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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52화 (52/605)

52화. 의심

52화. 의심

로벨은 도망 나온 영지민의 숫자를 확인했다. 갓난아기를 포함해서 100명이 약간 넘었다. 생각보다 숫자가 적어서 아쉬웠다. 반면, 애꾸눈 볼포스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10명, 20명이면 귀찮아서라도 그냥 내버려둘 수 있지만, 세 자릿수 영지민이면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 쫓아 올 겁니다.”

“깁스 남작이 직접 올까?”

“십중팔구 그럴 겁니다.”

로벨은 롱소드의 폼멜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예전 롱소드보다 조금 작고, 세로줄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촉감이 썩 나쁘지 않았다.

“여자와 아이들을 먼저 보내. 내가 뒤를 맡겠어.”

“싸우실 겁니까?”

“그래야 한다면.”

로벨은 깁스 남작의 행동을 추리해보았다. 헨리 상단주가 어린 양고기와 값비싼 와인을 선물했으니, 금욕이 생활이 된 수도사가 아닌 이상 실컷 놀았을 것이다. 영지민이 아무 제지 없이 영지를 빠져나온 것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한두 사람도 아니고, 100여 명이 도망 나왔으니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내가 깁스 남작이라면...’

로벨은 깁스 남작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다. 영지민이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고, 병사를 소집하고, 영지민의 흔적을 쫓아오면...

‘지금쯤?’

“히이이잉-!”

로벨과 울프 용병단이 동작을 멈췄다. 아지랑이 피어나는 지평선 저편에서 서너 필의 말과 서른 명의 병사가 나타났다. 깃발이 보이지 않지만,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 왔네?”

“당연하지 않습니까...”

애꾸눈 볼포스는 허풍쟁이 제이콥과 과묵한 몬트에게 신호했다. 오랫동안 한솥밥 먹은 용병들답게 군말 없이 전투준비를 갖췄다.

로벨은 겁먹은 영지민들을 뒤로 물리고 울프 용병단을 앞에 세웠다. 그리고 로벨 로드릭의 깃발과 50명의 울프 용병단을 보고 싸움을 걸 수 있을지 시험했다.

깁스 남작군은 빠르게, 그러나 활기차지 않게 다가왔다. 파비스 뒤에서 스피어와 크로스보우를 겨냥한 울프 용병단을 보고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짜리몽땅한 기사의 성화에 못 이겨 조금씩 전진했다. 로벨은 자신의 가슴높이 밖에 안 오는 작은 기사가 깁스 남작임을 알았다.

“혹시 깁스 남작되시오?”

깁스 남작은 기사답게 로벨의 허리춤을 살피고 말했다.

“...그렇소, 로벨 로드릭 남작.”

로벨은 능청을 떨어볼까 생각하다가 어색할 것 같아서 평소처럼 행동했다.

“내게 볼 일이 있소?”

“경에게는 볼일이 없소만, 경 뒤에 있는 배은망덕한 천것들한테는 볼일이 아주 많소.”

쏴아아-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로벨은 영지민들을 힐끔 보고 말했다.

“나와 내 병사들이 보호하는 내 영지민 말이오?”

“내 영지민? 무슨 말이오? 저들은 깁스 자작령에서 도망친 내 영지민이오!”

“증거가 있소?”

“저들 중 아무나 붙잡고 심문해도 답이 나올 터. 무슨 속셈인지 모르지만, 트집 잡지 말고 병사를 물리시오.”

로벨은 롱소드 손잡이에 왼손을 올리고 말했다.

“저들은 내게 보호를 요청했고, 나는 기사의 명예로 받아들였소. 여자와 아이를 지키는 것은 기사의 의무이니, 설령 깁스 자작의 영지민이라 해도 내어줄 수 없소.”

깁스 남작은 수염을 부르르 떨며 항의했다.

“영주에게는 도망친 영지민을 체포할 권리가 있소!”

“그리고 보호할 의무도 있지.”

“지금 말장난하자는 것이오? 저들은 내 영지민이오!”

“아니오. 백번 양보해도 깁스 ‘자작’의 영지민이지. 그렇지 않소, 깁스 ‘남작?’”

애꾸눈은 로벨이 깁스 자작과 깁스 남작의 퍼스트 네임을 모른다는데 밥벌이 도구인 아바레스트를 걸 용의가 있었다. 아무튼, 영주 재판권을 가진 것은 깁스 자작이라 원칙상 영지민의 처벌도 깁스 자작만이 할 수 있었다. 로벨이 말했듯, 깁스 ‘자작’의 영지민이지, 깁스 ‘남작’의 영지민이 아니었다.

