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증거
53화. 증거
로벨은 컴포지트 아머를 꺼내서 서배튼부터 그리브, 퀴스, 폴린(Poleyn: 무릎 보호대)를 차례로 부착했다. 손이 잘 닿지 않는 백 플레이트나 럼프 가드(Rump Guard: 허리 보호대)가 아니면 혼자서도 어느 정도 입을 수 있었다. 어린 집사가 백 플레이트를 꼭 끌어안고 말했다.
“정말 가시려고요?”
“응.”
로벨은 갑옷을 달라고 손짓했다. 어린 집사는 내키지 않는 듯 쉬이 오지 않았다.
“구울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오크 때문에 몸도 많이 상했는데, 또 간다고?”
“그러니까 가야지.”
로벨은 손바닥을 까딱였다. 어린 집사는 마지못해 백 플레이트를 가지고 다가왔다.
아미 더블릿의 가죽끈을 판금고리에 걸고, 브레스트 플레이트와 짝을 맞춘 다음 이음새를 잠갔다. 로벨은 어깨와 허리를 돌려보고 만족했다. 몸에 딱 맞아서 불편함이 없었다.
“좋아.”
“저도 준비 끝났어요!”
마녀 키르케가 고깔모자와 떡갈나무 지팡이를 들고 방문을 벌컥 열었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말없이 마녀 키르케를 돌아보았다. 마녀가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당연히 저도 가야 하잖아요?”
“당연히?”
“기사님이 마법에 대해서 아세요?”
“아니.”
“그러니까요.”
로벨은 할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마녀는 은근히 도움이 많이 되었다. 조지 도트넘 자작과 싸울 때, 팔콘 요새를 점령할 때, 늑대의 왕과 싸울 때, 그리고 구울의 성에서 벗어날 때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위험할 수 있어.”
“기사님이 잘 지켜주시겠죠.”
“...보통 내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다고 대답하지 않아?”
“에이, 기사님보다 잘 지킬 자신이 없어요.”
로벨은 잠깐 생각한 후 납득했다. 그래서 어린 집사가 화를 냈다.
“저런 멍멍이 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면 어떡해요! 지켜주긴 뭘 지켜줘! 위험한 걸 알면 가지 말아야죠!”
“그건 안 돼.”
로벨은 롱소드와 대거를 차례로 빼서 칼날을 확인하고 소드 벨트에 넣었다.
“구울도 그렇고, 오크도 그렇고, 계속해서 위험이 생기잖아. 이번 기회에 확실히 조사해야 해.”
“인간들끼리 싸우는 것도 정신이 없는데, 괴물 걱정도 해야 하다니. 참나.”
로벨은 소드 벨트를 허리에 두르고 어린 집사를 안심시켰다.
“너무 걱정하지 마. 허풍쟁이 제이콥도 데려가니까.”
“그래서 더 걱정이라고요.”
어린 집사 눈에는 어른 세 명이 전부 못 미더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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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마녀 키르케, 허풍쟁이 제이콥 3명으로 구성된 깁스 자작령 조사단이 출발했다. 기사와 종자와 수행원이라 의심할 구석이 없었다.
로벨은 말 위에서 느긋하게 주위를 감상했다. 여름이 성큼 다가와 세상이 온통 푸른색으로 가득 찼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도 푸르고, 새순이 자라는 초원도 푸르고, 농부들이 다듬는 경작지도 푸르고, 허풍쟁이 제이콥의 얼굴도 푸르...
“왜?”
“...뭐가 말입니까요?”
“얼굴이 왜 그래?”
허풍쟁이는 로벨을 슬쩍 올려다보고 그동안 쌓인 불만을 털어놓았다.
“...노스폴드 시티에서 복귀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리 부르고, 저리 부르고, 제가 그래도 울프 용병단 원년 멤버인데, 소대장은 고사하고 잡일만 하잖습니까요.”
어린 집사가 있었으면 펄프 대장 일행은 울프 용병단 창설 이전부터 일했다고 한소리 했겠지만, 로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로벨이 볼 때 허풍쟁이가 고생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번 일 끝나면 성과금을 주고 휴가도 보내줄게.”
“저, 정말입니까요?”
“응.”
허풍쟁이의 얼굴도 밝아졌다. 로벨은 세상이 모두 환해지자 비로소 만족했다.
마녀 키르케는 껄껄 웃는 기사와 용병을 번갈아 보고 중얼거렸다.
“옛날이야기에서 저런 말 하면 꼭 죽던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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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입’이라고 하면 손바닥을 적시는 긴장감과 뒷목을 간질이는 음습함이 떠오르기 마련인데, 현실은 조금 달랐다.
