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5화 (55/605)

55화. 감당

55화. 감당

로벨은 구울의 머리를 자르고 가슴을 발로 찼다. 머리 잃은 구울은 두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쓰러졌다. 마녀 키르케는 꼬뜨 자락을 잡아채며 비명인지 고함인지 헷갈리는 소리를 질렀다.

“히이잉! 일이 너무 커졌어요! 기사님답지 않아요!”

“나도 조카를 제물로 쓸 줄 몰랐어...”

“조카를 이단심문관한테 팔아넘기는 사람인데요?”

“그래도... 설마했지...”

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100마리가 넘는 구울떼를 바라보며 복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한편, 허풍쟁이 제이콥이 메인 홀에서 깁스 자작의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머리를 잘라! 머리를 잘라야 끝이 난다! 머리를 치라고!”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깁스 성(keep)안에는 머리를 자를 만큼 크고 날카로운 무기를 가진 병사가 많지 않았다. 더욱이 농사가 싫어서, 혹은 굶는 게 싫어서 용병 흉내 내는 농민병이 대부분이라 무기 다루는 기술이 부족했다. 느리고 멍청한 구울이기에 망정이지, 힘이 좋은 오크나 지능이 높은 고블린이었으면 진작 전멸했을 것이다.

“그럼 어쩌죠?”

“우선 구울을 막자. 제이콥, 축하해!”

“예? 뭐가요?”

“방금 소대장이 되었어! 병사를 모아!”

로벨은 꾸역꾸역 밀려오는 구울을 쳐내며 공간을 마련했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속으로 욕을 퍼붓고 성 안팎에 흩어진 깁스 자작군와 영지민을 불러 모았다. 허풍쟁이의 노력 덕분인지, 아니면 구울로 동산을 쌓기 시작한 로벨의 활약 덕분인지, 살아있는 인간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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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구울에게 당한 병사와 사용인이 구울이 되면서 구울 숫자가 대거 늘어났다. 구울은 속된 비유가 아니라 진짜 ‘역병’이었다.

“우어어어...”

로벨은 열두 번째인지 열세 번째인지 가물가물한 숫자를 떠올리며 구울의 목을 쳤다. 힘도 충분하고, 타격도 정확했는데, 목뼈가 잘리지 않고 중간에 턱! 걸렸다. 칼날이 상할 대로 상한 것이다.

“노스폴드 시티 최고의 대장장이라더니!”

로벨은 상인 길드장과 대장장이 길드장을 욕하고 구울의 무릎을 걷어찼다. 살아생전에도 못 먹어서 깡마른 구울은 무쇠 로우킥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졌다. 사람이었으면 무척 고통스러웠을 부상이었다.

로벨은 쓰러진 구울의 머리를 쾅! 소리 나게 짓밟은 후 칼날을 비틀어서 억지로 회수했다.

“영주님! 살아있는 사람은 전부 모았습니다!

로벨은 롱소드의 피를 땅바닥에 뿌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인지, 영지민을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깁스 자작군이 앞줄에서 구울을 막고 있었다. 노역하러 왔다가 이 사태에 휘말린 영지민은 비명을 지르며 안쪽에 모였다. 아야와 이야카 앞에서 겁먹은 강아지들이 떠올랐다.

“성 밖으로 나가자! 대열을 갖추고 따라와!”

로벨은 롱소드 한 자루로 불안해서 땅에 떨어진 깁스 자작의 깃발을 주웠다. 성 안에서 휘두르기는 너무 길어 창대를 밟아 부러트렸다. 깁스 자작의 병사가 히스테리 부리듯 따졌다.

“성문까지 무슨 수로...”

로벨은 부러진 창으로 구울 아랫배를 찌르고 롱소드로 머리통을 쪼갰다. 그리고 축 처진 구울을 방패 삼아 쭉 밀고 나갔다.

“저런 무모한!”

로벨은 무모하지 않았다. 구울에게 포위당하기 직전, 머리 깨진 구울을 발로 차 전방의 구울을 자빠트리고 부러진 창을 뒤로 찔렀다. 뒤통수를 노리는 구울의 목을 45도 각도로 관통했다. 로벨은 그 상태로 롱소드를 오른쪽, 구울을 꿰뚫은 창을 왼쪽으로 휘둘렀다. 네일 공국의 야성미 넘치는 바바리안이 묘기삼아 선보이는 쌍도끼 기술 훨윈드였다.

구울들은 로벨을 잡지 못하고,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며 쓰러졌다. 힘도 힘이지만, 구울로 구울을 막아 포위당하지 않는 기술이 일품이었다. 손이 바쁜 로벨을 대신해 마녀가 거들먹거렸다.

“누가 무모하다고요?”

“...구울이 무모하다고! 저런 괴물 앞을 가로막다니! 위험하잖아?”

그 깁스 자작의 병사 중에도 유머를 아는 병사가 있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낄낄거리며 처음으로 소대장 역할을 수행했다.