“자작은... 이제 겨우 7살이오.”

“나이가 몇이든 깁스 가문의 정당한 주인이오. 아니면, 깁스 자작의 나이가 어리니 주군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오?”

“그런 뜻이 아니오. 자꾸 말꼬리를 잡으면...”

“말꼬리 잡으면? 결투를 신청하시겠소? 아니면 병사들로 싸우겠소?”

울프 용병단 대다수는 기사 나리들의 대화를 못 따라갔지만, ‘싸움’이란 단어에 격하게 반응했다. 무기를 치켜들고 사납게 웃었다. 굶주린 농민들만 상대해온 깁스 남작군은 숱한 전장을 해쳐온 울프 용병단과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차라리 깁스 남작이 결투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깁스 남작은 악명 높은 그랜드 챔피언과 1대 1로 싸울 생각이 없었다.

“깁스 자작의 이름으로 재판을 열어 도망자의 처분을 결정하겠소. 결단코! 채찍이나 벌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오.”

마지막 말은 영지민들에게 한 말이다. 겁이 많은 영지민은 부들부들 떨었다. 여자와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깁스 남작은 침을 탁! 뱉고 말머리를 돌렸다.

“가자!”

깁스 남작군은 등장할 때처럼 흐느적거리며 퇴장했다. 100번 싸우면 100번 다 이길 것 같은 허접한 군대였다. 로벨은 깁스 남작 뒤통수에 사격명령을 내리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애꾸눈 볼포스가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영주님, 이제 어쩌실 겁니까?”

“글쎄?”

“...글쎄라니요?”

로벨은 애꾸눈을 돌아보았다. 아주 많이, 정말 많이 난감한 표정이었다.

“난 깁스 남작이 덤빌 줄 알았어. 그럼 포로로 잡아서 영지민과 교환하려고 했어. 남작 몸값이면 영지민을 100명쯤 내줄 만하잖아.”

애꾸눈은 한숨을 푹 쉬었다. 세상의 모든 기사가 본인 같은 줄 아는지, 도망칠 거란 가정을 하지 않은 모양이다. 더불어 싸워서 진다는 가정을 하지 않은 것도 놀라웠다. 아무리 그랜드 챔피언이라도 승부는 모르는 것인데...

‘그런데 ‘아무리’란 말이 의미가 있을까?’

애꾸눈은 주제넘지만 한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랜드 챔피언과 결투할 기사가 있겠습니까?”

“페르젠 백작 기사 중에 있었어!”

“세상이 싫어졌거나 술을 많이 마셨겠지요.”

로벨의 눈을 휘둥그레졌다. 넘겨짚은 것 같은데 정답이었다. 애꾸눈은 로벨의 눈치를 살피는 100여 명의 영지민을 보았다.

“막막하군요.”

로벨은 어깨를 으쓱였다.

“성으로 가자. 집사가 해결해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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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기대대로, 그래서 참 얄밉게도 어린 집사가 해결책을 내놓았다.

“노스폴드 시티로 보내요.”

로벨은 뜬금없이 노스폴드 시티가 나와 반문했다.

“왜?”

“도시의 공기는 자유로우니까요! 영주의 재판권은 자유도시에서 통하지 않아요. 1년하고 1일이면 법적으로 자유민이 되잖아요?”

로벨은 인상을 찌푸렸다. 법적으로는 그렇지만, 1년 1일을 채워서 자유민이 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 농사와 잡일 밖에 모르는 영지민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자유도시에서 살아남기란 힘들었다. 설령 운이 좋고 재주가 좋아 먹고살만하다 해도 영주의 하수인이 찾아와 협박, 폭행, 납치, 혹은 본보기로 살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울프 용병단을 보내서 보호해야죠. 도시 수비병으로 고용해달라고 하세요.”

“오크가 사라져서 필요 없다는데?”

“오크가 끝이 아니라고 설득해야죠. 실제로도 북쪽에서 몬스터가 기승을 부리고 있... 에이이잇! 애당초 영주님이 멋대로 저지른 일이잖아요!”

“나,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그냥 한 판 붙어서 해결하려고 했는데... 그 남작이 겁쟁이라...”

