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재판
57화. 재판
로벨은 홀로 성에 남았다.
메인 홀 구석구석에 고인 어둠과 창틈으로 스며드는 바람과 그 사이에서 춤을 추는 횃불이 모두 낯설게 느껴졌다.
어린 집사 끝없는 잔소리, 마녀 키르케의 실없는 농담, 아야와 이야카의 하울링,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의 호탕한 웃음 등 익숙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버릇이 된 건가?’
로벨은 ‘외로움’이 익숙하지 않았다.
필립 로드릭의 사망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는 늙은 집사가 위로해 주었고, 로벨 로드릭이 침실에서 목을 맸을 때는 어린 집사가 옆에 있었다. 전쟁을 치를 때는 펄프 대장이 있었고, 골치 아픈 일이 생겼을 때는 마녀 키르케가 있었고, 심심할 때는 아야와 이야카가 있었다.
‘내일은 뭐 하지?’
어릴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지만, 기사가 되고 영주가 된 지금은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로벨은 보리빵을 삶은 보리죽을 후루룩- 마시고 침실로 올라갔다. 어린 집사가 쫑알거리지 않고, 아야와 이야카가 따라오지 않아 이상했다.
로벨은 롱소드를 머리맡에 세우고, 대거를 베개 밑에 넣은 후 결혼세로 진상 받은 양털담요 위에 누었다.
‘그러고 보니 소송건이 있었지?’
영지민 사이의 분쟁은 대개 촌장이 해결하고, 촌장이 해결하지 못할 소송은 어린 집사가 영주 대리인으로 해결했다. 보통 때라면 신경 쓰지 않겠지만, 홀로 남은 고독감 때문인지 일을 찾아서라도 하고 싶었다.
‘내일은 촌장을 만나야겠다.’
로벨은 할 일이 생기자 뿌듯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밤을 깊고 적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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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로벨은 아침훈련과 아침식사를 평소보다 일찍 끝내고 전투마를 챙겨 로드릭 마을로 내려갔다.
영지민은 아침이 밝자마자 양젖을 짜고, 보리를 빻고, 장작을 패며 바쁜 일과를 시작했다. 로벨은 참 부지런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한 덩이의 보리빵을 위해서 하루 종일 일해야 하는 것이 농민의 삶이었다. 하루를 쉬면 이틀을 굶어야 하고, 이틀을 쉬면 나흘을 굶어야 했다.
“오오! 영주님!”
“이 시간에 어인 일로...”
로벨이 나타나자 영지민은 일손을 놓고 굽신거렸다. 수탈을 부리지 않고, 노역을 시키지 않고, 정해진 세금만 딱딱 걷어가는 로벨은 이상적인 영주님이었다. 한 달에 한두 번씩 까칠하게 굴 때가 있지만, 보통은 무신경한 듯 자상했다.
“촌장은?”
“집에 있을 겁니다.”
“그래?”
로벨은 일하라고 손짓하고 촌장의 집으로 전투마를 몰았다. 어미 양의 젖을 짜는 동안 새끼 양과 놀아주는 어린아이들이 졸졸 따라왔다. 기사와 말과 아이들과 새끼 양이 행렬을 이루고 마을을 가로질렀다.
늙은 촌장은 기이한 일당에 웃음을 참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My Lord, 시찰이십니까?”
“아니.”
로벨은 전투마에서 내려 앵무새처럼 “영주님! 영주님!” 외치는 꼬마의 까치집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장갑을 적신 머릿기름과 구정물을 내려다보았다.
“이놈들아! 영주님이 네놈들 친구더냐! 혼나고 싶지 않으면 저리 가!”
촌장이 나이답지 않게 버럭! 소리쳤다. 꼬마들은 “와아!” 소리 내며 왔던 길로 달려갔다. 영문을 모르는 새끼 양도 “음메에에-!” 울며 망아지처럼 폴짝폴짝 뛰어 꼬마들을 따라갔다.
“저 철부지들을 대신해 용서를 빕니다. 영주님이 잘 대해주시니 예의가 없어져서...”
“괜찮아. 어리잖아.”
저 꼬마들에게 로벨은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멋진 기사, 그러니까 왕을 지키기 위해 괴물과 싸우거나, 공주를 구하기 위해 사악한 용을 무찌르는 수준의 기사였다. 세월이 지나서 나이를 먹고 머리가 굵어지면 기사와 귀족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들인지 알게 될 테고, 그리되면 지금의 어른들처럼 로벨을 어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로...”
“어린 집사가 없어서.”
