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보호
51화. 보호
로벨은 종이 위로 깃털 펜을 사각사각 놀렸다. 이름, 직위, 날짜 등이 꼼꼼하게 기재된 징수관 임명장이었다.
먼 옛날, 검을 다루는 재주와 펜을 다루는 재주가 비슷하다고 주장한 기사가 있었는데, 오늘날 로벨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그랜드 챔피언이 작성한 임명장은 악필 소리를 간신히 면할 정도였다.
로벨은 서명 후 어린 집사에게 내밀었다. 어린 집사는 촛불에 녹인 밀랍을 ‘로벨 로드릭’ 서명 옆에 조심스럽게 부었다.
로벨은 로드릭 가문의 인장 반지를 빼서 가문의 문장이 잘 보이게 인장을 꾹- 찍었다. 그리고 잉크와 밀랍이 마를 동안 잠시 내버려두었다.
“이걸로 징수관이 된 거지?”
“그리 건실해 보이지 않던데, 괜찮을까요?”
“펄프 대장이 감시할 거야. 만약 세금을 착복하거나 사기를 치면...”
로벨은 뭔가 생각하는 듯 롱소드의 폼멜을 쓰다듬었다. 어린 집사는 마른침을 삼키고 그람 형제가 부디 현명하기를 바랐다.
“아참, 젖소를 봤어?”
“어리고 건강한 목동이랑 평범한 젖소랑 둘러보고 왔어요.”
로벨은 임명장의 잉크가 마른 것을 확인 후 둘둘 말았다.
“그람 형제는?”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로벨은 메인 홀로 내려가 아야와 이야카의 관심거리가 되어있는 그람 형제에게 임명장을 내밀었다. 그람 형제는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 위로 임명장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My Lord.”
“성실히 수행하겠습니다.”
그람 형제는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목각 인형처럼 뻣뻣하게 성을 나갔다. 이야와 이야카가 졸졸 따라가며 엉덩이에 코를 킁킁거렸다. 어린 집사는 낄낄거리며 말했다.
“소금광산, 울프 용병단, 뉴 로드릭 마을까지 그럭저럭 굴러가게 되었네요.”
로벨은 롱소드 손잡이에 왼손을 올리고 말했다.
“아직이야.”
“아직이요?”
“사람이 부족하잖아.”
로벨은 자신의 말에 감탄했다. 몇 해 전만 해도 300명의 영지민을 먹여 살리기가 빠듯했는데, 소금광산과 울프 용병단이 지속적으로 수익을 내고, 영지가 두 배 이상 커져서 인구가 모자란 지경이 되었다.
로벨은 지난 며칠 동안 생각한 것을 밝혔다.
“영지민을 모집하자.”
“어떻게요?”
물론,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로벨은 ‘끄응...’ 소리를 내다가 겨우 답을 내놓았다.
“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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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명의 영지민과 15대의 수레와 농마 1마리와 소 2마리와 양 10마리가 뉴 로드릭 마을로 출발했다. 외팔이 더치와 그람 형제가 호위와 세수관리를 위해 따라갔다.
“잘 가! 잘 가!”
“이놈아! 밥 잘 챙겨 먹어라!”
“힘들면 그냥 돌아와!”
로드릭 마을주민은 아들, 딸, 오빠, 동생 등을 배웅하기 위해 바쁜 일손을 놓고 모였다. 어린 집사가 코를 훌쩍이며 억지를 썼다.
“누가 보면 전쟁터라도 내보내는 줄 알겠네. 쉬엄쉬엄 걸어가도 한나절이면 가는 옆 동네인데.”
“하루하루 일이 벅찬 농민들은 하루 걸려 옆 동네 다녀오기도 힘들어요.”
어린 집사도 잘 알기에 싸우지 않았다. 로벨은 롱소드 손잡이에 왼손을 걸치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야카가 “끼잉... 낑...” 소리를 내며 올려다보았다.
“사람을 구해오자.”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더 이상 “어떻게?”라고 묻지 않았다. 각자 알아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린 집사는 여행자와 행산인을 만나 정보를 수집했고, 마녀 키르케는 노스폴드 장인과 도제들을 찾아가 주변 이야기를 나눴다.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니 그럴듯한 계획이 나왔다.
“요즘 깁스 자작령이 엉망이라고 해요.”
“오크한테 죽은?”