“이게 무슨 잠입이에요! 대놓고 놀러온 거지!”
“옆집 숟가락 개수도 아는 것이 시골 마을인데 숨어들고 말고가 어디 있소?”
로벨 일행은 깁스 마을을 어슬렁거리며 분위기를 살폈다. 폭정에 시달려서인지, 아니면 이단과 파문 때문인지 마을주민의 경계심이 강했다. 아낙들은 아이들을 챙겨서 집안으로 숨고, 사내들은 무기 비슷하게 생긴 농기구를 꺼내들고 힐끔거렸다. 하지만 눈 마주칠 때마다 움찔하면서 고개를 숙이는 것이 로벨이 마을에 불을 지르지 않는 한 괭이와 쇠스랑을 휘두르며 덤빌 일은 없어 보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판금갑옷을 입은 기사와 험상궂은 용병과 음침한 마녀에게 덤빌 용기 있는 농부는 흔치 않았다.
“제가 음침하다고요?”
“그 낡아빠진 모자랑 꼬질꼬질한 꼬뜨가 음침하오.”
“마, 마법사 사이에서는 최신 유행이거든요?”
로벨은 마을 광장에서 말을 세웠다. 깁스 마을 주민이 하나둘 몰려와 광장 주위를 에워쌌다. 사람 잡을 연장을 챙겨 들고 반경 5야드 내로 접근하지 않는 것이 꼭 역병 환자를 대하는 듯했다. 하긴, 영주에게 수탈당하는 영지민 입장에서 기사 일행은 역병이나 다름없었다.
“여기 촌장 어디 있어?”
잠시 술렁이더니, 수염이 풍성한 중년 남자가 인파를 헤집고 나왔다.
“제가 깁스 마을 촌장입니다.”
“옛 신의 사제가 다녀갔지?”
“지금도 성에 머물고 있습니다.”
로벨은 언덕 위 세워진 깁스 자작의 성을 보았다. 성벽과 성탑은 잘 보이지만, 거리가 멀어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로벨은 다시 촌장을 보며 물었다.
“사제가 무슨 질문을 했어?”
“특별한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최근에 죽은 사람이 있는지... 그리고 장례를 잘 치렀는지...”
“대답은?”
촌장은 주위 눈치를 조금 보고 말했다.
“요즘 같은 때 사나흘에 한 명씩 죽어 나가는 거야 당연한 일이고, 장례식은 자애로운 자작님 주관으로 간단히 치르고 있습니다.”
자애로운 자작 부분에서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덤이 있어?”
로벨의 짐작이 맞은 듯 촌장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게... 경작지를 늘린다고 따로 묻지 않아서...”
“매장하지 않았다고?”
로벨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촌장이 변명하듯이 말했다.
“깁스 자작님이 시체를 가져갔습니다. 그리하면 보리를 조금 주겠다고 해서, 저희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옛 신의 사제가 찾아올 만 하군.”
옛 신의 사제들은 종말 이후 산 자와 죽은 자에게 심판이 내려져서 선한 자는 부활하고 악한 자는 영원히 불에 탄다고 믿었다. 그래서 심판의 날에 죽은 자가 부활할 수 있도록 매장을 종용하였다.
“산 사람은 태워 죽여도, 죽은 사람은 반드시 매장해야 하는 게 그치들의 교리지요.”
“매장 안 했다고 파문한 것은 아니겠지만...”
로벨은 몇 가지 더 질문했지만, 흑마법이나 악마추종자와 연관 지을 답변은 듣지 못했다. 애당초 영지민한테는 기대하지 않았다.
“성으로 가자.”
“성이라굽쇼?”
“옛 신의 사제들이 있다잖아.”
허풍쟁이는 잘못 들었나 싶어서 귀를 한번 후볐다. 그러나 로벨의 진지한 표정과 로벨을 흉내 내는 마녀의 표정이 청각에 이상이 없음을 알려주었다.
“그 뭐냐, 영주님? 깁스 남작이랑 얼굴 붉힌 게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닌뎁쇼? 직접 쳐들어 가기보다 성안 출입이 가능한 사람을 잡아다 심문하면 어떨까요?”
로벨은 허풍쟁이의 조언을 귀담아듣는 척하면서 무시했다.
“응. 성으로 가자.”
“저기, 영주님? 제 말 들으신 거 맞습니까?”
“응. 응. 성으로 가자.”
로벨은 말머리를 성으로 돌렸다. 그 방향에 위치한 깁스 마을주민들은 허겁지겁 좌우로 비켜서 길을 열어주었다. 정말 역병 환자가 된 것 같았다.