로벨은 전투마를 촌장집 처마에 묶고 어리둥절한 촌장을 돌아보았다.
“오늘 처리할 재판이 있지?”
촌장은 깜짝 놀라 주름살에 잠긴 눈을 치켜떴다.
“재, 재판이요?”
“왜?”
“아, 아닙니다. 그냥 놀라서, 아니, 의외라서...”
영주는 재판권을 가진 사법 책임자로 영지민의 분쟁을 해결할 의무가 있었다. 담장 위의 계란이 누구 계란인지 판결하는 일부터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를 교수형에 처할지 투석형에 처할지 판결하는 일까지 다양했다. 물론, 공사다망한 영주에게 계란 시비를 가려달라고 요청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대개의 경우 촌장선에서 해결하였다. 다시 말해, 로벨에게 올라오는 소송은 크고 중요한 재판이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어린 집사가 올 때까지 며칠 미뤄도 됩니다만...”
“나 못 믿는 거야?”
“아닙니다. 아닙니다. 어찌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럼 시작하자.”
로벨은 ‘시작하자’ 말하고 멀뚱멀뚱 기다렸다. 촌장은 젊은 영주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의심하면서도 일단 비위를 맞추었다. 사위와 딸을 불러와 집을 청소하고, 가장 좋은 의자를 준비해서 재판장을 만들었다.
보통은 성으로 불러와 해결하거나 구두로 보고받고 판결해서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하지 않는데, 영주가 직접 찾아와 재판한다고 하니 격식을 갖춰야 했다.
로벨이 이빨 빠진 롱소드를 손질하고, 전투마의 갈기를 빗겨줄 동안 준비가 끝났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로벨은 어깨를 으쓱이고 촌장집에 들어갔다. 세간살이를 몽땅 치워서 꽤 넓어 보였다.
“사람들을 불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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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장의 우려와 달리 로벨은 공정하고 명확하게 판결을 내렸다.
“토지분배는 이미 끝난 일이야. 가족이 늘었다고 다시 분배할 수 없어. 곡식이 모자라면 품을 팔도록 해. 사냥꾼과 숲지기의 일을 도울 수 있도록 조치해.”
“Yes, My Lord.”
“다음.”
로드릭 마을에 새로 온 목동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곁눈질로 눈치 보며 말했다.
“소를 먹이기 위한 건초가 필요한데 나눠주지 않습니다.”
“목초지의 풀로 부족해?”
“풀만 가지고 배불리 먹이기가 어렵습니다.”
로벨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목동이 돌보는 소들은 영지의 귀한 자산이야. 방앗간 관리인은 목동이 필요한 건초를 모아서 주도록 해.”
불만이 없을 수야 없지만, 이치에 잘 맞았다. 사실 이치에 안 맞아도 감히 토를 달 수 없으니, 로벨의 판결이 곧 진리고 이치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명확할 수 없었다. 목동과 방앗간 관리인이 나가고, 비루한 농부가 들어왔다.
“제 아들이 사라졌습니다. 영주님, 자비로운 영주님, 제 아들을 찾아주세요.”
로벨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재판이 아니라 요청이었다. 촌장이 지팡이로 땅을 탁탁! 두드리고 말했다.
“그 일은 우리가 해결하기로 했지 않은가.”
“어느 세월에 말입니까! 아들놈이 사라진 지 벌써 이틀이 지났습니다. 촌장님은, 촌장님 손녀딸이 사라졌을 때는 그리...”
“어허! 영주님 앞이다!”
촌장은 호통을 치고 로벨의 눈치를 살폈다. 로벨은 의자등받이에서 몸을 떼고 롱소드 손잡이를 어루만졌다. 촌장을 비롯한 영지민들은 바짝 긴장했다.
“이틀이 지났다고?”
“예, 예, 영주님.”
“그동안 찾지 않았어?”
촌장이 로벨 앞으로 한 걸음 나와 해명했다.
“장정들을 동원해서 마을 주변을 구석구석 찾아봤습니다만, 보이지 않는 것이...”
“숲은?”
“숲지기 토드에게 부탁했습니다. 허나 숲에 들어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으니 숲에 있을 리 없습니다.”
로벨은 아야와 이야카를 떠올리며 말했다.
“어른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만 있는 게 아니잖아. 마을에 없으면 숲일 거야. 용병들을 시켜서 찾아볼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농부는 넙죽넙죽 절했다. 로벨은 허풍쟁이 제이콥 이하 울프 용병단을 불러서 북쪽 숲을 수색케 했다. 그리고 오후까지 남은 소송을 해결했다.
