥꾼 삼부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숲지기 오두막으로 달려갔다.
요정왕이 사라진 탓인지 더 이상 숲 속을 헤매지 않았다. 숲지기는 숨을 헐떡이며 찾아온 로벨 일행을 보고 물었다.
“어? 영주님? 벌써 오십니까?”
“벌써?”
“계속 이 앞을 돌아다니지 않으셨습니까? 저녁이라도 드시라고 그리 소리쳤는데요. 못 들으셨습니까요?”
로벨은 시간과 공간이란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잠시 뒤 허풍쟁이 제이콥 일당이 나타났을 때 좀 더 확신할 수 있었다.
“우와악! 2시간밖에 안 지났는데 완전 밤이 되었잖아?”
“여름치고 해가 너무 짧지 않아?”
로벨은 너희들이 출발한 지 8시간이 지났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라진 마을 꼬마가 겁먹은 얼굴로 변명했기 때문이다.
“저, 저 잡으려고 오신 거예요? 전 그냥, 그냥 버섯만 따고 나가려고 했어요. 정말이에요. 해가 진 줄 몰랐어요!”
로벨은 허풍쟁이에게 크로스보우를 넘겨주고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 요정의 장난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