“으으으! 마녀의 예언이 사실이 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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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사문화를 잘 알지 못해 생긴 오해였다. 명예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혹은 여기는 척하는- 기사들은 아무리 적대적인 가문의 사람이라도 자신의 성 안에서 죽이는 짓은 하지 않았다. 물론, 귀족 한정 명예이며, 대놓고 칼 휘두르지 않을 뿐, 독을 먹이거나 암살자를 보내는 짓은 종종했다.
로벨은 최근에 증축해서 깨끗한 느낌을 주는 성문과 성벽을 둘러보았다. 성문은 두꺼운 떡갈나무에 철판을 덧대어 단단하고, 성벽은 네모반듯한 벽돌을 지그재그로 쌓아 튼튼했다. 정공법으로 점령하려면 고생깨나 할 성이었다.
“험험! 로벨 로드릭 남작, 지난번 무례를 사과하러 온 것이면 타이밍이 안 좋소. 손님을 받아 줄 상황이 아니오.”
깁스 남작이 헛기침으로 맞아주었다. 로벨은 시선을 돌려 짜리몽땅한 깁스 남작을 보았다.
“깁스 자작이 파문당했다고 들었소.”
깁스 남작은 화내지 않고 난감해 했다. 그래서 로벨의 의심이 깊어졌다.
“벌써 소문이 난 것이오? 어허, 난감하군. 옛 신의 사제들이 오해한 일이오. 7살밖에 안 된 깁스 자작이 그럴 리 없잖소?”
“그 오해를 풀게 도와주고 싶군. 옛 신의 사제들은 어디 있소?”
깁스 남작은 로벨의 방문목적이 자신이 아니라 옛 신의 사제란 것을 알아챘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비협조했다.
“그들은 몹시 바쁘다오. 기별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만나겠다고 하면 곤란...”
“우리를 찾았소이까?”
깁스 남작의 얼굴이 똥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메인 홀 뒤에서 몇몇 사람이 나타났다.
“경이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이오?”
마녀 키르케처럼 꼬트를 뒤집어 쓴 노인 한 명과 노인을 호위하는 무장한 기사 두 명이었다.
로벨은 꼬장꼬장한 노인보다 체구 좋은 기사들에게 먼저 관심을 주었다. 흉갑에 옛 신의 거룩한 상징과 칼로 된 저울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한때 마녀 사냥으로 악명을 떨친 저스티스 기사단이었다.
“기사님...”
마녀 키르케는 옛 신의 기사단의 악명을 잘 아는지 로벨 뒤에 숨었다. 로벨은 마녀를 보호하며 노인에게 말했다.
“내가 로벨 로드릭이오.”
“옛 신의 가호가 함께 할 지어져, 나는 길리언이오.”
기사와 성직자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다. 기사들은 기사들의 잔치인 토너먼트부터 영지 경영까지 사사건건 트집 잡는 성직자들이 못마땅했고, 성직자들은 세속적인 쾌락에 몰두하느라 옛 신의 교리를 실천하지 않는 기사들이 못 미더웠다. 그 이면에는 질투, 시기, 욕구불만 등도 있었다. 성직자들은 영지를 물려받지 못한 귀족가 차남 이하의 자식들이라, 자신이 가지지 못한 권력과 재화에 불만이 많았다.
“길리언 사제, 깁스 자작이 이단 행위를 했다고 들었소. 정말이오?”
“명백한 증거가 있소이다.”
“그 증거를 좀 보고 싶은데.”
길리언 사제는 얼굴을 와락 꾸기고 말했다.
“옛 신의 뜻을 의심하는 것이오?”
“아니오. 인간의 뜻을 의심하는 중이오.”
허풍쟁이가 소리 죽여 낄낄 웃었다. 대놓고 너희가 의심스럽다는 뜻이었다. 길리언 사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경 뒤에 숨어있는 것은 마녀가 아니오?”
허풍쟁이는 웃다가 사례 걸려 켁켁- 거렸다. 너도 파문당하고 싶냐는 뜻이었다. 로벨은 롱소드 폼멜을 움켜잡고 말했다.
“마녀를 처형하는 것은 왕명으로 금지되었소. 더욱이 이 아이는 내 가솔이니, 이 아이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나와 내 가문에 대한 도전이오.”
길리언 사제는 로벨과 마녀 키르케를 번갈아 보고 코웃음 쳤다.
“마녀를 끼고 다니는 경에게 경각심을 심어줄 수 있겠지. 따라오시오. 이단의 증거를 보여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