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위엄
56화. 위엄
로벨은 새 영지민과 함께 뉴 로드릭 마을을 방문했다. 하몬 남작의 흑마법으로 폐허가 된 곳이지만, 펄프 대장, 외팔이 더치, 그람 형제 등이 애를 써서 사람 사는 곳으로 바꿔가고 있었다. 물론, 언덕 위에 잿더미 성과 숲 속에 구울은 여전했다.
“좋아.”
로벨은 건초를 올린 지붕과 도랑을 파낸 텃밭을 둘러보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러고 보면 로벨의 영지도 상당히 커졌다. 로드릭 마을 400명과 뉴 로드릭 마을 300명을 합쳐서 영지민이 총 700명이 되었다. 그와 더불어, 채굴량이 대단하지는 않아도 꾸준히 수익을 내는 소금광산과 유지비는 다소 부담스럽지만 유사시 밥값 하는 울프 용병단이 있으니, 이만하면 로벨 로드릭 남작의 위엄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에헴!”
마녀 키르케가 실실 웃으며 전투마 옆에 붙었다. 로벨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이상한 행동이라 그러려니 하고 무시했다
“에헴! 에헴!”
마녀가 연신 헛기침했다. 헛기침 횟수가 늘어날수록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로벨은 작게 한숨을 쉬고 마녀를 불렀다.
“할 말 있어?”
마녀는 손가락을 딱! 튕기고 말했다.
“숲 속에 구울이 돌아다니잖아요?”
“응.”
“숲은 아주 넓으니까, 펄프 대장이랑 외팔이 괴물이 암만 열심히 해도 다 잡기 힘들잖아요?”
“응.”
“그럼 아야랑 이야카를 데려다가 구울을 잡으면 어떨까요?”
“응... 응?”
로벨은 마녀 키르케가 간만에 정상적인 의견을 내놓아 깜짝 놀랐다. 늑대 코는 사전의미 그대로 개 코라, 구울 냄새, 정확히는 시체 썩는 냄새를 찾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아야와 이야카는 생긴 것과 달리 겁이 많았다.
“걔네가 말을 들을까?”
“제가 따라다니면 말을 들을 거예요!”
로벨은 펄프 대장과 의논하기로 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축사가 덜 지어져서 말과 양과 소가 한곳에 모여 있었다. 큰 덩치만큼이나 과묵한 농마에 비해 뿔 달린 짐승들은 쉴 새 없이 투레질했다.
“알았다! 알았다고! 조금만 기다려!”
어린 집사의 또래쯤 될까. 머리가 제법 굵은 사내아이가 자기 키만 한 건초 꾸러미를 안고 임시 축사로 다가왔다. 로벨은 전투마에서 내려 건초를 받아주었다.
“아! 고맙습... 히익! 영주님!”
로벨은 건초를 여물통 위에 올리고 대거를 뽑아 새끼줄을 끊었다. 배고픈 소과(科) 짐승들이 우르르 몰려와 건초 더미를 헤집었다.
“그거 그렇게 주면 안 되는데...”
사내아이가 머뭇거리다가 로벨이 돌아보자 찔끔해서 고개를 숙였다. 어른스러운 어린 집사를 보다가 보통의 어린 아이를 보자 느낌이 새로웠다.
마녀 키르케가 몸을 옆으로 기울여 고개 숙인 사내아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 아이들을 혼자 돌보나요?”
“아앗!”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어서 놀란 걸까, 사내아이는 얼굴을 붉히고 뒷걸음쳤다. 마녀는 눈을 껌벅이며 다시 다가갔다.
“어디 아파요?”
사내아이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니, 그, 아니라, 나는...”
“얼굴이 이상해요. 열이 나나?”
사내아이는 어쩔 줄 모르고 계속 뒷걸음질하다 쇠스랑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마녀가 깜짝 놀라 손을 내밀었다.
“어어? 괜찮아요?”
“괘, 괜찮아요!”
사내아이는 큰 소리로 대답하고 후다닥- 도망쳤다. 마녀는 왜 저러나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도망가죠? 내가 뭘 잘못했나요?“
로벨은 순수하다 못해 순진한 마녀가 어이가 없었다.
“정말 몰라?”
“예... 모르겠어요.”
로벨은 사춘기 소년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마녀를 위해 친절히 가르쳐주었다.
“아이들은 마녀를 무서워하거든. 동화를 보면 마녀가 자주 괴롭히잖아.”
“아! 그렇군요?”
마녀는 자신의 꼬뜨를 내려다보고 풀이 죽었다. 로벨은 마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넌 좋은 아이니까, 언젠가 좋아하게 될 거야.”
“그럴까요?”
