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지옥
54화. 지옥
로벨은 허리에 매달린 마녀 키르케가 걸치적거렸지만, 오들오들 떨리는 손을 보고 차마 떨어지라 말하지 못했다.
“괜찮아.”
“그치만... 저 사람은 이단 심문관이잖아요.”
로벨은 이해가 안 되었다. 전쟁터도, 괴물도, 유혈이 낭자한 흑마법도 안 무서워하는 마녀가 맨손으로 때려죽일 수 있는 깡마른 사제를 무서워하니 말이다.
“안심해. 내가 지켜줄게.”
로벨은 마녀의 손을 풀어 옆에 세웠다. 그리고 길리언 사제가 쳐다보지 못하게 막아섰다. 한편, 길리언 사제는 기사와 마녀의 대화에 관심두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이단신앙에 대해 설명했다.
“산 자를 제물로 바치고 죽은 자를 모욕하니 그들은 심판의 날이 도래해도 되살아나지 못해 영겁의 시간을 무저갱에서 떠돌게 되오. 그런 천인공노한 죄를 저지르는 자들이 감히 신앙이란 이름으로...”
로벨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허풍쟁이 제이콥을 가까이 불렀다.
“깁스 자작을 찾아.”
“자작을요?”
로벨은 깁스 남작의 눈치를 보고 길게 말하지 않았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눈치만으로 전장을 헤쳐 온 베테랑 용병답게 로벨의 말을 알아들었다. 조금씩 멀어지다가 일행에서 떨어져 나갔다. 길리언 사제와 저스티스 기사단은 하찮은 용병 하나에 신경 쓰지 않았다.
로벨 일행과 길리언 사제 일행은 지하창고를 지나 깁스 성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깁스 남작과 저스티스 기사단의 말이 줄어들었다. 원래 말수가 적었는지, 아니면 지금 가는 곳이 말하기 곤란한 장소인지 알 수 없었다.
깁스 성의 최하층에 이르자 수십 개의 횃불이 불타는 널찍한 방이 나왔다. 무엇을 감추려는 듯 두꺼운 천으로 벽을 가렸는데, 고약한 냄새 때문에 은닉 효과는 높지 않았다.
“여긴?”
“쉿! 사악한 의식이 자행된 곳이오. 마음을 굳건히 하시오.”
로벨은 분위기에 휘말려 덩달아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길리언 사제는 횃불을 높이 들고 벽을 가린 두꺼운 천을 확 걷었다. 로벨은 얼굴을 찌푸리며 ‘데자뷰?’를 중얼거렸다.
마크 하몬의 성에서 본 것과 비슷한 피의 의식이었다. 시체가 못 박히고, 장기가 추출되어 굴러다녔다. 피와 내장으로 도형 비슷한 것이 그렸는데, 흑마법에 문외한인 로벨은 무슨 뜻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길리언 사제가 성호를 그리고 두 팔을 높이 들었다.
“잔인하고 잔혹하도다! 이보다 확실한 이단의 증거가 어디 있소! 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깁스 자작을...”
“이건 미완성이에요.”
마녀 키르케가 피로 그린 도형을 따라가며 말했다. 길리언 사제는 팔을 든 채로 되물었다.
“뭐?”
마녀 키르케는 벽에 못 박힌 시체들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 의식은 산 사람을 제물로 바쳐야 해요. 산 자가 죽을 때 발산하는 살고자 하는 욕망, 욕구, 의지가 필요해요. 여기 있는 가여운 사람들은, 끔찍한 몰골이긴 하지만 사념이 없어요.”
기사와 성직자가 비로소 한마음이 되었다. 마녀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로벨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물었다.
“조금 쉽게 말해봐.”
“그러니까, 의식을 준비하긴 했는데 사용하지 않았어요. 산 제물을 바치기 전까지 완성된 것이 아니에요.”
“산 제물을 바치면?”
“끔찍한... 아주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예요.”
로벨은 길리언 사제를 한번 보고, 이어서 깁스 남작을 보았다.
“어찌 생각하시오?”
“무, 무엇이 말이오?”
“7살에 불과한 깁스 자작이 정말 이런 짓을 벌였다고 생각하시오?”
깁스 남작은 로벨의 확신 찬 눈을 보고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길리언 사제는 깁스 자작이 주군이고 조카라 차마 죄인이라 말하지 못한다고 생각해 대신 해명했다.
“깁스 자작이 직접 하지는 않았을 거요. 그 어린 몸으로 시체를 자르고 못질할 수 없잖소. 허나, 이 의식을 치른 하인들이 깁스 자작의 명령으로 실행했음을 자백했소.”
“흐음. 본인이 조사한 것은 다르오.”