“스피어맨이 뒤를 맡는다! 뭐? 창이 없어? 시끄러워! 자기 무기가 5피트 이상이면 뒤로 와! 야! 거기 버디슈(Berdysh: 도끼창)! 어디서 단병기인척이야! 뒤로 빠져! 좋아! 소드맨 앞으로! 영주님을 따른다!”

인간들은 한 덩이가 되어 전진했다.

실질적으로도, 관용적으로도 ‘죽음’에 맞서는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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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눈에 띄는 활약만큼이나 빠르게 지쳐갔다. 롱소드를 제때 휘두르지 못해 주먹과 팔꿈치로 악쓰듯이 때릴 때가 많았다.

구울이라해도 사람의 몸이라 컴포지트 아머를 뚫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100% 안전하지는 않았다. 허풍쟁이 제이콥과 깁스 자작군이 뒤에서 받쳐주지 않았으면 진작 쓰러져서 밟혀 죽든가 깔려 죽었을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길리언 사제를 따라 들어올 때는 1분도 안 걸린 메인 홀인데, 도로 나가려니 10분이 넘게 걸렸다. 칼질과 주먹질과 기타 다양한 폭력행사 끝에 가까스로 성문에 도착했다. 로벨은 성문에 기대서서 소리쳤다.

“제이콥! 구울을 막아! 영지민부터 내보내!”

그러나 깁스 자작의 병사 하나가 살았다는 안도감에 먼저 뛰쳐나왔다. 로벨은 남은 힘을 쥐어짜네 무릎으로 병사의 복부를 찍었다. 폴린으로 감싼 무릎찍기였다. 두꺼운 캠비슨(Gambeson: 누비갑옷)을 입었다 해도 충격이 작지 않았다. 병사는 땅바닥에 쓰러져 아침에 먹은 것을 게워냈다.

“칼을 쥐고 살기로 했다면 용기를 보여! 여자와 아이들을 지켜라!”

로벨은 크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병사들을 통제했다. 병사들은 구울이 나오지 못하게 성 안쪽을 둘러쌌고, 그사이 비무장 영지민들이 성 밖으로 빠져나왔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로벨에게 꾸벅 인사하는 사람이 있었다. 로벨은 빙긋 웃고 피에 물든 롱소드를 곧추 세웠다. 땅에 주저앉거나 롱소드를 지팡이 삼아 쉬고 싶지만, 병사와 영지민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좋아! 조금씩 물러난다! 구울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으악!”

그때 방진 한 곳이 무너졌다. 지금껏 잘 버티던 병사가 우악스러운 모닝스타에 맞아 땅으로 꺼지듯이 풀썩 쓰러졌다. 그곳을 기점으로 스피어월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기사다! 기사 구울이다!”

“뭔 개뼈다귀 같은 소리야? 구울이 구울이지 기사가 어디... 있네?”

허풍쟁이 제이콥은 얼빠진 소리를 하고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크로스보우 몸체에 쿼럴을 올렸다. 그동안 궂은 핍박과 갖은 조롱을 당하며 향상시킨 사격 솜씨를 발휘했다. 쿼럴이 구울의 머리를 때렸다. 탱-! 말 그대로 때린 것이다. 구울의 통짜 헬름을 뚫지 못했다.

“진짜 갑옷이잖아?”

깁스 자작군이 스파이크 클럽으로 후려쳤지만, 구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보다 주먹 하나 더 큰 덩치에 플레이트 메일을 꽁꽁 감싼 ‘기사 구울’이었다. 로벨은 깁스 자작군 틈새로 기사 구울을 보았다.

“저스티스 기사단...”

지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구울이 되었다.

로벨은 무릎찍기에 당해 기절한 병사를 발로 차 굴리고, 병사가 팽개친 하프 파이크(Half Pike: 선상에서 주로 사용한 단창)를 주웠다.

“이제 됐어! 모두 나와! 성문을 닫는다!”

로벨의 허락이 떨어지자 깁스 자작군은 즉시 몸을 돌렸다. 몇몇 병사가 구울에게 뒷목과 발목이 잡혀 끌려갔지만, 대부분은 몸이 둔한 구울을 뿌리치고 성문을 빠져나왔다. 그 뒤로 한때 저스티스 기사단 소속이었던 구울이 쿵쾅거리며 쫓아왔다. 로벨은 롱소드를 땅바닥에 꽂고 하프 파이크를 어깨 뒤로 당겼다.

“성문을 닫아!”

기운이 남은 병사들은 성문을 어깨로, 혹은 등으로 밀었다. 공성망치를 튕겨낼 만큼 두껍게 만들어진 성문이라 쉬이 닫히지 않았다. 로벨은 성문 앞까지 접근한 구울에게 하프 파이크를 던졌다.

퍽!