“응. 그럴 거야.”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고, 마녀는 배시시 웃으며 좋아했다. 그리고 전투마는 건초를 우물거리며 주인과 주인의 친구를 한심하게 곁눈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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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임시 축사를 시찰하고 김매기가 한참인 추경지로 향했다. 로드릭 마을 출신과 깁스 마을 출신이 뒤섞여서 어찌되나 걱정했는데, 일손이 부족한 탓인지, 아니면 구울이 출몰하는 탓인지 텃세를 부리거나 파벌을 만들지 않았다. 펄프 대장과 그람 형제의 노력도 상당 부분 있었다.
“어이구! 어이구! 영주님 오셨습니까!”
나이는 많지만 키가 작은 땅딸보가 손을 싹싹 비비며 다가왔다.
“지낼 만해?”
“간밤에 구울 한 마리가 나오긴 했지만, 생각보다 괜찮습니다. 저희 집이 없어서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며 자지만, 그래도 살만합니다.”
로벨은 빈말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좋아했다.
“살만하니까 다행이야.”
땅딸보는 고개를 돌리고 “칫!” 소리를 냈다. 멀대가 땅딸보를 걱정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추경지 면적으로 올해 소득을 예측해봤습니다. 에... 호밀보다 귀리가 2배 더 많은데요, 가격으로 따지면 호밀이 1.3배라...”
“어린 집사랑 이야기해.”
로벨은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자 딱 자르고 관심을 텃밭으로 돌렸다. 그람 형제는 경제에 무지한 영주들을 자주 봐왔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래도 로벨은 경제를 모르면서 욕심만 많은 대다수 영주보다 나았다.
“사람 수가 늘어난 만큼 의견을 조율할 촌장이 필요합니다. 펄프 대장이 비슷한 일을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용병이라 영지민과 어울리지 못합니다.”
“그건 걱정 마. 오늘 온 사람 중에 촌장이 있어.”
“오오! 역시 일 처리가 빠르십니다요!”
깁스 마을 촌장이 따라온 것은 그냥 우연이지만, 로벨은 그람 형제의 칭찬이 싫지 않아 어깨를 으쓱였다.
로벨은 내친김에 수염 풍성한 깁스 마을 촌장을 뉴 로드릭 마을 촌장(Elder)으로 임명하고 금화 세 닢을 하사했다. 그리고 휴경지에서 군사훈련 중인 펄프 대장을 찾아갔다.
뉴 로드릭 마을의 주둔병력은 울프 용병단 12명과 전(前)헤르만 백작군 13명을 합쳐서 총 25명이었다. 기본 편제는 풋맨이지만, 펄프 대장의 명령으로, 정확히는 로벨의 취향으로 크로스보우 사격을 자주 훈련했다.
“My Lord, 시찰 중이십니까?”
펄프 대장은 허수아비에 꽂힌 쿼럴을 주워오라고 시키고 냉큼 다가왔다. 영주이자 물주에 대한 예의를 잘 아는 베테랑 용병이었다.
“어젯밤 구울이 나왔어?”
“예. 그래도 거의 소탕해서 출몰이 뜸해졌습니다.”
“하몬 마을 인구가 450명이야. 성에서 불태운 구울이 100마리 남짓이고. 그러니까 남은 구울이...”
세 자릿수 사칙연산이라 약간 시간이 필요했다.
“300마리에서 350마리야. 어린 집사 말대로 영지민이 전부 구울이 된 것이 아니라 해도 아직 많이 남아 있어.”
“틈틈이 순찰하면서 숫자를 줄여가고 있습니다.”
로벨은 훈련이 빡세다고 구시렁거리는 전 헤르만 백작군을 보며 물었다.
“어때?”
“이 바닥에서 몇 년씩 구른 놈들이라 기본기는 잡혀 있습니다. 우리식으로 길들이는 중입니다.”
“우리식?”
“‘진짜’ 싸우는 울프 용병단 방식 말입니다.”
마녀 키르케가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었다.
“그럼 가짜로 싸우기도 해요?”
“그야 물론이오. 용병단끼리 싸울 때는 종종 싸우는 ‘척’만 할 때가 있소.”
“와! 직무태만!”
“뭐, 열심히 싸운다고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전쟁이 끝나면 돈벌이가 사라지잖소. 세상사는 지혜라고 불러주시오.”
로벨도 용병들의 작당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도 모든 용병단이 꼼수부리는 것은 아니라, 울프 용병단처럼 정직, 성실, 신용을 보여주는 용병단도 있었다. 동종업계 종사자에게는 눈치 없고 배려 없는, 그래서 무서운 용병단이었다.
“키르케가 제안한 것이 있는데, 구울 사냥에 아야와 이야카를 쓰면 어떨까?”