로벨은 깁스 남작을 계속 노려보며 말했다.
“깁스 자작령의 실질적인 업무는 여기 깁스 남작이 도맡아 한 거로 아오. 그런데 성 지하에서 이런 의식을 치르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 말이 되오? 시체를 옮기는 일이 녹록치 않았을 텐데?”
“그건...”
“그건 좋소. 깁스 자작을 불러오면 차차 알게 될 일이고, 그보다 말이오...”
로벨은 길리언 사제를 보았다.
“이단 고발을 누가 했소?”
길리언 사제는 당황해서 비밀로 해야 할 정보를 공개했다.
“익명의 편지였소.”
“글을 쓸 줄 안다면 무지한 영지민은 아닐 것이고, 교양과 학식이 있는 자일 터. 이 성에 그런 자가 몇이나 되오?”
로벨은 롱소드 손잡이를 아래로 꾹 눌렀다. 깁스 남작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길리언 사제가 다시 따지고 들어왔다.
“잠깐 기다리시오! 이 일은 깁스 자작이 스스로 자백했소이다! 부활의 의식을 치렀노라...”
“거듭 말하지만 7살이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 힘든 나이지. 애당초 이 흑마법을 누가 알려주었을 것 같소? 설마 7살 자작이 홀로 공부했다고 믿는 것이오?”
길리언 사제가 깁스 남작을 보았다. 깁스 남작은 반박했다.
“내가 그랬다는 증거가 있소? 내가 왜 그런 짓을 한다 말이오!”
“삼촌?”
그때, 지하통로 저편에서 버섯 머리를 한 꼬마가 나타났다. 어린아이 체형에 딱 맞는 우플랑드로 한눈에 깁스 자작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뒤에서 허풍쟁이 제이콥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지만 마녀 이외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마녀 키르케가 소리 없는 박수를 치는 사이, 깁스 남작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티그! 네가 여기 오다니!”
“하, 하지만... 삼촌이랑 사제님이랑 다들 여기 있다고 해서... 저, 저건 대체 뭐죠?”
깁스 자작은 벽을 장식한 그로데스크한 인육 조형물을 보고 새파랗게 질렸다. 어린 나이에 보면 평생 트라우마가 될지도 모를 풍경이었다.
깁스 남작은 로벨과 길리언 사제를 힐끔보고 다시 소리쳤다.
“저건 네 녀석이, 아니, 자작이 명령한 일이잖소!”
“저, 저, 저는 저런 거 명령한 적이 없어요.”
“깁스 자작! 옛 신의 사제 앞에서 말을 바꾸지 마시오! 자작은 분명 부활의 의식을 치렀노라 자백했소!”
길리언 사제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 싫어서인지 깁스 남작과 함께 윽박질렀다. 어린 깁스 자작은 권위 높은 두 어른에게 겁을 집어먹었다.
“부, 부활은 옛 신의 경전에 나오는, 신성한 심판, 심판이잖아요. 아버님이랑, 어머님이랑, 다시 살아... 살아... 으아앙!”
로벨은 한심한 기분이 되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조카한테 이단죄를 뒤집어씌우는 삼촌이나, 그것을 고이 고대로 믿는 사제나, 답이 없군.”
길리언 사제는 주름 사이로 핏기가 도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데 깁스 남작은 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혔다.
“아니오! 내가 한 것이 아니오!”
길리언 사제는 깁스 남작을 가만히 쳐다보며 말했다.
“이번 일은 처음부터 다시 조사하겠소. 그리고 깁스 남작은 주요 참고인으로 함께해야 할 듯싶소.”
“나는... 나는...”
깁스 남작이 몇 마디 웅얼거리다 돌연히 밖으로 뛰어갔다. 로벨은 롱소드 손잡이를 오른손으로 바꿔 쥐고 허풍쟁이에게 소리쳤다.
“안 돼! 막아!”
그러나 허풍쟁이는 귀족 나리 앞을 막아도 되는지 확신이 없었다. 로벨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깁스 남작도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깁스 남작은 자신의 조카인 티그 깁스 자작을 붙잡고 대거를 뽑았다. 키 차이가 크지 않아 목에 칼을 대기가 쉬웠다.
“로벨 로드릭! 왜 남의 일에 끼어들어 훼방을 놓는 것이냐!”
로벨은 발검 자세에서 멈췄다. 로벨의 관점에서 상황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에... 인질극?”
자신의 조카를 잡고 인질극이라니, 차라리 허풍쟁이를 잡고 인질극하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로벨은 어린 깁스 자작에게 아무런 애정도, 호감도 없었다. 물론, 약간의 연민은 있지만, 그 정도 감정으로 칼을 거둘 기사는 유라피아 대륙 어디에도 없었다.