‘어린 집사가 알면 깜짝 놀라겠지?’
로벨은 보람찬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촌장과 늦은 점심을 먹었다. 어린 집사가 돌아오면 큰소리 칠 생각에 기분이 몹시 좋았다. 그러나 진짜 사건은 오후 늦게 시작되었다.
로벨이 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전투마 고삐를 풀 때였다. 사냥꾼 찰드와 숲지기 토드가 찾아와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영주님, 숲에 들어간 용병들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뭐?”
로벨이 얼굴을 찌푸리자 숲지기는 어려운 말을 하듯 띄엄띄엄 설명했다.
“길을 잃거나, 엇갈릴 수 있으니, 2시간마다 연락하기로 했는데,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로벨은 허풍쟁이 제이콥이 데려간 울프 용병단 숫자를 떠올렸다. 무려 스무 명이 넘었다.
“한 명도?”
“예.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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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즉시 성으로 돌아가 아밍 더블릿으로 갈아입고 컴포지트 아머를 착용했다. 어린 집사가 없어서 몇몇 파츠는 입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 사이 사냥꾼 찰드 삼부자가 준비를 마치고 찾아왔다.
“여, 여, 영주님! 저, 저희들 왔습니다!”
로벨은 롱소드와 대거와 허풍쟁이 제이콥이 놓고 간 크로스보우를 챙겼다. 숲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지만, 무기가 많아 손해 볼 일은 아닐 것이다.
“저희도 꼬, 꼭 가야합니까요?”
사냥꾼이 불안한 듯 눈알을 굴렸다. 로벨은 크로스보우 시위를 당겨 어깨에 메고, 쿼럴통을 소드벨트에 묶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 대답했다.
“응.”
사냥꾼 찰드는 한숨을 쉬고 숏보우와 화살을 준비했다. 무시무시한 용병들도 소리 없이 사라진 마당에 사슴이나 잡는 조잡한 사냥용 활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반면 아버지와 달리 용기가 많은, 혹은 젊은 치기가 넘치는 두 아들은 흥분해서 떠들었다.
“늑대? 곰? 혹시 고블린이나 트롤 같은 괴물일까요?”
“저번에 나온 오크일지도 몰라!”
“그럼 좋지! 데니의 복수를 해줄 테다!
로벨은 가상의 오크와 싸우기 시작한 두 아들들을 보며 괜히 데려가나 생각했다. 하지만 숲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너희는 길만 안내해.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도망쳐.”
“그럴 수 없습니다! 함께 싸우겠습니다!”
“그럴 수 있을 거야. 가자.”
로벨은 겁쟁이와 철부지의 사냥꾼 삼부자를 이끌고 북쪽 숲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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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 찰드는 사냥꾼답지 않게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며 주위 사람을 불안하게 했다. 그러나 사냥꾼의 경험과 직감은 충분히 쓸모가 있었다.
“영주님, 조금 있으면 해가 떨어집니다요. 조급해도 절대 깊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
“꼬마와 용병들이 위험한데도?”
“영주님이 위험해지는 것보단 낫습니다요.”
로벨은 동의하지 않았지만, 구태여 반대하지도 않았다. 크로스보우의 쿼럴을 하나 골랐다.
저녁의 숲은 똑같은 명암이라도 아침의 숲보다 음침했다. 어둠과 밤은 서로 맞닿아 있기 때문일까.
로벨은 숲길을 걷다가 낯선 느낌을 받았다. 사냥하러 종종 지나다닌 길인데도 난생 처음 방문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 기이한 감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졌다. 로벨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여기, 우리 숲 맞지?”
“그럼요.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니, 그냥.”
로벨은 잡목이 우거지자 전투마에서 내려 고삐를 끌며 이동했다. 비가 오지 않아 바짝 마른 땅이 기분 나빴다. 밤공기가 차가운 탓인지 종종 솜털이 곤두섰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는데...’
로벨은 그림자가 짙어지기 시작한 나무들을 보며 생각을 더듬었다.
“이보시오! 아무도 없소?”
“용병 나리들! 어디 있어요!”
사냥꾼 찰드 삼부자가 목청껏 소리쳤다. 우렁찬 목소리가 나무 사이로 메아리치며 멀리멀리 울려 퍼졌다. 로벨은 메아리를 감상하다가 불현듯이 깨달았다.
“뱀파이어 군주 드라카?”
성에 아무도 없던 날 찾아온 불청객. 늑대의 왕과 똑같은 마도의 수호자. 뱀파이어의 왕을 만났을 때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