“늑대들을? 괜찮은 생각 같습니다. 그런데 그놈들이 말을 듣겠습니까?”
로벨이 한 말과 똑같아서 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실없이 웃었다.
로벨은 젊은 촌장, 그람 형제, 그리고 펄프 대장을 한곳에 모아 농사일과 마을재건을 당부하고, 추가로 필요한 것이 있는지 물었다. 네 사람은 필요한 것이 참 많았으나, 차마 달라고 할 수 없었다.
로벨은 영주님 은혜가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는 입 발린 찬양만 조금 들은 후 귀갓길에 올랐다. 그래도 영지민 모두가 가식적이진 않았다. 자기 땅을 가지게 된 뉴 로드릭 마을 농민들은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로벨은 신난 마녀와 지친 허풍쟁이를 데리고 로드릭 성으로 향했다.
“이제 좀 쉴 수 있겠습니다요.”
“이틀간 고생했어. 성에 가면 약속대로 휴가와 성과금을 줄게.”
허풍쟁이는 성과금이란 말에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성안에 도사리는 무시무시한 소악마를 떠올리고 재빨리 제안했다.
“그 성과금이란 거 미리 주실 수 없습니까요?”
“왜?”
“성에서는 받기가 좀 힘들 것 같아서... 그 뭣이냐... 까다롭고 까칠하고 껄끄러운 꼬마가 있잖습니까.”
“어린 집사요?”
“전 누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로벨은 안장주머니를 뒤적이다가 아차! 하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가진 돈은 전부 젊은 촌장 줬는데.”
“금화 세 닢이요?”
“응.”
“하아...”
허풍쟁이는 다시 지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로벨 역시 어린 집사의 잔소리를 들을 생각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린 집사 성격상 땅을 준 거로 충분한데 왜 금화까지 주었냐고 펄펄 뛸 것이 분명했다. 한 마을을 구원하고, 수백 명의 사람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지만, 어린 집사 앞에서는 모두 부질없었다.
어두운 숲길을 지나고 구불구불한 초원길을 지나서 로드릭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에 오를 때 해가 저물었다.
노을이 사그라진 보랏빛 하늘로 부지런한 샛별들이 촘촘히 떠올랐다.
“와! 날씨 좋다!”
“보통 아침에 하는 말 아니오?”
“아침 하늘보다 저녁 하늘이 이쁘잖아요.”
로벨은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긍정했다.
“그러네.”
로벨은 칭얼거리는 전투마를 가볍게 두드려 언덕길을 내려갔다.
달빛과 별빛과 기사와 소녀와 말 한 마리가 조용히 언덕을 넘어갔다. 샛별의 축복인지, 일몰의 마법인지, 이상할 만큼 몽환적인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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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어린 집사는 일개 촌장 따위한테 무슨 30페닝이나 주냐고 버럭 화를 내었다. 로벨은 먼 곳에서 왔으니까, 집이 부실하니까, 사람들을 챙겨야 하니까 등등의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 덕분에 허풍쟁이 제이콥의 성과금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허풍쟁이는 자정까지 눈치를 보다가 결국 포기하고 눈물 흘리며 야영지로 복귀했다. 노스폴드 시티의 술집을 호령하는 장쾌한 휴가는 기약 없이 미뤄질 듯했다.
“그래도 영지민을 데려온 것은 잘했어요.”
“그, 그렇지?”
로벨은 활짝 웃었다. 어린 집사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영지민이 자급자족하려면 300명은 되어야죠. 흐음. 정확한 호구조사를 위해 제가 한번 다녀와야겠어요. 사양의 미덕을 모르는 깁스 마을 출신 촌장도 만나야겠구요. 암만 영주님이 주신 거라지만, 3페닝도 아니고 30페닝을 그냥 꿀꺽해? 상식이 있는 사람이야?”
“그러지마...”
로벨은 어린 집사를 말리면서 젊은 촌장에게 속으로 사과했다. 그리고 깜박한 이야기를 마저 했다.
“키르케도 다시 갈 거야.”
“마녀 아줌마가요? 왜요?”
“아야랑 이야카를 데려가려고.”
로벨은 마녀 키르케가 제안한 구울 사냥 이야기를 했다. 어린 집사는 식충이들을 써먹을 수 있다며 좋아했다. 로벨은 두 사람과 두 마리의 일정을 짜주었다.
“허풍쟁이... 아니, 애꾸눈 볼포스를 붙여줄게. 천천히 다녀와.”
“아...”
어린 집사는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럼 영주님 혼자 남잖아요?”
“그게 왜?”
“영주님은 혼자 두기가 좀 불안해서...”
어린 집사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로벨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내가 애야?”
“애보다 더하죠. 애들은 최소한 금화를 뿌리고 다니지 않는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