“멍청한 사제 놈을 구슬렸더니, 네놈이, 네놈이 끼어들어서...”
멍청한 사제 놈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횃불이 초라할 지경이다. 로벨은 롱소드를 뽑기 좋게 위치시키며 경고했다.
“저항해도 소용없소. 포기하시오, 남작.”
“포기? 으하핫! 나는 네놈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위대하고 현명하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경우도 대비했지!”
길리언 사제는 저스티스 기사단에게 눈짓하고 깁스 남작에게 말을 걸었다.
“거스 깁스 남작, 무슨 뜻이오?”
“저 마녀가 말했지! 이 의식은 산 제물이 빠져서 미완성이라고! 바꿔 말하면, 산 제물만 있으면 완성이다!”
“설마...?”
로벨은 정수리를 스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티그, 나의 사랑스러운 조카야.”
“사, 삼촌? 왜, 왜 이러세요?”
“약속한 대로 네 부모를 만나게 해주마.”
로벨은 롱소드를 뽑으며 소리쳤다.
“제이콥! 막아!”
그러나 이미 목에 들어온 칼보다 빠를 수 없었다. 깁스 남작은 환하게 웃으며 깁스 자작의 목을 그었다. 횃불 위로 붉은 피가 솟구쳤다. 저 작은 체구에서 저리 많은 피가 나올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깁스 자작의 푸른 눈이 고통과 공포와 의심과 좌절로 물들어갔다. 마녀 키르케가 고통스러워했다.
“안 돼! 안 돼요!”
“너희들만 죽으면!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조카의 파문은 기정사실이 되었으니! 이제! 이제 내가 깁스 자작이다!”
“미친 놈...”
로벨은 깁스 남작을 치기 위해 한 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두 걸음을 떼지 못했다. 서밴튼 위로 서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로벨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으어어어... 으어...”
어느새 시체가 기어와 로벨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죽지 않는 자, 움직이는 시체, 썩어가는 괴물, 로벨은 그 이름을 높이 불렀다.
“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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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롱소드를 빙그르 돌려서 역수로 쥐고 구울의 깡마른 손목을 찍었다. 푸석-! 구울의 손은 썩은 나무처럼 부서졌다.
“길리언 사제! 성 밖으로 나가야 하오!”
“으아아악!”
로벨은 길리언 사제를 돌아보고 바로 포기했다. 벽에 전시된 시체들이 일제히 깨어나 길리언 사제를 붙잡았다. 시체의 벽과 가까이 붙어있던 탓에 손 쓸 도리가 없었다. 망자에게 끌려가는 늙은 사제의 모습이 잘 만들어진 벽화 같았다.
“길리언 사제님!”
“악마다! 악마가 나왔다!”
저스티스 기사단은 모닝스타를 빼들고 엉금엉금 기어오는 구울들을 쳐냈다. 크고 두꺼운 헬름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진짜 흑마법 앞에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구울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고, 시간이 지날수록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키르케! 제이콥!”
로벨은 자기 사람을 먼저 챙겼다. 걸음이 느린 마녀 키르케를 들쳐 메고, 우왕좌왕하는 허풍쟁이 제이콥은 정강이를 가볍게 걷어찬 후 지하실 밖으로 달려나갔다. 길리언 사제와 저스티스 기사단의 비명이 뒤통수를 간질였다.
“영주님! 그거! 이거 그거잖습니까!”
"응! 하몬 남작의 성과 같아!”
성 안에 시체를 얼마나 쌓아뒀는지 여기저기서 구울들이 튀어나왔다. 로벨은 롱소드를 옆으로 휘둘러 횃불걸이의 횃불을 튕겨냈다. 횃불이 계단 아래로 떨어지며 어둠을 밝혔다. 불티 사이로 꿈틀거리는 구울들의 잔상이 그려졌다. 로벨 일행은 입을 꾹 다물고 뜀박질에 집중했다. 허풍쟁이는 컴포지트 아머를 입고, 마녀 키르케를 어깨 메고, 자신보다 빨리 달리는 로벨을 새삼 대단하게 보았다.
‘나도 10년만 젊었으면...’
그때, 실내라 그리 밝지 않지만, 지하보다는 환한 지상의 불빛이 보였다. 로벨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깁스 남작을 잡아야 해! 그래서 악마추종자의 정체를 밝혀...”
그러나 지상으로 올라오는 순간 깁스 남작 일은 잠시 잊기로 했다. 사나흘에 한 명씩 죽어간 시체들이 어디 모여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하... 지옥입니다요.”
성 곳곳에서 산 자와 죽은 자가 싸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