창날이 한 뼘쯤 파고들고, 구울도 한 뼘쯤 붕 떠서 뒤로 넘어갔다. 저스티스 기사가 쓰러진 구울을 짓밟고 성문 앞까지 쇄도했다. 로벨은 롱소드를 뽑아 양손으로 잡고 자세를 낮췄다.

“우어어어...!”

“하아아앗!”

로벨이 롱소드를 치켜드는 순간, 성문이 로벨의 양옆을 스치고 쿵! 소리 내며 닫혔다. 저스티스 기사는 문짝에 치여 나자빠진 듯 성문 뒤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려왔다. 로벨은 롱소드를 머리 위에 올린 채 굳었다.

“기사님? 끝난 것 같은데요?”

“...응.”

로벨은 무안해진 팔을 쉽게 내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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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스 자작과 측근들은 진작 성 밖으로 도망쳤다. 성 안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말단병사와 노역을 나온 영지민이었다.

“우리 딸이 안 나왔어요! 우리 딸이 성 안에 있다고요!”

“우리 아버지를 찾아주세요!”

성 아랫마을에 소식을 전해졌는지 사람들이 몰려왔다. 깁스 자작의 병사들은 성(Castle)문에서 영지민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네요.”

“그러게 말이오. 깁스 남작만 쳐내면 될 텐데 깁스 자작령을 통째로 쳐냈수다.”

“가끔 생각하는데요. 우리 기사님 은근히 민폐쟁이 아닐까요?”

“은근히가 아니라... 험! 난 아무 말도 안 했소!”

로벨은 마녀와 허풍쟁이를 돌아보고 다가왔다.

“영지민을 마을로 돌려보내.”

“성 안에 구울은 어쩝니까요?”

로벨은 굳게 닫힌 성(Keep)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옛 신의 사제들이 처리할 거야.”

“그치들을 믿어도 됩니까요? 아까 보니까 용빼는 재주도 없더구만요.”

로벨은 허풍쟁이를 지그시 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성 밖에서 아우성치는 깁스 자작의 영지민을 보았다.

“우리가 걱정할 사람은 옛 신의 사제가 아니라 저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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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성과 성 아랫마을을 둘러보았지만 깁스 남작 일행을 찾지 못했다. 로벨이 무사한 것을 알고 영지 밖으로 도망친 듯했다. 로벨도, 깁스 남작도 당황스러운 전개였다. 그러나 사실 가장 당황한 것은 깁스 마을주민이었다.

“영주님이 안 계신다고요?”

“그럼 어느 분께 세금을 냅니까요?”

“우리를 누가 지켜줍니까!”

깁스 마을 영지민은 영주가 사라졌다는 말에 크게 당황했다. 자유도시민이 보면 한심하겠지만, 이것이 일반적인 영지민의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로벨은 깁스 마을 촌장에게 물었다.

“깁스 가문에 사람이 없어?”

“외가 쪽으로 친척이 몇 명이 있습니다만... 포클랜드 시티로 떠난 지 오래라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 사트로 후작에게 연락해. 깁스 가문의 주인이니까, 새 영주를 보내줄 거야.”

“그리고...”

로벨은 전투마가 다치지 않았나 꼼꼼히 살핀 후 등자를 밟고 안장에 올랐다.

마녀 키르케가 어디서 주워왔는지 손가락만한 당근으로 줄듯 말듯 전투마를 놀렸다. 전투마 허공을 깨물고 삐져서 고개를 휙- 돌렸다. 로벨은 전투마 옆구리를 살짝 때려 전진시켰다. 전투마는 주인의 기대에 응해서 마녀의 손목까지 덥석 물었다.

“으아앙!”

마녀가 침 범벅이 된 손을 붙들고 소리쳤다. 전투마는 푸히힝! 울며 전리품을 우적우적 씹었다. 로벨은 정신연령이 비슷한 둘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깁스 마을 촌장이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말을 걸었다.

“기사 나리, 청이 있습니다.”

“말해.”

“기사 나리께서 우리 마을 사람을 데려가 집도 주고 땅도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로벨은 허풍쟁이 제이콥을 돌아보았다. 집을 준 기억은 없는데, 허풍쟁이의 얼굴을 보니까 납득이 되었다.

“그런데?”

“새 영주님이 온다고 해도 기사 나리만큼 자비롭지는 않을 겁니다. 청컨대 기사 나리를 따르겠다는 이들을 받아주었으면 합니다.”

로벨은 촌장 뒤를 보았다. 깁스 마을주민은 로드릭 마을주민보다 훨씬 많았다. 당장 눈에 보이는 사람만 500명이 넘었다. 로벨은 곤란하다 생각하면서 물었다.

“저들 전부?”

“전부는 아닙니다. 고향을 떠나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로벨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몇 명?”

촌장은 주민들을 힐끔 보고 말했다.

“저를 포함해서 100명 정도 됩니다.”

그 정도면 감당할 만했다. 로벨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우리 영지에 온 것을 환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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