“매번 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고요!”

로벨은 웨던 남작을 찾아가 아쉬운 소리하기로 결심했다. 웨던 남작이 영지민들을 받아주든 안 받아주든 로벨은 성과가 없었다. 영지민을 데려오지 못하고, 깁스 가문과 척만 지게 되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근래까지 줄곧 겪었듯, 인생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로벨이 노스폴드 시티로 떠날 준비를 할 때였다. 촌장집에 내려간 어린 집사가 짧은 다리로 바삐 돌아왔다.

“영주님! 영주님! 깁스 자작이 파문당했어요!”

“파문?”

로벨은 케케묵은 단어에 놀라기보다 어이가 없었다. 옛 신의 위세가 대단하던 옛날에는 사제들이 파문을 무기로 기사들을 좌지우지했지만, 말 그대로 옛날 일이었다. 요즘 기사들은 옛 신의 거룩함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신앙을 위해 죽지도 않았다.

“7살짜리를? 왜? 무슨 잘못으로?”

“이단 신앙으로 사악한 마법을 사용했다고 해요.”

로벨은 이단 신앙이란 말에 즉각 반응했다.

“하몬 남작처럼?”

“그건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깁스 자작령에서 구울이 나온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까, 아마 아닐 거예요.”

“꼭 구울을 부르는 것만 흑마법이 아니에요.”

마녀 키르케가 하품하며 나왔다. 그 뒤로 아야와 이야카가 따라 하품하며 어슬렁어슬렁 따라왔다.

“주방에서 잤어요?”

“저기가 따뜻해서요.”

마녀 키르케의 머리카락과 꼬뜨에 개털, 아니, 늑대털이 잔뜩 묻어있었다. 아야랑 이야카가 자는 곳에 비집고 들어가서 같이 잔 모양이다. 어린 집사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녀가 늑대를 닮아가는 건지, 늑대가 마녀를 닮아 가는 건지...”

어린 집사는 잠깐 딴생각을 하다가 처음으로 돌아갔다. 지금 중요한 것은 마녀 키르케의 잠자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말이죠. 깁스 자작령에서 데려온 영지민들을 도시로 보낼 필요가 없어요.”

“오?”

로벨은 입술을 둥글게 모았다. 마녀 키르케도 따라서 입술을 모으고 감탄했다.

“그럼 잘됐네요! 이걸 뭐라고 하죠? 엎친 데 덮친 격?”

“그건 안 좋은 뜻이고! 여하튼 당장은 깁스 자작, 깁스 남작을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 영지민들은 뉴 로드릭 마을로 보낼게요.”

“혹시 모르니까 울프 용병단 10명쯤 추가로 보내.”

“펄프 대장이랑 외팔이 더치가 있는데요?”

“그래도.”

“음. 그래요. 10명 보내도 30명이 남아있으니까.”

로벨은 깁스 자작 문제가 해결되자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늑대털을 떼어내느라 바쁜 마녀 키르케에게 물었다.

“악마추종자와 관련이 있을까?”

“이단 신앙이라는 게 딱 하나만 가리키는 게 아니지만, 하몽 남작님 기사님의 일기를 보면 그렇지 않을까요?”

“잉그비아 왕국의 마법사 집단이라고 했지?”

“예. 일반인은 잘 모르지만, 마법사와 연금술사 사이에서는 유명한 집단이에요.”

로벨은 거인의 발에서 늑대의 왕과 싸운 뒤로 줄곧 의심한 것이 있었다.

“까마귀 용병단, 까마귀 용병단을 고용한 조지 도트넘 백작, 소머리 괴물, 구울, 마크 하몬 남작, 마크 하몬 남작의 일기, 악마추종자, 오크, 오크에게 살해된 깁스 자작, 어린 후계자, 이단 신앙, 파문, 그리고 깁스 남작...?”

“어억?”

그동안의 사건이 알게 모르게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구울을 부른 것처럼, 오크를 부른 걸까요?”

“깁스 자작은 오크한테 죽었잖아요?”

“그럼 왜 7살짜리 깁스 자작을 파문한 거죠?”

로벨은 날카로운 직감을 발휘했다.

“...깁스 남작이야.”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로벨을 올려다보았다. 로벨은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깁스 남작이, 오크를 불러와서 깁스 자작을 살해하고, 그 증거를 어린 조카에게 뒤집어 씌웠다고 생각하면, 지나친 의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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