“예. 오크한테 죽은 깁스 자작에게 후계가 하나 있는데, 나이가 이제 7살이래요. 그래서 실질적인 영지 경영은 깁스 자작의 동생인 깁스 남작이 대신하고 있는데요, 형제애가 별로인 건지 조카 사랑이 부족한 건지 영지를 꿀꺽할 작정인가 봐요. 경비대장부터 징수관까지 모조리 자기 사람으로 갈아치우고 착복을 일삼는 중이래요. 봄 추수가 끝났는데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온다나 봐요.”
“저런 못된 기사 같으니! 기사님! 가서 혼내줘요!”
로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영지의 일에 관여할 수 없어. 그리고 깁스 자작은 사트로 후작의 봉신이잖아. 자칫하면 후작 가문과 전쟁이 날 수 있어.”
“그랜드 챔피언인 영주님과 무적의 울프 용병단을 상대로 싸움을 걸 용기는 없을 걸요?”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마녀 키르케는 입술을 삐죽였다. 로벨이 아무리 자상하고 자비로워도, 근본은 귀족이며 기사였다. 평민을 자신의 구두보다 못하게 여기는 여느 귀족보단 낫지만, 선민의식이 뿌리 깊어서 평민 10명의 목숨보다 귀족 1명의 목숨에 가치를 두고 했다. 물론, 평민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귀족의 목숨을 좀 더 중하게 여기는 것 뿐. 로벨은 곰곰이 생각한 후 말했다.
“깁스 자작과 동생 남작은 어쩌지 못하지만, 그들의 농민이 영지 밖으로 도망쳐서 보호를 요청한다면 가능할 거야.”
“도망... 치면요?”
“약자를 지키는 것이 기사의 의무니까.”
로벨은 자신이 생각해도 묘안이란 듯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서로를 보았다.
“그러니까, 어떻게 도망치는데요?”
로벨은 당당하게 말했다.
“잘!”
“저번하고 다를 게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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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이 로벨이 아닌 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어린 집사는 로벨이 아무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기사로, 영주로 성장한 로벨은 어린 집사의 믿음보다 좀 더 큰 사람이었다.
로벨은 일을 ‘잘’ 해결하기 위해 두 사람을 기다렸다. 그중 한 사람이 짐말과 짐마차를 끌고 먼저 방문했다.
“My Lord, 헨리 상단의 헨리 피터입니다.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올해 보리수확이 끝나자 어김없이 헨리 상단이 찾아왔다. 로벨은 성 아래에 세워진 짐마차 두 대를 보고 말했다.
“장사가 잘 되나 봐?”
“영주님께서 보살펴주신 덕분입니다.”
로벨은 아부가 싫지 않아 슬쩍 웃었다. 하지만 아부 때문에 목적을 잃지도 않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헨리 상단주는 젊은 영주의 의미심장한 질문에 바짝 긴장했다.
“물론 그러합니다만... 어찌...”
“그럼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헨리 상단주는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역시는 역시였다. 그러나 로벨은 강요하지도, 억지를 쓰지도 않았다.
“내 부탁을 들어주면 향후 10년간 로드릭 마을에서 생산하는 맥주를 독점으로 거래하게 해줄게.”
“독점 말입니까?”
“내 영지는 점점 커지고 있고, 보리 생산량도 꾸준히 늘고 있어. 나쁘지 않은 조건일 거야.”
헨리 상단주는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튕겼다. 작년만 해도 맥주가 20배럴에서 30배럴로 증가했다. 경작지 규모를 봐서 내년이면 40배럴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만한 맥주를 독점할 수 있다면 행상인으로 크게 성공한 셈이다. 결코 나쁘지 않았다.
헨리 상단주는 마른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의중을 떠보았다.
“무슨 일을 도와드리면 될지...”
“별거 아니야.”
로벨은 헨리 상단이 해야 할 일을 설명했다. 정말 별일 아니었다. 끽해야 교수형 당할 일이었으니 화형이나 능지처참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헨리 상단주는 긴 신음을 흘리고 말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내일 아침까지 결정해. 사흘 뒤에 출발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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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흘이 금방 지났다. 로벨은 아침을 든든히 먹은 후 전투마에 안장을 올리고 짐을 실었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불안해서 졸졸 따라다녔다.
“깁스 자작령에 가시려는 거죠?”
“응.”
“가서 뭐 어쩌시려고요?”
“기사의 의무를 수행할 할 거야.”
로벨은 어린 집사의 눈치를 보며 두리뭉실하게 대답했다. 자세히 설명하면 100% 반대할 것이 분명했다. 어린 집사는 자꾸 대답을 피하자 불안해서 넘겨짚었다.
“혹시 깁스 남작군과 싸운다거나...”
“그, 그럴 리가?”
“앗! 방금 말을 더듬었어요!”
마녀 키르케가 정답을 알아낸 것처럼 폴짝폴짝 뛰었다. 아야와 이야카도 덩달아 좋아했다. 하지만 어린 집사는 좋아할 수 없었다.
“영주님을 누구보다 믿지만, 그래도 혼자 가지 마세요. 펄프 대장이랑 외팔이 더치를 불러서 호위병으로 데려가요.”
“호위병력은 따로 있어.”
“어디에요?”
로벨은 빙긋 웃었다.
“오늘이 며칠이지?”
어린 집사는 날짜를 꼽아보았다. 특별할 것이 없는 날이었다. 로벨은 어린 집사의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어주고 성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마녀 키르케는 주인을 따라가려는 아야와 이야카를 말리며 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요?”
“글쎄요?”
어린 집사는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날짜를 계산했다. 그때, 로드릭 마을 동쪽 휴경지 언덕 위로 깃발을 높이든 군대가 나타났다. 익숙한 깃발이고, 익숙한 병사들이었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오늘이 무슨 날이지 바로 깨달았다.
“노스폴드 시티의 울프 용병단이 복귀하는 날이에요!”
“아하! 30일 계약이 끝난 날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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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꾸눈 볼포스가 이끄는 울프 용병단 43명이 로드릭 영지로 복귀했다. 그러나 악덕 고용주(?) 로벨 로드릭은 짐을 풀고 쉴 틈을 주지 않았다.
“My Lord!”
로벨은 언덕 위로 올라 울프 용병단을 쭉 둘러보았다. 노스폴드 시티에서 영웅대접 받으며 잘 먹고 잘 지냈는지 살이 부쩍 올라 있었다. 몇 시간 행군으로 지친 것 같지 않았다.
“할 일이 있어.”
“위험한 일입니까?”
“아니. 응. 아니.”
이상한 대답이지만, 귀족을 오랫동안 보필한 애꾸눈은 대강 알아들었다. 수틀리면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깁스 자작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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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완전무장한 울프 용병단을 이끌고 깁스 자작의 장원에서 반 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주둔했다. 애꾸눈 볼포스는 깁스 자작군이 출동할 것을 대비해서 저격수를 배치하고 파비스를 설치했지만, 군기 빠진 깁스 가문의 병사들은 울프 용병단의 접근 사실을 모르는 듯 내다보지도 않았다. 애꾸눈이 어이없어 하자 로벨이 설명했다.
“7살짜리 영주야.”
허풍쟁이 제이콥이 땅바닥에 침을 퉤! 뱉고 말했다.
“7살이면 다 컸지요. 전 7살에 옆집 과부랑 잤습니다요.”
“저거, 저거, 누가 허풍쟁이 아니랄까봐...”
“그냥 냅둬. 저리 살다 가게.”
허풍쟁이 덕분에 용병 사이에서 웃음이 피어났다. 로벨은 미망인이 허풍쟁이를 아들처럼 생각했나 보다 생각하고 이어서 말했다.
“삼촌인 깁스 남작이 대신 통치 중이야. 그런데 성격이 무자비한 모양이야.”
애꾸눈의 하나뿐인 눈이 살짝 흔들렸다.
“깁스 남작과 싸울 생각입니까?”
“아니? 그럼 사트로 후작가와 싸우게 되잖아?”
“그러면 왜 이곳에...”
로벨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아니,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깁스 자작령에서 수십, 아니, 수백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울프 용병단은 적군인 줄 알고 크로스보우를 올렸다. 하지만 노모를 업은 아들, 젖먹이를 안은 어미, 지저분한 손가락을 쪽쪽 빠는 꼬마 등은 어떻게 봐도 병사가 아니었다.
영주의 추악함과 농민의 애절함을 오랫동안 보아온 애꾸눈 볼포스는 금방 상황을 알아차렸다.
“영주님, 설마...?”
“응.”
“진심이십니까?”
“응.”
깁스 자작의 영지민이 단체로 도망치고 있었다. 이 사실을 깁스 자작, 아니, 실권을 가진 깁스 남작이 알면 어찌 나올지 뻔했다.
애꾸눈은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어쩔 생각이냐고 쳐다보았다. 로벨은 가슴을 펴고 말했다.
“옛 신과 프란시스 공작 앞에서 맹세한 기사로서, 저 가엾고 불쌍한 농민들을 보호할 거야.”
“어디까지 말입니까?”
로벨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우리 마을까지.”